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체제 그리고 조봉암 사법살인

(민주당,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됐다. 현재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하면서까지 권력욕을 꺾지 않았던 이승만은 1954년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전대미문의 수학공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등 독재정치를 일삼았다나이가 80이 다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을 그칠 줄을 몰랐다. 1951년 이승만이 주도하여 창당된 자유당은 사실상 이승만을 위한 당이었다특히나 한국전쟁 기간부터 갈등을 하게 된 정치세력들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시작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는데그것이 바로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1955년에 창당되었다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이철승박순천유진산 등이 민주당에서 활동했다또한 사사오입 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했던 자유당 인사들도 떨어져 나오면서 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다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대다수가 해방 이후 우익으로써 이승만 편에 서서 소위 좌익반대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거기다 조병옥은 이승만 악행사 민간인 학살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8년 제주 4.3 항쟁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장본인이었다이들의 반공의식은 이승만 못지않게 강경했지만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승만이 개인적인 권력욕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갈라지자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족벌정치와 독재정치를 실행하기 시작했다그는 충직한 비서출신 이기붕에게 자유당을 맡겼고초대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는 개헌안을 관철시킴으로써 영구집권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다당연히 여기서 이승만은 과거에도 항상 그랬듯이 비판세력에게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의 개념을 내세워 빨갱이(Commie)’ 딱지를 붙였다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반공정서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그는 1954년 7월 28일 그는 미국 상하의원 합동회의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물론이고 소련과의 전쟁까지도 지체없이 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 반공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기에는 충분했다.

(1950년대 판자촌, 이승만 정부 시절은 참으로 가난한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와 친일파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무능은 최악의 경제체제로 이끌었다. 이때분에 민중의 생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대찌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는 사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먹다 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을 한국사람들이 한국화해서 먹으면서 생긴 음식으로, 가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이승만이 이끄는 반공국가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경제가 참으로 피폐했다휴전 협정 이후 대한민국의 GNP 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53년 당시 GNP 성장률이 25.7%였지만 1954년에는 5.2%, 1955년은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까지 떨어졌다인플레이션도 매우 심각했다휴전 이후 4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은 26.4%, 51%, 42.9%, 37.8%였다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던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라고 했지만자유주의와 반공주의를 신봉하던 이승만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같은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렇게 원하는 이승만식 자본주의는 사실 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현재 한국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복지제도의 전면적 철폐에 가까운 어리석은 논리다따라서 현재 전세계적 펜데믹 COVID-19의 무상진료도 이승만의 논리대로라면 자비로 치료받아야 한다즉 뉴라이트들은 이 정도의 상식도 없는 맹신적 자본주의자들인 것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민중의 생활은 참으로 가난했다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먹다 벌인 음식 즉 꿀꿀이죽으로 배를 채우는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고미군부대에서 일하던 이들이 미군이 먹다버린 햄이나 소시지 등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부대찌개였다한국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허덕일 때 자유당을 비롯한 친일파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었다대표적으로 이승만에게 자신의 아들을 이강석을 양아들로 넘겼던 이기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1960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이기붕 소유와 그의 아내 박마리아 소유의 건물과 땅주식재산 등은 상상을 초월했다이기붕 일가에 비하면 이승만은 양호한 편이었다다른 관료들 또한 이들 못지않는 부정부패와 재산축적을 일삼았다.

(이승만 동상, 이 동상은 이승만 생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무려 24m나 된다. 이승만은 전 사회적 영역에서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실행했다.)

 

이승만 개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숭배가 있었다이승만 80회 생일을 기념하며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됐다. 59년 10월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서울 뚝섬에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송덕관우남회관우남정등의 건물이 건축됐고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심지어 서울시를 우남시로 변경하려는 시도도 있었을 정도였다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찬양가를 지어 배포했는데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기리기리 빛나오리라.

오늘은 리대통령 탄생하신 날.

꽃피고 새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대통령 만수무강을.

온겨레가 다같이 비옵나이다.

우리들을 리대통령 뜻을 받드러.

자유평화 올 때까지 멸공전선에.

몸과 맘을 다 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몸과 맘을 다바치어 용진할 것을.

다시 한번 굳쎄게 맹세합니다.

(반공청년단 관련 기사, 반공청년단은 이승만을 맹신적으로 따르는 단체였다. 그들은 이승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이승만 정귄 시기 각종 어용 조직 단체가 활기쳤다이승만은 반공청년단’, ‘상이군경회’, ‘서북청년단’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을 압력단체로 이용하였고이들 압력단체들은 여당 기간단체 내지는 산하 단체로서 애초부터 정부권력 및 정당의 뒷받침을 통해서 이루어졌다이승만은 1957년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다본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나 미국에서 사망하고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출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물론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이후 1957년 신학기를 맞아 서울법과대학에 부정 입학시킨 것이 탄로가 났었다.

(이승만 일가,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유당 독재 국가로 이끌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가 실행됐다집권당인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이 이기붕을 러닝메이트로 하고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내세웠다또한 혁신계의 진보당은 전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1956년 선거 당시 민주당은 불행을 겪었다이승만에 대적하기 위해 자신들이 내세웠던 후보 신익희가 열차에서 심장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이다그것도 투표일 10일을 앞둔 사망이었다투표 당시 이승만을 따르는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했지만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437조봉암 216만 3,808신익희 추모표 185만 표가 나왔다이승만 득표율 80%라는 예측은 완전히 빚나갔다그리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401만 2,654표로 380만 5,502표인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됐다사실상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패배한 셈이다.

(조병옥, 해방 이후 반공노선으로 가며 이승만과 함께 했던 조병옥은 한국전쟁을 이후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 결과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반이승만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반대세력들에게 탄압과 공작을 일삼았다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2시 30분 이승만과 자유당 측이 고용한 암살범이 명동 시공관에서 장면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하지만 이 사건은 살인미수에 그쳤다저격사건의 범인은 자유당 정책위원이자 이기붕의 측근 임홍순의 조종을 받는 하수인 김상봉이었다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에 넘겨졌다권총을 발사했던 김상봉은 권총 발사 이후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범행을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치졸한 연극을 연출했다물론 이것은 사전이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이정재, 이정재는 자유당의 끄나풀로 소위 동대문파를 이끌었다. 그는 한때 김두한 밑에 있던 조직 폭력배였으나, 1950년대 동대문파를 이끄는 조직 폭력배 두목으로 성장했다. 결국 그는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처형된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이승만은 반공청년단과 같은 여러 청년 단체와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을 좋아했다대표적으로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들 수 있다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임화수유지관 등 동대문파 정채깡패들은 1957년 5월 25일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시국강연회를 방해하는 사건을 벌였으며당연히 이것은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의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폐간 관련 기사, 이승만 정부는 1958년 경향신문을 폐간조치했다.)

 

언론탄압도 심했다. 1958년 1월 27일 서울시경은 만화작각 김성환을 경무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신문사에는 허위사실을 게재했다는 혐의로작가를 즉결 심판에 회부하여 과태료 450환에 처했다이른바 <고바우 만화필화사건이다당시 정부 정책에 비판적 성향을 보이는 언론사는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었다. <경향신문>이 이승만과 그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을 지속적으로 쓰자이승만은 그 신문사를 폐간시켰다결국 경향신문은 4.19 혁명 이후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이승만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모든 분야에서 이승만이 강조됐다부정부패한 관료들은 이승만에게 아부떨기 바빴고이승만과 자유당은 영구집권을 위한 시도들을 정치적으로 해나갔다반공교육은 전사회적으로 실행됐다. 1958년 1월 12일과 15일 조봉암을 포함한 진보당 인사들을 검찰이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이승만 정부가 조봉암을 구속한 죄명은 이른바 간첩죄였다.

(죽산 조봉암,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일제시절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서 유학했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지만, 박헌영과의 노선갈등으로 탈당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됐고, 간첩죄로 구속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대중적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일제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가 해방 이후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남로당을 탈당한 조봉암은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으로써 유상매수 유상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인물이었다그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이승만과 갈등하게 됐고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로 등극했다특히나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던 조봉암은 이승만에게 있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거기다 조봉암은 이승만과는 달리경제적 평등을 추구했다경제적 분야에서의 개혁을 추구했던 조봉암은 통일론에서도 이승만과 달랐다그 또한 반북주의가 있었지만이승만과는 달리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48년 이후부터 계속 구호에만 그친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던 이승만하고는 달랐다.

 

이승만은 그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고 싶었다그래서 그는 조봉암과 진보당을 간첩죄로 몰아 체포했다이렇게 구속된 진보당 대표 조봉암은 1958년 7월 2일 1심재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는 반공세력들은 판결 뒤 청년들을 동원하여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라며 난동을 부렸다결국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았고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사형선고를 받은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산 조봉암 무죄 선고, 죽산 조봉암은 사형선고 52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를 판결받으면서 명예가 회복됐다.)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구속된 진보당 간부들에게 모진 고문을 자행하면서 살려줄 테니 조봉암이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을 진술하라는 등 사건조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들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서 조봉암 집에 있는 서재에서 마르크스 관련 책이 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았다또한 그가 주장하던 평화통일론을 빨갱이 사상이라며 폄하하기 바빴다조봉암 간첩 누명은 사형집행 52년 만인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무고함이 확인됐다당시 조봉암이 구속되자 아이러니 하게도 이승만 반대편에 있으며한때 자유당과 같이 진보당을 좌익으로 몰았던 조병옥이나 장택상 등이 그를 변호하기도 했었다즉 이것만 보더라도 조봉암은 애초부터 간첩이 아니었고이승만 정권의 억울한 희생자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장면 암살을 시도하고반공청년단이나 이정재의 동대문파를 동원하여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했으며자유당과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도 마다하지 않았다북진통일론을 끝까지 주장했으며 북한과의 적대적인 노선 추구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며 세계적인 반공투사를 자임했다즉 이승만은 외교적으로도 반공을 주장했던 것이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국유화한 수에즈 운하를 폭격하자, “우방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하겠다는 망발을 했었다그의 집권 기간 동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민중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미국이 경제개발을 요구해도 뼈속까지 자유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이를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사법살인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조봉암 사법살인에서 알 수 있듯이당시 한국 사회는 약간이라도 진보적인 주장을 하면 사법살인이 가능한 반공독재국가였다반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얼마든지 공권력을 동원해 처벌할 수 있었고이승만은 이를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악용했다죽산 조봉암이 사법살인 당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막장을 향해 더욱 질주하고 있었다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플레이션과 경제구조는 무너질 상황이었고간신히 미국의 원조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그러던 중 이승만 정부를 끝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그게 바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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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1공화국 시절에는 물자가 하도 모자라서, 화장실에서 대변을 닦은 휴지도 재활용을 해서 그걸로 책을 만들었는데 재활용 기술도 형편없어서 대변 처리도 제대로 안 되어 대변에 포함된 고춧가루 같은 물질이 그대로 묻은 재생지로 이루어진 책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의 1950년대 편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NamGiKim 2024-02-04 23:25   좋아요 0 | URL
워낙 가난한 나라니 가능성 있죠. 거기다 전쟁으로 인프라 다 파괴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