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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정옥자 지음 / 현암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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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만 ,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

                                                                                         이희승<협동(1952)>

  예번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수필이다. "선비=딸깍발이"라는 등식을 나의 머릿 속에 각인 시켜 준 수필이다. 이 수필 때문에 선비는 고고한 존재, 현실적인 능력이 없을지라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무릎 꿇지 않는 곧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만일 옛날에 태어났다면 나도 선비가 되었을텐데."라는 생각을 품기도 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잇어서 선비는 고고함과 진실과 시대의 양심이었다. 이 시대에는 선비가, 진정한 양심이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 갔다. 선비들이 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 지식이라는 틀 안에 갖혀서 자기 만족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른 이들을 착취하던 모습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고고하다고 말하지만 그 실상은 무능한 자기에 대한 오만이요, 딸깍발이 보다는 양반전에 등장하는 양반과 양반 신분을 산 졸부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능력없는 신분, 현실과 괴리된 이상, 철학 없는 물질, 돈으로 고귀함까지 살 수 있다는 졸렬한 정신,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도 찬양하던 과거 선비들, 양반들의 모스비 아니었던가?

  선비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양반과 선비는 다르다. 선비는 고귀하지만 그 이름에 먹칠하고, 호가호위 했던 사람들은 썩은 관료들이었다."고. 그러나 양반과 선비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게 고고함의 상징인 이이, 율곡, 송시열 선생이, 사대부의 첫 출발점으로 이야기 되는 정도전이 과연 다른 존재들인가? 아니다. 이들은 선비이면서 관료요, 고고함의 상징이자 부패의 상징이다. 선비의 꿈이 무엇인가? 입신양명 아닌가? 입신양명을 꿈꾸고 관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이상 선비와 관료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라는 책과 동시에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을 샀다. 두 권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았다. 이 책은 선비에 관한 긍정적인 면을, 다른 책은 부정적인 면을 바라 본 책이다. 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다른 작가에 의해서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물이 나오더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선비라는 책의 제목답게 선비의 업적에 대해서 개략적인 기록을 해 놓았다.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역사책을 넘기다가 몇 년전에 보았던 그 책이 나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서평을 작성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꼭 한번 읽어 보면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러나 꼭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과 함께 보라. 긍정과 부정의 면을 모두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비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비는 고귀함의 상징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천함의 상징도 아닌 이 시대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엄청난 착각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한 시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도와 이익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아니라 변명하지 마라. 그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극명하게 나타난다. 대체 청과 명을 섬기는 문제가 우리에게 무슨 하등의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삼학사가 왜 생겨났는가? 시대의 산물이요, 절개의 상징이라 말하는가? 아니다. 사육신은 절개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삼학사는 시대를 알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빠져 자기 아집을 주장한 사람들이 아닌가? 당시 조정을 가득메우고 있던 이들의 면면이 이렇다. 명을 위한답시고, 자기 나라에게 불이익을 주는 존재가 조정의 대신이다. 명을 섬긴답시고 청나라 군에 들어가 촉 없는 화살을 날리던 현실 감각 없던 사람이 조선의 선비요, 대장이다. 이 정도면 무식이요, 매국노이다. 바른 것을 돌린다는 반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뭐가 바르단 말인가? 자기들의 이익에 반대하면 그릇된 것이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는 오만함이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택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의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 송시열 선생은 과연 어떠한가? 정치에 얼마나 많은 폐해를 끼쳤던가? 왕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니 성인으로 만든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는 사상적인 주입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게 고고하다던 남인들, 사림들 또한 어떠한가? 정권을 잡자마자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던가?

  선비는 고고함의 상징이 아니다. 봉래산의 낙락장송이 아니다. 정몽주가 아니라 이방원에 가까운 사람이다. 단지 그것을 정몽주같은 모습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꿰뚫어보지 못했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민초들이 겪지 않았던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비를 고고함의 상징으로 보고, 물질, 정치, 이권 이런 것들과 무관한 사람으로 오해하였듯이, 오늘날 지식인들, 대학교수들, 이들을 우리는 가치 중립적인 이야기들, 자기 양심에 따르는 이야기들만 하는 지성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는 피해들을 고스란히 우리가 떠맡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에 관한 진실"도 기억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사육신 중 성삼문의 시를 인용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의 진정한 선비 정신이라 함은 사육신의 정신 정도가 아닐까?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 성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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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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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부일체!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한몸이다."

  군위신강, 군신유의 모두 유가에서 말하는 기본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질서가 무너졌다. 그렇게 성리학의 나라라 말하는 조선이지만 실상 그 내면은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이성계라는 무인에게서부터 시작한 조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두된 사림파들. 그들의 이상은 임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내리누르는 것이다.

  임금도 우주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성군이라는 말은 임금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말이다. 성군이라 말하기 위해서 임금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성리학에 의한 통치를 꿈꾸던 이들은 임금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이것을 가속화 하였다. 임금의 권위는 바닥을 쳤고 급기야는 신하가 임금을 택하는 택군의 질서가 성립되었다. 말은 하늘의 뜻을 저버린 왕을 백성들을 위하여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상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익에 반하는 왕은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많은 역사 드라마들이 나오긴 하지만 "8일"이라는 드라마가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리라.

  택군의 시초는 광해군 이후의 인조반정일 것이다. 그동안 많은 임금들이 바뀌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왕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지만 인조반정은 말이 反正(바름으로 돌아간다.)이지 사실은 친명을 부르짖는 사림파의 이익을 위하여 임금을 택한 택군이다. 다음 택군이 영조요, 그리고 그 다음 택군이 사도세자이다. 정조또한 택군을 피해갔다가 마지막에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 불쌍한 왕이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 자식도 부모도 없는, 임금도 신하도 없으며, 인륜마저 없어져버린 비정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말은 사도세자의 삶을 통하여 고루하면서 비현실적인 모습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는지를 알고 있게 만들어 준다.

 

  이책을 보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군사부일체가 택군으로 변하여 버린 모습이 사도세자의 고백의 핵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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