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독일군대가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153개 사단과 3700대의 탱크 그리고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독일군은 1500km에 이르는 전선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크게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소련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격 당일 1200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루프트바페(Luftwaffe)의 공격을 받았다. 개전 초기의 독일군은 경미한 저항만 받으며 진격했고, 그들이 전개한 ‘전격전(Blitz Krieg)’은 붉은 군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브레스트 요새만 7월 12일까지 전선을 사수했을 뿐이다.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독일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지만, 1930년대부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전쟁을 준비해 온 소련은 즉시 전 국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속하게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정치 경제의 중심인 모스크바에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력을 집중시켰는데, 이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올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 7월 말이 되었을 때, 독일군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진격했고, 8월에는 독일군의 중앙 부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몰렌스크라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소련군은 총력을 다해 독일군에 맞섰다. 소련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을 패배시켰다. 그래도 소련군은 9월까지 독일군의 발목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모스크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1941년 9월 30일 독일군은 ‘태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모스크바를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10일 안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하고 붉은 광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는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위해 독일군 최정예 부대를 모아 180만 병력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게 했다. ‘태풍 작전’에 따라 독일군 장갑차 제2부대가 브랸스크(Bryansk)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가을비로 인하여 진흙탕이 되었음에도 독일군은 10월 2일에 중앙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브랸스크를 점령했다. 그 후 2주 동안 독일군 중앙부대는 브랸스크 부근에 두 개, 비야즈마 서쪽에 한 개씩 모두 세 개의 포위망을 구축했고, 이 세 곳에서의 전투로 소련군 66만 3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놓은 소련군은 모스크바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 전진을 막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지휘 체계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이오시프 스탈린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주코프 장군은 10월 중순에 모스크바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10월 19일 소련의 지도부는 모스크바에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모스크바를 사수할 것을 호소했다. 그로부터 몇일 후 모스크바 시에는 25개 노동자 부대와 12만 자원병이 모여들었고, 45만 명이 도시 방어를 위해 나섰다. 소련군과 일반 지원병들은 11월 초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라마강과 루자강 등 지역에서 독일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런 저항을 통해 소련은 “10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직접 보였고, 그런 스탈린의 호소를 들은 소련의 시민들과 군인들은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단결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15일 독일군은 군대를 재정비한 후 모스크바를 향한 공격을 다시 퍼부었다. 11월 27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불과 24km 떨어진 이스트라(Istra)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곽까지 접근했다. 1941년 12월 초 겨울을 맞은 모스크바에는 매서운 추위가 왔다. 기온이 영하 20에서 30도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1941년 12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주코프는 소련군을 이끌고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가했다. 주코프 장군은 소련의 주력 부대를 모두 중앙으로 집중시켰고, 12월 6일에 시작된 모스크바를 향한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물리쳤다. 이를 기회로 소련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군에 맞선 반격을 개시했고,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 8일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1941년 12월 16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빼앗겼던 남쪽 도시 툴라와 모스크바 북쪽의 칼리닌을 되찾았고, 1월 초에는 소련군의 서쪽 부대가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군은 250km 밖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3개월간 지속되었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은 총 58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소련군은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독소전쟁 개전 초기 독일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개과천선하여 효과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참모로 두고 그와 협력하여 모스크바 공방전을 준비했고,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소련 인민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입했을 시기 포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을 떠나지 않았으며, 소련의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작전을 지휘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군에 맞서 열심히 싸운 병사들과 인민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큰 동기부여를 해준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의 지도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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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13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소련은 공간(스몰렌스크)을 내주고 시간
을 벌면서 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몰아 닥치기 전에 보급선을
늘어 뜨리지 말고 신속하게 모스크바로 주공
을 해야 한다는 구데리안의 판단을 OKW와
히틀러가 무시한 점도 독일군 패착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몰렌스크는 전쟁과 평화에도 나오는 전쟁시 중요도시던데요. 잘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0-02-18 2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