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

사회주의에 대해 음해하는 자들은 ‘사회주의는 가진자에 것을 뺐는 사상‘이다라고 이상한 잣대로 왜곡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은 가진 것을 뺏는 사상도 독재를 추구하는 사상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 집단이나 개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어떠한 견제세력 없이 흔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인민들 누구나가 일한 만큼 받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고 능력에 따라 일하며, 고도의 착취를 당하지 않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목표를 향해 이행되는 과도기적 단계다. 그 나머지 시간엔 문학을 읽고, 운동을 하고, 시를 쓰며 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다. 따라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추구했던 세상은 모두를 다 똑같게 만들지도 똑같게 하는 세상도 아니었다. 이론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0세기 사회주의 민족해방투쟁이나 혁명 당시,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세력들이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대 부르주아 세력들의 재산을 몰수했던 것은 절대로 이유없이 몰수한 것이 아니다. 가진자들은 자신들의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즉 그 시기에도 자본가라고 해서 무작정 몰수만 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든 국가를 유지하는데 있어선 돈이 필요하다. 근데 모든 부자들의 재산을 어떤이유없이 뺏었다는건 그냥 반공분자들이 만들어낸 피해망상적인 선전선동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오해를 하고있고, 한편으로는 매우 몰지각하다. 이게 다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반공주입식 교육과 미제국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때문이다. 지금같이 자본주의가 겨우 살아남은 세계에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yo 2019-05-12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해‘일까요? 사실 대충이라도(혹은 대단히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하고 있거나, 혹은 진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따위는 애시당초 중요치 않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울 수 있는 능력일 뿐인데요.

NamGiKim 2019-05-13 00:23   좋아요 0 | URL
모르거나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수꼴이 되어 흑화했거나 이것들 중에 하나겠죠.
 

CIDG(Civilian Irregular Defense Program) 계획

1960년대 초 미국의 존F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있던 군사 고문단의 수를 증강했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권의 군대를 지원했고, 베트콩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콩에 맞서 소수민족들을 포섭하는데, 그게 바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베트남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영어로는 montagnard 에데족, 참파족, 바나족)이라 불리는 고산족이었다.

베트남 역사를 보다보면 그곳은 근대까지만 해도 기존에 참파왕국의 존재하던 곳이었고, 베트남 사회하고는 좀 거리가 있던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쪽 영토가 베트남 영토로 편입된 것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남진정책을 하며 참파 왕국의 정복을 마친 18-19세기 쯤이었다. 따라서 19세기 프랑스가 점령했을때도 이를 분할통치로서 이용했었고, 마찬가지로 미국도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를 이용했다. 비슷한 예로 이라크 전쟁 당시 제국주의자들의 압잡이가 되었던 쿠르드족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가 물러나고 난 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중부고원지대를 베트남화 시키는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는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상황에서 중부고원지대에 들어간 것이 미국이었다. 남베트남과는 달리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그랬듯이 소수민족을 잘 포섭하여 해방전쟁에 잘 협력하도록 했고, 이대로 가면 중부고원 지대 소수민족이 베트콩에 협력할께 분명했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미국은 CIDG라는 계획을 실행하여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들을 포섭하여 베트콩에 맞서도록 군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베트남의 일부 소수민족들은 미국의 그린베레(Green Beret)와 마이크 포스(MIKE Force)팀에 합류하여 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미국이 이들을 설득했던 방법으로는 자치국 수립 혹은 자치권 부여를 주장했지만, 사실은 이들을 꼬득이기 위한 분할통치의 방식이었다. 물론 이들 중에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편에 서서 싸웠지만,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퍼뜨린 농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들은 피닉스 작전과 같은 대학살극에 참가하여 민간인을 학살했고, 해방전선 전사들의 목을 자르며 들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마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튼 이들은 미국에게 이용당했고, 쉽게말해 베트남판 간도특설대가 되어 베트콩들에 맞서 싸운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때 이들을 철저하게 버렸고,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말 그대로 사회주의 베트남에게 목숨을 빌어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러시아 제국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사 가게된 어린시절의 로자는 거기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5살이 된 로자는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가, 탄압받자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했다.

망명후 로자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공부했다. 그녀 그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혼 덕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활동한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있던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했다. 이는 당시 그녀가 민족주의에 대해 매우 경계했기 때문이다. 로자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아래 계급투쟁을 방해하고, 이게 결국 국가주의에 기반한 이기주의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로자는 1907년 베를린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자본의 축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사민당으로 활동했던 것도 이 시기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당시 로자는 독일의 빌헬름 2세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고, 대략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16년 풀려난 그녀는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실망 했다. 제2 인터내셔널에 있던 사민당들이 조국 방위라는 개념을 내세워 제국주의간의 영토전쟁 혹은 패권전쟁을 맹목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을 떠난 로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투쟁을 이어갔다. 이때 로자와 그들은 어떤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바로 스파르타쿠스단이다. 이때 로자는 다시 한번 독일 제국에 의해 체포되어 또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로자가 감옥에 있을 당시 1917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로자는 볼셰비키의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독재화를 우려하기도 했었다.

1918년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뒤,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혁명(1월 봉기)을 일으켰으나, 독일 사민당의 비겁한 배신과 독일 자유군단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로자는 체포당한다. 체포된 로자는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 어떤 병사가 휘두른 개머리판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어, 단결하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 Lai)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을 발췌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미라이라는 마을에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Charlie Company)가 진입했다. 미라이에 진입한 찰리 중대는 베트콩 소탕이라는 명분아래, 거기 있던 민간인들에게 묻지마 학살은 하기 시작했고,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촌에 진입한 미군은 켈리중위가 내린 명령인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쏴죽여라(Shoot Anything that moves)‘에 복종했고, 여자, 아이,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학살이 일어난 이후 미군은 이 미라이 학살을 철저하게 감췄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마을을 폭격했다. 그러나 1969년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을 Haeberle)은 자신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했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살에 참가했던, 폴 메들로라는 병사는 방송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방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중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중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아주 철저하게 규명되었다. 학살을 주도한 켈리 중위는 처벌받았고, 미군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져, 베트남전 반전운동이 보다 거세졌다. 공교롭게도 미라이 학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1969년은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NamGiKim > 호치민 평전 서평

호치민 평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