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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2 ㅣ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는 맹자가 그의 왕도론을 전개할 때 한 말이다.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3리의 내성(內城)과 7리의 외곽(外廓)을 에워싸고 공격하지만 이기지 못한다. 에워싸고 공격을 하는 데는 반드시 하늘의 때를 얻겠지만,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못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굳고 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군량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 성을 버리고 간다. 이는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전쟁의 승패의 요건을 첫째 하늘의 때, 둘째 땅의 이득, 셋째 인화의 세 가지로 보았으며 각각의 순서를 天時<地利<人和로 본 것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리 기상과 방위, 시일의 길흉 같은 것을 견주어 보아도 지키는 쪽의 견고함을 능가하지 못하며, 아무리 요새가 지리적 여건이 충족된 땅의 이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는 이들의 정신적 교감, 즉 정신적 단결이 없으면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의 결론은 분명하다.
“고(故)로 말하기를, 백성들을 국경 안에 머물게 하는 데는 영토의 경계로써 하지 않고, 위를 튼튼히 하는 데는 산과 골짜기의 험함으로써 하지 않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는 데는 무력으로써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道)를 얻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많고 도를 잃은 사람은 돕는 사람이 적다.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친척까지 배반하고, 돕는 사람이 많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천하(天下)가 나에게 순종한다. 천하가 순종함으로써 친척이 배반하는 것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민심을 얻지 못한다면 필패라는 말이다.
십자군 전쟁2권을 읽으면서 내내 맹자의 말이 생각이 났다. 1세대 십자군이 막강한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성지를 탈환하여 십자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천시가 있었기 때문이며, 성채라는 지리가 있었기 때문이요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분열과 광신이냐 맹신이냐, 아니면 독실한 믿음이냐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하나로 통일된 지도력 즉 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 어느 하나만 갖추어도, 특히 인화만 갖추어도 전쟁에서 패하지는 않을 것인데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으니 적진에 들어가 영토를 획득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2권은 천시와 지리 그리고 인화의 삼박자가 십자군에서 이슬람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창업자가 아닌 수성자의 입장에서는 더 근신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으나 십자군 진영에서는 걸출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평범 이하의 사람에게 권력이 이동하고 있으니 천시를 잃어버림이요, 평범 이하의 지도자들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람들을 이리 저리 내몰고, 현지인과의 연대를 사소한 일들로 잃어버리고, 유럽과의 연대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니 인화가 깨짐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천시가 십자군 측에 있어서 보두앵 4세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혹은 나병에 걸렸지만 10년을 더 살았다면 십자군 국가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안타까운 종말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천시와 인화를 잃어버린 십자군에게 남은 것은 오직 지리뿐이다. 당시 지중해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치아와 제네바 해군의 지원을 받기 유리한 항구 도시와 곳곳에 세워진 견고한 성채가 십자군에게 남겨진 최후의 보루이다. 단언컨대 누레딘의 등장과 함께 대폭 허물어졌어야할 십자군 국가들이 꽤 오랜 세월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살라딘이 등장하였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기까지 꽤 애를 먹었던 이유도 순전히 지리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슬람 측에서는 누레딘과 살라딘 같은 걸물들의 등장, 적절한 시기에 퇴장하는 권력자들은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해주는 순전히 역사의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천시가 이슬람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또한 갈갈이 흩어져서 반목하던 이슬람이 무력이든, 성전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슬람이 인화의 이점을 얻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슬람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은 지리인데 이 또한 오랜 세월 십자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절대적인 불리함에서 상대적인 불리함으로 바뀐다. 비록 성채를 운용하지 못하지만 공략법을 획득하고 파괴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의 양동작전을 통해서 해상에서의 불리함을 지상에서의 유리함으로 만회한다. 절대적인 불리함이 상대적으로 바뀌니 이제 남은 것은 천시와 인화 뿐인데 이것은 이미 이슬람 측에 넘어갔으니 십자군 국가의 몰락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십자군 전쟁은 2권으로 끝이 났다. 3권에는 살라딘의 최대 라이벌인 사자심왕 리처드가 등장하지만 천시도 지리도 인화도 모두 잃어버린 십자군 측에서 십자군 국가를 다시 건국한다는 것은 꿈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미 끝이 났고, 3권은 대국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하는 십자군 전투만이 기록될 뿐이다. 흔히 무사의 낭만으로, 살라딘 vs 리처드의 대결로, 로빈훗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3권의 내용은 그저 십자군 전쟁을 이대로 마무리 짓기 아쉬운 십자군 측의 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3권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다지 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십자군 국가의 몰락, 이슬람 측에서 보자면 빼앗긴 성지의 수복은 역사의 필연이기에 그다지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2권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대한민국은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고루 갖춘 곳인가 하는 점이다. 한동안 수출 중심 국가로 성장하던 시기에 반도형 국가는 우리에게 막대한 지리를 제공했지만 후진국을 벗어나면서(개도국이 되면서) 지리는 불리로 바뀌었다. 사실상 사방이 막힌 대한민국에서 의식의 세계화를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계몽해야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미러중일의 4대국에 끼어 있는 지리(地理)는 지리(地利)가 아니라 오히려 지해(地害)로 변한지 오래다. 가변적인 요소로 천시와 인화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천시는 어떤가? 요 몇 년 간 벌어진 세계 경제 위기는 천시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남은 것은 가장 중요한 인화뿐인데 이 또한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좌와 우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서 대통령마저 반쪽짜리 대통령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니 인화 또한 그다지 기대할 만하지 못하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소위 말해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그나마 있는 인화도 산산이 부숴뜨리기에 열심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천시와 지리와 인화를 잃어버린 국가의 운명은 몰락일 뿐이다. 과연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하는가? 역사책을 한권씩 읽을 때마다 깊은 시름이 하나씩 더 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