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박노자.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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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전에 읽은 책 리뷰를 이제서야 쓴다. 책을 읽은 다음에 바로 리뷰를 쓰는 것이 습관인데, 아마 이 책을 읽을 때 쯤에는 동시에 읽기를 마친 책이 몇권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57권째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27번째로 읽은 책이다. 벌써 읽고 몇달은 족히 지났을 책인데, 이제와서 리뷰를 쓰는 것은 순전히 눈에 거슬려서이다. 책을 사놓고 열심히 읽고 있지만, 책을 사는 속도와 읽는 속도 사이에 버퍼링이 심하게 나는 것은 두 아이의 아빠로서, 직장인으로서,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어찌되었건 게으름의 소산일 것이다. 아마 책에 대해서만큼은 지름신이 강림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고 그때그때 서평을 쓰지 않으면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바로바로 서평을 쓰는 것이 나의 책읽기 습관이지만 이번처럼 피치 못해서 뒤로 미루어 두는 경우도 간혹 생기는데, 이런 책들은 책꽂이에 꽂아 놓고 치우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옆에 있는 다른 책꽂이에 책을 꽂아 놓는 습관이 있다. 그런 나에게 아직 책상 위의 책꽂이에, 그것도 눈에 보이는 곳에 책이 꽂혀 있다는 것은 아직 책 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순전히 이런 이유로 정말 몇달은 지났을 책의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서론이 이만큼 긴 것도 결국은 책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아 자신이 없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나는 나나미의 책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로마인 이야기는 무척 좋아해서 몇번을 반복해서 읽곤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전권을 3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물론 2권부터 시작해서 7권까지는 7~8번 정도 읽었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보면 로마가 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존속할 수 있었으며, 많은 민족들이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가는 것에 그렇게 심하게 반발하지 않았는지(물론 유태인들이야 워낙 별종이니 논외로 치고) 이야기하는 대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로마인은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을 아주 잘하는 민족이라고. 그렇다 로마가 주로 했던 일들은 분할하여 통치하는 것이다. 자기 패권하에 있는 민족들이 하나로 뭉쳐서 단결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에 로마식 통치가 그렇게 빨리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강압적인 것이든, 아니면 이익으로 꼬시는 것이든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본질적인 면에서는 다를바가 없다.  

  분할하여 통치한다는 말! 참 새련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보자. 내편과 네편을 나누어 대결구도를 조장한다는 것이 아닌가? 더 까놓고 이야기한다면 편가르기와 길들이기가 아니란 말인가? 피정복민들에게 내편인지, 적인지 분명히하라 주먹으로 위협하면서 내편이 된다면 이런 것을 줄 수 있어라고 당근을 흔든다. 누가 안넘어 오겠느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로마인들이 무척이나 얍삽한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오해는 하지 마시라. 오늘날에도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는 정치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아니던가? 심지어는 유치원 코흘리개 아이들도 매번 사용하고 있는 수법이다. 그만큼 유용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국가는 국민들에게 내편인지, 네 편인지를 결정하라 강요한다. 여기서 네편은 적이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이런 편가르기가 잘 먹힌다. 친미냐 반미냐,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상류층이냐 하류층이냐 등등등... 한국에서는 정말 많은 편가르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교묘하게 사용한다.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불구대천의 적이요, 내 편인 사람들은 계속 충성심을 시험하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혜택을 베풀어 주지 않는가?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가 이 책의 부제인데, 한국 근대 100년은 이 편가르기와 길들이기가 더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차라리 고구려사, 조선사를 말하면 모르겠지만 개화기로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서 실용정부까지 이르는 한국 근현대사 100년은 눈만 뜨면 편가르기를 하고,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하여 충성심과 반공과 유치찬란한 경쟁심과 승부욕까지 사용하던 시기가 아니겠는가? 거기에 더하여 박노자와 허동현의 논쟁이 지상격론이라는 어머어마한 타이틀을 가지고 벌어진다고 해서 무엇이 신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한쪽에서는 잘못되었다고 타박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해해야 한다고 편들 것이 아니겠는가? 이게 조금 강도가 심하냐 덜하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편지글이기 때문에 대화의 논조가 참 정중하다 생각한다. 백분토론보다, 여의도의 국회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고 논쟁적이고, 정중한 어조의 말들이 가장 마음에 든다. 헐뜯기가 아닌 자기 주장을 정중하게 내세우는 것이 왜 그 잘나신 분들이 모이는 여의도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거기엔 편가르기와 길들이기라는 사회를 통제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을 몸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일까? 

  책을 읽으면서 박노자와 허동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왜 하필이면 박노자일까? 왜 허동현일까? 일단 허동현이 누구인지 모른다. 경희대 교수라고만 적혀있더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는다. 한나라당 아저씨들, 혹은 민주당 아저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하는 수준이 아니겠는가? "걍 내비둬. 걔네도 힘들어 이해해야지." 뭐 대충 이런 논지의 글이 아니던가? 박노자는 어떤가? 그는 태생적으로 특이한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 한국을 사랑하지만, 그래서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엄연히 소련의 교육을 받았다. 이것만큼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태생적으로 반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반공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것도 정통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이것은 한국에서 극히 드문일이다. 그래서 박노자가 선택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이 책은 좌와 우가 아니라 특이한 한국인, 아웃사이더 한국인과 주류 한국인의 시각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편가르기의 한 방법이겟지만 말이다.  

  오늘도 사회는 편가르기와 길들이기로 통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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