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6월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뒤집은 해전이 있었다. 이 해전에서 일본 제국은 재기불능일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해전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이다.

 

1. 배경 

1931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2년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1933년 독일과 더불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이후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하며 중국 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수도 남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민중이 뭉치자 중국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또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면서, 일본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히틀러의 파리 점령과 더불어 일본 제국의 인도차이나반도 침공이 있었고, 미국과 영국은 이런 일본의 행동에 반발하여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끊었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일본 제국은 결국 미국과 전쟁을 하기로 했고, 1941127일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의 일본군의 태평양 지역 점령은 연합국에게 있어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1941년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점령당했고, 홍콩과 싱가폴, 말레이시아, 버마,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 웨이크 심지어 알래스카의 알류산 열도까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이러한 일본군의 승승장구한 태평양 점령은 19425월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현상과는 달리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을 당시 큰 실책을 범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파괴한 미국의 전함과 군함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구식 전함들이었고, 미국의 주력 항공모함 3척은 당시 해상에서 훈련 중이었기에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항공모함을 상대해야 했고, 태평양의 중심인 미드웨이에서 상대해야 했다.

 

2.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와 미국의 승리

 

1942418일 미국의 미 항공모함에서 출동한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에 접근해서 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하고, 중국 대륙으로 날아가는 일이 있었다. 당시 공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일본 해군을 지휘하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에 매우 자극받아 미드웨이를 공격하려는 의지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해 55일 일본 해군 사령부는 작전 명령 제18호를 발표하고 작전명‘MI 작전인 미드웨이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두 개 이상의 함대를 합한 연합 함대를 총동원했는데, 항공모함 8, 전열함 11, 순양함 23, 구축함 65, 잠수함 21척을 포함한 200척의 함대와 대략 6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된 규모였다. 당시 영국 해군보다도 규모가 대단했던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에게는 3척의 항공모함과 8척의 순양함, 6척의 전열함을 포함한 군함 76척을 동원되었다. 즉 함대 규모 면에서 3 1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가장 큰 장점이 있었는데, 19421월에 격침된 일본군 잠수정에서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코드 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체스터 니미츠는 이것을 이용하여 미드웨이를 노리는 일본군의 계획을 미리 파악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군 참전 병력과 함대 수, 공격 노선, 작전 시간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64일 새벽 3시 야마모토는 기함 야마토호에서 각 함대의 지휘관에게 전투 준비지시를 내렸다. 545분 미군 해상 정찰기가 나구모 함대를 발견했는데,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드웨이 해상에서도 미군의 레이더에 잡혔고, 미군 전투기와 일본군 전투기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오전 7시와 10시에 일어났던 교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했고, 오후 245분 미국 엔터프라이즈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급강하 폭격기들은 소류호를 공격했는데, 소류호가 침몰하면서, 한때 명성을 날렸던 나구모 함대는 전멸했다. 그리고 65일 새벽 255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 함대에 패배를 인정하는 미드웨이 작전 계획 취소전문을 보내면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3. 결과 및 의의

 

미드웨이 해전은 완벽히 일본군의 대패로 끝이 났다. 일본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었고, 3057명이 전사했으며, 순양함 1척을 잃었다. 반면에 미군은 307명이 전사했고, 항공모함 1척을 잃었으며, 구축함 1대가 침몰당했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은 사실과 거꾸로 보도했다. 대본영에서는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호넷 호 격침, 전투기 120대 격추, 아군 피해 항공모함 1척 상실, 1척 대파, 순양함 1척 대파, 미귀환 전투기 35라고 발표했고, 진실을 알 리가 없는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승리를 환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는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대략 6개월 만에 거둔 미국의 승리였고, 6개월 만에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미국은 과다카날 전투를 비롯한 태평양 전선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기를 붙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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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나 6시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는 분의 차를 타고, 천안문으로 향했다. 천안문에 도착한 필자는 대략 50분 정도 줄을 섰고, 3~5분 정도 마오쩌둥 기념관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대략 1~2분 정도 마오쩌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기에 중국 정부에선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기념관까지 만든 것일까?

마오쩌둥 그는 1893년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젊은시절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그는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장제스의 배신으로 깨지자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5년 고난의 역경속에서 대장정을 성공시켰다. 이후 중일전쟁시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전개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는 항상 마오쩌둥이 있었다. 1972년에는 냉전 데탕트 분위기속에서 미국과 수교하였고, 1976년 사망했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인생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속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대략 40분에서 50분 이상이나 줄을 섰을 정도로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존경심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느꼈다. 심지어 마오쩌둥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리시는 나이든 중국 어르신들을 적잖게 보았는데,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은데, 그 비판에는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다. 1950년대 그가 전개했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대략 3천만명이 아사했고, 문화대혁명은 많은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대약진 운동 사실상 정책적 실책이기에, 그것을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얘기하는 것은 타당치 않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정부조차 비판을 할 정도니, 그런점에서 보았을때 마오쩌둥은 절대 과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등소평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7 과3이라 평가를 내렸는데, 그런 평가는 마오쩌둥의 과에 비해 너무 후하게 준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장제스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것도 잘못됐다 본다. 따라서 필자는 마오쩌둥에 대해 평가할때 공5 과5로 본다.

한국 사람들의 경우 마오쩌둥을 비판할때, 한국전쟁 당시의 그의 파병을 문제 삼는데, 필자는 그런 류의 비판은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본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복잡한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봐야할 문제고,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했듯이, 1945년 여운형의 건준과 모스크바삼상회의 부터 봐야할 문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하자면, 오늘 본 마오쩌둥의 묘와 3년 전 모스크바에서 본 레닌묘를 비교하자면, 오히려 마오쩌둥이 레닌보다 더 밀랍으로 방부처리가 된 듯 하다. 마오쩌둥의 평가가 어떻든 그는 여전의 중국의 영웅이고, 혁명가로써의 공은 당연히 위대한 업적이기에 인정해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최근에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판한 마오쩌둥 평전을 필자는 읽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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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나치에 대한 단상

오늘 고기집에서 영업 방해한 어떤 또라이를 보니 채식나치들은 정말 히틀러가 가지고 있는 논리를 있는 그대로 답습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건 깨우치게 된다.

육식 하지 말라는 채식나치들의 논리 대로라면, 고기 쳐먹는 티라노사우루스는 자연계에서 없어야 한다는 똥논리도 만들어 질 수 있다. 고기를 섭취하는 행위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히 필요하다. 그럼 자연에는 트리케라톱스와 이구아노돈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논리대로라면 채식주의자들이 섭취하는 식물들 입장에선 채식은 졸라 잔인한 행위 아니냐? 식물도 고통 느끼는거 모르냐? 채식주의자란 자들이 실은 풀님들을 칼로 난도질해서 죽지도 않은 상태로 뜯어먹고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바바리안이잖아. 셀러드랍시고 그 풀에 풀로 섞어 만든 이상한 액체를 잔인하게 자른 채소에 뿌려먹잖아!!! 누가 누굴 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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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70년대부터 정한론과 같이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들이 등장했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꺾고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입장에선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차르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 또한 승승장구하며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자 했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하는 일이 생기자 이를 계기로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으며,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결국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려 했다. 또한, 러일양국은 조선과 만주의 권익에 대해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이는 결국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선제공격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게 바로 러일전쟁이다.

러일전쟁 초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 붙였다. 러일전쟁 초기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고 만주 중심 도시인 봉천을 공격하여 1905년 3월 10일에 장악했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극심했다. 가장 유명한 전투가 당시 있던 203고지 전투가 있는데, 이곳에서만 1만 명이 전사했고, 203고지는 시체로 산이 형성되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지상전보단 해전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발트해에 있던 발틱함대를 동원했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발틱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치 못하게 했고, 결국 발틱함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과 태평양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를 했고, 사실상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일본 해역에 도착했다. 결국, 러시아 발틱함대는 대마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함대와 교전했고, 대패했다. 그 해전이 바로 쓰시마 해전이다. 이를 통해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러시아 제국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혔다. 그 결과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월권과 랴오둥반도, 그리고 사할린 남부지방을 획득하고 극동에서 확실한 패권 국가로 등장했다. 결국,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진했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완벽히 합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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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

해방 이후 미군정청에서 했던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누구인가‘ 라는 재목을 달고, 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여론조사에서 단연 1위를 기록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900년 14살이 된 몽양 여운형은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년 뒤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당으로 옮겼고, 흥화학당을 나온 몽양은 돈을 벌기위해 우무학당에도 들어갔으나 일본인에게 넘어가자 나왔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에게 먹히자, 몽양 여운형은 1906년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에 나서며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하여 집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 질러 가지고 있던 노비 전부를 해방시켰다.

그러던 중 동생 여운홍과 함께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된 여운형은 1910년 이후 중국으로 갔고, 1910년대 여운형은 중국 남경에 있는 금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18년 여운형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어 강대국들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그 해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일본에가서 고위급 인사들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

1920년대 초 여운형은 고려 공산당에서 활동했고, 김구와 더불어 노병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1922년 모스크바로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은 중국의 국공합작에도 힘을 썻고, 손문, 장제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하고도 교류했다.

그러던 1929년 7월 상해에서 체포된 여운형은 1930년 법정에서 3년형을 받았고, 대략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1932년에 풀려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있으면서 백두산 탐방, 이순신 장군 묘소 정돈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체육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축구, 야구, 수영 ,체조, 권투, 달리기등 싫어하는 운동 종목이 없을 만큼 여운형 선생은 운동을 좋아했다. 1936년 말아톤 선수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가장 먼저 일장기를 지워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물론 그 바람에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지만 말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몽양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예측했고,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키자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다. 1940년 일제의 회유책을 단번에 거부했고, 일제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몽양 여운형은 국내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미리 대비했고, 1945년 8월 일본의 엔도 류사쿠 총감으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음으로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건준은 전국적으로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 해 9월 미군이 상륙하면서, 강제로 해산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로 찬반탁 논쟁이 불거지자 여운형은 미소공위를 지지했고, 1945년 11월에 창설한 조선인민당은 미소공위를 위해 헌신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익대립이 극심해지자 몽양 여운형은 우사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과 친일세력들로 부터 공격받았고, 1947년 3월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테러에 휩쓸려 백주대낮에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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