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음악을 듣는 귀를 키워라!
우선 강연회장에 도착하니 오디오와 스피커가 눈에 띈다. 그곳은 전에도 두어 번 가 본적이 있는 어느 북카페였는데 그 전에도 그 오디오와 스피커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고. 아무튼 뭔가 준비된 강연회 같아 기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턴테이블과 LP판 눈에 띈다. 이것은 또 얼마만에 보는 물건인가? 몇년 전 턴테이블과 LP판이 복고 열풍을 타고 다시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 반가웠다. 그리고 오디오 시험 방송(?)을 위해 틀어 준 음악은 말러의 교향곡1번이다. 저자는 바로 이 말러를 얘기하는 것으로 그날의 강연을 시작했다.
사실 그 시간은 저자의 두 번째 강연시간으로,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첫째 시간은 참석을 못하지 못했고 이렇게 <쇼팽과 리스트: 피아노가 부르는 밤의 노래>에 참석했다. 저자는 강연 초반에 요즘엔 클래식 대중화 바람을 타고 여기 저기서 클래식 강의를 많이 하는데 너무 쫓아 다니지는 말라고 한다. 그것은 클래식은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하지 학습하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무엇이든 즐기기 전에 학습부터 하려고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근성을 경계하는 말일 것이리라. 하지만 나 자신 좀 띄아해진 것도 사실이다. 나는 클래식을 학습할 생각은 없는데 사실 클래식이 여간해서 즐겨지는 분야가 아니고 보면 이런 강연회장이라도 기웃거려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학습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또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런 기회가 계기가 되서 오히려 더 열심히 클래식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저자는 요즘은 중년층 이상에서 클래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들을 만한 대중음악이 없어서는 아닐까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모름지기 노래란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하는데 4, 50대 만해도 요즘 유행하는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다. 정서도 다르고. 하지만 말했다시피 클래식은 다소 어렵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런 강연이나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기 보단 똑같은 음악을 여러번 반복해서 듣고 연주회장을 다니면서 음악을 듣는 근육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유행하는 대중음악이나 클래식이나 음악이란 장르는 스스로 귀를 여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클래식도 그 시대는 대중음악이 아닌가.
그런데 문득 나는 정작 저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정보도 없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또 저자에 대한 결례는 아니었을까? 뒤늦게 나마 저자에 대해 알아 보니 그는 모신문사 문화부장을 지낸 기자 출신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럴까? 강연내내 음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클래식에 얼마만한 열정이면 저런 강연을 할 수 있는 걸까 감탄할 정도였다.
강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쇼팽에 관한 부분이었다. 물론 당연한 것이긴 하겠만 사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그는 주로 피아노 독주곡을 많이 썼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초기 협주곡도 썼다. 그러면서 저자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려 주었는데 아무래도 초창기였던만큼 완숙기에 썼던 작품과 차이가 남을 설명한다. 그 과정을 베토벤과 박완서에 대한 예를 들기도 했는데, 베토벤이 위대한 것은 그의 작품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함에 있다고. 그러면서 저자는 데스크 기자 시절 이런 저런 명사들에게 원고 청탁을 하는 때가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명사들인만큼 완벽하고 좋은 글을 보내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대부분 그들의 글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놀랄 정도로 형편없기도 한단다. 그래서 결국엔 신문에 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들의 글이 수준이하여서라기 보단 신문의 원칙 중 하나는 지면이 한정된만큼 무엇을 더 할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원칙 때문에 실을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런 와중에도 소설가 고 박완서 씨의 글은 완벽해서 문장 중 뭐 하나를 빼면 글 전체가 무너질 정도라고 한다. 과연 박완서구나 싶다. 그러고 보면 고 박완서 는 한국 문학계의 베토벤이었나 보다싶다.(난 이렇게 문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런만큼 저자는 베토벤과 박완서의 예를들어 완벽함이 무엇인지를 말하며 쇼팽의 초창기의 작품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 그런 설명을 듣고 막상 쇼팽의 완벽하지는 않지만 풋풋하고 의욕에 앞선다는 협주곡 1번을 들었다. 그런데 왠걸, 난 귀가 무뎌서 그런가 도대체 뭐가 풋풋하고 완벽하지 않다는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내가 들은 협주곡 1번은 테크닉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그곡의 연주자는 그 유명하다던 루빈스타인이다. 그는 원래는 힘있는 연주 스타일로 유명했으나 말년에 힘을 많이 빼고 연주한 것이란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저자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오해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나는 클래식 초짜나 다름없으니 이곡을 들으면 이곡이 좋고, 저곡을 들으면 저곡도 좋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고 판단하리만큼 변별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 스스로를 비하할 생각은 없다. 그 한 시간 그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그런 자리에서 음악을 들으면 작곡자나 연주자의 생애를 듣는 건 기본이다. 우리는 저자가 이끄는대로 그들의 생애를 듣고 어느새 음악 용어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영화 이야기를 듣고 또 어느새 문학 이야기까지 듣게 된다. 그만큼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워낙에 풍부하고 방대해서 다 받아 적을 수가 없다. 그러지 않아도 저자는 자신의 하는 말을 노트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하긴 이 시간을 즐기러 왔지 노트하러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저자의 말을 듣고 싶다면 책을 사서 읽으면 된다).
사실 그날은 강연의 제목도 제목인만큼 쇼팽뿐만 아니라 리스트도 다뤘어야 하는데 쇼팽만큼 리스트는 그리 많이 다루지 못했다. 리스트는 원래 '헝가리 광시곡'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란 소설로 한 번 더 유명해진 음악가이다. 하루키가 리스트의 '순례를 떠난 해'에서 제목을 따와 그렇게 붙였으니 말이다. 하루키가 제목을 그렇게 짓지 않았더라면 리스트의 곡 중에 그런 곡이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것 말고도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1Q84>에서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를 소개하므로 야나체크를 세계에 알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음악을 사용하려면 그렇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써야 한다고 한다. 잘 아는 곡을 써 봐야 작품에 그다지 많은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일리가 있는 말이다. 소설을 통해 음악이 뜨던가 음악을 통해 소설이 뜨던가 해야되지 않겠는가? 물론 소설과 음악 두 분야의 공조의 문제일테지만. 영화는 익숙한 음악을 써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마침 라디오에 야나체크의 음악이 나왔다고 시작되는 <1Q84>의 첫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오버 같긴하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만 하긴 하다. 하루키는 확실히 영특한 작가다.
보통 저자들의 강연은 1시간 반을 넘지않는데 이날은 두 시간을 넘겼다. 그런데도 저자는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의 1/5을 했을까 말까란다. 정말 시간이 아쉬웠다. 그러면서 우리는 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안녕을 고했다. 사람들 모이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 일찍은 시작 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예정된 시간 보다 10분 내지 15분 정도는 일찍 시작했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째든 그날의 강연은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 나는 나오면서 새삼 '클래식 초짜'란 말을 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초짜로 살 것인가? 라디오를 듣거나 어디선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들어 본 곡이군 하며 스스로 만족할 줄도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이 글은 지난 5월 7일 <더 클래식 둘> 문학수의 클래식 Talk 콘서트를 다녀 온 후기다. 유려한 강연과 좋은 음질의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 저자와 주최측에 감사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