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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평점 :
사춘기 때 시를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어의 영롱함이랄까 깊은 옹송그림이 나의 의식을 붙잡고 놔주질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못 쓰긴 하지만 직접 써 보기도 했다. 써 보면서 이게 과연 시일까?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낯간지럽고, 소름이 돋을 것도 같았다. 시를 아무나 쓰나? 시 쓰는 영혼은 따로 있는 것만 같았다.
후회가 남는다. 이왕 그렇게 알기 시작한 시라면 깊이 빠져 볼 걸 어쩌자고 한쪽 발만 잠깐 담그다 말았을까? 핑계 같은 예기지만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고, 사랑할 용기가 없어 시작도 못하고 뒤돌아서버린 형상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시를 잊은 걸까, 시가 나를 잊을 걸까? 전자가 됐든 후자가 됐든 잊힌 존재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나는 시를 잊었다.
그렇게 된 것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우리나라가 언제 시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 특별히 이 나라 교육이 시를 좋아하도록 권장한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권장은 고사하고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시를 음미하고, 좋아해야할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했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했다. 세상에 모든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을 좋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를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제도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니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면 정신분열에 걸리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시는 솔직히 담이 높다. 여간해서 자신의 실체를 한 번에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무슨 스무 고개라도 하듯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보여주는 것이다. 몇 번씩 곱씹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스피드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시는 생리적으로 잘 안 맞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시 세계 전반에 흐르는 엄숙주의는 어떠한가? 홀로 고고하다. 80년 대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낙서 같은 대중시가 유행했었다. 그에 포문을 열었던 게 원태연 시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를 두고 얼마나 문단계와 대중이 말이 맞았던지. 나 같이 어정쩡하게 시를 좋아하다 만 영혼은 정말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 그럴 바엔 아예 시에 냉담해지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지금은 그 시 보다 더 문턱을 낮춘 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단계가 시를 더 고립시켰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린 왜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러기 전에 시인은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자. 이 책의 저자 장석주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오만한 영장류의 시대는 얼마나 지속될까? 생물학적 피폐화의 시대, 멸종의 시대는 금세기 안에 끝난다. 공생과 공존의 감각을 키우고,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채 일방적 독주를 하는 한 인류 문명은 종말을 맞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단단한 믿음에 구멍을 내고, 인류와 동물들, 문명과 자연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과 균형을 찾아줄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고 월트 휘트먼의 말을 인용해 말한다(46p). 우리가 의사가 왜 필요한지, 교사는 왜 있어야 하는지, 상인과 정치가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작가 특별히 시인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모르는 사람은 시인을 그저 이상주의자고, 신선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린 시인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리와 아름다움의 주춧돌, 인간의 시간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광대함이자 인간 마음의 최대치고,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졌으며, 방랑자, 게으름뱅이, 판관이다. 비율과 형평을 맞추는 자들이고,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찰라에서 영원을 보고, 언어, 징후, 신호, 상징에 민감한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리듬의 직조이며, 노래의 적자며, 좋은 시인은 항상 생성과 소멸에 민감하고,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일상에 흔히 존재하는 사람 같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이 일상적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명징하고 묵시적인 존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이 시를 쓴다. 여기서 먼저 짚어봐야 하는 것은 시는 원래 그렇게 만만히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낯설고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으로 쓰기 때문이다. 위에서 난 시를 멀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이 이유가 더 근본적이지 않을까? 시 보다 소설이 좋은 건, 소설은 논리와 합리적으로 말이 되게 풀어나가면 된다. 은유 보다 직유를 사용해 복잡하지가 않다. 가끔 내 마음도 내가 모를 때가 많은데 온갖 은유로 무장된 시에서 언제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음미한단 말인가? 그런 것은 내 취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를 쓴다. 그들은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로 끝난다. 고양이를 “밤의 야경꾼”이라 쓰고, 비 온 뒤 길에 고인 물웅덩이를 “길의 눈동자”라고 한다. 확실히 멋진 은유다.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은유화라고 했고, 진정한 의미를 낳는 것이 은유라고 했다. 창조의 번뜩임이고, 언어의 가능태가 곧 은유다.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는 없으며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만 있다고 했다. 그건 확실히 직유로 이루어진 소설 보다 낭만적이고 은밀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통음 난무하는 자들의 외침, 산모의 허공을 찢는 비명, 사물들의 속삭임, 편물 기계들이 내는 소음들, 새벽이나 황혼 같은 기후들이 내는 소리, 악마와 연인의 목소리, 얼음과 바람이 내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이를 세계에 중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제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으로 이끈다. 과연 멋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시인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살로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나쁜 시는 무엇인가? 사실 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 대는 시, 큰 진실, 큰 목소리, 넘치게 옳은 소리가 작은 소리, 여린 것들의 속삭임, 가냘픈 것들이 내는 소리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쁜 시 또는 악시(惡詩)다. 또한 직유는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오직 나쁜 시인들만 직유를 남발한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고 하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쓴단다. 좋은 시집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집’이다! 좋은 시집들은 대개 좋은 이미지의 백과사전이다.
또한 그것은 시에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노르웨이 국민시인 올리브 하우게의 시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에서 밝힌 의미이기도 하다.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 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그는 매일 시 한 편을 쓰고 싶다고 소박한 갈망을 표현했다. 시는 엄청난 영감이나 고매한 착상이 아니라 “떠오른 생각, 일어난 일, 무언가 주의를 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것은 시는 그렇게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를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자. 시는 늘 우리 가까이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하기만 하고 진실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삭막한가. 어떤 이는 말했다.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깝다. 시는 바로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것.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중국 치마 차파오 같은 거라고.
그렇구나. 시는 그렇게 앙큼하고 엉큼한 것이로구나. 이것을 모르고 감히 덤비려 했다니.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어찌 보면 사변적이긴 하다. 함민복 시인이 언젠가 자신의 시에서 내 시를 팔면 얼마의 돈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게 더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만 정의된다면 누가 시인을 할까? 그렇게 사회적인 의미로만 시인이 해석되어진다면 또 말하건대 세상은 피곤하고 삭막하다. 누군가는 세상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시인은 이 세상의 피곤과 삭막함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맞다.
저자는 시와 철학은 친척관계라고 했다. 시를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한다. 저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알만한 소설가들은 처음엔 시를 쓰다 소설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가 소설을 쓰기 위한 전단계로 오해하면 안 될 것이다. 시는 그 나름의 존재의 무게와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평생 이 시의 감옥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장석주는 책을 알뜰하게 읽고 살뜰하게 글을 쓴다(이 책은 세 번째로 읽는 책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문장노동자라고 했는데 그의 그런 구도자적 자세는 정말 본받고 싶다. 그런데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조금은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만큼 빼어나고 진지하게 시를 인문학적으로 잘 정의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를 읽다 문득 시와 시인이 뭔지 알고 싶어지거든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