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노동자 연대에서 개최한 맑시즘에 참가했었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맑시즘에선 항상 북카페를 여는데, 그 북카페에서 파는 책들 중에는 위대한 혁명가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이 쓴 사회주의 관련 혁명 서적들도 있지만, 노엄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미국의 진보학자들이 쓴 책들도 적잖게 팔았다. 난 그중에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를 샀고, 맑시즘이 끝난 뒤 이 책을 읽었다. 책은 총2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2권의 분량을 합치면 총 1200페이지나 된다. 올해 4월 하워드 진이 쓴 <만화로 보는 미국사>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가 쓴 <미국민중사> 또한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미국의 역사는 대체로 미국 주류사회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 같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한 미국의 역사,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자유와 신앙적 권리를 찾아 아메리카라는 땅을 찾아갔던 역사,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역사, 흑인 노예제에 반발하여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역사, 새 삶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던 자랑스러운 서부 개척의 역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망시키고 파시즘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미국의 역사, 소련이라는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미국의 역사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에 맞서 세계평화에 기여한 미국의 역사, 이게 바로 소위 미국사회와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미국의 주류역사학자들이 상상하는 미국의 역사일 것이다.

 

미국의 진보학자를 대표하는 하워드 진은 미국 주류사회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이와 같은 제국주의적인 시각과 역사를 일부 정치인과 제국주의자들의 전유물인냥 해석하는 시각을 단호히 배척하고 미국의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즉 하워드 진은 미국의 역사를 일부 주류 정치인과 인물의 역사로 보지 않고, 신항로 개척시기 제국주의자들에게 억압받던 피지배계급과 노예들의 시각에서,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여성인민들의 시각에서, 백인사회로부터 노예화되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흑인 노예들의 시각에서, 스페인 미국 전쟁 당시 지배받던 쿠바인들의 시각에서, 산업화 시기 대자본가들에게 무제한 착취 받던 노동자들의 시각에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전쟁에 반대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들의 시각에서, 1950년대 사회적으로 차별 받던 흑인들의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남 반전운동에 나섰던 반전 운동가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미국의 폭격으로 가족과 이웃을 잃은 베트남 인민들 의 시각에서, 1990년대 미국의 제제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갔던 이라크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던 중동 인민의 관점에서 미국사를 서술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혹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았거나)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의 내용을 얘기 해볼까 한다.

 

책의 첫 시작은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과 더불어 그 이면에 정복자 콜럼버스가 토착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추악한 만행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던 개척자 콜럼버스는 개척자가 아닌 정복자였다. 콜럼버스는 그 지역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노예로 부려먹고, 학살했으며, 원주민 부녀자들을 마음대로 겁탈했다. 콜럼버스와 그 일행의 악행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이 도륙됐다. 토착 원주민을 본 콜럼버스는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칼 한 자루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날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미국민중사1 p.15)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17세기 들어서 유럽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건너 왔다. 미주대륙으로 이민 가게 된 이민자들은 노예를 대리고 왔고, 그 지역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려고도 했었다. 17세기 중후반 현재 미국의 버지니아 지역은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자신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있었다.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미국민중사1 p.77)

 

1700년대 중후반이 되자 미국에서도 영국의 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게 결국 조지워싱턴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몇 년간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영국을 몰아냈다.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선포한 미국 독립선언서의 시작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는 멋진 말과 함께 시작하지만, 미국을 건국한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인식하는 평등에 개념은 참으로 저급한 수준이었다. 저자 하워드 진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견해 밝힌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미국민중사1, p.186)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라고 써놓고서 인디언들이나 흑인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평등한 인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서 미국 남부는 목화 산업으로 먹고 살았고, 따라서 미국 남부사회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었다. 흑인들은 백인 지배계층에 의해 엄청난 착취와 억압(심지어 흑인 여성들은 백인 지배자들로부터 성적 노리개가 되기도 했다.)을 당했다. 남부의 비인권적인 흑인 착취에 맞서 흑인들을 해방시키고 구출하기 위한 흑인들의 투쟁도 전개됐지만 노예 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북전쟁 시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링컨이 노예 제도를 반대하여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영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그런 인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연방주의자였다. 따라서 링컨은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선 노예제 따위는 남부 연방 꼴통들에게 양보할 인간이었다.

 

링컨은 1861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미국민중사1 p.333)

 

남북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은 노예제도로 부터는 해방이 됐지만, 자본주의 치하에서의 사실상 노예와 다를 게 없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에선 큰 개선이 없었다. 미국사회는 흑인뿐만 아니라 여성도 억압했다.(흑인이 투표권을 가진 것이 19세기인 데에 비해 여성은 1920년대 들어서 투표권이 생겼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여파에 따라 미국도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다 19세기 미국은 서부개척에 나섰고, 그 결과 엄청난 영토를 차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엄청난 착취와 억압을 토대로 하여 자라났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은 유보됐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척하기 위해서 더더욱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마치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무장투쟁은 19세기 후반 까지 계속되었다. 1890년에는 운디드니라는 곳에서 백인들에 의해 수백 명의 원주민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미국민중사1 p.504)

 

19세기 미국의 팽창은 서부개척으로 멈추지 않았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가 소유하고 있던 알래스카를 저가에 매입했고, 1890년대에는 하와이 섬을 완벽히 합병했으며, 1898년에 터졌던 미국 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쿠바를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국가로 만들었고, 필리핀 또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9세기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듯이 미국 또한 제국주의국가가 되었다. 이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거세지고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전 세계에 크나큰 전쟁의 먹구름이 나타났다. 1914년 유럽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맹국들에게 물자와 무기를 지원하며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던 1917년 전쟁에 참전했고, 1918년 승리했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미국민중사2 p.16)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는 과잉과 풍요 그리고 흑자 연속의 경제였다. 그걸 바탕으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이 활발했던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파업 주동자들과 투쟁한 노동자들을 쉽게 연행하고 구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던 1929년 미국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경제대공황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대공황으로 인하여 미국은 적자와 실업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1930년대 세계는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렸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1933년 독일에선 히틀러가 등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1939년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엔 제국주의국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군사적인 동맹을 맺고, 여러 나라를 침략했다. 194112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나치독일과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미국 또한 엄청난 인권유린과 억압이 존재했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미국민중사2 p.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미국민중사2 p.114)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냉전체제에 돌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자신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진보정권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중국내전에선 국민당을 지원해줬다. 소련과의 경쟁이 시작됨에 따라 미국사회는 반공주의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거기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나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내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했다. 자칭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반공이라는 명분아래 수많은 지식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고, 심지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미국민중사2 p.138-9)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개입은 한국전쟁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미국은 그로부터 15년 뒤 아시아에서 일어난 또 다른 전쟁에 개입했다. 그게 바로 베트남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들어왔고, 그 때문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패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도미노 이론에 빠져있던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고, 남베트남의 반민중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그래도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미국은 베트남에 엄청난 폭탄을 퍼붓고 고엽제를 투하해가며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했지만, 결국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주의 세력에게 패배했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가 베트남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패배한 것이다.

 

“1964~1972년까지, 세계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일찍이 이 나라가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반전운동이 있었고 이 운동은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미국민중사2 p.207)

 

베트남 전쟁은 결국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들어섰다. 레이건 정부는 다시 강력한 반공정책과 군비증강 하는데 있어서 온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남미에 있는 수많은 우익독재국가들을 지원했다. 1991년 걸프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라크군을 박살내면서 베트남 트라우마를 사막에다 묻어버렸다. 미국은 이라크를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무려 100만이나 되는(이중 50만은 어린이와 유아) 이라크인 들을 아사시켰다. 20019.11테러가 일어나 무려 3000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부시 정부는 이를 계기로 미제국을 또 한 번 발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리고 이런 중동분쟁은 현재진행형이 되어버렸다.

 

“2001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미국민중사2 p.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미국민중사2 p.557-8)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한 제국주의국가가 국내의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의 파업투쟁과 다른 나라의 자주적인 역량을 어떻게 짓밟고,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내세워 어떻게 그 이면에서 수많은 백색 독재국가들을 지원했는지를 아주 낱낱이 보여준다. 역사라는 학문을 한 인물과 정치집단 혹은 제국주의 국가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관점을 배척했고,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아래 고통 받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민중의 입장에서 재조명 했다.

 

지난 2015년 대한민국의 박근혜 정부는 좌편향 교육은 잘못됐다.”는 시각을 가지고 국정교과서 사태를 초래했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반대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이를 시행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사태를 지지하던 일부 뉴라이트 계열 교수들과 극우집단들이 내세우던 논리는 아주 심플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역사라는 학문 자체를 국가주의라는 맹목적이고 전근대적인 사상에 그대로 대입해서 본 것이다. 역사는 정직하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해야지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단순히 자랑스러운 국가의 역사 따위를 일부 정치인들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를 집필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다.

  

  

하워드진의 미국민중사를 읽으며 필자는 역사라는 학문은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배웠다. 미국민중사는 미국이라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부에선 이 책의 편향성을 문제 삼을 것이다. 하워드 진도 이 책을 쓰면서 그리고 책 후기에서 밝히는 대로 이 책은 철저히 억압받던 민중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이기에 중립성을 보장하기 매우 힘들뿐더러 애초에 보장 할 수가 없는 책이다. 중요한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해야한다는 중요한 교훈이지 중립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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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살림지식총서 534
남정옥 / 살림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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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 뭘하긴!! 거짓 방송하고 난뒤 몇몇 관료들과 함께 도망쳤지. 그리고 대전과 부산 내려가서도 거짓방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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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방송은 2018-08-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북한이 파견한 간첩들이 방송국에 침투해 일으킨걸로 밝혀졌고 이대통령은 오히려 도망가라는 관료들의 만류를 여러차례 뿌리치다가 억지로 하다시피 피신했으며 오히려 그런 목적으로 피난갔으면 이통이 피난간 시점은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단다 이승만이 붙잡혔으면 지금 김정은치하에 살고있는건데 이걸 바라고있는 좌빨인가?

NamGiKim 2018-08-18 18:40   좋아요 0 | URL
넌 왜 내가 쓰는 글에만 딴지 거냐?ㅋㅋㅋ 나이 쳐먹은 아재씨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 하 - 압축본
지만원 지음 / 시스템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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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군 개입설은 역사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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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18-08-1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북한이 기록한 5.18역사책하고 전두환을 기소한 수사기록하고 둘다 600명 대학생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이 무기고털고 TNT폭탄 설치한다음 도화선연결하며 여러사람 쏴죽이고 사단장지프차 습격했다고 언급했는데 바로 이들이 대학생으로 위장한 북한군이란다

구글이 상용화 예정인 99.5% 정확도를 자랑하는 얼굴인식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만원박사팀은 1년넘게 꼼꼼히 조사한끝에 광주현장에 무기든 사람 어린이 예술가 등등 570명을 발굴했는데 이들은 전부 북한군장성.노동당고위간부.김일성친인척.유명탈북자로 밝혀졌다

이미 5.18민주어쩌고는 생명력을 잃은 사망한 상태이며 첨부터 북괴와 접선이 나있던 김재규가 김일성의 사주를받아 국가원수를 살해하고 10.26 도화선인 부마폭동부터가 북괴가 자기들에게 충성하는 빨갱이학생을 조종해 일으킨 부마폭동부터 10.26 광주5.18은 전부다 북한이 제2차 공산화시도를 위한 일으킨 폭동이자 사태였단다

NamGiKim 2018-08-18 19:02   좋아요 0 | URL
너 바보냐? 김재규를 중정부장에 임명한게 박정희인데 김재규 중정부장 임명권자도 북한 김일성 지령 받는가 보군.

NamGiKim 2018-08-1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단고기급 뇌피셜에 헛소리군.

헛소리라니 2018-08-18 18:0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79년부터 80년까지 거대한 역사적변환점은 북한이 전부다 일으킨걸로 드러났고
이게 드러날 예정인것은 5.18폭동에 동감하는 국민은 전체의 60%에 달한다
한국당이 겁이많은 쫄보라서 그렇지 용기있게 5.18 진상으로 똘똘뭉치고 이에 동조하는 많은 국민이 합세하면 이땅의 빨갱이들 전부 소멸하고 너 포함한 50대이하중 90%는 민주화는 공산화운동이었고 죄다 빨갱이들이었으며 독재는 정당했고 다시 한정적이나마 4공 5공으로 되돌아가야한다는 주장에 동조하게된단다

NamGiKim 2018-08-18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동아: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전혀.˝
이순자: ˝지금 그 말(북한군 침투설)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독불장군이라 우리가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요. 그걸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5·18 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
전두환: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NamGiKim 2018-08-18 18:37   좋아요 0 | URL
국방부 ˝5·18 北개입설은 허위라는 과거사위 결론 존중˝

2013.05.24.

광주시 확인요청에 입장 표명

[동아일보]

국방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에 대해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발표한 결과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당시 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는 ˝신군부 세력이 5·18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 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기술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23일 정례 브리핑에서 ˝진상규명위 보고서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약 2년간 조사한 결과˝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앞서 광주광역시는 22일 김관진 국방부 장관 앞으로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 명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속히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내용의 민원을 제기했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7월 24일 발표한 570여 페이지에 이르는 보고서에 따르면 신군부는 1980년 5월 24일 시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된 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을 북한이 5·18을 선동하기 위해 남파한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가 이창용의 수사 및 재판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창용은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없이 남파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을 입증할 첩보나 보고는 없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진상규명위의 조사를 존중한다는 것은 국방부 역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북한군의 개입이 없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난 자랑스러운 사회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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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8-18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자유수꼴주의 우파ㅋㅋㅋㅋㅋㅋ 난 당신이 더 한심스러워요. 누가 소련 체제나 구 공산권 체제를 교조적으로 혹은 신좌파를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했나.ㅋㅋㅋ

NamGiKim 2018-08-1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주의 자체를 죄악시 하는 당신들이야말로 1949년 중공 건국 이후 미국에서 유행한 메카시즘에 빠진 거겠지.ㅋㅋㅋ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수꼴이라는 증거다. 사회주의 하면 무조건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거 말이야.
 
몽양 여운형 -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선다 산하어린이 155
전상봉 지음, 이상권 그림 / 산하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업적에 비해 잊혀진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을 재조명한 여운형 위인전이다. 어린이용 위인전 치고는 여운형에 대한 웬만한 내용은 거의다 있다. 몽양 여운형을 알고는 싶은데, 평전 읽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한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던 몽양 여운형의 정신은 현재 우리가 본받아야할 정신이다. 좌우를 통합하는 그의 노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해야할 정신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많은 어린이들이 이 책을 읽고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정국 최고의 지도자 몽양 여운형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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