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훔친 첩자 표정있는 역사 2
김영수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 이 말은 알고 있을까?

  "정보는 국력이다."

 

  이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잘 모르겠다면 이 말은 또 어떨까?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이젠 좀 알겠는가? 리뷰의 제목은 지금 국정원의 표어이고, 정보는 국력은 1999~2008년에 사용되던 표어이며, 마지막 것은 1998년까지 사용되던 표어이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은 무시무시하던 중정 시절의 표어이며, 다음은 안기부, 국정원에서 사용되던 표어이다. 사실 중정, 안기부, 국정원 다 같은 기관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국정원이 방향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어는 "자유와 진리를 위한 무명의 헌신"이요, 국정원의 속성과 행위 양식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가 아닐까?

 

  007시리즈, 본 시리즈, 홍콩의 마담 시리즈 등등 스파이 이야기는 주요 영화의 모티브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스파이 영화를 하나 꼽자면 007 시리즈 5탄이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007이 있지만 내가 확실하게 본 가장 오래된 007이기 때문이다.(참고로 작은 아버지가 빌려다 놓은 비디오를 몰래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10살 때쯤인가?)

 

 

  핸섬한 얼굴과 탄탄한 근육질의 몸, 스마트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의 남자 주인공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으니 어떤 여자를 만나도 몇 초 안에 꼬실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스파이 주변에는 온갖 첨단 기술로 무장된 차와 도구, 무기들이 있고, 얼굴과 몸매 모두 착한 미녀들이 수두룩하다. 주인공은 온갖 어려움에도 임무를 잘 완수하고 얼굴과 몸매가 모두 착한 여주인공과 로맨틱하게 은둔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를 보고나서 "밤밤밤밤 밤밤밤밤 빠라라 빠라라 빠밤"의 입소리에 맞추어서 총을 쏴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지 않을까 싶은데. 본 시리즈도 현대화 되긴 했지만 이 도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화가 그리고 있는 스파이와 현실의 스파이는 너무나 다르다.

 

  음지에서 일하고, 무명의 헌신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스파이란 절대로 양지로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대단한 공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사실을 알뿐이다. 그들은 절대로 양지로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비록 그들이 현역에서 물러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만약 양지로 나오는 순간 그들은 이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생각해 보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얼굴과 정체를 알고 있는 스파이가 존재하는가?

 

  이런 연유로 역사에 수없이 많은 스파이들이 존재했지만 그 이름을 남긴 스파이는 거의 없다. 만약 스파이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면 그는 실패한 스파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하지만 역사의 그 어디에도 이름 석자 남김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스파이의 슬픈 운명이다. 이런 스파이에 대해서 없는 역사 기록을 뒤져서 그들의 삶을 대략적인 윤곽이나마 파악하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다. 결코 쉽지 않았을 작업이지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작업이며 꽤나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책을 읽어보면서 스파이에 대해서 이렇게 끈질기게 파고들어간 책은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스파이가 존재했는가?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에 스파이가 존재했었고, 체계적으로 스파이를 키우고 운용하는 병법서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보아 동양에서는 꽤나 오래전부터 스파이가 존재했다. 전란의 시대가 만들어낸 부산물이 스파이학이 아닐까? 그렇다면 결코 중국의 문화로부터, 그리고 전란의 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 고대사에도 스파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우리나라에도 꽤 오래 전부터 스파이가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역사서에 정식으로 기록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니 우리나라 스파이의 역사도 대략 1500년 정도 된다고 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적국에 침투하여 순수하게 군사 정보만 수집하기도 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상업을 하면서 정보 수집을 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불법을 연구하러 오가는 길에 스파이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런 노력들은 그들의 조국에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며, 정책 결정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이들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과거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정보통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고 한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신 분들은 자신이 혹은 자신들의 측근이 보안사 혹은 기무사 출신인 경우가 많다. 정보를 틀어 쥐어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각 언론사를 틀어쥐는 이유도 동일하다. 그러다보니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모든 어두운 방법들도 동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항상 도마에 오르는 것이 국정원이 아니겠는가? 정보 기관으로서 중립을 지키고 제 자리를 찾는 것이 국정원이 나아가야할 바른 길이 아닐까? 국정원이 다시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시녀 기관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것은 간첩, 첩자라는 용어이다. 저자는 이 용어는 가치중립적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군사 정권에 이해서 이 용어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라 주장한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다. 스파이라는 말은 왠지 있어보이고, 로맨틱해보이고, 영화같아 보이지만 간첩이나 첩자라는 말에서 음침함을 먼저 떠올린다. 이렇게 용어에서부터 혼선을 빚으니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을리 없다. 스파이라는 말에서부터 자유로우니 중국과 한국에서 첩자를 이르는 말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다. 장구하고도 활발했던 첩자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최대 갑부 역관 표정있는 역사 1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새로운 접근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서는 중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영웅주의적인 접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김영사에서 내놓은 표정이 있는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역사를 훑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을 가지고, 그것도 평범한 집단을 가지고 역사를 풀어나간다. 아니다. 평범한 집단이라기보다는 지금가지 무시되어온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역관, 후궁, 첩자 등등 역사의 전면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라져간 이들을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오는 작업이기에 어렵지만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출판사에서 꽤나 신경을 쓴 것 같다. 대중 역사학자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이덕일씨를 첫번째 작업의 주인으로 선택했으니 말이다. 실은 나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가 이덕일이라는 이름을 보고 구입을 했다. 막상 읽어보니 꽤 재미있어서 시리즈 몇 권을 더 구입해서 보고 있다. 책 내용도 쉽기 때문에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고등학생이 읽어도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역관! 우리는 흔히 역관을 단순히 통역사 정도로 생각을 해왔다. 조선시대 역관이 양반 계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의 전면에 이름을 올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덕일씨의 말대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담당했던 부분들은 그저 통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선이 세계와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통역은 물론이거니와 공무역, 사무역까지도 담당했었단다. 당연히 역관들은 갑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쌓은 부를 가지고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조선에 유입하여 계몽하는 창구가 되기도 하였고, 신문물을 접한 지식인으로서 잠들어 있는 조선을 깨우기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기도 하였다. 역관들 중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바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어도 조국의 이익을 지켜낸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 시대의 역관은 오늘날로 치자면 외무부 소속 실무 담당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시다. 누구냐고? 바로 이 분이시다.

 

사진 출처: 오마이 뉴스

관련기사: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4822

 

   한미 FTA 당시 우리나라 통상 교섭본부의 대표였으며 나중에 통상 교섭본부장이 되신 분이다. 그리고 지금은 강남구에서 정동영과 상대하여 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신 분이다. 촛불 집회 당시 분노한 국민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자기 계정의 트위터가 폭파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세간에 위대하신 이름을 당당하게 드높이신 분이다. 왜 갑자기 이 분이 생각이 났는가?

 

  위키리크스를 통하여 한미 FTA당시 그의 태도가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적이 있었다. 기사는 위에 링크를 걸어둔다. 그는 한국이 FTA 교섭대표로 참석하여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대변했었다. 한국측의 교섭 전략을 미국에 그대로 알려 주었으며, 처와대에서 내린 훈령마저도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 공무원의 신분이었으나,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대변했던 것이다. 청과의 국경 분쟁시에(당시 청의 황제는 강희제였다.) 김지남이라는 역관은 청의 사신을 대면하여 철저하게 조선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조선의 의견대로 국경을 정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같은 계통에서 비슷한 일을 하였지만 왜 과거의 어떤 사람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현대의 어떤 사람은 자국의 이익을 무시했던 것일까? 그러면서도 왜 어떤 사람은 역사의 전면에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어떤 사람은 FTA를 반대했던 사람과 붙어서 이겨 국회 의원이 되어서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비단 김종훈 뿐이겠는가? 그 외에도 한미 FTA와 관련되어 청와대의 훈령을 무시하고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 사람들이 더 있다. 심지어는 김현종 통상교선본부장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죽도록 싸웠다고 당당히 선언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것이 일반인에게 공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더 가관은 조병제 외통부 대변인의 말이다.

 

  "위키리크스가 다량의 문서를 유출하고 그것을 공개한 것은  기본적으로 무책임하고 부적절하다. 불법적으로 유출-공개된 문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대응을 하지 않겠다."

 

  외통부의 입장은 한마디로 위키리크스의 문서를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이니 해당자가 아무리 죄가 있어도 일체 대응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김종훈과 김현종을 비롯한 외통부의 관리들이 자국의 이익을 팽개치고 청와대의 훈령을 무시하며 미국을 위하여 싸운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원래 밝혀지지 않을 것인데 불법적으로 밝혀진 것이니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다. 과거 삼성 X파일과 논리도 입장도 똑같다. 그렇다고 진실이 가려지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보면서 그 분이 생각난 것이고, 앞으로 그 분을 보면서 청와대의 훈령을 무시한 분이 국회의원으로 박근혜에게 어떻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다. 사족이지만 국회의원 중에 종북이 이슈로 떠올랐는데 개인적으로는 종북보다 종미(뼛속까지 친미가 종미가 아닌가?)가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된다. 종북은 실체는 없지만(고작 실체라는 것이 조갑제의 종북이라는 책이 아닌가?) 종미는 여러 곳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자국 대통령의 훈령을 무시하고 교섭 상대국의 이익을 위해 싸워주는 종미에 대해서 청문회를 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기록된 조선 시대 역관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뼛 속까지 친미인 이 시대의 역관들 때문이리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2-08-17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종훈 같은 사람에게 딱 적용되어야 하는 죄목은 반역죄라는 거죠. Treason. 동맹관계나 협상을 떠나서 국가중대사의 기밀을 상대방에게 넘기고 나아가서 상대방을 위해 일을 했으니 말입니다. 쓰고나니 간첩죄도 추가되네요. 감옥에서 사색하고 있을 x가 국회의원이라니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러니 - 인지 파라독스인지 알 수가 없네요. 정말이지 강물이 거꾸로 흘러가는 가카의 치세답습니다.

saint236 2012-08-17 10:47   좋아요 0 | URL
불법으로 획득한 정보는 죄가 있어도 무대응으로 일관한다는 외통부의 입장이 더 웃깁니다. 앞으로도 이런 사람들 참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2-08-19 05:51   좋아요 0 | URL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견찰이 수사는 사건들 중 과연 몇 개나 송치될 수 있을까요? 아니 옷벗을 검사들이 수두룩 하겠는데요. 미국 변호사협회의 윤리규정을 적용하면 변호사도 못해먹을 인간들 투성이거든요 견찰출신은. (손이 떨려서 자꾸 오타가 나네요)

saint236 2012-08-19 12:24   좋아요 0 | URL
그냥...자기들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 다보탑의 돌사자는 어디로 갔을까?
혜문 지음 / 작은숲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MBC에서 2006년 4월에서 2007년 7월인가까지 대략 1년을 조금 넘게 방영했던 방송 중에 느김표: 위대한 유산 74434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 해외로 빼돌려진 문화재가 74434점이나 되는데 이것을 다시 환수하기 위한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프로그램이다. 당시 위대한 유산 74434는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와 조선왕조 실록의 오대산 사고본을 되찾아 왔다.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는 국민 성금을 모아서 일본에서 돈을 주고 사왔으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반환을 받아 왔다. 당시 느낌표: 위대한 유산 74434와 문화재청은 온갖 폼은 다 잡아가면서 자기들이 이룩한 성과를 잘 포장했지만 정작 이 일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은 배제하는 의도적인 잘못을 저질렀다.(참고로 이 일에 대한 비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던 때는 프랑스로부터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는 일(반환이라고 해야하는지...)과 맞물려서 우리나라의 문화재 중에서 해외로 빼돌려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다. 그래서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일본에서 다시 찾아 오는 일에 기꺼이 성금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느낌표: 위대한 유산 74434를 통해서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당연히 감사한 일이지만 마냥 감사할 수만은 없는 것이 제대로된 설명과 이해를 구하지 않고 애국주의적이며 감정적인 접근에 치우쳐서(아마도 예능 프로그램의 한계때문인 것 같다.)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헤외 반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이 과정 속에서 문화재 환수를 위하여 많은 희생과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의 맥이 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감상적이고 애국적인 접근을 하기에 앞서서 어떤 경로로 우리 문화재가 반출되었는지,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문화재는 어떤 경로로 해외로 반출 되었는가? 첫번째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강탈 당했다. 임진왜란이라든지 병자호란, 혹은 개화기의 외국의 침략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수많은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느낌표를 통해서 환수된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라든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외규장각도서는 이렇게 외세에 빼앗긴 사례이다.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이런 과정을 통하여 강제로 외국으로 빼돌려졌다. 둘째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뇌물로 바쳐진 케이스이다. 이런 경우는 당시 국내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뇌물로 외세에 자발적으로 갖다 바친 경우이다. 대표적인 예가 핸더슨 컬렉션인데 소설 꺼삐딴 리의 모티브가 되는 핸더슨 컬렉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누구에 의해서 어떤 물건이 해외로 빼돌려졌는지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우리 문화재를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 일단 외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문화재를 환수하기 위하여 취하는 대부분의 노력은 국민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일이다. 국민들의 마음에 애국이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공론화를 시키는 경우인데 이런 경우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복잡하게 만들기 쉽다. 한 예를 들자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사용되었던 칼이다. 나도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알게 된 일인데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칼이 일본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에게도 한국에게도 매우 껄끄러운 존재인데 그러다 보니 이 칼에 대한 처리도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다. 만약 정부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백이면 백 "어떻게 저 칼이 저렇게 보관되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일본이 대한민국을 무시하는 처사이다."라면서 애국이라는 국민적인 감정에 호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하건데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외교라인을 중심으로 다방면의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선 국왕의 갑옷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면 무상으로 돌려 받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돈을 주고 사오든지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것도 어렵다면 외규장각 도서의 경우처럼 장기적이며 영구적인 대여를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잃어버린 문화재를 추적하는 국가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언제까지 개인들에게, 민간 단체에게 이 막중한 임무를 맡겨둘 것인가? 이것은 국가의 직무 유기이다. 마지막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가 병행되어야 한다. 해외로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자발적으로 외국에 문화재를 뇌물로 가져다 바친 사람들이 꽤 많은데 이들이 오늘날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민족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를 자발적으로 해외로 반출시킨 이들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며, 어떤 것들이 있는지 대략 알려진 것만이라도 대중에게 공개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느낌표: 위대한 유산 74434와 같이 단기적이고 흥미 위주의 단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주위를 둘러 보면 빼앗긴 문화재가 참 많다. 다보탑의 돌사자도 사라져 버렸고, 미군에 의하여 조선 국왕의 옥새도 밀반출 되었으며, 가야와 신라의 토기들, 고려의 청자들도 이런 저런 이유로 외국을 떠돌고 있다. 과거에는 먹고 사는 것에 치여서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지지 않았는가? 국가의 예산을 땅파고, 도로 건설하고, 강바닥에다 쏟아버릴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문화 유산을 되찾아 주는데 일정 부분이라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외국을 떠도는 문화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이 시대의 간송들에게 감사와 함께 박수를 보낸다.

 

  문화재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을 가르쳐 줌에도 별점에 박한 이유는 순전히 글솜씨에 있다. 물론 이 책을 쓰신 혜문 스님이 전문적인 글쟁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면 글솜씨에 대한 평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평점이 박한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에서도 곳곳에서 애국이라는 국민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글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때놓고는 중고등학생들이라면 한번쯤은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인가? 공유사이트에서 "디스트릭트 9"이라는 영화를 다운받아서 봤다. 머리가 복잡해서 아무 생각없이 SF 영화를 보고 머리나 식히자는 생각에 영화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디스트릭트 9이라는 영화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개봉한지 한참 지난 영화였고, 포스터도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편이 아닌지라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스킵 신공으로 봐야겠다면서 다운을 받았다. 그런데 실수를 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의 내용이야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자세히 적지 않겠지만 이 영화는 SF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SF가 아닌 인간 사회를 고발하는 영화다. 외계인이라는 특별한 생명체를 디스트릭트 9에 몰아 넣고 접촉을 금하는 모습에서 가장 먼저 독일의 게토가 연상이 된다. 비단 독일의 게토뿐이겠는가? 인류 역사상 인종에 따라서, 국가에 따라서, 출신 지역에 따라서, 혹은 건강의 유무에 따라서 편가르고 상대방을 박멸해야할 해충 정도로 여기게 만들 것이 한두번인가?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통합과 설득의 리더십을 자처하며 국민들을 기만하는 독재자들 또한 한둘이던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 또한 설득과 통합의 리더십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억압과 갈등, 분열을 통치 기술로 삼고 있지 않는가? 좌와 우를 나누고, 꼴통 보수와 종북 좌파를 나누고, 색깔 논쟁을 벌이며, 영호남을 나눈다. 영남은 절라디언을 외치고, 호남은 경상도 문딩이를 외친다. 어버이 연합은 어린 노무자식들이 싸가지 없다면서 까스통을 들고, 젊은이들은 "미친 노친네들"이라면서 까스통 할배를 비난한다. 언론은 이런 갈등을 부추기고 있으며, 정부는 소통하겠노라 고개를 숙이면서도 명박산성을 쌓는다. 그리고 촛불을 든 사람들을 자기 똘마니들을 시켜서(영(등)포라인, 불법 사찰을 피하려면 이정도쯤의 자기 검열은 필요합니다. ㅎㅎ) 사찰하고 고소한다. *찰과 *원은 충실하게 고소하는대로 다 받아 준다. 갈등은 키우고 설득은 포기하면서 나누어 지배하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이덕일의 책은 재미있다. 왜 재미있는가? 첫째는 그의 글솜씨가 대중이 읽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학자들처럼 딱딱하게 써버리면 읽기도 전에 질려 버릴텐데 이덕일의 글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둘째 그의 사관은 참신하다. 모든 사람이 A라고 말할 때 과연 A일까 이렇게 보면 B일 수도 있지 않은가라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카더라는 의문이 아니라 사료에 근거해서 하나하나 논리를 쌓아가는 의문이기 때문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셋째 그의 글은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카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말자.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자.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진단하고 해답을 내리는 것이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이덕일은 여기에 충실하다. 그렇다고 아마추어처럼, 혹은 시사 평론가처럼 오늘날의 상황을 잔득 늘어 놓고 과거가 어떻고 하지 않는다. 그냥 과거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서 논평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오늘의 현실이 숨겨있다.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유성룡(설득과 통합의 리더)"라는 제목대로 유성룡의 리더십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유성룡의 시대는 조선에게 매우 불운했던 시기이다. 오로지 자기 살길만 챙기는 선조(이덕일은 선조에게 매우 야박한 평가를 내린다.), 치열한 당쟁,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양반층, 변방을 떠도는 인재들, 급변하는 국제 정세! 결국 명과 조선,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삼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임진년이 밝았다. 국난에 직면해서 국가는 사분오열 편가르기가 심해진다. 전쟁 발발의 책임을 상대당파에 떠넘기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도 되는것처럼 말이다. 종북장사처럼 강화파, 친왜(일)파 장사가 성행한다. 그 와중에도 집권층은 자기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이순신이나 김덕령 같은 장수들도 팔아먹는다. 국제 정세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눈감고 귀막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설령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 당파에 불리하다면 사뿐히 무시한다.

 

  오늘날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설득과 통합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편가르기와 억압만이 존재한다. 상대방을 분열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민을 분열하여 지배하니 그 폐해가 얼마나 대단할 것이며, 오래 갈 것인가? 이덕일의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성룡의 리더십은 설득과 통합이다. 이는 원칙과 유연함을 의미한다. 원칙이 없는 유연함은 야합이나 짬짜미가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적인 기득권을 위해서 야합하고 헤쳐 모여를 반복하는가? 유연함이 없는 원칙은 상대방을 포용하기 보다는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종북, 빨갱이, 문딩이, 절라디언 등등 온갖 증오 섞인 말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포용성이라든가 유연함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상대방에 대한 증오만이 가득하다.

 

  총선을 치렀다. 이젠 대선을 앞두고 있다. 통합과 설득을 말하고, 오직 자신만이 여기에 적합한 사람이라 말하는 대선후보들이 한 트럭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이들이 원칙과 유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가? 유연함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국가를 수익모델로 삼는 가카식의 원칙을 제외하고 정치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후보들을 찾아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표를 위하여 편을 가르고, 갈등을 조장하고, 지역 감정을 부추긴다.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전투 의지를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시킨다. 누가 이러한 불행을 막을 것인가? 이 시대의 유성룡과 같은 이는 누가 될 것인가?

 

  문득 두렵다. 유성룡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몽학이라도 나타날텐데. 함께(together)가 아니라 분리와 분열(to getto)로 가는 오늘날이 답답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신없는 사회가 유행이다. 과거에도 무신론에 대한 여러가지 서적들이 출간되었지만 요 몇년 새에 꽤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만들어진 신을 비롯한 도킨스의 책들, 필 주커먼의 신없는 사회,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등등. 여기에 칼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의 책과 불가지론자들의 책을 더한다면 도저히 다 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무신론이 꽤 힘을 얻고 종교를 박멸하겠다(도킨스), 심지어는 신이 없는 사회가 더 도덕적(주커먼)이라는 말에 열광하는 사회는 미국 같은 매우 종교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성이 강한 기독교 국가에서 무신론의 전투력이 업그레이드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종교에 대한 실망의 반사이익을 무신론이 얻고 있는 것이리라. 종교성이 강하다는 것은 대개 종교가 근본주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근본주의적 성향의 종교는 세상을 타협의 대상이나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정복의 방식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랑이나 용서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정치와 군사, 자본같은 세속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정복 행위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 어디에도 신의 자리는 없다. 있다면 오직 인간의 욕망을 적당하게 포장하는 포장지로서의 신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중세를 뒤흔든 십자군 전쟁은 참으로 묘한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 전쟁이 장장 백년을 끈 것만 해도 대단한데 십자군 전쟁은 1차부터 시작하여 7차까지 수세기를 끌어 온 전쟁이다. 거기에다 앙숙과도 같은 영국과 프랑스가 한 깃발 아래에서 전쟁을 했으며, 향후 유럽의 권력의 재편을 이끌어 왔으며,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동서양이 전쟁을 벌였지만 동시에 활발하게 접촉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서양의 교류 면에서도, 향후 권력의 재편 과정에서도, 문학적인 면에서도 십자군 전쟁은 매우 중요한 전쟁이요,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 내기 위해 아픔을 겪는 혼돈의 시기였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의의는 이정도 선에서 평가를 마무리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1차에서부터 7차까지 십자군 전쟁이라는 동일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십자군의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아마 그 분기점은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했듯이 2차 십자군과 3차 십자군의 어느 지점쯤일 것으로 추정된다. 1차는 두말할 필요없이 성지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행하여진 종교적인 전쟁이다. 비록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진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그 모순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중세 기사들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지 그저 명분을 빌려 온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된 십자군을 뽑자면 나는 단연코 1차 십자군을 뽑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의 이름은 어느덧 하나의 포장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3차 십자군에서부터는 그 어디에도 신에 대한 신앙심은 찾아볼 수 없고, 사자심오아 리처드와 살라딘 같은 양측의 걸출한 인물들만이 등장하고 있다.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교황조차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방법도 피를 흘려 회복해야 한다는 무력 일변도로 좁혀졌다.

 

  십자군 전쟁의 변질의 원인은 무엇인가? 미련하긴 했지만 순수했던, 그리고 다소 동서양의 문명의 접촉이라는 제한적이나마 순기능을 감당했던 십자군이 상대방을 박멸시키겠다는 극단주의로, 혹은 정적 제거를 위한 하나의 구실로 변질된 이유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져버린 십자군의 자리에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하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자기의 무용을 뽐내고 싶어하는 기사들,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에게 십자군 참전을 요구하는 프랑스 왕,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같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베네치아, 같은 이유로 십자군에 참여한 제노바, 피사! 십자군을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는 살라딘 이하 술탄들! 이미 십자군 전쟁 속에는 기독교의 하나님도, 이스람의 알라도 없고 오직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욕망만이 가득할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결국 교회에 대한 도전을 가져왔다.(이슬람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겠지만 이족 역사는 잘 모르기에 생략한다.) 지금까지 중세를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은 급속히 몰락해 버렸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럴수록 교회의 권위는 더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반대급부로 인간의 이성과 철학이 재발견되었고 르네상스의 시대로 점점 나아가게 된다. 십자군 전쟁까지 불사했던 교회의 근본주의 포지션이 인간의 욕망과 만났고, 나아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왜곡을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에 비례하여 무신론과 교회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높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몇 년전 시대착오적으로 십자군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일반인이 아니라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과 이를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데 있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보복전을 십자군으로 묘사한 것이다. 미국 이슬람계의 비난으로 이틀만에 취소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슬람에 대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라크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이란까지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 운운 취소 이후 부시 행정부는 정의로운 전쟁, 정당 전쟁으로 노선을 변경했지만 나나미가 책의 마지막에 지적한 대로 이 또한 신의 이름으로 빌린 인간의 욕망의 향연일 뿐이다. 신의 이름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부분으로 살짝 윤색만 되었을 뿐이지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핵심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 없는 사회를 꿈꾸는 세상 속에서 절대 악일수밖에 없는 전쟁에 정당성과 정의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무의미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명분을 뒤집어 쓰는 일은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십자군 전쟁과 같은 소모적이고 지극히 인간적인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될 것이며, 이는 인류에게 대재앙이 될것이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나나미의 시각에 대한 태클을 걸자면 십자군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던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베네치아에는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자기들의 욕망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베네치아나 십자군이나 거기서 거기다. 오히려 십자군들의 어리석은 열정을 이용하여 자국에 반기를 든 도시국가를 정벌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것은 비열하다 못해 저열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나미는 이런 베네치아의 행태에 대해 호의를 표하다 못해 칭송 직전까지 간다. 같은 이코노믹 애니멀이라고 명명되는 베네치아에 대한 일본인 나나미의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향후 일본이 나가야 할 방향이 베네치아처럼 거점을 중심으로 바다를 점령하는 해양대국, 곧 대일본 제국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만약 후자라면 나나미의 시각은 그녀가 그렇게도 조롱하던 십자군의 어리석음과 묘하게도 닮아 있다는 것은 본인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RINY 2012-05-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과학교과서에서는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저희 학교 생물 선생님 한분도 창조과학론자에요.

saint236 2012-05-25 23:51   좋아요 0 | URL
진화론도 하나의 론이기는 합니다. 물론 창조론보다는 합리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 또한 상대적인 것이고요. 창조과학을 어떤 분은 사이비 과학으로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창조를 과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는 것인데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주장이 진화론의 허점을 찌르는 데에서 멈추어 선다는 것이지요. 요즘 종교전쟁이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책의 결론이 창조든 과학이든 유일의 잣대가 되어버리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없어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