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위로가 되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 뉴스룸 뒤편에서 전하는 JTBC 작가의 보도 일기
임경빈 지음 / 부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좀 묘하다 싶다. 뉴스가 위로가 되는 이상한 시대라니?

뉴스는 그러면 안 되는 건가? 그게 언제부터라곤 정확히 모르겠는데 암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뉴스는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는 내 주위에 일부러 뉴스를 보지 않는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스가 희망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 좋은 소식, 이를테면 정치인들의 싸움과 비리. 그것은 경제인들도 마찬가지고, 온갖 사건과 사고만 전달해도 한 시간이 빠듯할 정도다. 그 소리가 단순히 시끄러워서가 아니다. 매일 그런 소리만 듣는다고 해 봐라. 가위 눌린다. 그래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스가 무슨 죄인가? 뉴스는 그저 있는 사실을 전달할 뿐인데. 문제는 그런 사실을 영산해 내는 사회 전반의 시스템이 문제 아닌가? 그런데 뉴스도 반성할 필요는 있다. 그것만이 보도 거리는 아니지 않는가. 좀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들도 찾아보면 많을 텐데 왜 그리도 우중충한 소식만 전하는 건지. 그게 또 어떻게 보면 뇌의 작용인지도 모르겠다. 나쁜 것, 부정적인 건 잘 잊히지 않는 것. 그래서 분명 좋은 뉴스도 전달했는데 그것을 잊는 것이다. 기자로선 각인될만한 걸 취재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순환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랬던 뉴스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생활밀착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뉴스 할 시간이면 TV 앞을 떠나 있거나 다른 채널로 돌렸던 것도 언제부턴가 오히려 그 시간이면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효과를 얻었다.

 

글쎄, 뉴스가 위로가 되는지 어쩌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난 저자가 팩트체크에서 일한다는 JTBC의 뉴스룸을 보지 않으니까. 그건 일부러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할 시간에 난 아직 TV를 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뉴스룸에 팩트체크가 만들어지고 나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뉴스를 볼 맛이 난다고 칭찬을 듣곤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뉴스하면 지상파 3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공영의 의무를 다해야할 지상파 방송사들이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차단해 왔다.

 

그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 예가 세월호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이런 중요한 사안을 지상파 3사들은 늑장 보도를 하거나 아예 보도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에 비해 뉴스룸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다. 바로 이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줬다는 점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을 못했다. 이런 뉴스 뒤에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뉴스는 당연 기자들이 만든다고 생각했다. 자료 화면은 물론이고, 보도 멘트까지. 그런데 나 같은 경우 그 뒤에 숨은 작가가 있을 수 있다는 어렴풋이 알게 됐던 건 우연히 책 <탄핵, 헌법으로 체크하다>의 독자와의 만남에서다. 거기에 공저자들이 공교롭게도 그 유명한 뉴스룸 기자와 작가로 이루어진 제작진들이다. 그중 한 명이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하고.

 

무엇을 쓰는 작가든 작가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자기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은. 왜냐하면 작가는 문자로 말하고,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들이니까. 그런 점에서 뉴스 보도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뉴스 보도 작가들이 뭘 할까? 기껏해야 기자들이 취재해 온 것을 입에 맞게 다듬어 주고, 자막 다듬고 뭐 그런 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거의 기자 못지않게 현장을 누비고 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뉴스 보도 작가는 거의 대부분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

 

프리랜서. 멋진 말이긴 하다. 중세 시대 용병에서 나온 말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돈만 주면 대신 싸워주는 사람. 즉 다시 말해 일 해주는 사람.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놀고 싶으면 언제든지 노는 사람. 하지만 이것이 어느 나라, 어떤 집단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의미와 대우가 달라질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선 빛 좋은 개살구고, 전문직이긴 하나 비정규직이란 카테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리랜서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방송사들이 말이 좋아 외주 제작이지 말하자면 자기네들 손쉬운 방법으로 하청을 주는 것이다. 그게 훨씬 직접 제작하는 것 보다 비용이 싸게 먹히니까. 그리고 하청은 어떻게든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 재하청을 준다. 거기에 끼어서 일하는 사람이 프리랜서이고 하청인의 다른 말인 셈이다. 계속 그러다 보면 비용 단가만을 생각할 뿐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뒷전인 것이다. 다 먹고 살자는 취지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하청만 돌리다 보면 우리나라는 하청 산업 구조를 면할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을 탈피해 보겠다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모색하고 있긴 하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는지.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프리랜서란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계약직이고, 비정규직의 곁가지라고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만큼 저평가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여타의 나라에선 비정규직일수록 페이가 쎄다고 하는데 말이다. 저자는 방송 작가도 계약직인 만큼 4대 보험이 안 되고 여러 가지 수당을 생각할 때 못해도 월 300은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웬만한 베테랑이 아니고선 그러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놀라운 건, 자신이 20년 전 초보 작가 때 받았던 임금을 여전히 받고 있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동안 물가상승률이 얼만데. 그나마 최근에 작가 유니온이 생겨서 점점 좋아지고 있기는 한단다.

 

사실 이렇게만 말하면 이 직업에 별로 희망이 생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저자는 시사 보도 분야에서 일한지가 20년이다. 자신의 프리랜서로 일한 경험을 살려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높여 갈 것인가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러한 선배들이 있기에 후배들이 닦아놓은 길과 터 위에서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방송 작가로서의 애환, 방송 작가가 하는 일, 방송 작가의 비전과 전망 등을 나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하지만 왠지 흥미롭기 보단 뭔가 모르게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이 분야에 대한 책은 나로선 처음 접하는 것이긴 한데 아직도 정착이 안 된 분야다 보니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오늘도 한 책을 읽었는데, 어떤 것이 문제가 되면 그 분야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줘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갑질이 문제라면 그 사건을 보도하는 단편적인 뉴스에만 의존하지 말고, 갑질이 왜 문제인 건지, 갑질을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는 개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그처럼 방송 작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랬다고, 이렇게 뉴스룸이 인기고 그에 따라 방송 작가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들을 어찌 알겠는가? 하청 산업 구조가 문제고, 그에 따른 삶의 질적 저하가 문제라면 그것을 적극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자리는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드는 거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 작가를 사회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그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런 책들이 더 많이 나와 줘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만 기억하자. 결국 이 책이 말하는 건 하나다. 일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제발 그런 날이 나도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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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1-01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랜서라는 단어가 용병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을 들으니, 창을 들고 이번 **에서 싸우는 걸로 하고 계약하는 군인이 생각났어요. 전에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외국어라서 그런지 조금은 좋아보였는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잘 모르지만, 어쩐지 그 분야 전문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stella.K님, 저녁이 되니 바람이 없어도 공기가 차가워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stella.K 2017-11-01 18:53   좋아요 1 | URL
뭐 일반 비정규직 보단 다소 고급져 보이긴 하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보다 저평가 되어 있으니
비정규직과 나을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일하기 좋은 세상이 돼야
살맛도 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니 걱정입니다.ㅠ

2017-11-01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1-02 14:01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면 외주 하청 문제 생각 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책에서 가짜 뉴스 감별법에 관해서도
언급하긴 했는데 방송국들 정말 반성 많이해야겠는데요?
이렇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떠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잘 모른다구요.
알아도 내 문제가 아니니까 대충 뭉개고 넘어가구요.
아, 정말 구제불능입니다.ㄷㄷㄷ

페크pek0501 2017-11-02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어느 지방의 뉴스 앵커와 말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원고를 다른 이가 써 주고 자기는 그것을 읽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라고 해서 놀란 적이 있어요. 뉴스 앵커가 직접 원고를 써서 말하는 줄 알았거든요.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선 이동진 진행자가 오프닝 멘트를 하고 나서 이거 잘 쓴 것 같다고 오프닝 멘트를 써 주는 작가를 대놓고 칭찬해서 놀랐죠. 그것마저 남이 써 주다니...

님의 글이 우리가 모르는, 무대 뒤의 진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시네요.

stella.K 2017-11-02 14:05   좋아요 0 | URL
토크쇼는 작가가 따로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근데 시사는 모르겠는데 뉴스는 오해하기 쉬운 것 같아요.

근데 이 책은 뭔가 의도는 좋은 것 같은데
내용면에선 뭔가 좀 아쉬운 느낌이 들더군요.
그림도 너무 많구요.
물론 덕분에 눈은 덜 피로하긴 했지만.ㅋ
 
릿터 Littor 2017.8.9 - 7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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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 민음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새로나온 <릿터 8>을 내일(그러니까 오늘) 발송한다고. 순간, 아!했다. 리뷰 쓰는 것을 잊어 먹은 게 생각난 것이다.

 

그런데 하도 띄엄 띄엄 읽으니 이제와 리뷰를 쓰려니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나이 땐 뒤돌아서면 잊어 먹는다. 그래도 전화기 냉장고에 안 집어넣는 게 어디냐?

 

자, 생각을 차근차근 되짚어 보면, 마가릿 애트우드를 특집으로 다룬 게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 <시녀 이야기>로 유명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은 우리나라에 수 권 번역되어 나와있다. 여기전 그동안 애트우드의 책을 번역했거나 편집한 사람들이 애트우드에 관해 얘기한 거랑 그녀의 인터뷰가 실려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얼마 전, 모처에서 올해의 노벨문학상을 맞히는 퀴즈가 있었는데 거론된 작가 중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안 작가니 이 사람을 선택했는데 알다시피 나는 미끄덩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새롭게 연재에 들어간 <<문학사 굿즈샵>>이다. 그러니까 8,90년대 유명작가들이 글을 쓰면서 애용한 물품들을 소개한 글인데, 첫번째로 <워드프로세서 '르모'의 추억>이다. 좀 놀라웠던 건, 아직도 육필을 고수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바인데(그중 잘 알려진 게 김훈 작가일 것이다), 반대로 육필을 고집할 것 같은 작가가 워드프로세서라는 당대 첨단의 도구를 선호했다는 것. 대표적인게 고 박완서 작가라는 사실. 그는 더 이상 파지를 내지않아 좋다며 애용의 변을 남겼다고.

 

워드프로세서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80년 대 말, 90년 대초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전까지 작가가 글을 쓰려면 그렇게 육필로 쓰거나 전동 타자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부였다. 타자기도 있는 사람이나 쓸 수 있는 거지 작가라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리라.

 

작가가 꿈이었던 나도 워드프로세서가 무척 갖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한창 갖고 싶었던 시절은 개인용 PC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때라 내가 워드프로세서를 갖고 싶다고 하면 하나 같이 그럴 바엔 돈 조금 더 보태서 PC를 사라고 권유 받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내 주제에 무슨 PC는...기계치에게 PC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컴퓨터 관련학과를 졸업하고 비교적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동생으로부터 PC를 물려 받았다. 유난히 모니터가 누런 게 담배에 찌든 느낌이 나는 286 컴퓨터였다. 마침 그때는 내가 연극 대본을 막 쓰기 시작한 때여서 누렇거나 파랗거나 따질 게제가 아니었다. 그냥 뽀대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동생은 쓰던 컴퓨터를 주게되서 미안했던지 프린터기를 사 주기도 했다. 지금 노트북이나 태블릿 PC를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얘기다.

 

문득 이 코너를 읽고 있는데, 나에게 있어 굿즈는 뭘까를 생각해 봤다. 그건 역시 노트북은 아닐까 한다. 나는 이제 거의 육필로 글을 쓰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기만큼은 육필로 써 볼까 했는데, 습관이 무섭다고 도저히 기분도 안 나고 힘들어 못 쓰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블로그다.

 

언젠가 내 책 후기에도 그런 얘기를 썼지만 블로그는 나의 굿즈이면서 동시에 나의 글쓰기를 대변한다. 얼떨결에 독서 에세이를 냈지만 그 보단 내 블로그질이 훨씬 더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아무튼 '문학사 굿즈샵'은 상당히 흥미로운 코너임엔 틀림없다. 두 번째 편은 어떨지 기다려진다. 

 

그밖에 단편 소설로는 장강명의 소설이 눈에 띈다. 장강명을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나로선 아직 판단이 서질 않지만, 그의 단편 '괜찮아요' 는 나름 괜찮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나운서에 도전하는 미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잔잔하게 잘 읽혔다. 시작 전 작가의 사진이 실려있는데 선하고, 장난기 가득한 안경 낀 얼굴이 왠지 미워할 수 없는 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새로 안 사실이었는데, 창원 MBC가 살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능청스럽게 찔러넣은 것이다. 근데 이 작가 그렇게 열심히 글을 쓴다며? 열심히 글 쓰는 작가를 싫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최진영의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글 쓰는 태도가 나와 비슷한 것 같은데, 나 역시도 글을 쓰면서 고쳐 쓰기를 같이한다. 그녀와 내가 다른 건, 그녀는 그렇게 써서 어쨌든 책을 내지만 나는 쓰다가 엎는다는 것. 아, 소설 쓰기는 세상에 못할 일중의 하나인 것 같다.  

 

또한, "출근 시간도 한참 지나서 잠을 깼다."로 시작하는 시 '카프카, 당신도 나를 찾았었지' 도 독특하다. 흔히 보아 온 시가 아니다. 무슨 시가 활자가 그리도 많은지. 시 같기도 하고 짧은 에세이 같기도 하다. 이런 시도 나름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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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2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님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누구 찍었어요? 저는 줄리언 반스를 찍었어요. 마거릿 애트우드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인데, 2013년 수상자 앨리스 먼로가 애트우드와 같은 캐나다 출신이라서 올해는 물 건너 갔다고 생각했어요. 애트우드가 상을 받으려면 몇 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나온 《시녀 이야기》 드라마판에 대한 반응이 좋고,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어서 애트우드가 올해 상을 받았으면 이견이 없다고 생각해요. ^^

stella.K 2017-10-13 13:2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애트우드 찍었다 미끄덩이었다니까.
근데 이 사람이 캐나다 사람이었어?
난 영국인 줄 알았다능...ㅠ
글치않아도 <시녀이야기> 드라마가 나왔다고 해서
나도 관심 폭증인데 최근에 나온 건가 보지?
내가 보려면 시간 좀 들여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너의 굿즈는 뭐니?
그것 좀 알면 안 되겠니..?ㅋ

cyrus 2017-10-13 13:32   좋아요 0 | URL
제가 굿즈를 받으려고 책을 사겠습니까? ㅎㅎㅎ 당연히 제가 좋아하는 굿즈는 책이죠. ^^

stella.K 2017-10-13 13: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군. 당연한 걸 다 물어 보고 말이지.
나쁜 누나다. 그지?ㅋㅋㅋㅋ

서니데이 2017-10-13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의 굿즈는 티코스터가 인기입니다.^^
오늘 아침에 기온이 서울은 6.1도 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오후는 어제보다 조금 더 기온이 오른 거라고 해요.
stella.K님,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stella.K 2017-10-14 11:49   좋아요 1 | URL
오, 그 이쁘고 앙징 맞은 티코스터요!
글치 않아도 저의 커피잔이 엉덩이가
따뜻하다고 하네요.ㅎㅎ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습니다.
이제야 가을 날씨답다 싶긴한데
앞으로 점점 추워질 거 생각하니까
얼마 전까지의 날씨가 그리워지네요.
서니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시길....!^^

페크pek0501 2017-10-14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오랜만에 들어 보는 반가운 이름입니다.
저도 워드프로세서를 살 생각이라고 말하면 돈을 더 보태서 컴퓨터를 사란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집에 팩스는 있었어요. 그래서 원고지에 쓴 것을 팩스로 어느 잡지사에 보내는 일을 했던 적이 있는데 어느 시점부터 이메일로 제출하는 시대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팩스는 무용지물이 되었죠.
팩스 시대에서 컴퓨터 시대로 전환되던 그때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stella.K 2017-10-14 18:21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팩스!
전 이게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어떻게 이쪽에서 보내면 저쪽에서 받을 수 있는지...
진짜 이메일 생기고부턴지 아님 우리 나이가 그래서인지
편지도 잘 안 쓰게 되더라구요.
대신 이렇게 실시간 댓글을 쓰는데 편지가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구요.ㅎ

서니데이 2017-10-14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컴퓨터가 있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 인터넷 전용선이 집집마다 들어오는 시기부터는 컴퓨터가 가전처럼 된 것 같고, 요즘은 휴대폰도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데, 가끔 팩스로 보내달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집에는 팩스가 없어서 조금 불편해요. 그러면서 아직도 팩스를 많이 쓰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stella.K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7-10-14 18:51   좋아요 1 | URL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혹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있긴 있나보군요. 신기해라.ㅋ

그래요. 서니님도 미투요!^^

transient-guest 2017-10-17 0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이핑과 손글씨로 하는 작업의 가장 큰 차이는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손으로 쓸 때보다 훨씬 빨리 글이 나오는데, 익숙해지고나면 이게 거의 로보트처럼 작업이 됩니다. 손으로 쓰던 시절에는 생각하면서 한줄씩 채워보던 것이 쓰고 지우고 재구성을 반복하면서도 멈춤없이 계속 작업이 되는 것이 타이핑 같습니다. 시험을 손으로 치룬건 대학시절이 끝이고 이후엔 늘 노트북을 들고 다녔어요. 워드프로세서는 92-93년 정도에 잠깐 사용한 기억이 있지만, 이후론 늘 PC가 곁에 있었습니다.ㅎㅎ

stella.K 2017-10-17 13:25   좋아요 0 | URL
그래요. 맞아요. 손으로 쓰면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쓰고 지우고 재구성하고.
그런데 기계에 익숙해져 버리면 그런 신경이 이예
퇴화되버리는가 봅니다.ㅠ

와, 근데 워드프로세서를 직접 써 보셨군요.
저는 주위에 pc 권하는 사람만 있었지 그걸 쓰고 있다는
사람은 못 만났습니다.ㅎ

2017-10-18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0-19 13:25   좋아요 0 | URL
아, 네. 즐독되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현대작가들 A To Z
캐롤라인 타가트 지음, 앤디 튜이 그림, 정윤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좀 대박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현대 작가가 어디 52명만 되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스티븐 킹이나 폴 오스터, 이제 노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하루키 같은 작가는 명단에서 제외됐으니 섭섭하다 못해 서러울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보니 보르헤스는 살아생전에 왜 자신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는데, 노벨상이야 1년에 딱 한 사람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이 많은 사람들 중 자기 이름이 없다는 건 더 섭섭한 일이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지은이의 말을 보니 차라리 520명을 선정하라면 날 것 같다고 그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선별 기준은 현대적이면서 ‘20세길 빛낸에 방점을 뒀다. 그러고 보니 여기 나와 있는 52명의 거의 대부분은 생존해 있지 않다. 재밌는 건, 52명의 명단 중엔 프루스트가 1871년 생으로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젊은 사람은 1954년 생 가즈오 이시구로다. 그렇다면 이시구로는 그렇다 쳐도 프루스트는 현대 작가라고 보기엔 너무 늙은 감이 있다. 이럴 땐 근대라고 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20세기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현대라고 굳이 우겨도 할 말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애초에 거론한 작가는 지금도 건재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니 ‘21세기를 빛낸 작가명단에나 넣어줄 모양인가 보다.

 

어쨌든 내가 이 책을 두고 대박이라고 한 건 편집이 너무 잘 돼 있어서다.

52명의 작가마다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고, 비교적 짧게 그들의 삶과 주요 활동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 그들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게 어찌 보면 잘 빠진 작가 인명사전 내지는 잡지? 그런 느낌이 든다. 또 이런 식으로 현대 미술가와 영화감독을 다룬 책이 두 권 더 나와 있다. 이것 역시 52명만 다루고 있는데 다이제스트로 훑어 볼 수 있어 마음에 든다.

 

사실 나 같은 만연체주의자가 짧은 글, 다이제스트를 좋아할 리 만무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책장 귀퉁이에 각 작가의 잘 안 알려진 사실을 슬쩍 끼워 놓기도 했는데 확실히 그건 보너스다. 원래 책을 좋아하면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가 알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주는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내가 모르는 작가도 몇 있다. 예를 들면 치누아 아체베나 제임스 볼드윈(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은 연상케 한다), 조라 닐 허스턴클라리시 리스펙토르, R.K. 나라얀 같은 작가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거의 알지 못했다. 새롭게 알게 되서 좋았다. 작가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보부아르는 남성중심주의를 공격하고 뒤흔든 최초의 작기일 것이다. ....<제2의 성>(1949)을 통해 남성이 영성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여성성을 논했다.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여성이 주어진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남성과 여성 모두 실의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 우연히 자궁을 가지게 된 암컷 인간과 여성을 구분 짓고, 여기서 비롯되는 문화적이고 감정적인 관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26p)

1969년 베케트는 ‘현대인의 결핍을 작품 속에 새로운 형식으로 승화시키고 표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32p)

"당신은 지금 이탈로 칼비노의 새 소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를 읽게될 것이다. 긴장을 풀고 주의를 집중하라. 다른 생각은 모두 떨쳐 버려라.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흐릿해지도록 내버려 두어라."
칼비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첫 장에서는 계속해서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읽기에 가장 편한 자세를 알려 주고, 이책을 고른 이유를 논하며, 책을 읽는 방법을 이야기한다.(38p)

소설 <페스트>(1947)는 1941년 알제리를 휩쓴 티푸스 전염병 전염병을 바탕으로 하지만, 크게 보면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관한 풍자이자 세계의 전반적인 악을 반영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42p)

카뮈는 감성과 감각이 결여된 작가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실제로 카뮈의 문장은 무미건조하고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페스트>에서 주인공이 ‘사랑 없는 세계는 죽은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듯이, 슬픔과 사별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그는 독자를 죽음과 절망 속으로 이끈다.(44p)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소설로 옮겼다. 찻 번째 작품<낙원의 이쪽>(1920)의 주인공은 젊은 방랑자로, 사랑 쪽으로는 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장차 문학계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66p)

피츠제럴드는 장편 사이사이에 단편을 써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단편에는 매번 외로운 아웃사이더나 얼마 후면 낙담하게 될 것이 뻔한 낙관적인 젊은이가 등장한다. 피츠제럴드는 한 번도 자신의 작품에 만족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작품은 수많은 작가에게 꾸준히 사랑을 미쳤다. 찰스 잭슨의 소설 <잃어버린 주말>(1944)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대학 강사는 책장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며 문학 수업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흠 잡을 데 없는 소설이란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소설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69p)

골딩의 작품 저변에는 언제나 야만성이 자리 잡고 있다. <후계자들>(1955)에서 네안데르탈인 무리가 기이하고 사악한 존재와 마주치는데 이 존재는 결국 인간으로 밝혀진다.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자유 낙하>(1959)에서는 사회의 붕괴로 안정적인 기반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한다.

골딩은 충격적인 결말의 대가로 일컬어지며, 처음 읽을 때를 놓친 부분을 찾기 위해 책을 다시 읽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깊이 걱정하는 문제와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문제를 글로 옮겼다고 설면했다.(75~76p)

고디머는 거의 모든 소설에서 서로 다른 인종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78p)

"사실이란 언제나 진짜 있었던 일보다 부족하게 마련이다."
나딘 고디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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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05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으면 작가 작품들도 읽고 싶어져요. 작가 리스트를 봤는데, 이 책 한 권만 봐도 작가 이름과 작품명만 줄줄 꿸 수 있습니다. ^^;;

stella.K 2017-09-05 12:11   좋아요 1 | URL
맞아. 그래서 읽은 거야.
물론 작가의 자서전이나 전기를 읽을 수도 있지만
다 읽을 수는 없잖아.
이 책 영화감독 편도 읽고 싶어지더군.

2017-09-0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9-0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이네요ㅎ 영화감독편도 궁금합니다!

stella.K 2017-09-09 18:46   좋아요 0 | URL
생각 보다 꽤 괜찮더라구요.
영화감독편은 찌찌뿡입니다.^^
 
릿터 Littor 2017.6.7 - 6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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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떻게 운이 좋아 1년인가, 10개월치 정기구독권을 무료로 받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리뷰를 쓰지 못했다. 다 게으름 탓이겠지만 이건 또 독자로서의 예의는 아닌듯하여 늦게라도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은 지가 좀 되서 자세한 리뷰는 좀 어려울 것 같고,

전에 창간호를 산 적이 있는데 그때는 (돈 주고 사서일까) 좀 낮선 느낌에 딱히 나쁘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호들갑 떨고 싶으리만치 좋다는 느낌도 안 들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읽을 거리도 많고 재미가 쏠쏠했다.

 

기억에 남는 건, 장강명 작가가 창간호 때부터 우리나라 문학상을 고찰하는 글을 써왔는데 그게 나름 흥미가 있었다. 이번호까지 다섯번의 연재로 마무리가 되는데 그 나머지는 단행본에서 이어질거란다. 물론 우리나라 문학상이 문제가 많지만 그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올만큼 할 얘기가 많았나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하긴 최근 어느 일본 작가가 세계적인 문학상에 대한 수다를 책으로 낸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할 말이 많긴 많은가 보다. 문학상도 문학상이지만 출판사 역시도 확실한 지명도가 있지 않으면 책을 잘 안 내려고 하니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쯤 정상화가 될지 모르겠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선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독자더러 순순하게 작품으로만 판단해 달라고도 한다는데 과연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올까 싶다.

 

또한 릿터는 주목 받고 있는 외국 작가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번엔 미셸 뷔시를 다루었다. 누구냐면 <검은 수련>, <절대 잊지 마> 등 주로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인데 요즘 부쩍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많다. 무엇보다 북 디자인이 상당히 매력적인데 특히 <검은 수련>은 뭔가 악마적이면서도 고혹적이라 나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의 인터뷰는 젊고 잘 생긴 문학평론가 허희가 인터뷰어로 나섰는데, 작가도 작가지만 그가 나섰다니 더 관심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엔터테이너적이어도 되는 건지.

 

그 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소설이다. 특히 아킬 샤르마란 젊은 인도 태생의 작가의 '모험과 즐거움이 가득한 삶' 단편은 의외로 잘 읽혔다. 이야기는 섹스 밝힘증이 있는 주인공이 이제 그만 정리하고 결혼할 사람을 만나 조신하게 있다 결혼하려고 하는데 그걸 앙큼하게 어기고 적당히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는  뭐 그런 얘긴데 유쾌하다. 그래봤자 주인공은 섹스 머신 같긴하지만.

 

그리고 이어서 구병모와 최영건의 단편도 나오는데 웬만하면 읽으려고 했는데 못 읽었다. 왜 그리도 재미가 없던지. 어제도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었는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은 이야기를 좀 재밌게 쓸 필요가 있다. 여성 작가는 재미없을 거라는 인식이 남성 작가에 비해 높다는 것이다. 내러티브가 약한 건가 아니면 크리에이티브 정신이 부족한 건가? 독자로서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읽을 새도 없지만 솔직히 겁이난다. 재미없고 돈만 버렸다는 느낌을 갖게될까 봐. 

 

이번호에서도 에세이스트 서경식의 글은 계속되고 있는데 그의 글발이야 뭐 이미 정평이 나있는 거고, 글중에  특별히 프리모 레비를 다루고 있어 관심있게 읽었다. 언제고 프리모 레비의 글도 읽어줘야 할 텐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이 잡지가 <악시트>보다 한 달 늦게 나온 줄로 알고 있다. 이 잡지도 작가의 인터뷰가 눈에 띄는데 <악시트>를 내고 있는 출판사는 벌써 그 부분을 따로 떼어 한 권의 책으로 내기도 했는데 이 잡지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지 조용하다. 따로 책으로 내도 괜찮을텐데.

 

잡지는 말 그대로 잡스러운 책이고 난 잡지에 별로 욕심이 없었는데 자꾸 보니 그도 욕심이 난다. 무엇보다 팔거나 내다버리지 못하겠다. 이런 거 잘 모아두면 나중에 괜찮은 기록물로도 남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모아두면 짐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쩌나 무료 정기구독 기간이 끝나도 계속 읽고 싶어질 것 같다. 이런 선물은 안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역시 공짜는 양잿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 같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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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9-0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9월 1일입니다. 즐겁고 좋은 시간 꽉꽉 채워서 보내세요.
어쩐지 매일 좋은 일들 많이 생기는 그런 한 달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stella.k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stella.K 2017-09-01 19:4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9월, 좋은 가을되기 바랍니다.^^
 
은유의 힘
장석주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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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때 시를 잠시 좋아한 적이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언어의 영롱함이랄까 깊은 옹송그림이 나의 의식을 붙잡고 놔주질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못 쓰긴 하지만 직접 써 보기도 했다. 써 보면서 이게 과연 시일까?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낯간지럽고, 소름이 돋을 것도 같았다. 시를 아무나 쓰나? 시 쓰는 영혼은 따로 있는 것만 같았다.

 

후회가 남는다. 이왕 그렇게 알기 시작한 시라면 깊이 빠져 볼 걸 어쩌자고 한쪽 발만 잠깐 담그다 말았을까? 핑계 같은 예기지만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고, 사랑할 용기가 없어 시작도 못하고 뒤돌아서버린 형상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시를 잊은 걸까, 시가 나를 잊을 걸까? 전자가 됐든 후자가 됐든 잊힌 존재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나는 시를 잊었다.

 

그렇게 된 것엔 나름의 이유는 있다. 우리나라가 언제 시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 특별히 이 나라 교육이 시를 좋아하도록 권장한 적이 있었는가 말이다. 권장은 고사하고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시를 음미하고, 좋아해야할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했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 했다. 세상에 모든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을 좋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를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제도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니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면 정신분열에 걸리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시는 솔직히 담이 높다. 여간해서 자신의 실체를 한 번에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무슨 스무 고개라도 하듯 아주 조금씩 천천히 보여주는 것이다. 몇 번씩 곱씹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데 스피드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시는 생리적으로 잘 안 맞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시 세계 전반에 흐르는 엄숙주의는 어떠한가? 홀로 고고하다. 80년 대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낙서 같은 대중시가 유행했었다. 그에 포문을 열었던 게 원태연 시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를 두고 얼마나 문단계와 대중이 말이 맞았던지. 나 같이 어정쩡하게 시를 좋아하다 만 영혼은 정말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 그럴 바엔 아예 시에 냉담해지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지금은 그 시 보다 더 문턱을 낮춘 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단계가 시를 더 고립시켰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린 왜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러기 전에 시인은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자. 이 책의 저자 장석주는 이런 말을 한다. 이 오만한 영장류의 시대는 얼마나 지속될까? 생물학적 피폐화의 시대, 멸종의 시대는 금세기 안에 끝난다. 공생과 공존의 감각을 키우고, 그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채 일방적 독주를 하는 한 인류 문명은 종말을 맞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단단한 믿음에 구멍을 내고, 인류와 동물들, 문명과 자연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과 균형을 찾아줄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라고 월트 휘트먼의 말을 인용해 말한다(46p). 우리가 의사가 왜 필요한지, 교사는 왜 있어야 하는지, 상인과 정치가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지만 작가 특별히 시인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는가? 모르는 사람은 시인을 그저 이상주의자고, 신선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린 시인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리와 아름다움의 주춧돌, 인간의 시간을 가로질러 넘어오는 광대함이자 인간 마음의 최대치고, 고뇌와 기쁨들을 보는 천 개의 눈을 가졌으며, 방랑자, 게으름뱅이, 판관이다. 비율과 형평을 맞추는 자들이고,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찰라에서 영원을 보고, 언어, 징후, 신호, 상징에 민감한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리듬의 직조이며, 노래의 적자며, 좋은 시인은 항상 생성과 소멸에 민감하고, 자기 세계의 한복판에서 산다는 점에서 농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일상에 흔히 존재하는 사람 같지 않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식이 일상적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명징하고 묵시적인 존재가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이 시를 쓴다. 여기서 먼저 짚어봐야 하는 것은 시는 원래 그렇게 만만히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낯설고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으로 쓰기 때문이다. 위에서 난 시를 멀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이 이유가 더 근본적이지 않을까? 시 보다 소설이 좋은 건, 소설은 논리와 합리적으로 말이 되게 풀어나가면 된다. 은유 보다 직유를 사용해 복잡하지가 않다. 가끔 내 마음도 내가 모를 때가 많은데 온갖 은유로 무장된 시에서 언제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음미한단 말인가? 그런 것은 내 취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를 쓴다. 그들은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로 끝난다. 고양이를 밤의 야경꾼이라 쓰고, 비 온 뒤 길에 고인 물웅덩이를 길의 눈동자라고 한다. 확실히 멋진 은유다. 거울에서 타자인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은유화라고 했고, 진정한 의미를 낳는 것이 은유라고 했다. 창조의 번뜩임이고, 언어의 가능태가 곧 은유다. 나쁜 은유, 해로운 은유는 없으며 오직 명석한 은유와 덜 명석한 은유만 있다고 했다. 그건 확실히 직유로 이루어진 소설 보다 낭만적이고 은밀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통음 난무하는 자들의 외침, 산모의 허공을 찢는 비명, 사물들의 속삭임, 편물 기계들이 내는 소음들, 새벽이나 황혼 같은 기후들이 내는 소리, 악마와 연인의 목소리, 얼음과 바람이 내는 소리들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이를 세계에 중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말을 채집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한다.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 말의 제의로서의 시, 그 제의를 주제하는 집정관으로서의 시인. 좋은 시들은 가장 나쁜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남으로 이끈다. 과연 멋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시인가? 감각의 쇄신을 이루고, 세계의 쇄신을 의미의 살로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저를 둘러싼 모르는 세계라는 외부성에 의해서만 성립되고 의미를 품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그 세계와 부딪칠 때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진다. 그런 까닭에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세계의 확장이자 의미 영역의 확장이다.

 

그렇다면 나쁜 시는 무엇인가? 사실 보다 더 큰 진실을 담으려는 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시, 옳은 소리만 해 대는 시, 큰 진실, 큰 목소리, 넘치게 옳은 소리가 작은 소리, 여린 것들의 속삭임, 가냘픈 것들이 내는 소리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쁜 시 또는 악시(惡詩). 또한 직유는 은유의 나쁜 친척이다. 오직 나쁜 시인들만 직유를 남발한다. 좋은 시인들은 이것과 저것은 같다고 하지 않고 이것은 저것이다라고 쓴단다. 좋은 시집은 빼어난 이미지들의 집이다! 좋은 시집들은 대개 좋은 이미지의 백과사전이다.

 

또한 그것은 시에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노르웨이 국민시인 올리브 하우게의 시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에서 밝힌 의미이기도 하다.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 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그는 매일 시 한 편을 쓰고 싶다고 소박한 갈망을 표현했다. 시는 엄청난 영감이나 고매한 착상이 아니라 떠오른 생각, 일어난 일, 무언가 주의를 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찰나를 목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것은 시는 그렇게 작은 진실만을 머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를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말자. 시는 늘 우리 가까이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하기만 하고 진실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삭막한가. 어떤 이는 말했다.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깝다. 시는 바로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것.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중국 치마 차파오 같은 거라고.

그렇구나. 시는 그렇게 앙큼하고 엉큼한 것이로구나. 이것을 모르고 감히 덤비려 했다니.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어찌 보면 사변적이긴 하다. 함민복 시인이 언젠가 자신의 시에서 내 시를 팔면 얼마의 돈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게 더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만 정의된다면 누가 시인을 할까? 그렇게 사회적인 의미로만 시인이 해석되어진다면 또 말하건대 세상은 피곤하고 삭막하다. 누군가는 세상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시인은 이 세상의 피곤과 삭막함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저자의 시와 시인에 대한 정의가 맞다.

 

저자는 시와 철학은 친척관계라고 했다. 시를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한다. 저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에 알만한 소설가들은 처음엔 시를 쓰다 소설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다고 시가 소설을 쓰기 위한 전단계로 오해하면 안 될 것이다. 시는 그 나름의 존재의 무게와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평생 이 시의 감옥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장석주는 책을 알뜰하게 읽고 살뜰하게 글을 쓴다(이 책은 세 번째로 읽는 책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문장노동자라고 했는데 그의 그런 구도자적 자세는 정말 본받고 싶다. 그런데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조금은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만큼 빼어나고 진지하게 시를 인문학적으로 잘 정의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를 읽다 문득 시와 시인이 뭔지 알고 싶어지거든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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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5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8-25 18:18   좋아요 0 | URL
그렇죠?^^

2017-08-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9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