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년 9월 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월 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괌,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월 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월 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년 9월 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년 12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년 10월 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년 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년 8월 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