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와 그의 죽음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 4.19 혁명 이후 시민들은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
1960년 4월 26일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이승만 개인이 민주주의를 위한 선택이 절대 아니었고, 4.19 혁명에서 수많은 민중이 피를 흘리며 투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로부터 2일 뒤 이기붕 일가는 집단자살로 역사속에서 사라졌고, 이승만은 그들이 죽은 현장을 직접 가서 참사 현장을 잠시 둘러보고 경무대를 떠나 걸어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승만 동상 철거 소식을 전한 대한뉴스)
1960년 4월 27일 국회의 결의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발표되자 허정 외무장관이 자동적으로 대통령 서리에 취임했다. 이리하여 장면 내각이 들어서고 허정 과도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새로운 발걸음이 생겨났다. 이승만 숭배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던 이승만 동상은 민중의 손으로 무너져 내렸다. 1948년 여순민중항쟁 때나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기도 했었다.
또한 4.19 혁명 이후 극심한 반공 체제에 도전하며 통일 문제에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는 운동도 출현했다. 기존에 이승만 반공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정복주의적 비젼인 북진통일론에 대립되는 통일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였다. 당시 급진적인 지식인과 학생은 자립적 경제 발전을 원하기도 했고, 이는 종종 반미 구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했으며, 반제국주의적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했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당시 남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 혁명 이후 시민들 중 일부는 이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것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북진통일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일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

(장면, 장면은 이승만 정권 당시 야당에서 활동하며 그와 경쟁했다. 4.19 이후 허정 과도내각을 이끌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이 해방 이후부터 만들어 놓은 반공주의적 토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당시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동상에는 대대적인 헌화가 쌓였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 이후 등장한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억누르고자 했다.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에 들어선 장면 정부 또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반공사상에선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와이행 비행기에 오른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하야한 지 1달 3일 만에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하와이 동포 몇 사람이 제공한 대만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이것은 이승만 인생에 있어 마지막 망명길이었다. 이승만은 정말 마지막 까지도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4.19 혁명과 자진하야 그리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12년간 저지른 온갖 악행과 폭정 그리고 4.19 혁명에서 일어났던 사상자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마치 한국전쟁에서 거짓방송을 해놓고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960년 한국과 북한의 경제 차이,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지금이야 한국이 앞섰지만 당시 한국은 북한 경제 규모에 두배나 더 작은 규모였다.)
이승만이 떠난 한국의 경제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로 인한 빈곤은 4.19 혁명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이승만의 한국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남한보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보다도 훨씬 경제력에서 밀리는 상황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그랬듯이 전후재건에 착수했고, 1956년에는 소위 ‘천리마 운동’이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여 경제성장과 전후복구에 성공해냈다. 또한 북한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경제원조도 받았다. 1960년 당시 북한의 경제규모는 세계 50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보다 2배나 작은 101위였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를 세워 반공보루를 강화하려 했던 미국의 반소련 반공정책도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4.19혁명 이후 가난한 한국인들이 북한으로 흡수되는 것을 원할까봐 매우 노심초사했고 두려웠다. 그러던 1961년, 이승만이 하와이에 망명한지 1년이 되던 해 한국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 이승만에 반대했던 일부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바로 5.16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를 주도했던 인물은 바로 박정희(Park Chung-hee, 朴正熙)였다. 5.16 쿠데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는 자유주의자 이승만이 하지 않던 일이었다. 바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었다. 거기다 박정희는 일제시절에는 만주육사에서 소위로 지냈던 친일경력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경력도 있었으며, 이승만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도 세웠었다.
현재 이승만 세력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박정희는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었다. 그는 이승만을 부패한 권력자 혹은 독재자로 생각했으며, 그는 18년이라는 세월을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었다. 그가 이승만을 대신해서 국가적으로 높게 평가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였다. 거기다 백범 김구의 아들 김신은 5.16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고, 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 했다. 이승만을 싫어했던 박정희는 그 대안으로 백범 김구를 민족영웅 혹은 독립영웅으로써 국가적 차원에서 높게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이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틈을 타 귀국하려고 하자, 이를 막은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 즉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의사를 수차례 거부했다.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 이들은 5.16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초기에 약속했던 공약과는 달리 독재정권을 유지했으며, 이승만 보다 더 긴 18년간 군림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지만, 이승만이 그렇게 강조하던 한가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 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다. 애초에 5.16 쿠데타를 할 시점부터 박정희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겠다고 명백히 입장을 밝혔었고, 과거 그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던 존F케네디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미국까지 갔었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 시절의 반공주의를 사회적으로 더 체계화 시켰다.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이승만식 반공주의는 사실상 정치생명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찍은 이승만과 그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 리)
하와이에 망명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 이승만은 점차 늙어갔다. 1962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하와이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 서서히 기력을 잃어갔다. 이승만은 반수(半睡) 상태로 몇 년을 살았다. 사실상 산 것도,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하와이에 망명하여 거의 칩거하면서 살았다. 그가 반수상태로 몇 년을 더 산 것은 산삼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승만이 병상에 누워있던 1964년 이승만이 매우 아끼고 좋아하던 인물이자 극단적 반공주의자 맥아더가 생을 마감했다. 맥아더가 사망한지 2달 후인 1964년 6월 말 이승만은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로 쓰러졌다. 그는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의 헌신적 내조를 받았기에 비교적 건강했지만, 무엇보다 박정희가 귀국을 거절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즉 1964년 6월에 그가 쓰러진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는 결국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던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마우나리니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의 90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죽은 7월 19일은 사실상 그가 없애고자 했던 해방정국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괴한의 테러로 목숨을 잃었던 날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장례식, 이승만의 귀국요청을 수차례 거부한 박정희는 그가 죽자 귀국을 허락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이승만을 높게 평가한 것 처럼 얘기하며 그 근거로 장례식에서 박정희가 읽은 추도문을 예시로 들지만, 사실 그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표면적으로 공개석상에서 보인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2020년에 열린 이승만 추모제, 이승만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가 죽은지 55년이 지났음에도 그를 여전히 미국의 조지 워싱턴 마냥 건국의 아버지로 찬양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만이 죽자 결국 박정희는 이승만의 귀국을 마침내 허락했다. 이승만의 유해는 그를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됐다. 특별기가 한국에 귀국하자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은 4.19 민중혁명으로 한국에서 쫒겨난 대통령이었다. 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지 않았고,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귀국하려고 했다. 그는 미국유학시절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과오를 저질렀고, 전혀 반성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국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