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해방 이후 미군정청에서 했던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누구인가‘ 라는 재목을 달고, 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여론조사에서 단연 1위를 기록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몽양 여운형은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900년 14살이 된 몽양 여운형은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년 뒤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당으로 옮겼고, 흥화학당을 나온 몽양은 돈을 벌기위해 우무학당에도 들어갔으나 일본인에게 넘어가자 나왔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에게 먹히자, 몽양 여운형은 1906년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에 나서며 애국계몽운동에도 참가하여 집에 있는 노비문서를 불 질러 가지고 있던 노비 전부를 해방시켰다.

그러던 중 동생 여운홍과 함께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된 여운형은 1910년 이후 중국으로 갔고, 1910년대 여운형은 중국 남경에 있는 금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18년 여운형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내어 강대국들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3.1운동에 불씨를 제공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그 해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일본에가서 고위급 인사들에게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

1920년대 초 여운형은 고려 공산당에서 활동했고, 김구와 더불어 노병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1922년 모스크바로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은 중국의 국공합작에도 힘을 썻고, 손문, 장제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하고도 교류했다.

그러던 1929년 7월 상해에서 체포된 여운형은 1930년 법정에서 3년형을 받았고, 대략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1932년에 풀려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있으면서 백두산 탐방, 이순신 장군 묘소 정돈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체육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였다. 축구, 야구, 수영 ,체조, 권투, 달리기등 싫어하는 운동 종목이 없을 만큼 여운형 선생은 운동을 좋아했다. 1936년 말아톤 선수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자, 가장 먼저 일장기를 지워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물론 그 바람에 조선중앙일보는 폐간되었지만 말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몽양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예측했고,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키자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다. 1940년 일제의 회유책을 단번에 거부했고, 일제의 온갖 위협과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몽양 여운형은 국내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을 미리 대비했고, 1945년 8월 일본의 엔도 류사쿠 총감으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음으로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건준은 전국적으로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 해 9월 미군이 상륙하면서, 강제로 해산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로 찬반탁 논쟁이 불거지자 여운형은 미소공위를 지지했고, 1945년 11월에 창설한 조선인민당은 미소공위를 위해 헌신했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좌우익대립이 극심해지자 몽양 여운형은 우사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과 친일세력들로 부터 공격받았고, 1947년 3월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철회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테러에 휩쓸려 백주대낮에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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