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됐다. 냉전은 미소양국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양국은 경쟁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냉전의 구도를 마치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위선과 기만 속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역사적 팩트가 존재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과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의 협력이다.
(스테판 반데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치에 협력하여 인종청소를 포함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대학살자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예전부터 반소감정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침략자 나치를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OUN의 지도자였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는 나치와 협력하여 소름끼치는 대량 인종 학살들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으로 1941년 9월 29일에서 30일에 수도 키예프(Kiev)외각에 있는 바비야르(Babi Yar)에서 33,721명의 유대인을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우크라이나 점령 기간동안 대략 15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는데, 스테판 반데라가 지휘하는 OUN 대원들은 나치의 천인공노할 정책에 적극 협력했으며, 1941년에만 최소 30만의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미콜라 레베드,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지휘자로 수만에서 수십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 등을 인종청소하고 학살한 전쟁범죄자다. 그러나 미국 CIA는 그를 후원했으며, 그 덕분에 천수를 누리며 살다 1990년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조직으로는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Ukrainian Insurgent Army)가 있었으며,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나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와 같은 UPA 인사들은 볼리니야아 갈리치야 지역에서 반데라의 군대가 그랬듯이 소름끼치는 민간인 학살 및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1943년 볼리니아 지역에서는 최소 35,000명에서 7만 명 혹은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 주민들이 이들에게 무차별 학살당했으며, 스테판 반데라 또한 이런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극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였다.
(CIA,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CIA는 소련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서유럽에서 파시스트들과 협력했다. )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점차 반격하기 시작하자, 나치와 소련군을 동시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런 게릴라전은 1945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반파시즘 항전에 참가한 소련 인민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1944년부터 1945년 상반기 까지 91,615명의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군대가 소련군에게 사살됐고, 비슷한 비율의 숫자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 반데라와 같은 몇몇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성향의 인물들은 연합국 점령지역으로 도망쳤고, 몇몇은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 정착했다.
(냉전 당시 OUN과 CIA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 올리버 스톤의 다큐인 우크라이나 불에 휩싸이다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45년 당시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있었는데, 반데라와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나 처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냉전 초기 미국은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CIA는 OUN과 UPA 지도자들의 미국 이주를 후원했었으며, 이들을 소련 전복을 위한 전복부대나 첩보부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 전쟁범죄자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볼리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는 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 살았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런 전범들은 잘먹고 잘살았었다는 얘기다.
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미콜라 레베드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하여 연합국과 접촉했는데, 미 육군 방첩대는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으며, 1949년 6월에는 CIA의 협력하에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법무부가 레베드를 미국서 추방하려고 했으나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는 “미콜라 레베드는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며, 핵심적인 반소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스테판 반데라 동상, 스테판 반데라의 동상은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때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서방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냉전 초기 소련 휘하의 우크라이나에 침투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게시했다.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등이 있다. 실제로 미국 CIA는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인물과 협력하여 1949년 9월 5일 우크라이나인 스파이 선발대를 낙하산으로 소련에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런 공작은 1954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소련은 이런 제국주의 무리들을 신속히 처리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나치 협력자들을 통해 소련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공작을 했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적국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워싱턴에 제공한 대가로 CIA는 그 보답으로 민족주의자 퇴역군인들을 영향력 있고 권위 있는 지위에 두면서, 그들이 기존대학에서 준 학문적인 기관이나 학술적 지위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며 이런 전쟁범죄자들과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피시스트들은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진실은 서방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다. 반공주의 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보여주는 역사다.
미국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이유에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이와같은 사실에서 미국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냉전 초기에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리 트루먼이 말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의 진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