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터키사 -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터키 처음 읽는 세계사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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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하면 생각 나는 것은? 

  터번, 콧수염, 이스탄불, 2002 월드컵 3위, 갈라타사라이, 그리고 이을용? 맞다. 6.25참전국. 칸카르데시, 코레가지. 이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최근에야 알게 된 것들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터키는 유럽에 속한 팀으로, 아시아에 속한 사우디 아라비아나 이란, 이라크보다 더 먼 나라이다. 알고 있는 것도 거의 없고, 터키를 형제국가라고 부를 때 왜 그렇게 부르는지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메메드2세, 콘스탄티노플 함락, 슐레이만 대제같은 민족, 인물,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것들이 전부 터키 역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사도 선택으로 가르치는 마당이니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드물고, 세계사라고해도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세계사에서 번두리 역사로 취급받는 터키사에 대한 입문 소개서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간혹 터키사를 소개한다고 해도 딱딱한 학술 서적이나, 이슬람 역사처럼 중동과 이집트, 그리고 터키를 뭉뚱그려 한꺼번에 다루고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니 터키사라는 말자체가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차에 나온 처음 읽는 터키사는 내 시선에 포착되기 딱 좋았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책들을 주문하면서 같이 끼워서 주문했다. 이미 주문한 로마제국 쇠망사와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와 함께 읽으며 로마의 세계에 흠뻑 빠지리라 작정을 했다. 시간상으로는 가장 나중에 읽어야 하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순전히 쉽기 때문이다. "처음 읽는"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정말 쉽게 풀어 쓴 책이다. 혹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특히 터키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터키사에 입문하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중고등학생들이 읽어도 무방하고, 초등학교 5~6학년이 읽어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15000원의 가격으로 출판된 책이지만 일반 교양 도서라는 느낌보다는 교과서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각 단원을 편성하고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터키사를 풀고 있다. 그렇지만 140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채 300페이지가 안되는(후주와 연표를 제외하고 순수한 내용만을 계산했을 때) 적은 분량에 그것도 그림까지 곁들여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주마간산식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때문에 조금 자세한 교과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가치는 철저하게 "처음 읽는"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을 기억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상인들이 터키계 사람이라는 것도, 돌궐이 사실을 투르크라는 그들의 이름을 얕잡아 본 중국식 명칭이라는 것도, 애거서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도 실은 터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위에서도 밝혔듯이 주어진 분량에 비해 너무 긴 세월을 다루기 때문에 설명이 간략하다는 점(물론 교과서에 비하면 엄청나게 자세한 것이겠지만)과 터키사를 너무 미화했다는 점이다. 첫번째 예는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과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이다. 단 몇줄로 표시되어 있지만 예루살렘 정복은 1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이고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은 3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이다. 시간상으로 100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것을 단 몇줄로 표시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장구한 시간을 300페이지에 담으려 하다 보니 발생한 문제이나 연표를 더 자세하게 기록해 주었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서구 중심의 세계사관에서 벗어나 터키를 중심으로 쓰다 보니 그들이 벌인 정복 전쟁의 잔인함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십자군이 터키군에 대하여 한 것만큼 터키군도 십자군에 대하여, 그리고 유럽인에 대하여 잔인한 행동을 취했다. 터키에 대항하던 성요한 기사단의 모토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음을 기억한다면 터키 또한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넓은 포용력을 보였다고 말하지만 이교도에 대하여 특별 인두세를 물렸다는 사실은 포용력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예니체리 군단 또한 마찬가지다. 예니체리 군단이라는 것 자체가 기독교도 소년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어 개종시킨 것임을 기억한다면 터키사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자칫 오해할 소지가 있음이 이 책을 보면서 느기는 또 다른 아쉬움이다. 

  어찌 되었던 읽기는 재미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혹은 화장실에서, 혹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에, 딱 그 정도의 분량이다.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번 읽어 볼 것을 권한다.  

 ps. 43페이지 바울에 관한 설명 중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이다. 교회사에 의하면(그래봐야 전설이겠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아니라 목이 잘리는 단두형을 받았다. 십자가 형을 받은 것은 또 다른 사도인 베드로라는 것이 교회 전통에 따른 설명이다. 아마도 바울과 베드로를 혼동하여 생긴 실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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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는 꼭 한번 여행을 가고 싶은 나라입니다만,
치안 상태가 걱정되어서..... ^^

동서양이 교차하는 멋진 나라이고, 바다 색깔도 일곱빛이 나는 나라라면서요?
아.......... 여행가고 시퍼염.

saint236 2010-09-07 15:22   좋아요 0 | URL
저도 가보고 싶네요. 아는 분 중에 터키에 몇년 사셨던 분이 계신데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참 아름다운 곳이 많다네요. 역사 유적지들로만 골라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언젠가는 갈 수 있겠죠?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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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촌놈들의 제국주의! 

  이 책을 보는 내내 전혀 생각하지 못하다가 책을 덮고 서평을 스는 순간 왜 이 책이 떠올랐을까? 우석훈씨의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결론은 이거다. 한번도 식민지를 경영해보지도 못했던 한국이,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한국이, 주제 넘게도 북한을 식민지로 삼아 제국주의를 펼쳐보려 한다는 것이다. 우석훈씨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10년을 촌놈들이 주제 넘게 제국주의를 실행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은 이러한 촌스러운 짓을 거침없이 해내고 있다고 부연한다. 

  한번도 제국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만 뒤쳐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발전의 원동력을 내부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것도 말이 통하고 통일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로 포장할 수 있는 북한을 식민지화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의 말 또한 이거다 저거다 구분짓는다는 촌스러움이 폴폴 뭍어나지만 말이다. 

  세계로 떠난 지식인이라는 제목을 보고 개화기에 사신들이 외국에서 문물을 배워오려고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들을 엮어 놓은 것인줄 알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순수하게 세계를 여행하던 조선의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하여 기행문을 토대로 재구성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의 공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쌍것들의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서방 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 근본은 힘이다. 제국의 대명사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과 같은 서구의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 감회를 솔직하게 적어 놓았기 때문에 때로는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  

  문명과 야만! 

  서방 세계를 여행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세계를 철저하게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어떤 이들은 조선은 아직 문명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에 어떻게 하면 문명화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세심하게 살핀다. 어떤 이들은 아직 문명화하지 못한 조국 조선이 창피해서 무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본다. 문명과 야만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또 그들이 그렇게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힘이다. 문명화 된다는 것은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말이요, 조선이 문명이 아니라 야만의 세계에 있다함은 조선이 강대국이 아니라 약소국이라는 말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조국을 문명화하고 싶고 서방을 본받고 싶었던 이유는 조선을 제국의 반열에 올려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석훈씨의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떠올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을 가지고 있지만 정의에서 벗어난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도 힘을 소유해서 한 세상 떵떵거리면서 살아보자는 것이 서방 세계를 우러러본 근대 조선의 먹물들의 속내이다. 힘을 가진 조선이 불가능해지자 지식인들이 그렇게도 쉽게 일제에 협력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들에게 문명은 힘이었던 것이다. 그 힘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편승해서 갈 수만 있다면 대동아 공영이면 어떻하며 동남아 진출이라면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역사는 "제국주의=문명"의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증언한다. 오히려 "제국주의=야만"이라는 등식이 옳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나보다. 위의 공식을 약간 바꾸어 신봉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정의=문명, 공산주의=야만"이라는 등식을 신조처럼 신봉하고 있지 않은가? 

  "We belive God"이라는 문구가 씌여진 달러를 흔들어 보이면서 이러니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얼토당토한 말을 쏟아내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초창기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We belive God"이라는 말은 "We belive Money"라는 말을 의미한다. 순진한 사람들은 God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God을 Money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Money를 위해서 전력 투구한다. 얼마나 촌스럽고 천박한 짓인가? 반기독교적인 복음이 장로 대통령 시대에 기독교의 복음으로 둔갑한 것은 기독교가 본질에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미국을 다녀간 수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을 찬양하고, 시청 앞 광장에서 좌파 타도를 외치면서 영어로 기도할 때마다 내 손발은 오그라든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돌아서게 만드는지 깨닫게 될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난다. 답답함을 느낀다. 국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토플과 토익 점수에 목을 매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솔직하게 말해서 쪽팔렸다. 한국 통일에 관한 박사 학위를, 민중신학 박사 학위를 미국에서 따가지고 자랑스럽게 돌아오는 사람을 볼 때마다 미쳤군 한 마디 날렸다. 영어를 잘하기 위하여 어릴 때 혀를 절개하는 수술을 시키는 부모를 볼 때마다, 원정 출산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를 볼 때마다 돌았다고 막말을 했다. 그렇지만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그냥 촌스럽군이라면서 넘어가려고 한다. 이미 많은 말을 하기에는 한국 사회가 신봉하는 "자본주의=정의=문명=남한, 북한=야만"이라는 공식이 우리를 너무 쪽팔리게 하고 촌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온통 촌스럽다. 정부도 촌스럽다. 문화부도 촌스럽다. 이런 젠장이다. 

  함께 읽을만한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우석훈), 정치교회(김지방), 추락하는 한국교회(이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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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의 일생 규장각 교양총서 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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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이라... 

  흔히 양반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아니 이 양반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좋은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양반이라는 말에는 남을 비하에서 부르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양반아"라는 말을 들어서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사람만큼 양반이라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없다. 아직도 우리 집안은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남들과는 체질적으로 다름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은 그리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결혼하기 전 처가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이었다. 아내가 나에게 할아버님이 보시면 분명이 어느 집안 무슨파 몇대손이냐 물어보실테니 알아오라고 하기에 별걸 다 물어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아갔다. 역시나 대뜸 처음보자마자 뭐가 취미고,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본관은 어디고 무슨 파 몇대손이냐 물으시기에 "** 이씨 **파 **손입니다."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잘 모르시는 것 같다. 그러더니 다시 꼬치꼬치 캐물으시기 시작하셨다. 그런 성씨도 있느냐? 어디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냐 등등.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게 결혼하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만약 이 질문을 우리 집안 어르신들이 들었으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돌아가신 큰 고모부가 "덕수 이씨"신데 그정도는 되야 그럭저럭 짝이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다. 솔직하게 우리 조상들 본관이 어디인지 관심도 없다. 요즘 본관이 어디고 증조부, 고조부의 제사를 집에서 모시는 것도 의미를 알고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들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증조부와 고조부의 제사날짜는 젊은 사람들에게 토익이나 토플 시험 날짜보다도 관심 밖의 일이다. 어르신들이야 쌍놈 짓거리 하신다고 혀를 차시면서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한탄하시겠지만 도시화로 핵가족화가 되면서 삼대가 함께 사는 집도 드문 시대이기에 당연한 현상이 아니겠는가? 

  본관이라는 것은 그저 동사무소에서 각종 신고할 때 외에는, 명절이나 나처럼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수준이다. 그런 세상에서 본관을 가지고 양반 쌍놈 구별하는 것은 참 웃기는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 초기 10%도 안되던 양반들이 양란을 겪고 나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났다. 박지원은 양반전을 통하여 이런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양반이라는 양반들이 양란을 겪으면서 행했던 일들이 도망가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잃었다. 왕에 대한 존경마저 사라지고 궁궐이 백성에 의해서 불탔으니 양반들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버틸 수 있겠는가?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껄껄대고 웃지 않았는가? 

  양반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양반이라는 신분에 목숨을 걸멸서도 실제로 우리는 양반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모른다. 그저 양반전이나 봉산탈춤을 통해서 무능했거나 허례허식이 강했나 보다, 혹은 딸깍발이라는 수필을 보면서 꼬장꼬장했지만 절개가 있었나 보다, 시조를 보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이 강했나 보다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양반들이 삶을 피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사진을 들어가며 양반들의 삶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좋이 않아 과거에 낙방했다고 하면서 6번이나 이름을 바꾼 사람, 대를 이를 손자를 얻기 위해 성황당에서 지성을 드리는 양반, 신랑 괴롭히기를 당하다가 맞아죽은 양반, 중국의 예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풍속을 지키는 이중적인 양반, 녹봉보다 더 많은 선물을 받으면서 뇌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양반, 고시생처럼 동기들끼기 이렇게 저렇게 인맥으로 엮여서 줄을 서는 양반 등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풍속사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그것도 양반의 풍속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예법이 이렇구 저렇구 한다. 그래서 읽는데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책을 보고 양반은 이런 것이구나 어설프게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이 책을 읽고 실제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그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양반이라는 호칭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양반이라는 신분에 목숨을 거는 한국 사람의 이중적인 잣대를 이해하는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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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분야를 읽으시는군요?
ㅎㅎ일찍부터 닉넴은 익혀두었어요.^^

saint236 2010-06-04 15:31   좋아요 0 | URL
걍 이것저것 그때그때 땡기는 것들을 읽죠. 역사 분야는 좋아해서 즐겨 읽습니다.
 
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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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지중해 시대가 끝이 났다. 더이상 제피로스도 에우로스도, 노토스와 보레아스도 불지 않는다. 시로코고 바다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랜 세월 역사를 주름잡았던 갤리선도, 신무기 해상의 포탑 갈레아차도 투르크에서 불어오는 에우로스를 타고 멀리 사라져 버렸다. 마레 노스트룸의 주인이던 로마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고, 로마로 통하던 모든 길도 끊겼는데 바다라고, 갤리선이라고 영생할 것인가? 

  로마이후 서유럽 vs 동유럽, 기독교 vs 투르크, 십자군 vs 예니체리의 격렬한 전투도 이젠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투르크와 베네치아가 목숨 걸고 싸웠던 지중해는 더 이상 역사의 한가운데에 위치할 수 없다.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옮겨졌다. 사람들이 이제 제피로스를 그리워 하지 않는다. 시로코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 울구 아리는 신화일뿐이다. 무역풍과 편서풍의 시대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갤리선 대신 범선이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다. 

  레판토 해전은 역사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아가기 전, 범선이 갤리선을 대체하기전 지중해가 보여준 회광반조일 뿐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전쟁의 양상은 이제 총력전으로 바귀어져 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총력전이다. 한번의 전투에서 우승해서 그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고대식 전투가 아니라 어느 한쪽이 멸망할 때까지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투닥거리다가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는 용병식 전투가 아니라 프로끼리의 대전이 아니라 누군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막싸움의 시대가 시작 되었다. 자연스럽게 전쟁은 당면한 적을 물리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투 이후 얼마나 빨리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가 하는 국가의 회복력에 초점이 맞추어 지기 시작했다. 베네치아가 왜 그렇게도 십자군을 결성하려고 노력하였는가? 그렇게 화려하게 승리하고도 결국은 막대하 손해를 감수하면서 비굴하게 조약을 먖어야 했는가? 베네치아의 회복력이 투르크를 빠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 3부작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베네치아와 투르크의 싸움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마트의 싸움같아 보인다. 장기간 동네 사람들에게 파고 들어서 단골을 만들어 놓았는데 대형 마트가 이익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다. 심정적으로는 아직도 동네 구멍가게에 친근함이 가지만 대형마트에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때가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그후 회복력 또한 빠르다. 유통업과 판매업도 질보다는 양, 인정이나 친절보다는 가격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들어선 것이다. 얼마전부터 동네에서 수십년을 장사해온 구멍가게가 공산품을 20%세일해서 팔고 있다. 팔려나간 자리를 다른 물건이 채우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조만간 정리할 것 같아 보인다. 기울어져가는 가세를 바라보는 그분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10년 전만해도 저녁에는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역사의 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아가는 현장을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마음이 꼭 이렇지 않았겠는가? 

  한 시대가 가면 한 시대가 오는 것이 세상사일진대 왠지 서글픈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재미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오만한 시오노 나나미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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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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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이다. 두번재 작품의 배경은 로도스 섬이다. 로도스 섬 크기나 자연 풍광 보다는 가진 지정학적인 위치 대문에 더 유명한 섬이다. 지도를 펴보면 알겠지만 지중해 동편에 위치하여 이슬람 제국의 목밑을 겨눈 칼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로도스 섬이다. 일찌기 팔레스타인에서 패배하고 쫓겨난 성요한 기사단이 성지탈환을 위하여 절치부심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최전선이다. 병력의 양에서 절대 열세인 성 요한 기사단이 대제국 투르크를 상대로 방어전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질적인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질의 대명사인 중세의 기사단과 양의 대명사인 투르크 제국의 충돌은 간단히 말해 질과 양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알라딘에 등록되어 있는 서평을 찾아보니 대체로 로도스 공방전을 서유럽의 가톨릭 세력 대 지중해 동쪽의 이슬람 세력의 충돌로 보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로도스 공방전을 동방과 서방의 대결로만 바라본다면 껍데기만 보는 것이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몰타 기사단 시절에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반짝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로도스 공방전은 당시 최고의 질을 자랑하던 기사단이 몰락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이젠 전쟁의 승패는 소수 정예가 아니라 압도적인 물량이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양상은 서유럽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서유럽도 세력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정도나 시대에 뒤떨어지게 용병을 고용하여 아웅다운 치고 받는 싸움을 벌이고 도시 국가가 주류를 이루지만 그외 나머지 국가들은 영토국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봉건주의가 끝이나고 절대 왕정이 등장하던 시기라는 말이다. 카를 5세, 헨리 8세, 프랑수아 1세라는 세 명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절대왕정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북유럽에서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맹위를 떨치면서 분열하지만 결국 이들도 영토국가의 시대로 나아간다. 

  영토국가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일정부분의 양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전쟁에 몇백 몇천이라는 소규모 전투집단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몇만을 동원할 수 있는 전제군주가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르크의 쉴레이만 대제 또한 마찬가지다. 현저하게 떨어지는 전투력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시킨 이후의 나타난 새로운 전쟁 양상이다. 화약 무기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양상은 더 뚜렷해져 간다. 현대에 와서 소수 정예를 외치는 것도 일정부분 물량이 보장될 때에나 가능한 말이다. 양으로 승부를 짓는 것이 이미 시대의 대세로 굳어졌다.

  로도스 공방전을 장기에 비유하자면 졸(卒)과 차(車)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도스 공방전 이전까지는 기껏해야 졸(卒) 한개 혹은 두개가 차(車)와 대결하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군주도 5개의 卒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車는 장기판을 휩쓸고 다닐 수 잇다. 그렇지만 卒을 한번에 4~5개를 소집할 수 있는 군주가 등장한다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車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卒을 다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馬 혹은 象 혹은 砲와의 유기적인 연계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로도스 공방전에서 馬, 象, 砲는 車의 편이 아니라 卒의 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날고 기는 車라고 할지라도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일정부분 양이 담보가 되었을 때 각 부분들이 지휘관의 의도에 다라 유기적으로 움직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정예병이라고 할지라도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세계 군사 대국 1위이자 최첨단 기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미군도 양적인 면에서 그 어느 나라에 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하기 일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낭만적인 중세 기사도의 상징 성 요한 기사단은 실상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 낙오자가 아닐까? 비록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의료봉사라는 원래의 설립 목적을 잘 지키고 있지만 오랜 세월 대 이슬람 전투를 이끌었던 기사단으로서는 생명이 다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로도스 공방전 이후의 시대는 질이 아닌 양의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3부 레판토 해전 또한 어떤 방향으로 전쟁이 전개되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 레판토 해전은 베네치아가 승리를 했어도 투르크의 압도적인 물량에 밀려서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는 것으로, 혹은 패배한 것으로 결론 지어지지 않겠는가? 

  질의 시대를 끝내고 양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로도스 공방전이 만들어낸 역사의 새 판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전쟁 3부작에 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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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ㅁ12 2012-04-0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이 책을 읽어보신게 맞나요?

로도스 공방전은 질과 양의 대결이나 졸과 차 같은 것은 지극히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인데요

전체적인 말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영토국가, 절대왕정 얘기인지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뒤에 서너개 문단은 비유 자체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시 읽으세요

saint236 2012-04-03 12:17   좋아요 0 | URL
정말 읽어본게 맞고요. 그냥 무턱대고 잘못 읽었으니 다시 읽으세요라는 훈계조의 댓글은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