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승만과 이기붕)

 

이승만 정부는 정치 분야에선 이승만 개인과 자유당 독재의 길로 가고 있었고경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당시 이승만 정부는 미국 경제원조로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미국의 경제원조는 1957년 3억 8,289만 3천 달러에서 1958년에는 3억 2,217만 2천 달러로 감축되었으며, 1959년에는 2억 2,220만 4천 달러로 거의 1억 달러 가까이 삭감됐다이렇게 미국의 원조가 감축되자 즉각적으로 한국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은 정치경쟁자 조봉암을 사법살인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또한 그는 여전히 건강한 편이었다. 8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권력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승만은 19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이라 하여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이것은 여순항쟁 이후 10년만에 새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사실상 자유당 정권의 정권연장을 위한 수단이었다이들은 통과시킨 국가보안법에는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이들이 제출한 새 국가보안법에는 1.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2.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3. 상고심 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의 정략이 숨겨져 있었다여기에는 정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을 가속화하려는 이승만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주당의 백남훈조병옥곽상훈장택상 등을 포함한 민주당과 무소속의원 95명은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물론 이승만의 자유당 측도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장택상을 회유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을 붕괴시키고자 했다자유당 정부는 신국가보안법 통과를 위해 내무부와 은밀한 협의를 거쳐 극비리에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서 유도와 태권도 유단자인 무술경찰관 300명을 임시 경위로 특채하고, 3일 동안 국회경위의 역할을 담당할 훈련을 시켰다이승만과 자유당의 목표는 오로지 ‘1960년의 재집권에 있었다이승만과 이기붕은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1959년 3월 가장 충직하다고 믿는 최인규를 내무장관으로 하고재무 송인상부흥 신현확농림 이근직교통 김일환을 각각 국무위원에 기용했다또한 그들은 신국가보안법이 통과되기 5일전 야당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의원만으로 3분만에 법사위에 상정한 것을 처리하는 변칙을 연출했다당연히 야당의원들은 이에 반대했고국회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이럴걸 예상하고 있던 이승만 세력은 훈련시킨 무술경관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지하실에 감금했다박순천김상돈허윤수김응주김재건 의원 등이 중경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 이승만과 이기붕은 자유당 집권 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과 자유당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진보당의 조봉암을 사법살인 했지만야당은 이승만 정권에 저항했다. 1959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고대통령 후보에는 조병옥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이 선출됐다이들은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했다당연히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부통령 후보로는 이기붕을 내세웠다하지만 민주당은 여기서 큰 타격을 받았다. 1956년 신익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급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조병옥 후보의 사망, 그의 죽음으로 다시한번 민주당에게 대통령 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1959년 12월부터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은 피로가 겹치며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결국 1960년 1월 29일 조병옥은 치료차 도미하게 됐다조병옥이 도미하자 자유당은 선거 시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할 것을 2월 3일에 전격 발표한다. 1960년 2월 조병옥은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다수술 후 경과도 매우 좋은 편이었고주미대사로 있던 양유찬이 문병을 와서 담소를 나눌 정도였다하지만 2월 15일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쾌유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6일 뒤 조병옥은 김포공항에 무언의 환국을 했고운구행렬에는 시민들이 뒤따라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4년 전에 그랬듯이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됐다다시한번 고통을 겪게 된 장면은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에 1/3의 표를 주지 말고 재선거를 실시하자라고 하며 유권자에게 호소했다이런 상황속에서 자유당은 부통령 선거를 위해 온갖 음모와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바로 부정선거였다.

 

1960년 2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내무장관 최인규의 이름으로 선거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에게 내렸다지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연기권표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한 표 중 합계 유권자 4할에 해당하게 하는 표를 사전에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기표하였다가 투표개시 (오전 7전에 무더기로 투표함에 투입할 것. (소위 4할 사전투표)

 

2. 자유당 입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하는 유권자로서 3인조 또는 9인조를 편성하여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투입토록 할 것. (소위 3인조 또는 9인조 공개투표)

 

3. 자유당 유권자로 하여금 자유당 완장을 착용하고 투표케 함으로써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화하여 야당 측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토록 한다.

 

4.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 못하게 하거나그것이 불여의할 경우에는 변기를 투표소 내에 가지고 왔다는 등 구실로 시비를 걸어서 투표소 밖으로 축출할 것.

(3.15 부정선거 개표)

 

이 지령문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지만정부와 여당은 이것을 오히려 야당의 날조라 공격했고그들에게 충성하는 어용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3월 15일 투표가 실시됐다예정대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자유당의 부정선거의 핵심은 4할 사전투표로 3인조1·5인조·9인조의 공개투표를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를 사전에 달성한다는 것이었다당연히 이들은 부정선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들을 매수해 퇴장시키도록 했다따라서 3.15선거는 자유당의 사전계획대로 철저한 부정선거로 이루어졌다중앙선관위의 선거결과 발표에 따르면 전국의 유권자 1,119만 6,498명 중 1,050만 9,482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963만 3,376표로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부통령에는 833만 7,059표를 얻은 이기붕이 당선되었다장면은 184만 4,257김준연은 24만 5,526임영신은 9만 9,090표였다즉 이승만은 전체 유권자의 92%를 이기붕은 78%를 득표한 셈이다.

(부정선거 이후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3.15 부정선거가 있자 많은 시민들이 이에 분노했다. 마산 시위는 민중혁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3.15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다분노한 이들은 저항하기 시작했고가장 용기있게 떨치고 일어선 사람은 바로 경남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었다마산시민들과 용기있는 학생들은 부정선거 날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학생과 시민들이 시윌르 벌이자 경찰은 투석전을 벌인 끝에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이러자 격분한 시민들은 남성동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했다이 과정에서 시민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전라도 광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12시 50분경 광주 민주당원 50여 명은 <()! 민주주의 장송>이라고 쓴 만장을 선두로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곡성을 외치며 금남로 4가에서 광주지방법원 앞까지 시위하였다그러나 경찰에 저지당해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되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은 주모자로 26명을 구속했다경찰은 구숙안 이들을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용공분자나 좌익분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려 했다또한 정부는 이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조종으로 몰아붙여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심지어 경찰은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쓰인 전단을 시위 도중 사망한 학생들의 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국민은 더 이상 참으려하지 않았다대통령의 담화나 경찰의 탄압에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3월 17일 진해고교생서울성남고교생전남여고생들이 데모를 벌였다이런데도 부정선거를 저지른 측은 파렴치하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3월 18일 부통령 당선자로 공고된 이기붕은 마산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총은 쏘라고 (일부는 쓰라고로 들었다 함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이기붕의 망언은 당연히 시위진압에 나선 일선 경찰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됐다. <런던 타임스>(3월 15)는 <고교생도 반항적>이란 기사에서 대구고등학생들의 시위를 상세히 보도하고 <타임>(3월 21)은 <경찰 통제 하의 3인조 선거>, 같은 날짜 <뉴스위크>는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연극>, <워싱턴 포스트>(3월 16)는 <침묵에 잠겼던 한국의 젊은 세대 잠을 깨다>, <르몽드>(3월 18)는 사설 <심각한 투쟁양상>,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3월 16)는 사설 <이씨의 승리중대문제를 야기>, 같은 날짜 <뉴욕타임스>는 사설 <마산사건의 발생>, 은 <양당제도 파탄위기>, <워싱턴 포스트>(3월 17)는 사설 <더러운 승리>, <런던 타임스>(3월 17)는 사설 <차라리 가장(假裝)선거를>, <이코노미스트>(321)는 <이박사의 희미한 승리>, <뉴욕 타임즈>(3월 22)는 사설에서 <이박사의 후계자>문제를 각각 제기하였다.

(김주열 열사의 사체, 시위가 격해지자 경찰은 발포했고, 그로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주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고 사망했다. 하지만 경찰측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사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했던 경찰간부는 바로 친일경찰이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사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함 모습으로 바다에서 떠올랐다참으로 기가막힌 사실은 학생 김주열에게 정면에서 최루탄을 쏴 죽인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일제 악질 경찰출신이다이를 지켜 본 시민들이 궐기했다분노한 시민들은 김주열 열사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혁명의 불길을 앞당겼다2마산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2명 사망, 14명 부상 등의 희생을 치루면서 며칠째 계속되었다정부는 4월 13일 마산의 적색분자를 조사를 한다며 군경의 대공 3부 합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마산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였다이승만은 4월 15일 다시 마산사건은 공산당의 조종이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검찰은 2차 마산사건과 관련하여 시민학생 30명을 구속하고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학생들의 시위, 학생들의 시위는 이승만 정권의 폭압이 강해질수록 더 격렬해졌다. 심지어 중학생과 초등학생도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뻔뻔했다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학생들을 끝까지 공산당 조종이란 용공사건으로 몰아 위기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였다이승만의 추종자들이 3.15 부정선거는 최인규 등 내각에서 저지른 것이고이승만은 몰랐다는 주장은그의 거듭된 용공담화’ 발표에서 거짓임이 확인된다이승만은 3.15 부정선거와이에 항거한 마산 시민·학생 학살의 주범이다.

 

마산을 시작으로 번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서울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고특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4천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오후 1시 교내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종로를 거쳐 9차례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저지선을 격파하여 오후 2시 15분 국회의사당(광화문 소재앞에 도착연좌시위에 들어갔다결집했던 고려대 학생들은 결국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여기서 문제가 또 터졌다청계천 4가에서 잠복해 있던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쇠갈귀·몽둥이·벽돌 등으로 마구 난타하여 학생 10여 명기자 3명 등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이 정치깡패는 반공청년단 소속으로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단부라는 조직폭력배들이었다여기에는 임화수유지광 등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8 고대생 습격 사건 현장,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고 있는 동대문파 깡패들은 고려대 학생을 폭행했다.)


(유지광, 유지광은 동대문파 깡패다. 그는 이정재, 임화수등과 더불어 4.18 고대생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다.)

 

정치깡패의 고려대학생 폭행사건은 오히려 민중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다음날인 4월 19일 여러 대학 학생들은 총궐기했다그날 고교생과 대학생을 비롯한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서울대생 2천여 명이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체주의에 항거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출발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였다이와 함께 건대생 1,500동국대생 1천 여 명서울사대생 1,500여 명동성고등학생 1천여 명서울의대약대생 1,600여 명성균관대생 1,500여 명고대생 2천여 명연대생 4천여 명경희대생 1천여 명경기대서울음대생 2백여 명단국대국학대한양대서라벌예대성심여대홍익대강문중고생흥국중고생대광중고생 등 도합 10만 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밀려왔던 것이다시위대중 일부는 경무대로 향했고또 다른 일부는 정부기관지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경찰서 등에 불을 지르고 부정선거를 규탄했다다른 지방도시에서도 수십만의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타도 시위를 벌였다.

(곽영주, 곽영주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던 경찰 간부다. 그는 4.19 혁명 당시 경무대로 몰려온 시민과 학생에게 발포했다. 그 결과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경무대 앞에서는 이승만의 경호를 맡은 곽영주가 경찰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무차별 총격이 시민들에게 가해졌다이날 하룻동안 서울시내 곳곳에서 수 차례 시위대와 경찰의 접전이 이루어지고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을 업고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단말마적인 경찰은 최루탄실탄기관포를 가리지 않고 난사하여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의 사망자와 6,2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즉 많은 이들이 경찰의 발포로 이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경무대에서 후퇴하는 경찰병력)

 

여기서도 이승만은 마지막 발악을 했다그는 4월 19일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국무원 공고 83호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임명했다. 16시 30분 부산·대구·광주·대전 지구에도 계엄을 선포하여언론을 사전 검열하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지시켰다이승만은 시위를 진압하고 싶어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임명한 송요찬 중장은 시위 진압을 거부했고오히려 시민들 편에 섰다결국 4월 21일 내각이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22일 이기붕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밝혔다이어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촉구하며 부통령직을 사퇴했다여기서 민중들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6일 후인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이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시위를 감행했고시가를 행진했다교수단의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켰고다음날인 26일에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키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매카나기 대사, 주한미국대사인 매카나기는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이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것이다하지만 이승만이 사퇴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바로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미국의 뜻을 전달했는데거기에는 이승만이 물러나길 바라는 미국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즉 이승만은 미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이기붕 일가도 끝이나 버렸다이승만의 양자였던 아들 이강석은 권총으로 가족을 쏴죽인 뒤본인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하야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60년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은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독재자로써 군림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승만의 권력욕은 민중혁명으로 막을 내렸다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마치 민중을 생각해서 하야한 것처럼 얘기한다그러나 이 시리즈를 다루면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겐 그러한 양심따위는 전혀 없었다그는 그 시점에서 노욕만 있었을 뿐이다. 3.15 부정 선거 이후 민중혁명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전형적인 독재 권력자의 모습이었다단지 미국이 물러나라 해서 물러났을 뿐그가 물러난 이후 그의 지원자였던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이기붕 일가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그것은 바로 다시 한국을 떠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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