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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ㅣ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컵에 물이 절반이 차 있다. 이것을 당신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반 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반이나 있는 것일까? 같은 현상을 보고 해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굳이 E.H.Carr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질문을 조금만 더 쉽게 바꾸어 보자. 역사가 왜 재미가 없는가? 우리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역사를 무엇으로 분류하는가? 암기 과목으로 분류한다. "역사=암기과목" 이 얼마나 넌센스고, 얼마나 역사에 대한 무지인가?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도 시대에 맞추어 외워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능에서 비중이 대폭 낮아진다면 굳이 왜우려고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국영수 공부 더해서 거기에서 몇 점 더 맞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암기하려고 골머리를 썩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일테니 말이다.
과학을 암기 과목으로 이해하고 과학 수업 시간에 과학 공식들을 달달 외운다고 생각해보자. 혹은 수학 시간에 수학 공식들을 달달 외운다고 해보자. 그것으로 과학 공부와 수학 공부가 끝이 나는가? 아니다. 과학과 수학은 공식을 가지고 응용하는 논리적인 단계들이 더 중요하다. 공식을 외우는 것은 응용을 위해 기초를 다지는 것일 뿐이다. 과학이 재미있고, 수학이 재미있는 이유는 열심히 외운 공식들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도 여러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외우고 살펴보는 것은 철저하게 역사의 흐름을 해석해 내기 위함이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와 재미는 해석과 현실에의 적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참 좋아한다. 고등학교때 만났던 역사 선생님 때문이었다. 자칫 재미없을 것 같은 국사를 참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지금 보면 맑스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간단하게 적용한 것 같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의 정치 문란은 백성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백성의 고통은 세로운 왕조 창립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신하들의 힘을 깎아야 하는데 신하들의 힘은 사병과 재산에서 유래한다. 왕은 신하들의 사병을 깎기 위하여 노예를 해방하고, 경제 개혁을 실시했으며, 불교와 유교라는 정신적인 가치들을 도입했다 뭐 이런 식이다. 경제와 군사력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국사의 흐름을 해석하면서 중간 중간에 역사적인 사실들을 이야기하니 안 외우려야 안 외울수가 없고,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역사 해석의 재미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엘리트들이 공부해야할 필수 과목 중에 꼭 끼어 있는 것이 동양에서는 작문과 역사, 서양에서는 웅변과 역사이다. 논리적으로 시민들을 설득해야 하느냐, 아니면 왕에게 정책을 제안해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에 웅변과 작문으로 나뉘지만 양쪽 모두 역사가 필수 교양과목임을 분명히 했다. 역사를 통해 세상과 정세를 해석하는 힘을, 그리고 현실에 적용하는 힘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대부분 역사를 재미없는 암기 과목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 접근 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 대부분 역사 서적의 접근 방식은 통사적인 접근 방식이다. 어느 시점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서술하는 통사적인 방식은 문제의 흐름을 침해하지 않는 대신에 역사를 암기 대상을 만들어 버릴 소지가 있다. 통사적인 접근 방식에 덧붙여서 이 책에서 시도하는 주제적인 접근방식을 덧붙인다면 역사를 훨씬 더 재미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라는 다섯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접근방식이 꽤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유도 흔히 접하던 통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류의 다양한 역사를 다섯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해석해 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고, 그의 날카로운 시각에 경의를 표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사=서양사로 보는 한계를 발견하며 이렇게 샤프한 사람도 결국 이 한계를 넘지 못했구나하는생각에 씁쓸해진다. 일본이 세계사에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는 잠자고 있었다는 그의 생각은 세계사=서양사라는 프레임에서 단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실례가 된다. 별 다섯개 중에 네 개를 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사를 즐겁게 접하고 싶은 고등학생들, 혹은 대학생들의 입문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용도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게 외울 것도 없으니 그저 가볍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