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나 6시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는 분의 차를 타고, 천안문으로 향했다. 천안문에 도착한 필자는 대략 50분 정도 줄을 섰고, 3~5분 정도 마오쩌둥 기념관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대략 1~2분 정도 마오쩌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기에 중국 정부에선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기념관까지 만든 것일까?

마오쩌둥 그는 1893년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젊은시절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그는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장제스의 배신으로 깨지자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5년 고난의 역경속에서 대장정을 성공시켰다. 이후 중일전쟁시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전개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는 항상 마오쩌둥이 있었다. 1972년에는 냉전 데탕트 분위기속에서 미국과 수교하였고, 1976년 사망했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인생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속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대략 40분에서 50분 이상이나 줄을 섰을 정도로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존경심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느꼈다. 심지어 마오쩌둥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리시는 나이든 중국 어르신들을 적잖게 보았는데,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은데, 그 비판에는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다. 1950년대 그가 전개했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대략 3천만명이 아사했고, 문화대혁명은 많은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대약진 운동 사실상 정책적 실책이기에, 그것을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얘기하는 것은 타당치 않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정부조차 비판을 할 정도니, 그런점에서 보았을때 마오쩌둥은 절대 과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등소평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7 과3이라 평가를 내렸는데, 그런 평가는 마오쩌둥의 과에 비해 너무 후하게 준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장제스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것도 잘못됐다 본다. 따라서 필자는 마오쩌둥에 대해 평가할때 공5 과5로 본다.

한국 사람들의 경우 마오쩌둥을 비판할때, 한국전쟁 당시의 그의 파병을 문제 삼는데, 필자는 그런 류의 비판은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본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복잡한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봐야할 문제고,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했듯이, 1945년 여운형의 건준과 모스크바삼상회의 부터 봐야할 문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하자면, 오늘 본 마오쩌둥의 묘와 3년 전 모스크바에서 본 레닌묘를 비교하자면, 오히려 마오쩌둥이 레닌보다 더 밀랍으로 방부처리가 된 듯 하다. 마오쩌둥의 평가가 어떻든 그는 여전의 중국의 영웅이고, 혁명가로써의 공은 당연히 위대한 업적이기에 인정해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최근에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판한 마오쩌둥 평전을 필자는 읽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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