소련은 어떻게 악마가 되었나
[인문견문록]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김범수 옮김, 동아시아 펴냄)을 읽고 지금은 없어진 ‘소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오구마 에이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는 스무 살에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수용소에서 가게 된다. 책은 그의 수용소 시절과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본군에 비친 소련군의 ‘자유스러움‘이었다. 오구마 겐지는 서슴없이 ˝소련군은 일본군보다 나았던 것 같다˝라고 기억한다. 그의 말이다. ˝소련군은 임무를 벗어난 사적인 관계로 있을 때는 장교와 병사가 마음 편하게 서로 이야기했다. 메이데이 같은 휴일에는 수용소에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함께 춤을 춘다거나 했다. 상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이유가 있으면 병사가 항변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력집단인 군대의 폭력 수준은 한 사회에서 용인되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추정치가 된다. 소련군은 포로가 보기에도 매우 자유스럽고 평등했던 것이다.

수용소에서 정작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포로 내부에서 작업량, 식량 배분 등도 지위에 따라 차별받았다. 소련 군인끼리의 평등함을 동경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민주운동을 진행했다. 일본군 내부에서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조직민주주의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이들의 운동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졌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으로 무려 2700만 명의 희생을 치른 직후였다. 이 전쟁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이토록 열악한 시기의 소련에서 게다가 가장 폭력에 친숙한 군대라는 조직이 민주적이고 평등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성격은 사회의 성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조직은 사회의 축소판이고 개인은 조직에서 사회화된다. 필자가 알고 있던 소련은 스탈린주의에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지옥이었다. 오구마 겐지가 경험한 소련은 달랐다. 궁금했다. 그래서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의 <진실이 밝혀지다>(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노사과연 펴냄)를 펼쳤다.

저자 마리오 소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포르투갈에서 1949년에 태어난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은 반식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독립전쟁 진압을 위해 대규모 징집을 시작한다. 식민주의를 반대하던 마리오 소사는 탈영한 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한다. 스웨덴에서는 버스 노동자로 일하며 급진적 정치운동에 참여해왔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다 보면 꼭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뭔데? 소련 망한 것 봤잖아.˝ 소련은 보수적인 사람에게도 진보적인 사람에게도 지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우리가 아는 스탈린주의 지옥은 실제 소련이 아니라 CIA의 심리전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버스 노동자(정확하게는 ‘정치 활동가‘)의 말이라 무시할까봐 말해두자면, 소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은 소사 말고도 뉴욕주립대 역사학 교수이자 <배반당한 사회주의(socialism betrayed)>의 저자 로저 키란(Roser Keeran), 몽클레어주립대 교수이자 <흐루시초프 거짓말하다(Khrushchev Lied)>의 저자 그로버 퍼(Grover Furr) 등이 있다. 이들의 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쏘련(책에서 고유명사는 원음에 가까운 발음으로 사용된다. 필자 주)의 노동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살인과 의문의 죽음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못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스딸린 시기 쏘련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으며 수백만의 반대파가 사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략) 그렇지만 대체 이 숫자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 숫자들의 출처는 누구일까?˝ 우리들은 소련에서 수백만, 수천만이 살해된 것을 당연한 사실이라고 알고 있다. 마리오 소사는 이런 이야기들이 특정한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반박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사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소련이 악마화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했다. 나치는 정권을 잡은 뒤 의회 화재 사건을 조작해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유권자의 48%를 확보한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진보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독일은 또한 재무장에 돌입한다. 이때 독일 지도부는 대(大) 독일(greater Germany) 국민생활권이라는 야욕을 갖고 있었다. 현재의 독일보다 훨씬 큰 독일을 건설하려는 욕심이었다. 대독일의 핵심 지역의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통합해 독일의 곡물 기지로 변모시킬 야심에 들떠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34년 선전장관 괴벨스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한다는 선전을 시작했다. 별다른 증거도 없었기에 성과도 미미했다. 그들은 이내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다. 외부 그것도 최강국 미국에서 협조자를 찾게 된다.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

마리오 소사가 말하는 기근의 진실은 무엇인가? 나치와 허스트의 언론은 볼셰비키의 의도적인 학살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소사는 사실상 계급투쟁이었다고 전한다. 1929년 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부를 독점하고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농촌의 부농 쿨라크와의 마찰을 촉발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을 빈농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내기 전에도 기근은 주기적으로 왔었다. 소사의 설명이다. ˝직간접적으로 1억 2000만 명의 농민들이 연관된 이 거대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 불안정을 야기했고, 몇몇 지역에서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의 면역체계는 유약해졌고 전염병과 유행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아졌다.˝ 빈농들을 구제하기 위해 농업집단화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마찰도 있었고 기근도 있었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다고 소련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스페인독감으로 죽어간 유럽인만 2000만 명에 이른다. 페니실린이 개발되기까지 전염병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련은 지속적으로 서구의 심리전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사와 그로버 퍼는 볼셰비키가 그런 희생을 의도적으로 전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마오쩌둥의 정책 때문에 3000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는 선동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린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의 연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는 약 1억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 아무도 인도인 희생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인도 자본주의에는 희생자가 사라지고 중국 사회주의에만 희생자로 넘친다. 허스트 계열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아사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고 지속적으로 선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의 약발이 압도적이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근에 대한 신화를 다시 퍼뜨린 것은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였다. 소련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던 레이건 시기 콘퀘스트는 <서글픈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이름의 책을 펴낸다. 콘퀘스트는 어떤 사람이었나? 영국 정론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폭로한 그는 영국 정보국의 정보조작부서인 IRD(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의 전 기관원이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진보진영과 관련한 조작된 흑색선전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1977년 극우파와의 협력이 문제돼 해체될 때까지 수많은 언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정보를 전달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은 1942년 유대인학살에 앞장섰던 우크라이나 극우 전쟁범죄자들이었다.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영국, 미국 정보부와 협력했던 언론인, 학자들 덕분에 이런 프로파간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꾸 접하다 보면 사실로 착각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드디어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고(庫)를 개방했다. 소련을 비난해왔던 사람들은 비밀문서고가 열릴 날만을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문서고가 개방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서구의 선전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젬스꼬프(Zemskov)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진행한 연구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9000쪽에 달하는 그의 연구보고서가 1990년 나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반(反)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개,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다.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 정치범의 수는 콘퀘스트의 주장과 달리 45만 4000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7~1939년 사이에 죽은 인원도 300만 명이 아니라 16만명이었다.

아마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래요. 정보 조작한 사람들이 엄청 과장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45만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잖아요?˝ 우리는 이 숫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의 판단은 덧붙이지 않고, 일단 마리오 소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우리는 쏘련이 외부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30년대 쏘련의 인구는 거의 1억6000만~1억7000만 명이었다. 30년대는 유럽에서 일어난 거대한 정치적 변화로 인해 힘겨운 시기였다. 독일의 나찌즘,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 필자 주)들은 쏘련에게 전쟁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략) 이러한 힘겨운 시기 동안, 쏘련에서 형벌체계 하에 있었던 사람은 최고 250만 명이었다. 이는 대략 성인 인구의 2.4%였다.˝ 감이 안 잡힐 수 있기에 한국의 예를 들자면 교정시설 수용인원 총수는 2017년 현재 5만 7000명, 보호관찰 대상자 수는 2017년 현재 10만 5000명이다. 인구 대비 대략 0.3%가 된다.

소사의 글에는 당시 소련 인민들이 가졌을 긴장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좌파 이론가인 채만수의 논문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노동사회과학> 제7호, 2014)의 일부 글을 인용해본다. ˝당시 나찌 독일의 대대적인 전쟁 도발, 따라서 쏘련 침략은 누가 보기에도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남은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독일과 쏘련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전쟁, 즉 피차가 모두 그 흥망 자체를 걸어야하는 전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면서도 그 전쟁을 늦추며 시간을 벌기 위해서 1938년 9월 뮌헨협정을 통해서 체코를 진상하면서까지 쏘련을 침략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독점자본들 역시 사회주의 쏘련을 침략하여 파괴하고 궤멸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기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된 당시의 정세였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 교정시설 내부의 인권은 어떨까? 2005년 8월 19일 자 <시사저널>에 실린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교도소 수형자의 인권을 개선시키자는 여론은 미국에서 거의 없다. 오히려 이런 열악한 인권을 소재로 삼아서 <프리즌 브레이크>(2005년 8월~2017 5월까지 FOX에서 방영)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2017년 3월 시작해 현재 시즌 6 방영 중. 넷플릭스 제작)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다.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미국 교도소의 수형자는 범죄자이지만 소련의 노동수용소인 굴라그(Gulag)에 있던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지 않은가? 일단 공개된 문서고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른 죄수다. 게다가 당시 소련 인민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러시아 연구자인 서울 과학기술대 김남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논문 ‘굴라그 귀환자들과 흐루쇼프 하의 소련 사회‘(<러시아연구> 25권 1호, 2015)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흐루시초프의 소련은 스탈린이 사망한 3주 후 굴라그 죄수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한다. 그 수는 무려 120만 명에 이르렀다. 우리가 생각하면 방면된 사람들에 대한 환대가 넘칠 것 같았지만, 넘쳤던 것은 인민들로부터의 냉대였다. 당시 소련 인민들은 귀환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소련당국에 보내었다.

노동수용소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수적 변화도 극적이다. 1934년 5.2%에서 1953년 0.3%로 크게 낮아졌다.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것은 항상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사실과 사회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망률이 매우 낮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형량의 경우는 어떨까? 1939년을 보면 5년 미만의 형 95.9%, 5~10년의 형 4%, 10년 이상의 형이 1%로 나타난다. 무한정 긴 징역형이라는 괴담은 소련에 대한 심리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우리가 막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조작된 정보였음을 말해준다.

고전에 대한 서평을 주로 올리다가 뜬금없이 소련을 둘러싼 프로파간다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쓴 이유는 필자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다. 필자의 목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급진 사상을 지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된 신념체계, 허구적 사실에 기초한 문화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는 사실이 아닌 믿음의 덩어리다. 마르크스, 알튀세 이래 이데올로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상가는 지젝이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의 논문 ‘지젝의 사회정의론에서 바라본 바울 이해‘(<신약논단> 제2권 제2호, 2017)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산물, 곧 언어를 통해 매개된 하나의 상징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마치 그것이 본래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지젝은 이런 환상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환상 가로지르기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같이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체계로부터의 동력차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련을 악마로 만들면 사회 개혁세력을 악마의 동조자로 몰아갈 수가 있다.

격심한 빈부격차를 반복하던 북·서유럽은 사회통합을 위해 사회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미국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언어로 구축되는 질서인 담론과 상징계에서 사회주의를 지워버렸다.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수단이 정보기관을 통한 소련에 대한 프로파간다였다. 부족한 사회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개혁을 회피한다. 사회주의 소련과 바로 인접했기에 악마화(demonization)가 잘 먹히지 않았던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온건한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대신 미국은 극단적 불평등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기득권은 외부의 적을 설정한다. 외부의 악마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사고 회로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사회개혁 세력은 늘 외부의 악마와 비교당해야 한다. 외부의 악마를 설정하면 정작 피해를 보는 것은 개혁이 힘들어지는 우리 사회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불평등이 보여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바로 이것이다.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출처: 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245981?no=245981&fbclid=IwAR08N-7VgxFDgK5kbVDjnlzt6cKBCXd1qz1TgYk0d-vEDu7h30mfP8XbIZY#08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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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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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조선 역사의 첫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 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군대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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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핀란드 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대략 4개월간 전개된 전쟁이다. 서방의 많은 사학자들이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해 주로 소련의 팽창주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있고, 소련과 스탈린의 정복욕에 기반한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의 진보성을 믿는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 핀란드 전쟁에 대한 입장은 무엇일까? 아래에 있는 글은 2013년 그리스공산당(KKE)에서 출판한 책 중 역사왜곡에 대한 파트 중 하나다.

핀란드의 경우는 다르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직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의 차단과 방어 강화 노력을 시작했다. 핀란드 국경은 레닌그라드에서 불과 32km 떨어져 있으므로 소련 방어를 위해 핀란드-나치 독일 간 기존의 원만한 외교관계와 소련에 맞서 핀란드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대한 군사적 준비를 고려할 때 핀란드와의 협정이 중요했다. 두 국가 사이의 협상은 1939년 10월 12일에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목표는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는데 이용되는 것이었는데, 핀란드가 다방면으로 지원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핀란드에게 상호원조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그에 대한 핀란드의 거부 이후 소련은 핀란드 국경선을 이동하여 두배 정도 규모의 영토를 교환하여 해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임대해달라는 역제안을 했다. 핀란드는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 소련의 제안을 핀란드가 거절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초래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는 국제 제국주의 진영의 지원에 의존했다. 미국,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 맞서는 총체적인 공세뿐만 아니라 원정군을 준비하면서 핀란드에게 아낌없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전쟁을 계속시키기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핀란드에 극심한 압력을 가했지만, 군대가 이미 2월에 헬싱키로 들어와 있었던 핀란드와 소련은 1940년 3월 12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전쟁을 중단하고 다른 나라를 겨냥한 어떠한 연합에도 참여하지 않을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영토를 소련에 양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중 일부는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은폐되거나 왜곡된다.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을 체결하여 방어선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나치 독일의 막강한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 이 진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댈러스(F- Dallas)와 같은 부르주아 역사학자조차도 "소련에 대한 독일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고 방위력을 강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 당시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소련의 이러한 입장은 아주 현실적이었다."며 이 조약의 체결이 소련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공주의자인 윌리엄 엘, 쉬러(William L, Shirer) 역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끄러운 비밀협정이 스탈린에게 숨 쉴 틈을 준 것은, 차르 알렉산더(Czar Alexander)가 1807년 나폴레옹으로부터, 레닌이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독일인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처럼 분명했다. 나중에 소비에트 공식 외교사가 강조했던 것처럼, 또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일 러시아가 나중에 독일에 의해 공격을 당했더라면 서구 열강들은 이미 독일 제3제국(Third Reich)에 맞서 돌이킬 수 없는 개입을 했을 것이고, 소련은 1939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 열강에 맞서 혼자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크렘린은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21개월간의 귀중한 시간 덕분에 소련은 당시까지 "무적의" 독일군(Wehrmacht)을 물리칠 수 있었고 소련을 파괴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계획을 박살내, 베를린에 적기(Red Flag)를 게양하며 유럽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출처 :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p.13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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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해체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 소련(Soviet Union)은 세계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국가였다. 1917년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탄생한 소련은 1920년대 공업화를 거치며 강국으로 성장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파시즘을 물리쳤으며, 그 이후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 경쟁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이기에 소련은 당연히 사회주의 국가였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소련은 개인의 이익과 사적영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 국가와는 엄연히 다른 체제였으며, 실제로도 다르고자 했다.

 

반공주의적 산물이 사회전체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경우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가 도대체 어떠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알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아마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소련이란 스탈린주의적 폭압 체제, 대숙청으로 인한 2천만 명 학살, 한국전쟁의 주범, 굴라그와 같은 강제 노동이 존재하는 세상 그리고 세계를 적화시키려는 호전적인 국가 등의 이미지일 것이다. 즉 소련이라는 나라는 국방력에 지나치게 투자하여 인민들의 삶과 질적향상은 매우 등한시 한 국가로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공주의로 점철된 우익과 서방의 날조된 왜곡이 반영되었다. 물론 소련이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의 경쟁에서 재정의 많은 부분을 국방력 강화 및 개발에 투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 미국처럼 공공분야에 있어 많은 부분을 개인에게 맡기고자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실제로 소련은 헌법과 법률을 통해 사회주의적 권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소련이 추구한 권리는 심지어 20세기 말에도 수많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조차 충분하게 실현되고 있지 못한 권리로 여성의 적극적인 경제활동 참여”.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보증”, “근로의 권리”, “주거와 주택의 권리”, “무상의 의료와 교육의 권리”, “사회보장의 권리”, “사회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다양한 문화적·예술적인 서비스를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권리등이었다. 이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립함으로써 소련 인민이 구가하거나 얻을 수 있었던 권리와 자유였다.

 

실제로 소련은 공업화에 성공했던 1930년대부터 이러한 권리를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시스템 적으로 설립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이른바 의료혁명과 교육혁명을 겪었다. 이 덕분에 소련인민들은 그 시기부터 무상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인민 AB가 병에 걸려 치료가 필요하다면, AB는 국가가 운영하는 병원에 가서 병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권리로써 돈을 지불하지 않고 치료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런 무상의료는 단순히 감기치료만이 아닌 고도의 의료기술이 필요한 것에도 해당되었다. 즉 소련은 이러한 무상의료 서비스가 1920년대와 193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틀이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소련사회는 해체 이전까지 보건의료도 무상이었다.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저렴했고, 약국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급됐는데. 아이들 의복에 대한 보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도 있었다.

 

소련의 교육혁명은 매우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교육은 인민이 차별없이 받아야 할 하나의 권리로써 자리매김하였고, 공업화 초기 교육율과 대학진학률은 매우 빠르게 상승했다. 이에따라 소련 전역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일어났다. 문맹퇴치운동으로 인하여 90%가 넘던 소련의 문맹률은 1%때로 줄어들었으며, 인민들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교육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과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70,80년대 기준으로 소련의 교육시스템은 10년간 무상이었다. 대학교를 가더라도 대학 교육도 무상이었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 일종의 수당같은 것을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데 한 달에 40루블씩 지원받았다. 이 금액이 계산하면 소련 대학의 기숙사 비용이 1년에 24루블 내면 모두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많은 돈을 수당으로 지급받았던 셈이다.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노동시간을 비인간적으로 늘리는 사회가 아니었다. 물론 스탈린 시절 굴라그를 운운하는 반공주의자들의 얘기는 다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30년대 스탈린시기에도 7~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표명했었다. 물론 이 노동제는 193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돌면서 폐지됐다. 하지만 이것은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소련 시절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소련 사회는 노동에 대해 의무이자 권리라는 개념으로서 받아들였다. 소련 시절의 노동시간은 주5일 주40시간이었고. 모성보호도 있어서 임신 여성은 야간 노동이 안되었다.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항상 유급이었다.

 

광산노동 등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퇴직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으며, 출산휴가도 보장되어 있는데 유급으로 18개월 보장됐고, 출산휴가 끝나면 당연히 원래 하던 일로 복귀가 가능했다. 임금도 노동자, 관리직, 기술직의 구별 없이 비슷하게 지급받았다. 야간, 휴일노동은 강제로 하는 경우가 없고, 하겠냐고 요청 받고 동의해야만 하고, 할 경우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야간은 50%, 휴일노동은 2배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소련은 대중적인 노동자 연금제도를 설립했다. 연금 수급 연령은 여성 55세 남성 60세였다.

 

소련사회는 어떤 공장에 관리자나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존중 받고, 똑같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형태였다. 큰 회사의 경우 사택 같은 걸 지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의 3~4%를 지불하고 모든 것들을 무료로 이용했다. 중요한 건 회사에 일하는 동안 거주를 할 수 있는 곳이지 주택을 팔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회사 안에는 스포츠시설도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서 구내식당 식재료로 공급했다. 즉 소련사회는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삶은 인민들에게 구가해줬고, 공식적으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경제성장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소련은 1920년대후반부터 50년대까지 사회주의 경제 수치를 매우 낮게 잡으려고 했던 서방의 기준으로도 최소 연 12~14%의 성장률을 보였다. 1928년에서 1956년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쏘련의 공업 생산은 연평균 12.7%나 성장하였다. 국민총생산은 연율 15% 이상이나 성장했고, 그 기간 문맹은 일소되었으며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적어도 소련은 1972년까지 연평균 8%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사회에 대해 지적하는 것 중에 한가지를 뽑자면 소비재 부족과 일상적인 필수품의 부재일 것이다. 물론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비하면 풍요로움에 있어서 많이 뒤쳐졌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2700만 명의 희생과 국부의 약 1/3이 사라졌음에도 빠른 전후복구와 회복을 보였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동맹이었던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부흥을 절대 돕지 않았고, 오히려 지연시키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서유럽 경제학제들의 예견을 무색케 했고 제4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전후복구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이것은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배급제를 폐지했던 자본주의 국가 영국보다 6년 내지는 7년이나 빠른 속도였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소련의 연평균 식량 생산량은 8859만 톤이었지만 불과 10년 후인 1961년에서 1965년 동안에는 50%가 증가한 13000만 톤을 달성했다. 같은 시기 육류와 유제품 역시 연평균 60%70%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다. 따라서 소련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복구를 하면서 굶주리지 않았다. 공업역시 1951년에서 1965년까지 연평균 10.7%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연평균 농업성장률이 4%를 넘어섰고, 농업분야에서도 자립기반이 확보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화학' 공업이 중점으로 육성되어, 합성물질, 석유화학제품, 화학비료 생산 기업이 대규모로 건설됐으며, 이런 전후복구와 경제 성장을 통해 1960년대 소련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 할 수 있었고,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경제 문제로 크게 고통 받지 않았다.

 

이처럼 소련의 사회주의는 지난 마지막 위기 역시 극복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향한 계속적인 행군을 보증하기에 충분한, 전례가 없는 눈부신 역사적 성과를 집적했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군사적인 안전보장을 달성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로 하여금 여러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며 핵무기 보유량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사회주의는 경제·산업구조를 발전시켰고, 전 세계 공업생산에서 그 점유율을 1/3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며, 공업과 과학·기술의 많은 분야에서 자본주의를 앞질렀다. 사회주의는 근로인민의 생활수준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켜 모든 국민에게 무상의 교육과 의료를 보장했고, 문맹과 실업을 근절했으며 고등교육을 받아 숙련기술을 가진 노동자계급을 육성했다.

 

하지만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성공적인 업적은 탐욕, 경쟁,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를 합리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고 말이다. 여기서 로자가 말하는 야만은 바로 자본주의를 뜻한다. 지난 세기 소련해체 이후의 소위 승리했다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 특히 사유화, 공공 부문의 폐지, 개방적 무역정책의 강요, 정부에 의한 모든 형태의 경제계획의 배제, 모든 형태의 국가 보조금·보상금과 사회적 보호의 폐지 등의 신자유주의적경제정책을 이용하여 3세계국가의 경제를 억지로 개방시켰고, 그려러고 한다. 국제자본과 다국적 기업의 전면적 진출을 위한 길을 닦고 있다.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제국주의 국제기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이들 정책의 목적은 선진 자본주의 중심부로의 잉여가치의 유입을 강화·촉진하는 데에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한 정책의 논리적 귀결은 이들 국가의 천연자원 및 인적자원에 대한 수탈의 증대, 그들 국가 경제에서의 자본형성 과정의 봉쇄, 그들의 경제발전고정의 전면적인 정지 내지 심지어 퇴행, 그들의 생활수준의 급격한 저하,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대다수 세계 인민의 빈곤·질병·궁핍·노숙자화의 계속적인 증대다.

 

따라서 이런 야만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해야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생각하고 있고, 또 그 가치를 믿고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를 빗대며 단순히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로 단순도식화 하는 부르주아지들의 악랄하고 교묘한 선전선동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소련은 비록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지금도 업신여기고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믿었고, 실천하고자 했으며 또 어느부분에선 달성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소련 사회주의가 가지는 역사적 정치적 인류사적 의미다.

 

참고자료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09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대국굴기, 크레듀, 2007

 

러시아 혁명사 강의, 나무연필, 2017

 

소비에트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레디안,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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