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치를 향한 발걸음,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2011년에 나온 영화 ‘고지전(The Front Line)’을 보면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1952년에서 1953년 사이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던 남북한의 병사들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교전을 한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남북한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러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지속됐다. ‘반공포로 석방’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오로지 북진통일만을 외쳤다. 한국전쟁에서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승만이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의 동생이다. 그는 이회영과 더불어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였다.)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던 이회영 일가의 6형제 중 한명인 이시영은 1948년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새 국가건설에 노력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이승만의 견제는 점점 심해졌고,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 결국 부통령 이시영은 1951년 5월 1일 <국민에게 고한다>는 한 통의 서한을 신익희 국회의장 앞으로 전달하고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이승만은 부통령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여겼다. 그는 매사에 유아독존적이었다. 정부의 각종 행사장에서는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국정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소외시키기 일쑤였다. 국회는 5월 17일 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결선투표 끝에 김성수가 78표를 얻어 74표를 얻은 이갑성을 누르고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성수도 부통령직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1952년 5월 29일 폭탄적인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부산의 임시수도 정부청사,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사용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선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지만, 이승만은 노회함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았다. 거기서 그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신이 주도하는 당을 발족했다. 그 당이 바로 자유당이다. 당시 자유당은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는데,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구도였다. 이승만은 이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자유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생각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1952년 1월 28일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났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ㆍ땃벌떼ㆍ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뿌리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소위 이들은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 요구 등을 내건 이승만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관제데모는 결과적으로 반 이승만 정서를 고조시키는 역풍을 불러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동원한 헌병들은 대낮에 국회의원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연행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개헌하기 위해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는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 전북 일부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최전선에서 인민군과 대치중이던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했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다음날인 5월 26일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몰고 가서 연행했다. 이게 바로 부산정치파동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까지 가자 이시영, 김창숙, 김성수, 장면 등 반이승만 야당원로들이 부산에서 이른바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불리는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25기념식상에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와 김시현 등이 주도한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터지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해방 후 친일경찰 채용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ㆍ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으로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직선제로 실시한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발췌개헌 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서 충직한 심복 노릇을 한 이범석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권력욕이 강한 이승만은 족청을 등에 업은 이범석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범석을 ‘토사구팽’의 신세로 전락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자파라도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그 뿌리부터 자르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노회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 투표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되면서 한국전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은 국내 정치적으로 남한의 반공보수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굳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0만 미만이었던 한국군은 60만 대군으로 급격히 자라났고, 경찰력도 증강되어 반공안보체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반공이라는 체제의 가치는 국시로서의 지위로 더 강화되었고, 소위 사회주의 노선이나 민주사회주의 노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색체를 보이면, 이단취급 받는 광적인 사회가 되었다.
1953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가 한국에서 실시되었다. 제3대 총선은 2년 앞으로 다가온 제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이승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 우선적으로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범석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승만은 먼저 대통령령을 발포하여 각종 청년단체를 불법화하였고, 자유당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범석의 족청을 존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고 난 뒤 이승만은 헌법 속에 들어있는 의원내각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다수의석을 차지하고자 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을 통한 이승만의 독재정권이 공고화 되기 시작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점차 반이승만세력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해방 후 이승만과 한편에 섰던 조병옥이나 이범석 그리고 신익희 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했고, 이승만을 위해 백색테러를 일삼다가 국회의원 자리까지 들어가게 된 조직폭력배 김두한 또한 반이승만세력이 되었다. 아무튼 제3대 총선은 이승만이 이와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되었다. 자유당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유권자를 매수하는 한편 깡패들을 동원하여 야당의 유세장을 기습하고 야당 후보 및 무소속 후보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갖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특히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던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등록 서류를 탈취하여 후보등록을 못하게 하고, 장면의 측근 오위영에게 후보를 사퇴하도록 압박하였다.

(자유당, 자유당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승만을 대변했던 정당이다.)
온갖 부정, 타락선거의 결과 자유당은 114석으로, 민국당 15석, 대한국민당 3석, 국민회 3석, 제헌동지회 1석, 무소속 67석에 비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나 당초 목표인 개헌정족수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1954년 9월 7일, 이승만의 자유당은 선거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이기붕 의원을 포함한 135명의 서명을 받아 개헌안을 국회에 제안했다. 이렇게 하여 제2차 개헌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개헌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국민투표제의 채택 -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안위에 관한 중대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② 국무총리제 및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를 폐지하고 민의원에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적 불신임권 부여.
③ 참의원 의원을 2부제로 개선.
④ 참의원에 대법관 기타 고급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인준권 부여.
⑤ 경제체제의 중점을 국유ㆍ국영의 원칙으로부터 사유ㆍ사영원칙.
⑥ 현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 폐지.
⑦ 기타 8개 항의 개정사항을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불과 2년전 부상정치파동을 주도했던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을 꿈꾸며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러 자유당이 원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은 이승만은 자유당의 개헌안을 공고기간에 거쳐 11월 18일 본회의에 상정했다. 또한 이승만은 국회상정에 앞서 우파 반공주의의 본산인 민국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개헌안 통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개헌안은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부친 결과 재적 203명 중 가 135표, 부 60표,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인 136표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포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로 부결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전대미문의 수학계산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개헌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11월 28일 일요일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정부는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2/3는 135라도 무방하다는 특별성명을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을 다했다. 27일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학의 수학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하여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에 착안하고, 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여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어제 최 부의장이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부결임을 선포한 것은 의사과장의 잘못된 산출방법의 보고에 의하여 착오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숫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 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해괴망측한 발표를 했다. 다음날 29일 최 부의장이 개회 벽두에 전차회의에서 부결이라고 선포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자, 국회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이었다.

(사사오입 개헌의 논리)
이승만은 이런 전대미문의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토대를 마련했다. 사사오입 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불법적인 개헌이었을 뿐만 아니라 1인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헌정사상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이승만의 악행은 대통령으로서 독재정권을 강화하면서도 아주 잘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일을 가리지 않았으며,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