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 판 다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데니스 도에 타마클로에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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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어떤 존재일까?

  생각나는대로 아프리카에 대해서 적어보자.

 

  하나의 대륙, 오랜 식민지, 흑인, 축구, 춤, 타잔, 에디오피아, 이집트, 리비아, 사하라 사막, 부시맨, 피그미,르완다, 소말리아, 민족학살, 에이즈, 절대 빈곤!

 

  대체로 아프리카에 대해서 내가 떠올리는 것들은 그다지 밝고 좋은 면들은 없다. 가난하고, 내전에 시달리고 무법천지이고, 왠지 문명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대륙! 태초의 신비를 간직한 조용한 대륙이라고 아무리 좋게 포장한다고 해도 우리들 눈에는 비문명의 땅, 야만의 땅일 뿐이다. 소말리아, 르완다, 이집트, 리비아 등 많은 국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국가들을 구별하는 것도 어렵다. 그냥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일뿐이다. 그 이름의 유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실제 땅 크기가 얼마인지도, 민족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몰라도 상관이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머릿속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것만이 아프리카의 전부이다. 물론 그것이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임을 알지도 못한다. 서구 열강에게 같은 착취를 당한 처지이면서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동지가 아닌 수탈의 대상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의문을 던지면서 아프리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고대에 어떤 국가들이 이 땅을 지배했는지, 어떠한 문명들이 이 땅에 존재했었는지, 민족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고, 오늘날 독립국들은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설립이 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지? 왜 그들은 지속적인 분열과 갈등에 휩싸여 있는지, 르완다에서처럼 인종 청소가 발생하는지, 왜 어린이 병사가 존재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절대 빈곤으로 몰아 붙이는지? 아프리카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살펴 보자. 이 책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위는 아프리카의 지도이다. 이 지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가? 아프리카 국가의 국경선들이 잘르 대고 그은 것처럼 대체로 반듯하지 않은가? 일반적인 국가의 국경선들은 강이나 산맥같은 자연적인 지형들로 인하여 구불구불한데 이상하리만치 아프리카의 국경선들은 반듯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지형지물들이 반듯하게 생겨서? 절대로 아니다. 아프리카 국가의 국경선들은 위에서 던진 현재 아프리카 대륙이 처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다. 아프리카 대륙이 속한 국가들의 국경선이 저렇게 네모 반듯한 것은 그들의 국경선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 독립을 하면서 여러가지 복잡하고 정치적인 그리고 국제역학적인 관계가 고려되면서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물론 부족간의 통합이라든지, 원주민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인종 청소와 같은 비극들이 아프리카에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이유이다.

 

  어쩔 수 없이 식민지들을 독립시켜야 했지만 그렇다고 서유럽의 국가들이 욕심을 버리고 회개한 것은 아니다.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 했다. 그러한 마음이 원조로, 혹은 친밀한 동맹관계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이 택한 것은 자기 입맛에 맞는 권력층의 형성이다. 그 권력층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하냐,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느냐는 물론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서유럽 국가들은 무자비한 독재자들을 선호했다. 그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와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그 무기들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폭력으로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책의 2/3는 이러한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각 국가들이 어떻게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되어 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워낙 많은 국가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2/3라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어보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이 직면한 정치적인,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만큼 다루고 있는 책이 없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다만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별점에 짠 것은 저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역사교과서 정도로 본다면 얼마나 지루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이 책은 아프리카의 고대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아프리카 역사를 그렇게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비판하면서도 저자 또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역사적인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현대사를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서인지는 모르겠다. 이 또한 이 책을 읽기가 지루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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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01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어본적이 있고요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는 책입니다. 추천 드리고 갑니다~^^

saint236 2012-01-01 23:00   좋아요 0 | URL
주목받지 못한 양서입니다. 반값에 판매할 때 낼름 집어 왔습니다.

차트랑 2012-01-03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받지 못한 양서'라는 말씀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많은 독자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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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는 맹자가 그의 왕도론을 전개할 때 한 말이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3리의 내성(內城)과 7리의 외곽(外廓)을 에워싸고 공격하지만 이기지 못한다. 에워싸고 공격을 하는 데는 반드시 하늘의 때를 얻겠지만,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못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굳고 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군량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 성을 버리고 간다. 이는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전쟁의 승패의 요건을 첫째 하늘의 때, 둘째 땅의 이득, 셋째 인화의 세 가지로 보았으며 각각의 순서를 天時<地利<人和로 본 것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리 기상과 방위, 시일의 길흉 같은 것을 견주어 보아도 지키는 쪽의 견고함을 능가하지 못하며, 아무리 요새가 지리적 여건이 충족된 땅의 이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는 이들의 정신적 교감, 즉 정신적 단결이 없으면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의 결론은 분명하다.  


  “고(故)로 말하기를, 백성들을 국경 안에 머물게 하는 데는 영토의 경계로써 하지 않고, 위를 튼튼히 하는 데는 산과 골짜기의 험함으로써 하지 않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는 데는 무력으로써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道)를 얻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많고 도를 잃은 사람은 돕는 사람이 적다.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친척까지 배반하고, 돕는 사람이 많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천하(天下)가 나에게 순종한다. 천하가 순종함으로써 친척이 배반하는 것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민심을 얻지 못한다면 필패라는 말이다. 
 

  십자군 전쟁2권을 읽으면서 내내 맹자의 말이 생각이 났다. 1세대 십자군이 막강한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성지를 탈환하여 십자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천시가 있었기 때문이며, 성채라는 지리가 있었기 때문이요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분열과 광신이냐 맹신이냐, 아니면 독실한 믿음이냐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하나로 통일된 지도력 즉 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 어느 하나만 갖추어도, 특히 인화만 갖추어도 전쟁에서 패하지는 않을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으니 적진에 들어가 영토를 획득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2권은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의 삼박자가 십자군에서 이슬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업자가 아닌 수성자의 입장에서는 더 근신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으나 십자군 진영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평범 이하의 사람에게 권력이 이동하고 있으니 천시를 잃어버림이요, 평범 이하의 지도자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람들을 이리 저리 내몰고, 현지인과의 연대를 사소한 일들로 잃어버리고, 유럽과의 연대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니 인화가 깨짐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천시가 십자군 측에 있어서 보두앵 4세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혹은 나병에 걸렸지만 10년을 더 살았다면 십자군 국가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안타까운 종말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천시와 인화를 잃어버린 십자군에게 남은 것은 오직 지리뿐이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치아와 제네바 해군의 지원을 받기 유리한 항구 도시와 곳곳에 세워진 견고한 성채가 십자군에게 남겨진 최후의 보루이다. 단언컨대 누레딘의 등장과 함께 대폭 허물어졌어야할 십자군 국가들이 꽤 오랜 세월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살라딘이 등장하였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까지 꽤 애를 먹었던 이유도 순전히 지리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슬람 측에서는 누레딘과 살라딘 같은 걸물들의 등장, 적절한 시기에 퇴장하는 권력자들은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해주는 순전히 역사의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천시가 이슬람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한 갈갈이 흩어져서 반목하던 이슬람이 무력이든, 성전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슬람이 인화의 이점을 얻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슬람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지리인데 이 또한 오랜 세월 십자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절대적인 불리함에서 상대적인 불리함으로 바뀐다. 비록 성채를 운용하지 못하지만 공략법을 획득하고 파괴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의 양동작전을 통해서 해상에서의 불리함을 지상에서의 유리함으로 만회한다. 절대적인 불리함이 상대적으로 바뀌니 이제 남은 것은 천시와 인화 뿐인데 이것은 이미 이슬람 측에 넘어갔으니 십자군 국가의 몰락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십자군 전쟁은 2권으로 끝이 났다. 3권에는 살라딘의 최대 라이벌인 사자심왕 리처드가 등장하지만 천시도 지리도 인화도 모두 잃어버린 십자군 측에서 십자군 국가를 다시 건국한다는 것은 꿈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미 끝이 났고, 3권은 대국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하는 십자군 전투만이 기록될 뿐이다. 흔히 무사의 낭만으로, 살라딘 vs 리처드의 대결로, 로빈훗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3권의 내용은 그저 십자군 전쟁을 이대로 마무리 짓기 아쉬운 십자군 측의 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3권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다지 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십자군 국가의 몰락, 이슬람 측에서 보자면 빼앗긴 성지의 수복은 역사의 필연이기에 그다지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2권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대한민국은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고루 갖춘 곳인가 하는 점이다. 한동안 수출 중심 국가로 성장하던 시기에 반도형 국가는 우리에게 막대한 지리를 제공했지만 후진국을 벗어나면서(개도국이 되면서) 지리는 불리로 바뀌었다. 사실상 사방이 막힌 대한민국에서 의식의 세계화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계몽해야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미러중일의 4대국에 끼어 있는 지리(地理)는 지리(地利)가 아니라 오히려 지해(地害)로 변한지 오래다. 가변적인 요소로 천시와 인화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천시는 어떤가? 요 몇 년 간 벌어진 세계 경제 위기는 천시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인화뿐인데 이 또한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좌와 우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대통령마저 반쪽짜리 대통령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니 인화 또한 그다지 기대할 만하지 못하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소위 말해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그나마 있는 인화도 산산이 부숴뜨리기에 열심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잃어버린 국가의 운명은 몰락일 뿐이다. 과연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가? 역사책을 한권씩 읽을 때마다 깊은 시름이 하나씩 더 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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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 - 분노와 콤플렉스를 리더십으로 승화시킨 정조
김용관 지음 / 오늘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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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이산! 

  요 근래에 들어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는 상관없이 아버지 사도세자와 할아버지 영조의 비극적인 스캔들은 정조를 책과 드라마,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비운의 주인공으로 재발견되게 만들었다. 드라마 이산도 이러한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이서진과 한지민이라는 바라만 보고 있어도 흐뭇해지는 선남선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조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는 정조라는 인물을 친근하게 만드는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율에 좌우되는 드라마라는 특성상 역사를 상당부분 왜곡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단 이산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역사 드라마가 일정부분, 때론 상당 부분 역사를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의 역사적인 배경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드라마와 관련된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물론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여 판매부수를 늘리려는 얄팍한 상술이 없지는 않다.) 이 때 어떤 책을 선정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칫 잘못해서 역사적인 부분에서 드라마와 오십보 백보인 책을 선택하게 되면 안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저자가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꼭 그런 책으로 평가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저자가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꼼꼼하게 여러번 읽었다는 저자가 듣기에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역사서라기보다는 팩션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역사서가 일정부분 저자의 상상력을 가미하면서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고 해석해서 읽어야하기 때문에 팩션의 느낌이 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서가 팩션이 아니라 역사서로, 단순한 추정이나 소설이 아니라 합리적인 추론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입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실록은 물론이고, 당시 사람들이 기록한 여러 서적들을 동시에 읽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덕일씨의 책이 상당히 파격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적이 역사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저자는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꼼꼼이 여러분 읽었는지는 몰라도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이 상당히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철저하게 실록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지배층에게 유리하게 실록이 편집될 수도 있음을 감안한다면 실록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실록에만 의존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의도하지 않았지만 역사적인 부분들을 잘못 해석하여 책의 신뢰도가 많이 반감되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저자는 정조에 의한 홍국영의 퇴출에 대하여 아름다운 토사구팽이라는 말로 이렇게 적고 있다.  

  권력은 언제나 사냥개를 원하지 않는다. '시대가 다르면 하는 일도 달라야 한다.' 홍국영은 똑똑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둔했다. 그가 영리해서 그나마 군주와 헤어질 때를 너무 멋지게 헤어진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7년 동안 홍국영이 있어 집권이 가능했지만 이젠 헤어질 마당에서는 두 사람 모두 아름다운 이별을 연출한 것이다. 두 사람의 이별이 그저 토사구팽이라 치부하기에는 장면이 너무도 문학적이다. 그건 정조의 마음 그 깊은 곳에 부드러움 때문이다. 공자의 "논어"를 정밀하게 읽다보면 공자처럼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든다. 정조는 공자를 좋아했고 그의 말을 실천하려 노력했다.(p 118~119) 

  과연 홍국영과 정조의 헤어짐이 이렇게 아름다운 헤어짐일까? 홍국영은 정조를 위하여 기꺼이 물러나 줬던 것일까? 드라마라면 모르겠지만 역사적인 사실은 절대 아니다. 다음의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홍국영에 대하여 이렇게 등록되어 있다.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도정권(勢道政權)을 이루었으나 기반이 약해 곧 실각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낙춘(樂春)이다.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다. 이어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서명선(徐命善)·정민시(鄭民始) 등과 함께 세손(뒤의 정조)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76년 노론 청명당(淸名黨) 계열의 김종수(金鍾秀) 등과 연계하여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숙위대장을 겸임했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 금위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오영도총숙위(五營都摠宿衛)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모든 소계(疏啓)·장첩(狀牒)·차제(差除)를 총람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백관을 맹종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다.
  1778년(정조 2)에는 누이를 원빈(元嬪)으로 삼게 하여 정권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하여 핍박함으로써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다가 1779년 9월 정조의 은퇴 권유로 조정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0년 왕후 독살기도에 연루되었다 하여 정민시·서명선·유언호(兪彦鎬)·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江陵)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실의에 잠겨 지내다가 34세로 병사했다.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인 송덕상(宋德相), 민우수(閔遇洙)의 문인 김종후(金鍾厚) 등의 지원을 받아 노론 청류(淸流)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나, 전횡을 일삼고 나아가 스스로 외척이 되어 독주함으로써 여타 외척세력 및 노론·소론·남인 모두와 대립했다. 특히 정조의 준론탕평책(峻論蕩平策) 구상 추진에 장애가 되면서 제거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정조가 세자 시절 그의 기지로 위험에서 벗어났던 적이 있어서 왠만한 그의 잘못에도 눈을 감아 주었지만 도가 지나친 그의 행동과 권력욕은 그를 역신으로 만들었고, 정조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정조가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어서 물러나라는 권유를 했고, 홍국영도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밀려났으며, 그 후에도 권력에 대한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몇년 만에 병사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아름다운 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드라마 작가나 할 법한 일이 아닐까? 

  게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정사에 기록된 부분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야사에 기록된 부분을 끌어 당겨 인용하면서 그것이 마치 진실인양 호도한다. 그 야사라는 것도 오늘날은 물론이요 당시에도 해석이 분분한 것도 많고 웃기지도 않는 일이라며 음담패설로 치부하는 것들도 있다. 당시 사람도 믿지 않았던 것을 가져다가 그것이 사실인양 말하는 것도 역사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ex 경종이 후사가 없는 것을 장희빈의 만행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한 가지 더! 제목에 CEO와 경영이라는 단어가 꼭 들어갔어야 하나 싶다. 책의 내용은 CEO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경영은 더더욱 상관이 없다. 중간 중간에 정조의 리더십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부분들을 보고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차라리 경영이 아니라 역사책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저자가 역사적인 사실을 충실히 다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책이 제목도 "정조: 미완의 꿈, 사라진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정조를 분노와 콤플렉스라는 단어로 해석한 것은 꽤 참신한 시도이다. 그렇지만 그 참신한 시도를 적절하지 못한 접근 방법과 분류, 제목으로 인하여 묻힌 것이 아쉽다. 별 두개를 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조에 대하여 재미있게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기를 권한다. 다만 어느 정도는 감안하고 읽기를 바란다. 

  ps.엘신님께 받은 책이다. 엘신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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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1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 정조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경영과 연결시키다니요.. 저는 도저히 어려워서 리뷰조차도 못 읽겠습니다 ㅠㅠㅠ

saint236 2011-11-19 23:33   좋아요 0 | URL
정조와 사도세자! 정말 묘한 구석이 있는 부자입니다. 팔색조처럼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거든요.

2011-11-19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1-11-19 23:32   좋아요 0 | URL
옙 우체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부쳤습니다.

yamoo 2011-11-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자게서가 아니었군요! 자게서인 줄 알았는데...

saint236 2011-11-19 23:32   좋아요 0 | URL
자게서로 분류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자게서보다는 역사서에 더 가까운 것 같네요.

transient-guest 2011-11-22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짝 자극적인 제목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부제까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당위론적인 내용, 결말을 위한 역사 짜집기 인용이 넘칠 것 같습니다.

saint236 2011-11-22 10:23   좋아요 0 | URL
심심풀이로 읽기는 괜찮죠. 정사와 야사를 묘하게 혼합해 놓았달까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모더니즘+제국주의+몬스터+종교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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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컵에 물이 절반이 차 있다. 이것을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반 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반이나 있는 것일까? 같은 현상을 보고 해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굳이 E.H.Carr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질문을 조금만 더 쉽게 바꾸어 보자. 역사가 왜 재미가 없는가? 우리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역사를 무엇으로 분류하는가? 암기 과목으로 분류한다. "역사=암기과목" 이 얼마나 넌센스고, 얼마나 역사에 대한 무지인가?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도 시대에 맞추어 외워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능에서 비중이 대폭 낮아진다면 굳이 왜우려고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국영수 공부 더해서 거기에서 몇 점 더 맞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암기하려고 골머리를 썩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일테니 말이다.  

  과학을 암기 과목으로 이해하고 과학 수업 시간에 과학 공식들을 달달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혹은 수학 시간에 수학 공식들을 달달 외운다고 해보자. 그것으로 과학 공부와 수학 공부가 끝이 나는가? 아니다. 과학과 수학은 공식을 가지고 응용하는 논리적인 단계들이 더 중요하다. 공식을 외우는 것은 응용을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일 뿐이다. 과학이 재미있고, 수학이 재미있는 이유는 열심히 외운 공식들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도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외우고 살펴보는 것은 철저하게 역사의 흐름을 해석해 내기 위함이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와 재미는 해석과 현실에의 적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참 좋아한다. 고등학교때 만났던 역사 선생님 때문이었다. 자칫 재미없을 것 같은 국사를 참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지금 보면 맑스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간단하게 적용한 것 같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의 정치 문란은 백성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백성의 고통은 세로운 왕조 창립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신하들의 힘을 깎아야 하는데 신하들의 힘은 사병과 재산에서 유래한다. 왕은 신하들의 사병을 깎기 위하여 노예를 해방하고, 경제 개혁을 실시했으며, 불교와 유교라는 정신적인 가치들을 도입했다 뭐 이런 식이다. 경제와 군사력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국사의 흐름을 해석하면서 중간 중간에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니 안 외우려야 안 외울수가 없고,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역사 해석의 재미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엘리트들이 공부해야할 필수 과목 중에 꼭 끼어 있는 것이 동양에서는 작문과 역사, 서양에서는 웅변과 역사이다. 논리적으로 시민들을 설득해야 하느냐, 아니면 왕에게 정책을 제안해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에 웅변과 작문으로 나뉘지만 양쪽 모두 역사가 필수 교양과목임을 분명히 했다. 역사를 통해 세상과 정세를 해석하는 힘을, 그리고 현실에 적용하는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대부분 역사를 재미없는 암기 과목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 접근 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 대부분 역사 서적의 접근 방식은 통사적인 접근 방식이다. 어느 시점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서술하는 통사적인 방식은 문제의 흐름을 침해하지 않는 대신에 역사를 암기 대상을 만들어 버릴 소지가 있다. 통사적인 접근 방식에 덧붙여서 이 책에서 시도하는 주제적인 접근방식을 덧붙인다면 역사를 훨씬 더 재미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접근방식이 꽤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유도 흔히 접하던 통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류의 다양한 역사를 다섯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해석해 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고, 그의 날카로운 시각에 경의를 표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사=서양사로 보는 한계를 발견하며 이렇게 샤프한 사람도 결국 이 한계를 넘지 못했구나하는생각에 씁쓸해진다. 일본이 세계사에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는 잠자고 있었다는 그의 생각은 세계사=서양사라는 프레임에서 단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별 다섯개 중에 네 개를 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사를 즐겁게 접하고 싶은 고등학생들, 혹은 대학생들의 입문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게 외울 것도 없으니 그저 가볍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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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투퀴디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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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이름에는 매우 친숙하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민주주의의 시초가 된 아테네, 그리고 강력한 규율에 의해 다스려지는 군사 국가 스파르타(우리에게는 스파르타식이라는 말과 영화 300을 통하여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양대 산맥이다.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배경 지식으로 함께 읽어 둘 책이 있다. 역시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이다. 여기에 갈라파고스에서 나온 "살라미스 해전"을 같이 본다면 금상첨화라고 하겠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마라톤 전쟁과 살라미스 해전(300은 이 해전의 바로 전 육상 전투이다)으로 대변되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똘똘 뭉쳤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 지은 다음 분열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한 26년의 오랜 내전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내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이 그리스 vs 비그리스의 구도였다면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vs 그리스(델로스 동맹 vs 펠레폰네소스 동맹)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로 해군에 올인했던 아테네는 대 페르시아 동맹의 맹주가 된다. 강력한 군사 대국 스파르타조차도 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라는 환경에서는 아테네를 따라가기 어려웠다. 농경과 중무장 보병을 중시하는 스파르타는 한 곳에 정착하여 안주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바다로 뻗어나가 적극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교역을 중시하는 아테네는 도리아 민족과 이오니아 민족성의 차이뿐 아니라 해안도시와 내륙도시라는 환경의 차이에도 기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마친 후 그리스의 세련 판도 형성은 계속되는 페르시아의 위협과 매우 밀접하다. 바다건너에서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고 있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절대적 우위에 있는 해군력이 매우 중요하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 해군력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테네이고 아테네는 이러한 자국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그리스의 절대 맹주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의 비상은 조만간 파탄을 맞게 된다. 페르시아의 위협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십분 활용하여 맹주가 된 아테네인만큼 페르시아의 위협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순간이 오면 질시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테네의 경쟁 상대였던 고린트와 소속 동맹 펠레폰네소스의 맹주와 소속 도시들은 아테네의 식민 정책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지켜 보게 되었다. 그렇게 의심이 쌓여 가다가 어느 순간 아주 작은 사건(코린트의 식민 도시가 코린트와의 불화로 인하여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탈퇴하여 아테네와 동맹을 맺은 사건, 26년간 그리스를 전란에 몰아 넣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은 아니었다)을 계기로 26년 동안 그리스 전역과 시켈리아, 마케도니아, 페르시아를 아우르는 대형 전쟁이 시작된다.  

  이 책은 이렇게 발생한 전쟁에 자세한 경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투퀴디테스도 자국의 몰락이 마냥 안쓰러웠는지 26년의 전쟁 중에서 그리스가 몰락하기 시작한 21년까지의 역사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일까 책을 한참 읽다가 결말을 보지 못하고 마무리한 듯한 찜찜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많고, 또 연설문도 기록되어 있고, 지중해 전체의 사건을 동시 다발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지리와 지명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어렵다. 어떤 분은 이긴 것이 아테네인지 스파르타인지도 헷갈릴 정도라고 하니 어느 정도로 복잡한지 충분히 상상이 갈 것이다.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와 국가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얽혀 있기 때문에 전쟁의 발생 원인과 아테네의 패전의 원인,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들을 명확하게 몇 가지로 추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자 적어본다. 내가 대단한 역사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학 전공자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인 분석은 아니다. 다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분석해 보는 것일 뿐이다. 

  첫째 아테네의 몰락은 제국주의적 태도의 한계에 기인한다. 민주주의의 대명사 아테네의 정체는 말은 대명사이지만 실제는 제국주의요, 소수의 이익을 위한 교묘한 과두제라고 할 수 있다. 과두제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아테네의 정체가 과두제라?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아테네의 정체는 과두제가 맞다고 생각한다. 근대 유럽의 식민지 정책처럼 식민지는 모국 아테네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아테네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시민들 또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유력자들의 거수기 역할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다만 이 사실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서 민중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 순간에도 유력자들은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력자들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하여 끊임없이 외부에서 부를 끌어와야 했고, 가장 쉬운 방법으로 제국주의 노선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는 초기에는 무리가 없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 수록 식민지 획득에 있어서 치열한 경쟁이 발생하게 되고, 이 것은 식민지 획득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커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되면서 식민지에서 모국으로 유입되던 부는 역전되어 모국에서 식민지로 돌아가게 된다. 다만 그 부의 형태가 군사력과 전쟁이라는 형태로 돌아가 더 큰 비극과 황폐화를 불러올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제국주의는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하게 된다. 아테네의 몰락은 이러한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둘째 무리한 욕심으로 인하여 몰락했다. 아테네 몰락의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전쟁 후반기 시켈리아 전투라고 하겠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이기지 못한 아테네는 시켈리아 원정을 무리하게 감행했고, 여기에서 철저한 실패를 맛본다. 패전은 예기치 못한 불운이 아니라 예견되었던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들은, 그리고 일부 유력자들은 무리한 욕심을 부리고 시켈리아를 먹어치우려다가 배탈이 나고 말았다. 만약 이 원정이 없었더라면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그렇게 쉽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아마도 전쟁의 주도권을 놓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셋째 공동체 의식의 쇠퇴이다. 지금까지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던 미덕들이 기피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병역을 피하기 위하여 노예를 사서 대신 태운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중산층이 몰락하여 빈민층으로 전락해 버렸다. 고대 로마도 결국 중산층이 몰락하여 넘어지지 않았던가? 

  고대 그리스 몰락의 모습들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을 본받아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국익이라는 말로 잘 포장하여 해외로 군인을 파병하고 있다. 무리한 욕심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진행시키고 있다. 4대강이라는 거대한 먹이는 아마도 대한민국을 국가적 배탈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끌 것이다. 중산층은 이미 몰락하고 있고, 삼각형의 사회구조가 아니라 8자형의 구조로 이행하고 있으며, 조만간 남미형이 이원화 구조로 재편될 것이라는 비극적인 예견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조들을 이곳저곳에서 보게 된다.  

  중국 속담에 "끝나지 않는 잔치란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들도, 아무리 좋은 시절도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끝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빨리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네테인들이 간과했던 역사적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제국은 몰락했다. 그리고 그들을 몰락시킨 스파르타도 머지않아 몰락했다. 그 뒤를 이러 등장한 수없이 많은 제국들도 결국은 몰락했다. 고전을 통하여, 특히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이 이것이다.  

  끝나지 않는 잔치란 없다는 역사적인 진리 앞에서 최대한 겸허해지고,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에만이 역설적이게도 잔치의 끝을 유예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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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9-23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박광순 역'으로 감명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이 책도 사두긴 했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saint236 2011-09-23 14:39   좋아요 0 | URL
저는 박광순 역은 읽지 않았는데 모두 읽어 본 사람들은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훨씬 매끄럽다고 하네요.

transient-guest 2011-10-27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병희 선생님의 버젼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최근에야 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기회되는대로 이분께서 번역하신 것을 모두 읽어볼 생각입니다.

saint236 2011-10-27 10:36   좋아요 0 | URL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이 깔끔합니다. 읽기도 편하고요. 역사는 아직 못 읽어 봤고요 페르시아 원정기는 오늘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