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 -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성교육
페기 오렌스타인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이 책은 왜 미국의 10대 아이들이 그토록 오럴 섹스에 집착하는가를 추적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럴 섹스를 섹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도 단계가 있을 것이다. 좋으면 손잡고, 손잡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섹스도 하고 싶을 것이다. 바로 이 키스와 섹스 사이에 오럴 섹스가 위치하는 것이다. 뭐 섹스는 아니지만 (적극적인) 애무쯤 될 것이다.

 

사실 미국 같이 성이 개방되고 진보적인 나라에서도 10대들의 성은 문제인가 보다. 그것을 그들도 모르는 바는 아닌지라 진지한 성행위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진지한 성행위를 할 경우 그 후에 책임져야할지도 모르는, 즉 콘돔이 찢어지거나 원치 않은 임신 등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오럴 섹스는 좋은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내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10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으니 성에 대해서도 얼마나 보수적일까? 거의 금욕적일 것이다. 그들 사이에선 꽤 오래 전부터 순결 서약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지금도 그것은 유효해 보인다. 말 그대로 결혼할 때까지 섹스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당연 비기독교 진영에선 코웃음을 사겠지만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뛰어 넘으리만큼 힘 있는 운동이 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조차도 오럴 섹스만큼은 예외로 두고 있어 순결을 지키는 것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채로 그들의 부모조차 자신의 아이들을 순결 서약에 동참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이 책이 페미니즘을 표방 하니만큼 이런 만연된 사고에 문제점은 없는가를 저자는 짚어낸다. 즉 오럴 섹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해 줄 수도 있지만 많은 부분 여자가 남자에게 더 많이 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상당 부분 친밀감을 위해서란다.

 

보통은 16세 이전에 오럴 섹스 경험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연스런 현상이라기 보단 뭔가의 강박에 의한 것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그 나이까지 그런 것도 안 해 봤냐며 어린 아이 취급 받을까봐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10대들이 이렇게 오럴 섹스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건 빌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 때문이기도 한데, 그 문제가 붉어졌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구강 섹스 밖에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 후 과연 오럴 섹스가 섹스냐 아니냐로 열띤 토론도 있었다고 하니,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략난감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섹스에 갖는 양가감정은 생각 보다 엄청났다. 여자 아이들은 성에 눈뜰 무렵 왁싱을 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남자 아이들이 털 많은 여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토할 것 같다면서. 그렇게 한껏 오럴 섹스를 즐기면서 뒤에 가서 걸레 같은 년이라며 욕을 하고. 뭐 미성숙의 소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오럴 섹스는 오럴 섹스대로 하고 있으니 모순 아닌가? 게다가 여자만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확실히 불평등해 보인다. 사실 이 체모라는 것도 있을 만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을 경우 건강에 해롭다는 건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이것을 한다. 물론 요즘엔 남자도 왁싱을 한다고 하는데 여자만큼은 많이 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털은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보기도 다음 때문에 해도 소극적이다. 이것 역시 평등은 아니다. (사실 이것은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동양권에서는 여성이 체모가 너무 없어도 오히려 안 좋게 보는 시각도 있다)

 

항문 섹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건 여자에겐 고통이 수반 되는데 (나는 이것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섹스가 됐든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다면 고통이 따르긴 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에도 반영되기도 하는데, 포르노는 말할 것도 없고 섹스 장면이 나오는 거의 모든 영화는 확실히 남성 편향이 많다.

 

이건 또 태어날 때부터 깊이 뿌리박힌 남근 사상과도 연관이 깊은데, 남자 아이는 버젓이 남근을 드러내지만 여아는 성기를 감춘다. 그러므로 성교육과 매스컴이 이 드러난 문제만이라도 바로 잡아준다면 여성 문제의 대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특별히 동성애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내가 동성애를 옹호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왜 동성애에 빠지는가에 대해선 알고 싶었다. 그런데 그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한 믿을만한 조사에 따르면, 여학생들은 성관계 파트너의 육체적 쾌락을 자신의 만족에 대한 잣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만약 상대가 만족했다면 저도 성적으로 만족해요라는 말을 한다. 그에 비해 남학생들은 반대였다. 자신의 오르가슴을 척도로 사용한다. (한편 파트너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성들의 성향은 상대의 성별과 큰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성보다는 동성 성관계에서 오르가슴을 느낄 가능성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121p).

 

나는 여기서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에 동성애의 비율이 여성 보다 남성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섹스를 더 능동적이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여자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이 이유와 관련이 많을 것이다. 이성과의 섹스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소외된 결과다. 그런데 비해 동성은 아무래도 더 여유롭고 편하게 느껴지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한 가정의 고통으로 남기도 한다. 부모는 내 아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한다. 그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포기를 했을 뿐이다. 더구나 미국에선 이미 동성애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기도 했으니 무슨 수로 이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물론 진보적인 페미니즘이라면 동성애는 옹호되어야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보단 저자가 주장하는 건 섹스에 있어서 남녀의 조화와 평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섹스 자체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자신이 왜 섹스를 하는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섹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호기심 또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성급함 때문에 뭣도 모르고 섹스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반대급부로 보수적 기독교 단체에서는 그렇게 순결 서약도 하는 것인데 어느 쪽이든 크게 의미는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성급히 섹스를 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자위를 해 보라고 권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10대들이 자기 몸에 대해 너무 무지한 상태에서 (오럴) 섹스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만 할뿐 진짜 성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위는 미국이나 동양권인 우리나라나 그렇게 환영 받거나 적어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미국은 워낙에 성 개방의 나라니 그만큼 성적인 허세도 많아 그건 뭔가 덜떨어진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금욕적인 것도 뒤섞여 더더욱 의미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그러나 저자는 자위야 말로 자신이 어떨 때 오르가슴을 느끼는지 실험해 볼 수 있는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순결 서약을 결혼할 때까지 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 반문한다. 그렇다. 우리는 종종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본질적인 것을 간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파생된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지면상 여기에 일일이 옮길 수는 없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읽어 보시든지)

 

이렇게 여성은 성에 대해 주체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고, 그런데 비해 남자는 너무나 주도적이니 강간이 끝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자신이 강간이나 성희롱을 당했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주로 술 취한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보단 아는 사람에게서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그럴 때 우리는 대체로 어떤 반응을 취하는 가다. 여자들에게 술 마시지 마라. 술 취한 남자를 피하라고만 하지 남자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술로 인한 피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는 허리우드 유명 여배우를 중심으로 <미 투 캠페인>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즉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게 묵인되고 방관되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 허리우드 여배우들에 의해 호명되어진 수컷들은 적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이런 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미국이란 나라도 성 개방만을 외쳤지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에 대해선 방관하거나 미온적이었나 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성 개방이었을까?

 

우리나라는 또 어떤가? 직장 내 성폭력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인사상의 불이익이 있을까봐 누구 하나 나서서 대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으며, 스스로가 문제 해결을 하려고 법에 호소를 해봐야 진술 과정에서부터 불이익이 되고 직장 내에서도 왕따를 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교육과 성폭력에 관한 법체계는 어떻게 달라져야할까? 이 책이 과연 미국의 예라고만 볼 것인가? 성을 개방했더니 거기서 파생된 문제들이 많아 금욕주의 성교육을 실시해 봤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의 성교육을 주목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22세 모든 여성이 부모의 동의 없이도 무료로 골반 검사, 피임, 낙태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중략)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친밀한 신체 접촉을 할 때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자위와 오럴 섹스, 동성애, 오르가슴을 공개적인 토론 주제로 삼았다. (중략) 네덜란드 정부는 성교육 커리큘럼에 상호작용기술을 추가하여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지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하는법과 분명하게 경계선을 긋는 법을 가르쳤다. 그 결과 2005년에는 네덜란드 청소년 다섯 명중 네 명이 첫 번째 성경험은 자신이 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즐거웠다고 답하게 되었다.(351~352p)

 

어떤 면에선 다소 파격적이긴 하지만 이건 확실히 우리나라도 주목해 봐야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청소년이나 우리나라나 아직도 성교육은 영화가 해준다고 생각한다. 30년 전부터 있어 온 얘기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이건 또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사고이기도 하다. 성교육을 왜 영화가 하는가? 학교가 해야지. 이건 우리나라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다. 학교에서 바로 가르쳐야 여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부디 우리나라도 자각되길 바란다.

 

책이 워낙에 사례 중심이어서 읽기에 다소 벅찬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 실태에 관해선 그 전파속도가 다소 늦다 뿐이지 우리가 미국과 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혐과 여혐이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있다. 그들 싸움에 끼어들어 봤자 크게 얻을 소득은 없다. 성 교육을 바로 세우면 많은 부분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렇게 싸우는 것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맥(漂麥) 2017-12-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므흣 - 진지 - 공감...^^

stella.K 2017-12-12 11:58   좋아요 0 | URL
ㅎㅎ 고맙습니다.^^

희선 2017-12-1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교육도 하려면 이것저것 많이 생각해야겠네요 학교에서는 그런 건 별로 마음 쓰지 않죠 말하기 어려워서 그렇겠습니다 그런 것도 전문으로 하는 선생님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한다면 보건 선생님이 해야 할까요


희선

stella.K 2017-12-12 12:01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우리나라 성교육이 어느 정돈지 모르겠더라구요.
옛날 보다 많이 나아졌는지...? 나아졌다고 해도 꾸준한 학습과
관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ㅠ

2017-12-12 0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2-12 12:08   좋아요 1 | URL
저도 이책 읽으면서 미국에서의 혼전순결 서약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많이 다르겠구나. 좀 충격이었지요.
오럴 섹스도 그렇고.
그런데 이런 생각이 한국에 곧 퍼질거란 아니 어쩌면
시작됐겠구나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걱정이 되더군요.
특히 한국은 남자들이 콘돔 사용을 아직도 기피한다더군요.
그럼 외국 여자인 경우 한국 남자들은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도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는 기술이 따로 있나? 뭐 그런 생각을 한다더군요.
외국 여자나 우리나라 여자들이나 성의식이 조금 더 철저해야 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강나루 2017-12-1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충격 깊은 생각이 밀려오네요

stella.K 2017-12-12 13:31   좋아요 0 | URL
처음엔 저도 충격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깝깝하더군요.
미국이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는...?!
포르노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의식있는 성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해야할 텐데 구성애 여사가 많이 그립더군요.
옛날 같이 방송에도 나오고 그러지...

강나루 2017-12-12 1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 성교육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네요

stella.K 2017-12-12 13:33   좋아요 1 | URL
ㅎㅎ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같이 고민해 보아요.^^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죽음을 앞둔 서른여덟 작가가 전하는 인생의 의미
니나 리그스 지음, 신솔잎 옮김 / 북라이프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만일 내가 앞으로 3개월 내지 6개월, 또는 1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4년 전 오빠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 갖게 된 질문이다. 물론 오래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땐 마냥 슬프기만 했고, 그때 나는 창창한 나이었으니 그런 질문은 별로 가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나에게 보다 실제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나 보다 한 세대를 앞선 분이지만 오빠는 나와 동세대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오빠가 죽은 나이 보다 2년을 더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아무래도 세상을 덤으로 살고 있지 싶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100세를 살지는 않는다. 나의 오빠가 그랬고, 이 책의 저자가 그랬다. 38세 젊은 나이에 유방암으로 죽었다. 저자는 죽기 전까지 생의 마지막 풍경을 글로 남겼다.

 

삶이라는 게 그렇긴 하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산 것 같은데 어느 날 병원을 가고, 거기서 치유 불가능한 병명을 판정 받고, 그때부터 자신의 마지막 생의 나날을 손으로 꼽는다. 누구는 판정을 받은 날로부터 병석에 눕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희망 없이 살아가지만, 생을 긍정적으로 산 사람은 죽을 때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제목 그대로 비록 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삶이고 죽음조차도 내 것이니까.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죽음도 긍정한다. 그런 사람들은 특히 서양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암으로 죽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심장사나 사고사 같이 갑자기 죽는 것 보단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있고, 남아 있는 가족이니 친지들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맞는 말이다. 다 같은 죽음이라고 해도 오빠는 본인에게나 가족들에게나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줬다. 만일 오빠가 갑자기 죽었다면 그 정신적 충격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6개월 전만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환자 신세가 되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걸 지켜본다는 건 괴로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그때가 떠올라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나도 언제든 오빠 같을 수 있고, 이 책의 저자 같을 수 있다.

 

사춘기 시절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왜 그렇게 힘들 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시절의 어리석은 생각이긴 하지만 틀린 생각은 아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건 말이다.

 

죽음을 목도하고, 이런 책을 읽고, 2년에 한 번씩 암 검진 받으라는 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그리고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건강을 염려해야 하는 신세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죽음을 이해시키려고 썼던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볼 때 그랬다. 저자는 죽음을 앞두고 지난 인생을 반추하며 남은 인생을 담담하게 살아갔던 그 마지막 삶을 그렸을 뿐이다.

 

난 아직까지는 건강한 편이긴 하다. 물론 그 건강이란 게 아픈데 없이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나쁘지 않은 정도를 의미할 뿐이다. 사람은 25세를 이후로 노화에 접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써 온 내 팔 다리 근육을 생각하면 그냥저냥 양호한 편이라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바라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이 책의 저자처럼 또는 나의 오빠처럼 암 같은 예후가 안 좋은 병의 진단을 받아도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냐고 화내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반대로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안했으면 좋겠다.

 

물론 분명 많이 울 것 같긴 하다. 그렇더라도 내 가족과 친지들 앞에선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급적 기운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주변을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처분하고, 안 입는 옷이나 물품들도 팔거나 버려야 한다. 나는 살아 있는 가족에게 이 일을 맡길 수가 없다. 그건 또 얼마나 마음 아프고 미안한 일이 되겠는가, 가급적 내 블로그에 나의 부고를 알릴 수 있도록 미리 글을 써 두고, 비밀번호를 가족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힘 닿는 대로 나 죽으면 읽어 보라고 편지 한 통씩 남겨줄 것이다. 이것만 해도 바쁘겠지.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고 뭔가를 계속 쓰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간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냥 앉은 자리에서 깜빡 잠이 든 것처럼 죽는 사람 말이다. 난 내가 숨이 넘어 간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오래도록 기도하며 산 사람들이 하는 마지막 기도가 있다. 그것은 임종의 기도다. 가급적 자신의 마지막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또한 남아 있는 가족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서 하는 기도다. 자신이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대신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오빠의 죽음 이후로 가끔 나 자신을 위해 이 기도를 한다.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2, 30년 뒤부터 해도 되지 않을까?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누구나 100세를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언제 사고를 당하고 죽을지 몰라 보험도 드는 세상인데 그걸 못하겠는가?

 

나이 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자꾸 들어난다. 수시로 이별 연습을 해야 하고, 안 다니던 병원도 가야하며, 잔칫집에도 가야하지만 초상집에도 가야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도 앞으로 살 것만을 생각하고 이런 책을 안 쓰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도 젊은 나인데 말이다. 하지만 썼다. 자신의 남은 삶을 위해 앞으로 저 세상에서 맞을 또 다른 삶을 위해.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저자는 독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좀 호불호가 있을 것도 같다. 생각 보다 공감하는 바가 적어 아쉽고 조금 지루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03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민 독서 -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는 마라톤이다

 

어렸을 때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훗날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책 읽는다고 미움 받은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는 저자가 남자답게 자라주길 바랐는데 그 바람과 달리 병약해 집구석에만 갇혀 책만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책 읽는 것을 싫어하니 몰래 읽다 들키고 그 이후론 다시 읽지 않았다고.

 

저자는 거기서 한 가지 좋은 점과 한 가지 나쁜 점을 발견했는데, 책을 안 읽으니 겸손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굉장히 교만했을 거라고. 뭐 책을 안 읽는 것에 대해 옹색한 변명 같긴 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나도 그런 적이 있긴 하니까.

 

초등학교 처음 들어가서 첫 생활통지표에 담임선생님은, 나는 책을 잘 안 읽는 것 같다고 했다. 왜 하고 많은 말 중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 나를 지켜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칭찬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반이 보통 80명 정도 됐다. 그 아이들을 일일이 지켜보고 한마디 한다는 게 쉽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기입란이 워낙 작아 여러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또한 선생님의 그런 말씀은 더 열심히 독서에 정진하란 뜻이었을 테지만, 한글을 겨우 뗐을 내가 그 행간을 이해하기는 불가능 했다. 그렇다고 누가 나에게 차근차근 말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러다 보니 그게 은근 트라우마가 되었다. 솔직히 난 독서 집중력이 그렇게 좋지가 못하다. 한 번 책을 잡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이 1시간 내외쯤 될 것이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눈이 핑핑 돌고, 머리에서도 과부하가 걸린다. 때문에 나는 아무리 재밌고 은혜로운 책도 보름은 붙잡아야 한다. 난 한 때 이것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린 적이 있다. 책은 어쩌면 그리도 나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독서는 집중력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한참 후에 깨달았다. 오랜 시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건 집중력이 아니라 지구력이다. 나는 집중해서 책을 읽는 시간은 짧지만 독서 자체를 지루해 하거나, 세상에 못할 것이 독서라고 여겨 본 적이 없다. 한때 책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들이 성인이 돼서 안 읽는 경우도 많다. 짧은 기간 책을 읽다 안 읽는 사람과 한 번에 많이는 못 읽지만 꾸준히 읽는 사람과 누가 승리자인가? 독서는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런 상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일 독서에 대해 집중력도 좋고,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지구력도 좋다면 어떻게 됐을까? 저자가 말하는 교만의 반열에 들어 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걱정할 것이 못되는 게,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서점이 생기고 블로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넘사벽의 독서 고수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전까지는 누가 무슨 책을 얼마나 읽는지 아는 바는 없고, 바람이 전해 준 말들만 많아 실감이 안 났는데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으니 나 책 많이 읽는다고 교만을 부리고 허세를 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가만히 있어주는 게 나를 위해 좋다는 걸 금방 깨달게 될 것이다.

 

작년에 내가 독서 에세이를 냈다고 하니 책을 많이 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일 뿐이고, 수많은 독서 고수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한 가지 얘기할 수 있는 건 내 책은 내 집중력의 산물이 아니라 지구력의 산물이라는 것뿐.

 

독서 박해 중단하라!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훌륭하게 잘 해 줬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이 너무 좋은 나머지 책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리고 책 어디를 펼 쳐봐도 기승전독이다. 모름지기 전도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좋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입만 열었다 하면 깔떼기로 나도 모르게 그것으로 끝을 맺는 것. 그게 전도사의 남다른 포스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박근혜나 김영삼 대통령의 예를 끌어 왔겠는가? 누구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게 결코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저자가 없는 소리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잠깐 소개해 보면,

 

저자는 박근혜는 책은 안 읽고 만날 드라마나 봐서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고 했다. 또한 현실과 드라마를 혼동한 나머지 극비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길라임이란 가명으로 입원했다고. 박근혜가 TV를 얼마나 어느 정도 보는지는 알아 봐야할 일이지만 길라임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밝혀진 이야기인 건 사실이다. TV나 영화, 게임 같은 영상물에 집착하면 어떤 폐해를 낳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이고.

 

김영삼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가 독서를 싫어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 아닌가. 그래 가지고 한 나라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식견을 가질 수 있겠는가 했더니 그 분야의 전문가의 머리를 빌리면 된다고 했다. 빌리는 것도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알다시피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대통령이고, 김영삼 대통령 역시 IMF 금융 위기를 초래한 대통령으로 임기는 채웠지만 불명예 퇴진했다.

 

적어도 이 두 대통령은 자신에게나 국민에게나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지 못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대통령이 그렇긴 하지만.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과는 좀 다른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것을 몸소 보여줬던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한대로 왜 우린 초등학교 때까지는 독서를 독려 받다가도 왜 중학교만 들어가도 금지를 당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버지로부터 금지를 당한 건 아니지만 잔소리를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뭐라고 하지 않으셨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자 태도가 바뀐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선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때 내가 공부를 좀 잘했더라면 그런 말은 듣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난 가득이나 책을 빨리 못 읽는데, 공부할 양은 많고, 아버지로부터 그런 잔소리를 들어야 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누가 독서를 할 것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취미로 한단 말인가? 남는 시간은 자야지. 돌이켜 보면,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건 명백히 핍박이고 고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독서를 못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난 우리나라의 불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가 좋다는 건 알지만 그것을 강제하고 입시에 내몰리도록 하면서 획일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의 맹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졸업하면 뭐하겠는가? 그동안 자기 손으로 책을 사 본 일이 없으니 어떤 책이 좋은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나마 어떤 책이 좋으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얘기 책 좀 읽는다는 사람에겐 필요없는 말일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 책 역시 좋긴 하지만 정말 책을 안 읽는 사람들에게 읽혀져야 하는데 여전히 읽는 사람에게만 읽힐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난 우리나라가 이 개인의 독서를 박해하는 것을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창 책을 읽어야할 나이에 그것을 금하고 입시로 모는 교육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이거야 말로 우리나라의 문혁은 아닐까? 중국의 문화대혁명 말이다. 알다시피 그것은 말이 좋아 문화대혁명이었지 중국인을 우민으로 만든 문화 박해였다. 그 정점에 중국의 찬란한 고전을 읽지 못하게 만든 독서 박해가 있었고. 그나마 그 기간은 생각 보다 오래진 않았지만 문혁의 그늘은 지금도 드리워져 있다. 그런 것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하고 있다

중국의 문혁과 우리나라 독서 박해를 같은 선상에 놓는 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하지만 적어도 이치는 같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사람을 규격화 시킨다는 점에서 학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더구나 386 이전 세대는 국가에서 지정한 교과서. 일명 국정 교과서로 공부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게 아닐지 모르지만 입시의 그늘은 여전해서 입시 맞춤형 인간만 양산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어떤 고민도 없이 대학을 부모님이 정해주는 대로 간다지 않는가? 교육이 우민을 만들었다. 과연 그 원죄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저자가 책 안 읽는 대통령에 대해 언급했지만 책을 안 읽기는 국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역대 그런 대통령이 국정을 농단 할 때 우리는 뭐했을까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저자는 말했다. 예를 들어 갑질이 문제라면 갑질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알아야 대처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처럼 자기 손으로 책 한 번 재대로 골라 보지 못한 국민이 과연 대통령 선택은 잘 할 수 있겠는가? 선출된 대통령마다 앞에서 박수치고 뒤에서 욕하지 않았나? 국민 저마다 어떤 대통령을 뽑을지에 대한 정보와 철학이 없고, 다 여론몰이에 휘말려 뽑지 않았나? 그것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이 원래 선거는 그런 거야 하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선거철이면 각 후보들이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쓴 그렇고 그런 자전 에세이 같은 거 말고, 대통령을 연구한 이름하여 대통령학에 입각한 책을 읽어 본 적은 있는가? 얼핏 기억나는 건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가 쓴 <좋은 대통령이 나쁜 대통령 된다> 같은 책 말이다. 그녀가 대통령이 된 게 아버지의 아우라 때문이라면 소박하다기 보단 우민의 교육 때문은 아닌가?    

 

그러려면 독서와 토론은 더 이상 시간 떼우기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규 과목이 되야한다. 그리고 나의 부모나 선생님이 책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이런 말 들으면 독서를 방해 내지는 박해했다고 신고하도록 해야 한다. 즉 아동과 청소년 학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좀 심한가? 다 이 책을 읽은 덕분이라고 해 두자. 아니 나도 이 순간만큼은 책 전도사가 되야겠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

 

사실 나는 우리나라 입시생들이(물론 다는 아니지만) 자신의 진로를 정하지 못해 부모가 정해 준다는 건 자기 손으로 좋은 책을 골라 읽지 못한 것과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유명한 도서 리스트가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하버드나 서울대 또는 무슨 공적 기관에서 뽑은 100대 리스트. 심지어는 유명한 서점에서 뽑거나 휴가 때 읽을 책 리스트 등. 하지만 그 리스트대로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 참고일 뿐이다.

 

낚시하는 사람에게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손맛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이 해 봐야 든다고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도 사람이 쓰는 것인 만큼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나에게 맞는 책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그것을 찾아야 한다. 찾는데 실패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면 감만으로도 내게 맞는 책을 찾을 수가 있다. 감이 다 맞는 건 아니겠지만 8, 90% 정도의 적중률이라면 꽤 괜찮은 거 아닌가? 물론 거기엔 재미와 감동 또는 쉽게 읽힐 책만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뭔가 힘을 뽝 주고 이판사판으로 읽어줘야 할 책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두환 회고록> 같은 책은 읽지 말라고 하는데, 거기에 리스트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이순자 여사가 쓴 자서전도 포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명박 회고록도 그렇지 않나? 하지만 꼭 읽지 말아야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면교사 삼을 생각이라면 읽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렇게 읽지 말아야할 책도 있느냐면, 우린 책이라면 무조건 다 좋을 거란 무의식적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인간의 지적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좀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데 말이다. 특히 현대의 베스트셀러일수록. 고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책이 어디 있는가? 나는 처음 성경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거기엔 바른 말만 적혀있는 줄 알았는데 인간의 온갖 잡다한 죄악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성경이 인류 역사상 가장 권위 있는 책이 될 수 있었던 건지. 그런데 나중에 깨달은 건 책은 좋고 나쁘고, 재밌고 없고로 평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 평가된 다는 걸 알았다.

 

또한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곤 하지만 만듦새를 무시할 수 없다. 너무 조악하게 만든 책은 내용 역시 조악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도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전두환 회고록> 같은 거 보라. 무시할 수 없는 장정을 뽐내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난 장식이 많고 글은 조금인 책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건 아무래도 출판사측의 전략이겠지만 초보 독서가들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자의 지적대로 책의 정본은 못 읽고 축약본으로 읽고 나 그 책 읽었다고 자랑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다. 책은 즐겁게도 읽어야겠지만 책 읽는 근육을 위해선 좀 고통스럽게 읽을 필요도 있다. (이렇게 말해 놓고도 좀 부끄럽긴 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읽다가 포기한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왜 책을 읽는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의 물음에 답하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 물음이 있기 전에 책은 그냥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읽던지 안 읽던지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읽게 되어 있다. 김영하 작가는 최근 한 지적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말은 곱씹을 만하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거라고.

 

그래서 일까? 요즘엔 장서가와 독서인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것 같다. 장서가도 언젠간 책을 읽을 테니까. 그러므로 너는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사니?”란 말은 책 그만 읽고 공부나 해.”란 말과 함께 사라져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다. 가식적인 폼도 좋고 베게로 삼아도 좋다. 그건 어느 특정인의 잇템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필수템이어야 한다.

 

저자의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에 내가 추가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나는 앞서 독서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내외라고 했다. 그러니까 난 독서를 하기엔 취약한 체질을 가진 셈이다. 그런데도 독서를 포기하지 않는 건 책을 읽지 않는 것 보다 읽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무엇보다 머리가 텅 빈 느낌인 게 금방 바보가 될 것만 같다. 그건 독서를 하고 나서 눈이 핑핑 돌고 뭔가 과부하가 느껴지는 현상 보다 더 안 좋은 느낌이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지금 그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야성(野性)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성(獸性)이 생긴다고. 늑대 인간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도 방치하면 들판을 돌아다니는 짐승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우린 매일 씻고, 닦고, 쓸고, 조이고를 해야한다. 이것을 위해서 독서만한 것이 없다. 저자는 교만을 걱정하지만 책으로 생긴 교만은 책으로 겸손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지금은 북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때

 

이 책을 읽다보니 저자가 그런 말을 한다. 이제 앞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100세 시대다. 지금 청년이라면 70년 내지 60년은 더 살 것이고, 중년이라면 50년 내지 40, 노년이라면 30에서 20년쯤은 더 살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도 그중 3분의 1은 잠으로 보낼 것이다. 그러면 그만큼 빼기를 더 해야 한다. 그것뿐인가? 눈은 더 나빠질 것이고, 집중력도 예전만 같지 않아 지금 어떤 속도로 책을 읽든 지금 보다 느려지지 더 빨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건 인위적인 예산일 뿐이지 누구도 그 시간을 채울 거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예전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마치 그전에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처럼. 그때 제일 먼저 생각했던 건 죽을 때 죽더라도 내 손으로 지금까지 모아 온 책을 처분할 수 있어야 할 텐데와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동안 난 얼마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수시로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글프긴 한데 안 할 수도 없는 생각이다. 원래 계획 없이 사는 게 나의 콘셉트이긴 한데 그래도 북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그것대로 읽다가 생을 마감하면 좀 후회를 덜하고, 조금이라도 만족하고 죽지 않을까?

 

리스트를 많이 하지는 말자. 많이 잡으면 못 지킬 수도 있으니 자기 능력에서 중간치로 잡고 생각 보다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을 생각해 옵션으로 20권만 더 추가하면 괜찮지 않을까? 나이가 드니 생각하기 싫어도 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혼자하기 싫다면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모집해 같이 만들어 봐도 좋을 것 같다.

 

저자에게 감사를...

 

지금까지 난 단순히 이 책에 대한 리뷰를 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질문에 내 식의 답을 달았다.

저자는 꽤 오래 전부터 여러 권의 책을 냈다. 나 개인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저자의 책의 특징이라면 어떤 책을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책을 어렵게 쓰기는 쉬워도 쉽게 쓰기는 쉽지 않다. 읽다보면 저자 특유의 익살과 유머가 느껴져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은 그저 책 전도사로서 무작정 책을 읽으라고만 하지는 않는다. 그 속엔 저자가 읽은 책도 고스란히 녹아있고, 왜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들도 많이 던져준다. 무엇보다 저자의 전공인 기생충과도 연결시켜 놓는 걸 보면서 과연 저자의 재치가 하늘을 찌른다 싶다. 이 책은 독서 초보자에게도 좋지만 이미 독서의 깊은 내공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늘 사람들의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는 저자에게 이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윗듀 2017-11-2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고 썼는데 리뷰의 수준 차이가 너무 다르네요 ㅠㅠ 흑흑 (사실 제말이 그말이에여!! 헤헤) 잘읽고 갑니당!

stella.K 2017-11-29 13:42   좋아요 0 | URL
아유, 왜 그러십니까? 잘 쓰고 못 쓰고가 어딨습니까?
다 생각나는대로 쓰는 거죠.
리뷰는 쓰면 쓸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물론 요즘엔 대충 쓰는 것도 많구요,
안 쓰고 넘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정말 스윗듀님처럼 뭔가 할 말이 있는데
다른 분이 맥을 잡아 주셔서 저도 내 말이 그 말인데 할 때도 있구요.
모쪼록 가려운데를 긁는 기분이셨길.^^

2017-11-28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1-29 13:43   좋아요 1 | URL
아유, 왜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비밀글로 막아 놓으셨습니까?
정말 공감가는 글인데...ㅠ

2017-11-29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1-29 13:57   좋아요 1 | URL
알고 있죠. 그런데 위의 댓글은 특별히 공감가는 게 있어서
비밀글이란 게 아쉬워서 그러죠.
저는 뭐 그렇게 인기 서재가 못 되서 누가 뭐랄 사람없습니다.
그리고 다 알아요.
남의 서재에서 댓글이 하얗게 보이면 아, 님이 다녀가셨구나 하죠.
특히 주인장이 저처럼 답글을을 비밀글로 하지 않은 경우는 100퍼죠.
사이러스의 서재는 특별히 더!ㅎㅎ

2017-11-29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1-29 14:22   좋아요 1 | URL
아유,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그렇죠. 그런데 국민이 똑똑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동안
나라꼴은 말이 아니고 국가경쟁력에서도 뒤지고
그 책임 나중에 부메랑이 되서 다 지도자한테 돌아갈텐데
정신을 못 차려요.ㅠ

yamoo 2017-11-29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건 아닌 듯합니다. 지식이 늘어 판단력과 분석력이 조금 좋아지는 것 뿐(이것도 사람마다 달라 그냥 책은 기호의 소비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로 독서에세이 류는 이제 그만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 서점에 가면 가장 먼저 구경하는 분야 역시 독서에세이 분야라, 제겐 좀 거시기 합니다. 제가 타인의 독서에세이를 기웃거리는 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멋진 책이 있을까하는 기대인데, 이제는 이런 기대를 충족해 주는 독서에세이 류는 좀처럼 없는 듯해서요.

서민 교수의 이 책은 아직 서점에서 구경도 못해 봤습니다. 미안하게도 아작 스텔라 님의 책도 찾아 읽지 못하고 있어요. 자꾸 까먹어서 그래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스텔라 님의 책과 서민 교수의 책은 찾아 봐야 겠습니다.

독서 에세이에 관한 리뷰라서 그런지 스텔라 님의 독서 이력이 잘 표출되어 있어 인상깊게 읽고 갑니다~

stella.K 2017-11-29 19:05   좋아요 0 | URL
ㅎㅎ 안 읽으셔도 되요.
야무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서 많이 무뎌졌고
오히려 야무님 같은 분은 저의 책 보시면 실망하실 것 같아서
안 읽으시는 것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담 같지 마시고, 가끔 이렇게 댓글 남겨 주세요.
야무님 제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 그대로인데요 뭐.ㅋ

cyrus 2017-11-3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이 먼저 언급하셨지만, 저도 독서에세이를 잘 안 읽어요. 독서에세이 비슷한 글을 매일 북플에서 읽기 때문이에요. ^^

stella.K 2017-12-01 13:11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 네가 내 책을 읽어줬다는 건 대단한 거지. 인정!
나도 말했지만 운이 좋아서 책 낸 거라고 하지 않던.ㅋ
너나 야무님은 워낙 독서 고수니까 굳이 독서에세이 안 읽어도
될지도 몰라.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필요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북풀과 책은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지.
나도 책 낼 때 이미 썼던 걸 많이 정리해 낸 건데?

요즘엔 하도 독서에세이가 흔해져서 아주 인정 받는 작가가 아니면
안 읽을 것 같아. 나도 독자의 입장에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기획 단계에서 조금 더 특화된 뭔가가 있어야할 것 같고.

그런데 너도 언젠가 어느 출판사에서 연락 오지 않았니? 책 내자고?
진작에 물어보고 싶은 말을 이제야 물어 보네.
너 요즘 서재에 며칠씩 안 나타나는 걸 보면
모종의 작당이 있는 것 같기는한데 말야.ㅎㅎ

cyrus 2017-12-01 14:05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연락 온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제안이 온다고 해도 거절할 거예요. 어설픈 책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건 저나 출판사 모두 손해예요.. ㅎㅎㅎ

요즘 그냥 북플 접속시간을 줄이고, 대신 책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렸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

stella.K 2017-12-01 14: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사람 기죽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야.
나는 자비출판은 반대긴한데 그래도 출판사에서
연락 오면 고려는 해봐라.
출판사에서 연락이 올 때는 모든 리스크를 다 생각하고
연락한 것일 테니.
나도 당장 하겠다고 하진 않았어.
생각해 보겠다고 하곤 2년이 훌쩍 넘겨버렸지.

페크pek0501 2017-12-02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리뷰를 쓰시다니... 저는 또 이 긴 리뷰를 다 읽다니... ㅋㅋ
독서에 관한 책은 하도 읽어서 그만 사야지, 하면서도 사실 끌릴 때가 많아요. 그만큼 관심 있는 책이니까요.
아무쪼록 마태우스 님과 스텔라 님의 책 판매가 계속 증가 추세로 뻗어나가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7-12-02 15:33   좋아요 0 | URL
ㅎㅎ 언니도 길게 쓰지잖아요.
다 읽길 바라지는 않고 공감하는 부분있으면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댓글 소통되는 거죠.
그런데 언니는 다 읽으셨으니 박수. 짝짝짝!

아, 근데 독서에세이 독자의 입장에선 뭐 다 책 얘기하는 거지
하겠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책 얘기를 가장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게만 인식이 될까 봐 걱정이어요.
제가 야무님과 사이러스한테 너무 착하게만 얘기했나 봐요.ㅠㅠ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 500년 전 루터는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겼는가
박흥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는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맞춰 올해는 그 어느 해 보다 종교개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저술되어 나오는 것 같다. 이 책도 그런 책중의 하나다. 기독교야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 개혁주일로 지내고 있으니 저 500주년이란 말만 아니면 새삼 놀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말을 하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사실 교회로선 매년 놀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 개혁 이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덤덤하고 아무런 감흥이 없고, 권태에 찌든 종교인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사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지적은 잘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늘 승자의 역사다. 그래서 교회에는 종교개혁이 승리한 혁명인 줄 안다. 그래야 종교개혁이 의미가 있는 것이 되니까. 하지만 저자는 과연 역사학자답게 성공하지 못한 종교개혁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루터의 개혁의 시발이나 의지는 좋았지만 그의 혁명은 성공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루터에 관해선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이 책 덕분에 새삼 주위를 환기시켜줬던 것도 사실이다.

 

종교개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책에선 면벌부라고 하는 면죄부를 가톨릭교회가 발행하므로 잘못된 신학과 그로인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게 또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선 종교의 타락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역사가 존재하는 한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라고, 그리고 종교라는 부분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당시 가톨릭이 국교인 독일로서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왕과 교황과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고.

 

책은 이렇게 면벌부 문제로 촉발된 루터의 종교개혁이 어떻게 번져 나갔으며 어떤 사상적 논쟁이 있었고, 나라를 변화시켰는가를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루터의 공과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도 나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필연적이다 싶게 뭔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루터 같은 개혁가가 나오길 기다리는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당시 힘 있는 세력가들이 그를 도와주기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그만큼 부패가 심각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개혁이나 새로운 물결은 혼자로선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를 받혀주고 도와주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당시의 종교개혁은 종교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사회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건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터의 만인대제사장설과 함께 성경이 일반인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려면 배포가 되어야 하는데 인쇄술의 발달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루터는 자신의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려야 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 또한 인쇄술 및 출판에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종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걸 보면 성공한 혁명 같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의로운 일을 하면 반드시 시기와 방해는 있을 터. 그의 혁명을 저지하려고 당대 가톨릭 사제들과 그의 반대파들은 얼마나 그를 핍박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루터는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사제의 신분으로 결혼까지 감행한다. 가톨릭으로선 이단이다 못해 파면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왕의 개혁이라면 정말 여기까지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행히도 루터의 결혼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할까? 무엇보다 그는 농민들과 완전히 화합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의 농민이란 대중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공하지 못한 대중운동이라는 것이다. 뭐 자신을 반대하는 가톨릭과 사상적 논쟁을 하고 혁명을 하느라 거기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했고, 게다가 그는 유대인들을 박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것은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도 인간이고, 인간에겐 누구나 편견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 되려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런 루터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그는 과연 개혁에 성공했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과연 그의 개혁은 의로운 것이었나? 그 개혁은 오늘도 유효한 것일까?

 

하나 확실한 건, 그는 미완의 개혁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한 개혁가는 아니다. 그리고 미완이란 말도 그다지 적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개혁을 시작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 이후로 그를 추종했던 개혁가들이 계속해서 있어 왔다. 대표적으로 요한 칼뱅 있었고 역사상 그 말고도 개혁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 오늘 날의 교회가 루터를 성공한 종교개혁가로만 보는 것은 성공 신학적 측면이 강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둔하지 않다. 오늘 날의 목사나 신학자들도 루터가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더 연구해 볼 문제겠지만, 교회가 방점을 두는 건 그가 개혁을 했다는 것일 게다. 만일 그가 완벽한 개혁을 이루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린 어쩌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성공한 루터를 우상으로 섬기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우린 역사나 사람을 보는 시각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모 아니면 도. 진보 아니면 보수. 악 아니면 선. 성공 아니면 실패. 이런 시각으로만 역사와 사람을 보면 어떤 우를 범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 알고 있는 루터에서 좀 더 다각적인 시도는 좋았지만 깊이 있게 파고들지는 못했고, 종교개혁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은 깊이 있게 다뤄주진 못했다. 그냥 아쉬운 대로 개론서쯤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또 하나 드는 생각은, 21세기에 루터가 다시 세상에 온다면 개혁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아마도 더 어렵지 않을까? 오늘날처럼 과학이 발달하고, 사상이 많고, 진보와 보수가 참예하게 갈라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루터의 목소리가 힘을 낼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분명 그는 세기에 한 번 나올 위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위인은 시대에 맞게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는 21세기에 맞는 개혁가가 나오지 않을까? 그게 반드시 루터가 아니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은 성공하는지에 관해서 까지는 몰라도 이 시대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인간 부패의 역사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항상 있어 왔으니까. 누가 이 썩고 곪아터진 걸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의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박수쳐 주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적어도 소금 마는 뿌리지 마라. 그리고 제발 자신은 뒤짐만 쥐고 있으면서 진보니 보수하는 프레임 가지고 비판하지 마라. 세상이 썩어 있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7-11-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주제문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황사도 조심하세요.^^
stella.K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7-11-12 18:05   좋아요 1 | URL
종교개혁 지금 생각하면 참 멋진 것 같습니다.
세계사에서 어떻게 이렇게 멋진 일이 있었나 감탄이 절로 나오죠.
역시 사람은 많이 알아야 혁명도 하는가 보다 싶습니다.ㅎ

정말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추운 건 참을 수 있는데 황사와 미세먼지는 정말 죽갔습니다.ㅠ
서니님도 조심하세요.^^

transient-guest 2017-11-15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ristianity의 초기 대두 또한 정치적인 요인과 종교/사회적인 열망이 합쳐졌다고 봐야겠죠. 그런 의미로 최근 명성교회의 세습, 아니 대형교회들의 발호를 보면서, 종교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개혁이 가능하냐는 건데, 아직은 어렵다고 봅니다. 루터가 다시 오면, 아니 예수님이 다시 와도 대형교회는 바꾸기 어려울 것 같아요..-_-

stella.K 2017-11-15 15:55   좋아요 1 | URL
명성 교회는 저도 얼마 전에 듣고 놀랐어요.
김경집 교수가 책에서 그런 말을 하더군요.
목사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적 목회자가 되야하는데
제사장적 목회를 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제사장은 제도에 얽매일 수 밖에 없죠.
그런데 대형 교회 소형 교회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는 있다고 봐요.
다 하나님의 교횐데 말이죠.
그 자존감을 회복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transient-guest 2017-11-22 02:10   좋아요 0 | URL
사실 문제는 교회의 사이즈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 같아요. 다만 대형교회가 상대적으로 더 사회에,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 있고 그 여파도 크니까 그런 면도 있죠. 근데 세습/돈문제는 아무래도 그 이권이랄까, 쌓아놓은 것이 많은 대형교회의 주된 이슈 같긴 합니다. 재물가는곳에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이분들의 마음은 확실히 지상에 굳건히 뿌리박혀 있네요...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니..-_-: 그래도 명성교회 건을 보면 젊은 신도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도 하고 그러는데, 효과가 없으니 교회나 담임목사의 문제가 심각한 곳은 신자들이 떠나는 수 밖에 없나 싶네요.

서니데이 2017-11-15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낮에 햇볕이 좋아서 따뜻할 줄 알았는데, 날씨가 5도 밖에 되지 않고, 바람불어서 많이 춥습니다. 수능한파인 모양이예요. 이렇게 추워지면 감기도 빨리 유행할 것 같은 기분이고요.^^;
stella.K님, 따뜻한 오후,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2017-11-15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6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6 0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7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리석음의 미학 - 도스또예프스끼의 간질병과 예술혼
김진국 지음 / 시간여행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스토옙스키(이건 영어식 발음인 줄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했는데 모르긴 해도 그게 러시아식 발음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어식 발음으로 더 잘 알려있으니 그냥 편하게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가 간질병 환자라는 건 익히 잘 알려진 바다. 그리고 역사상 위대한 인물 몇몇이 같은 병을 앓기도 해 한때 천재병(?)으로도 불린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자는 신경과 전문의다. 그러니 간질병에 대해 오죽 잘 알고 있을까? 간질병이 어떤 병인지에 관해선 단편적으로 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책을 보니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우선 저자의 간질병에 관한 설명을 보자.

간질병 환자들이 발작을 일으킬 때, 구덩이에 빠져 피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짐승의 소리를 내면서, 희멀건 눈을 치켜뜬 채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긴장성 발작. ... 그 다음 간대성 발작이 이어진다. 이 시기에 몸의 떨림이나 강직이 서서히 풀리면서 발작이 멎는다. 그 이후 환자는 몇 시간씩 깊은 잠에 빠지거나, 비몽사몽을 헤매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지껄이기도 한다. (중략) 그런데 온몸을 뒤트는 고문과도 같은, 길고도 긴 고통의 시간도 지나고,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뒤에는 정작 자신의 몸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33p)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그의 치열한 사투를 혐오스럽게 지켜봤을 테니 본인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병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놀라운 건 발작이 일어날 때 그처럼 육체적으로는 힘이 드는데 영적으로는 현실의 찬란한 순간이 즐거운 환희의 아침으로 들려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희망이 생생한 이슬방울처럼 영혼을 적시듯 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글을 쓰는 소재와 기회로 삼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전반에 걸쳐 간질병이 자주 나오는 것도 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측두엽 간질의 전형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특이점은, 중독성 글쓰기와 성욕감퇴증, 과잉종교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그처럼 많은 저술은 바로 이런 증세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기도 하다. 또한 성욕감퇴증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부인에게 서만도 4명의 자녀를 얻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의학적 소견이란 건 정말 소견일 뿐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여성을 혐오했다고 하는데 그게 성욕감퇴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을 보면 의학적 소견이란 걸 간단하게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책의 첫 부분에서 간질병에 대해 이런 설명을 들으니 도스토옙스키가 일생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았을지 깊은 한숨이 쉬어지면서도, 사람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 피우는 존재라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다 싶다. 무엇보다 간질병에 중독성 글쓰기가 있다니 살짝 부럽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나도 간질병을 원한다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지 내가 새롭게 깨닫는 것은 인간의 질병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질병에도 신의 감추어진 섭리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간질병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유로지비 즉 바보 성자다. 이 유로지비는 자신의 안락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나, 우리나라엔 바리데기가, 그의 작품에선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병든 세상을 헤아리고, 용서와 베풂을 실천하는 성자로 거듭나며, 그의 간질병은 신께 받은 천형이 아니라 신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난과 고행으로 탈바꿈 시키며, 그를 19세기 근대의 길목에 들어선 유로지비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세계 4대 강국의 반열에 드는 러시아에서 이제 더 이상 유로지비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난했던 시절 잊을만하면 찾아 와서 온 동네를 활기 있게 해 주던 각설이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병을 통해서 현대 문명과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과 의료 체계만이 최선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21세기 현대 과학과 첨단 의료로 봤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는 불구폐질자로 너무나 쉽게 낙인찍을 것이라고 했다. 즉 그가 그처럼 위대한 대문호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니까 가능했을 거라고.

 

특별히 그의 주 무대가 러시아가 아니고 유럽이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광인과 비정상인을 감금하고 화형에 처하는 광기의 역사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또한 현대의 의료체계를 가장 먼저 도입해 고흐처럼 일찍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유로지비들은 마녀 사냥의 먹잇감이 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도스토옙스키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작품에 그런 유럽을 조롱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는데 순간 아찔했다. 도대체 문명의 발달 특별히 현대의 의료 체계가 인간을 살리기보다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린 그것이 최선인 양 그것에 맡기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질병 분류에서 조금만 비껴나가도 환자 딱지 붙이기를 서슴지 않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구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우울증으로 내몰고 그들의 자살을 방조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아픔이나 질병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심을 고갈시켜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간질은 뭐란 말인가?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예술혼을 불태웠는데 그냥 아픔을 해결해 줘야할 환자로만 보았다면 우린 평생 도스토옙스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아찔하지 않은가?

 

문득 요즘에도 그런 작가가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지는 않지만 한 세기 전 우리나라의 이상이 그랬다지. 그의 천재성은 처음부터 발현이 것이 아니다. 폐에 병이 들고 죽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천재란 소릴 들을 만큼 심오한 작품을 쏟아냈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의 고통은 때로 숭고할 수 있는데 그걸 현대 의학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차단해버린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을 걸쳐 주장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이다. 전통으로의 회기. 전통으로의 복고. 그는 어쩌면 그것을 위해 그처럼 많은 글들과 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신경 뉴런 하나로 인간을 규명하려고 하는 오늘 날의 과학을 부정하려하지 않았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무한 광대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과학의 공식과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녹슨 경박한 물질주의의 상투를 잘라내 버리고 싶어 했다.

 

저자는 말한다. 문명의 빛이 퍼지면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던 거룩한 존재들은 힘을 잃고, 그에 따라 믿음조차 시장에서 거래되는 산업으로 변질되었으며, 예술의 정신도 변패되어 미가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과학만 득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리하여 과학과는 무관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맑은 영혼이 빚어낸 고졸(古拙)의 아름다움도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왜 이 세대를 의심하려 하지 않는가? 왜 비판하지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런가 보다 무관심, 무감각으로 일관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과학이 득세하니 종교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나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건 아닌지? 도스토옙스키의 신앙이 그저 그의 간질병의 증상중 하나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얼마나 그를 무시하고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새삼 다시 한 번 글의 힘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또한 자신의 병을 내치지 않고 끌어안으며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켜 나갔던 도스토옙스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사실 처음 책이 다소 어렵고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저자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상당한 애정과 경의가 느껴졌고, 그러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를 미처 따라 갈 수 없었던 나의 일천한 지식이 부끄러워졌다. 결코 읽기엔 만만치 않았지만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02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1-03 14:2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사람은 뭔가의 결핍이 있어야 위대한 일을 해내죠.
늘 잘 나기만하고 아무 걱정이 없으면 발전이 없죠.
저는 이 책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름 유익했어요.^^

2017-11-04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8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11-0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해가 지는 시간이 되었어요. 날씨가 차가워지고, 해도 일찍 지고, 저녁이 빨리 찾아옵니다.
한시간 전과는 공기가 다른 느낌이예요.
stella.K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따뜻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