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원고지 -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2000~2010 창작일기
김탁환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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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다. 다시, 쓰는 수밖에 없다. -321p'


그런 말이 있다. 작가가 되려면 글을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어느 한 분야에 도통한 사람이 되라고. 다소 의아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을 가장 잘 증명해 낸 작가로 김탁환 작가만 한 사람이 있을까.


그가 작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을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가 어떤 작가가 될지 알지 못했다. 한때는 열심히 작품을 내다 소리 소문 없이 독자에게서 멀어져 간 작가도 많으니 그도 그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이름 하나가 특이해서 잘 잊히지는 않겠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시쳇말로 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다 할 정도로 유명을 넘어 대작가 되었다. 나 역시도 그의 책을 몇 권 읽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조선을 쓰고 있다. 물론 현대물도 쓰고 다른 여타 장르의 글도 쓰지만 그는 조선 전문 역사 소설가라고 해야 가장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백탑파니 방각본이니 하는 말도 그가 아니면 평생 알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니 몇 년 전 그를 독자와의 만남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익숙히 보아 온 사진과 달리 턱에 난 거뭇한 수염을 제외하면 그는 의외로 소담하고 조근조근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조선에 관한 책을 60권 쓰겠다고 했다. 그때는 그가 <목격자들>이란 책을 30, 31번째로 내놓고 작업의 반환점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조금은 부러웠다. 자기 분야가 확실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뭔가의 자신감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렇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 작품을 탈고하면 바로 다음 날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니 말이다. 대단하다 싶었다. 나 같았으면 탈고했으니 한 일주일 적어도 3, 4일은 쉬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 책은 작가의 지난 2000년에서 2010년까지 기록한 창작 일기다. 

일기만큼 사람의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나는 읽자마자 금세 빠져들었다. 왜 이 책을 이제야 읽었을까. 이 책이 막 발간될 때만 해도 비슷한 시기에 발간된 책들 중 단연 읽고 싶은 책으로 특 A 였는데 말이다. 솔직히 난 그때만 해도 이 작가를 완전히 좋아하지 못했다. 그러니 자꾸 다른 책이 끼어드는 바람에 이내 잊혔다. 변명은 또 있다. 역사 소설을 좋아하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좀 그렇지만 한때는 사극의 열풍이 거셌던 때가 있었다. 그러면 꼭 그 사극의 배경은 조선 시대다. 그것도 당파 간의 싸움과 임금의 여자들의 알력 다툼으로만 모아지는 구조. 그래서 끝까지 본 드라마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생각할 때 왜 하필 조선 시댈까 할 뿐이다. 확실히 사극은 양날의 칼이다. 사극을 통해 역사에 더 가까이 가던가 멀어지던가. 하지만 무엇이 중하단 말인가.


작가만큼 아름답고도 신비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주관이다. 작가는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하고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지적 시점을 견지할 수 있다고 신의 전지전능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적으로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꾸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고 그들을 알고 싶어 진다. 무엇보다 난 그들이 치열하게 쓰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김탁환 작가는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김탁환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닐진대 업계(?)에서는 또 그런 작가를 특별히 반기진 않는가 보다. 가르치는 건 호구지책인 경우가 많으니까. 그는 그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이 두 가지에 최선을 다한다. 인간은 원래 한 가지도 안 하는 게 문제지 닥치면 두 개, 세 가지 일도 해낸다.


그렇더라도 그는 언제 가르치고 언제 글을 쓸까 그저 놀랍기만 하다. 또 그 바쁜 중에도 짬짬이 전시회도 다니고, 영화도 보며 그때그때의 소회를 적기도 한다. 그뿐인가 작업실이 두 갠가 세 곳쯤 되는데 1, 2년마다 한 번씩 두 개를 하나로 합치거나 이사를 하기도 한다. 이사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못할 일 수위에 드는 일이 바로 이사하는 일이다. 책이 오죽 많을까. 소설 쓸 자료들을 모으느라 책이라면 질릴 만도 할 텐데 어떤 이유와 어떤 경로로 책을 손에 넣건 그 책을 읽을 욕심에 그의 헤벌쭉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 책들에 대한 간단 리뷰도 빠지지 않는다. 또한 40을 넘긴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입을 앞둔 고3 학생 이상으로 공부를 하기도 한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겐 체력이 관건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마라토너를 자청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작가가 마라토너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책엔 작가의 건강 관리법에 대해선 특별히 나와있지 않다. 그저 아프면 모든 일을 작파하고 한 번씩 호되게 앓고 일어나는 게 전부다. 그래서 그는 아픈 때를 생각해서 쉬지 않고 글을 썼던 것일까. 아님 그 안에 있는 뭔가의 힘이 그렇게 몰아붙이는 걸까. 라틴어 격언에 그런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나를 일에 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내게 매이게 하려고 애쓴다." 아마도 그도 그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새 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퇴고다. 퇴고에 대해서 그는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쉬면 표가 나며 빨리 정상궤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밤을 새우고 호흡을 되찾아 급해질까 봐 천천히를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그리고 퇴고에 관한 글은 책 여기저기에 빈번히 나타난다. 새 책을 쓰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던 것이 아니라 퇴고하기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작가의 지난한 작업이 종이를 뚫고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의 일기 끝자락에 이런 말을 남겼나 보다. 하나가 완성되면, 또 다른 미완성으로 가는 것! 그게 바로 작가의 운명이라고. 이쯤 되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누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 시지프스. 세상을 사는 사람 치고 시지프스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시지프스의 후예이기에 시지프스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 그가 김탁환이고, 세상의 모든 작가다. 누구는 퇴고로 밤을 새우지만 누구는 이 수고를 감당할 수 없어 대신 이 책을 읽고 있나 보다.      


나는 작가가 외롭고 고독하게 혼자 글만 쓴다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이 글을 쓰는 것도 알고 보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 뭔가의 재능이 있다는 건 세상과 소통하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그는 그런 말을 한다.


...... 이은미의 노래와 말을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적어도 그녀는 이쁘게 노래하는 단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안다. 그 예쁜 단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가를. 나 역시 미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직까지 몸부림치고 있다. 물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때문에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나는 아름답게 쓰지 않고 정확하게 쓰고 싶다. 그 길은? 일단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만들어낸 앞뒤 문맥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나는 또 정확하다는 것이 그런 공부를 넘어선다는 것도 안다.(45p)   


미문만이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뭔가 뒤통수를 때리는 말 같다. 우린 왜 미문을 최고의 문장인 양 알고 살아왔던 것일까. 나도 동의한다. 이은미는 정말 예쁘게 노래하는 가수는 아니다. 마치 어느 흑인 가수가 노래 부르는 듯하다. 흑인들이 언제 예쁘게 노래 부르는 것 봤나? (물론 역으로 예쁘게 부르는 흑인도 있긴 한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밉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예쁜 모습을 포기하고 영혼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 이은미도 그렇다. 나는 어떨까. 나의 문장 하나가 어느 독자에게 와 닿았으면 그래서 글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TV 드라마 작가 중에 시나 독백을 하듯이 대사를 쓰는 작가들이 있다. 얼핏 굉장한 능력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채널을 돌리곤 한다. 저건 드라마가 아니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일상에서 저렇게 대사 하지 않는다. 배우가 저런 대사를 하는 건 그 배우를 통해 작가를 드러내겠다는 속셈인데 드라마에서 작가가 드러나는 건 그 드라마의 실패를 의미한다. 드라마는 오직 주제와 상황과 캐릭터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탁환 작가의 저 말은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예쁘게 쓰기 전에 먼저 정확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은 명심해 둬야 할 것 같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의 일기에 40의 나이에 고별 무대를 갖는 어느 발레리나와의 대화를 적기도 했다. 그 발레리나는 그에게 소설가가 부럽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했더니 발레리나는 40이면 은퇴를 하지만 소설가는 늙어서도 계속 이야기를 만들지 않냐고. 그러자 그는 늙어서까지 진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는 아주아주 드물다고 했다. 오히려 마흔 살도 되기 전에 이야기와 이별을 고하는 소설가도 적지 않다고. 정말......? 순간 내 나이를 생각하고 뜨끔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선 소설은 못 쓰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난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다. 늦게 시작해서 늦게 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작가는 자신이 절필하지 않는 이상 은퇴도 없다. 소설가 중에 절필은 선언해도 은퇴를 선언하는 작가는 있는가? 그는 그저 조용히 사라져 갈 뿐이다. 그러니 김탁환 작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작가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시작하라. 


이 책을 읽으니 비로소 이 작가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생겼다. 김탁환 다시, 돌아왔는가? 다시, 쓰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다시, 그의 책을 읽어야겠다. 그의 책 모두를 읽지는 못하겠지만 중요하게 읽고 싶은 책은 목록을 추려서 다시 읽어가야겠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나도 덩달아 일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주 드문 드문 쓰고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나도 덩달아 쓰고 싶게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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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역사 소설을 쓴다는 건 자기 글감이 떨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하면 문단계에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생각해 보면 자기 삶에서 글감이 넘친다면 굳이 왜 역사 분야에 손을 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소설은 백 프로 창작이라기보다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이것 또한 편견일 수 있겠지만...ㅋ

stella.K 2020-09-20 17:04   좋아요 1 | URL
헉, 그런가요? 그래서 역사소설가들이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어있는 건가요?
그래도 김탁환 정도면 꽤 성공한 작가 아닌가요?
역사 소설뿐만 아니라 수필도 쓰고, 현대물도 쓰잖아요.
사실 김탁환에 대해선 작가 보단 스토리텔러로 보는 경향이 있긴하죠.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어쨌든 자기 분야가 있다는 건 좋은 것 같아요.
말씀마따나 자기 글감이 떨어지면 그거 파서 써 먹으면 되잖아요.ㅋ

hnine 2020-09-21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stella님이 김탁환 작가 좌담회 다녀와서 올리셨던 글 생각나요. 그래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고요. 제가 생각하는 김탁환 작가는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노력형이기도 하고 완벽주의형이기도 한 것 같았어요. 치밀하기도 하고요.
stella님 말씀대로 작가란 정말 매력적이고 신비한 작업을 하는 사람 같아요. 감히 저도 되고 싶기보다는 그들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충실히 음미하고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요. 그것도 좋아요 저는.
이 페이퍼도 몇년 후까지 기억할것 같네요.

stella.K 2020-09-21 18:1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독한 노력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만큼 명성을 얻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밑줄 그은 페이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저 글은 제가 느낀 것의 3분의 1도 채 못 쓴 거예요.
도톰한 책인데 중간중간에 사진이 들어가 있는데
차라리 빼고 본문을 더 늘리지 그런 아쉬움도 들더군요.
기회되시면 한 번 읽어 보세요.
저는 운 좋게도 중고샵에서 천원에 구입했는데
고맙고도 미안하더군요. 김탁환 작가의 책을 이렇게 싸게 구입해도 되나
그런 생각도 들고 꽤 오랫동안 천원에 올라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 좋은 책을 왜 안 사 가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ㅋ

han22598 2020-09-2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역사에 너어무 관심이 없는 일인이지라 김탁환 소설책은 단 한권도 읽지 않았는데,
스텔라님 글 읽으면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역시 탁월한 능력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네요. 열정, 성실. 집념..수많은 노력들이 이루어낸 결과인가 봅니다.

stella.K 2020-09-22 18: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김탁환의 소설은 많은 사람이 좋아하죠.
쉬엄쉬엄 한 번 읽어 보세요.^^

페크(pek0501) 2020-09-29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님, 맛있는 음식 드시고 푹 쉬기도 하는 추석 연휴를 보내세요.

stella.K 2020-09-29 17:54   좋아요 0 | URL
아고, 친히 오셔서 글남겨 주시고. 고맙습니다.
언니도 행복하고 여유로운 추석 보내세요.^^
 
나, 살아남은 자의 증언 - 위장된 3차 대전과 잃어버린 청춘의 녹슨 파편
김정옥 지음 / 늘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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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패러디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뭔가의 흥미를 유발한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가 연극 연출을 했다고 한다. 일반인들에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이 방면으론 거의 대통령급 되시겠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며 한때는 회장까지 역임하셨다니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 에세이인데 스스로를 회색분자라며 젊은 시절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떠나 얘기할 수 없구나 싶다. 더구나 저자는 자본주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삶을 살았다. 예술을 사랑해서 중앙대학을 거쳐 서울 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전쟁 중 프랑스 유학을 할 정도니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하자 비로소 자유를 만끽했고 그 나라의 높은 예술 수준에 푹 빠져 공부했다. 그 점은 독자인 나도 부럽긴 하다. 무엇보다 비슷한 또래의 프랑스인들이 자신은 파시스트니 공산주의니하며 서슴없이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데 놀랐다고 한다. 저자는 좌우익 어디에도 설 수 없는데 말이다. 좌도 우도 선택할 수 없지만 설혹 선택했다 해도 그것을 드러내기엔 우리나라는 얼마나 위험하며 용기가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지금은 우리나라 교육 수준이 높아져 외국에서 유학을 오기도 하지만 역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교육 개방의 기회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또 학생 때 구맥회 멤버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구인회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하니 지적 허영과 호기로움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세대인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회의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로 인해 그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이 죽거나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갔다. 그러면서 전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려고 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건 당연하다.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인데 거기에 어찌 명백하고 타당한 이유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찾지 못한 희생자의 뼈골이 얼만데. 그 숫자만큼이나 규명되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해 묻고 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특히 맥아더와 트루먼의 관계 그 사이에서 낀 우리나라의 운명을 조명한 부분은 개인의 에세이로만 다룰 건 아니라고 본다. 어찌 보면 이 책은 개인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조망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역사학자의 것 마는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런 증언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나의 역사 지식은 일천하다 못해 통탄할 정도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을 내기 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이고 조언을 듣고자 했다. 그러자 지인들은 좀 산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는데 잘 쓰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책을 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연극계에 종사를 해서 그런지 글이 간결하고 이 자체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저자가 살아온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짧지 않나 싶다.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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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 출세욕 먼슬리에세이 2
이주윤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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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0쪽 내외. 보통의 다이어리만 한 크기. 이런 책을 읽고 뭐 할 말이 많을까 싶기도 한데 의외로 할 말이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알아주는 작가의 글 쓰기 담론이 아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글쟁이 언니의 솔직 토크' 뭐 그런 느낌이다. 특이하게도 이건 기획물이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먼슬리 에세이'란 시리즈물의 2탄으로 나왔다. 그것도 앞으로 한 달에 한 권씩 펴낼 거란다. 와, 요즘 출판 기획과 작가의 활동이 여기까지 왔구나. 새삼 놀라기도 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인 협회는 있어도 작가 협동조합 같은 건 공식적으론 없는 것 같던데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 책을 내고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누고, 서로 으샤 으샤 하는 뭐 그런 활동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긴 그 코 묻은 원고료를 n분의 1로 나눠봤자 얼마나 돌아가겠냐만. 어쨌든 말이 되거나 말거나 작가들의 활동은 진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먼슬리가 됐건 뭔 소리가 됐건 작가는 자꾸 떠들고 판을 깔아줘야 한다.


책에서 이슬아 작가에 대해서 말해서 말인데, 알다시피 이슬아는 구독 작가로 유명하다. 저자는 자신은 필력이 없어 그런 활동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이건 누구든 일단 마음만 있다면 한 번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도 해 봤으려고. 누구에 비한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이슬아도 처음부터 구독자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구사하는 문장은 젊은 독자들이 좋아할 만 문장이다. 그들 가운덴 구독을 좋아하기도 하던데 먹힐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싫으면 말고.


지금 생각해도 내가 대담하긴 했지. 작년에 이슬아 삘 받고 나도 어설프게 구독 활동을 했으니. 처음 시작을 했을 땐 과연 구독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론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 그런 흔치 않은 독자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독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고, 내 글을 구독해 준 독자들에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대신 난 그때부터 이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후유증이 생겼다.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도 이슬아는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건 인정! 


2.

독자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무리 기고 뛰고 나는 작가가 글을 써도 꼭 글 못 쓴다고 구박하는 독자는 있게 마련이다. 나도 언젠가 책을 내고 모 사이트에서 이것도 글이냐고 구박하는 독자의 리뷰를 보고 기분 상한 적이 있다. 성격상 또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뭐라고 반박하려다 결국 말아버렸다. 이제 난 독자가 아니라 작가다. 체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면 글은 언제 쓰고 이미지에 스크래치만 간다. 


생각해 보면 독자는 그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저자가 애정 하는 작가 중 한 명이 김애란인가 본데 어떻게 김애란을...?! 할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모 소설을 내 특유의 필봉으로 가차 없이 사시미를 떴다. 그러자 어느 댓글러는 속이 후련하다고 했고, 좋아요도 그때 기준으로 최고점을 찍고, 심지어는 그달의 리뷰에 선정돼 적립금까지 받았다. 그래. 사시미를 뜨려면 이 정돈해 줘야지. 나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독자는 딱 거기까지다. 그 이전도 그랬지만 그 이후에도 올라오는 리뷰도 칭찬일색이었다. 뻘쭘했다. 잘 썼다는데 내가 더 이상 뭐라고 말하리. 거기까지가 독자의 일인 것이다. 거기에 저자는 악플에 대처하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아주 합리적인 대처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냥 반사라고 하란다. 그 이유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으면 되고, 과연 그러면 되겠다 싶다.


3.

저자는 참 열심히 사는 사람 같다. 계속 쓰는 작가가 되려면 둘 중 하나다. 저자처럼 치열하게 쓰던가 아니면 낮엔 일하고 밤에 쓰거나. 모르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첫 책을 내고 계속 출판사 사장과 편집자와 케미가 좋아 일을 계속해 오고 있는가 본데 그러기가 쉬운가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기는 개점휴업이라고 첫 책 내면 각자도생의 길을 가지 않을까. 물론 뜻이 맞아 연이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첫 책 내고 출판사 사장한테 엄청 깨졌다고도 했는데 과연 그게 작가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난 워낙에 첫 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출판사 쪽에서 책 내자고 했을 때 2년이나 튕기다 지난 2016년에야 겨우 냈다. 어느 출판 사건 자기네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면 서로 고마운 거지 깨고 깨지고 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재밌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출판사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초보 작가일수록 조금이라도 좋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이냐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그래서 내 책이 유명 출판사에선 그냥 하나의 배경 정도밖에 안 되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도 스펙이라면 스펙 아닐까. 자신의 책을 소개할 때 "거 유명 작가 000가 낸 출판사에서 냈어. 그러니까 끕이 같다고." 구라 치고 싶지 않을까. 이러고저러고 지간에 어느 출판 사건 내 책을 귀하게 여겨 줄 출판사가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원고료 따박따박 주고.


작가치고 원고료 날려 보지 않은 작가가 있을까. 알아봤더니 우리가 알만한 유명 작가도 무명 때 한 번씩은 다 원고료를 떼인 경험이 있더라. 그 말을 듣는데 어찌나 속이 쓰렸던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런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출판사는 아니다. 어느 단체다.) 작년 말에, 내 책을 내 준 출판사 사람들이랑 오랜만에 만나 게거품 물고 원고료 떼었다고 성토하니까 사장이 듣더니 딱 한 마디 하는데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양아치라고. 그러자 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어졌다. 그 말 한마디를 못해 그렇게 게거품을 물었던가 싶었던 것이다. 혹 시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원고료 준다고 해 놓고 안 준 의뢰인 있거든 지금이라도 더 이상 양아치 되지 말고 반드시 지급해 줬으면 한다. 그거 안 준다고 부자로 잘 살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양심은 지키고 살아야지.


4.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많은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란 쳅터였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급적 접속사 쓰지 말이라. 부사 쓰지 말아라. 단문으로 써야. 기타 등등의 잔소리 솔직히 좀 지긋지긋했다. 중요한 건 문장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이다. 물론 가급적 그런 걸 쓰지 않음으로 해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면 당연 그래야겠지.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강박적이 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저자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들어 글이라 생각하지 않고 노래 부르듯 글을 불러 본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참고할만하다. 중요한 건 글의 리듬이라고. 나도 영화 <변산>을 보면서 힙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말인데 노래도 아닌 것이 리듬은 있다. 우리의 글 쓰기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뮤지컬도 그렇지 않은가.


5.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계속 쓰는 삶을 위해 팔리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글은 무조건 써야 한다. 나도 한때는 블로그에 낙서 반, 일기 반 한 글만 쓰는데 무슨 책을 낼까 싶었는지만 결국 책을 냈다. 물론 그것으로 책을 내지는 않았다. 내가 쓴 책은 독서 에세이였다. 문제는 그 이후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난 뭔가를 끄적이긴 했지만 블로그질을 예전만큼 안 하게 되었다. 요는 누가 봐도 되는 글, 누구 보라고 하는 글을 확 줄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어쩌다 신문 연재 기회를 얻게 되었나'를 읽다 정말 찔렸다. 그 알량한 책을 내니 글 쓰기가 더 불편해졌다. 누가 이런 후진 글만 쓰면서 어떻게 책을 냈지? 흉보는 것 같아 스스로 위축되기도 했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것을 깨닫고 좋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했다. 예전에 난 블로그에 100일 동안 뭐라도 쓴다고 하고 그걸 실천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게 또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그런 내공이 모여 책을 내게 된 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저자 말마따나 무조건 써야 한다. 어설픈 글로 투고할 생각하지 말고 남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꾸준히 글을 써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 1일을 아직도 시작도 못하고 난 이렇게 리뷰만 쓰고 있다.ㅠ


6.

이 책은 정말 웃기고, 재밌고, 용기를 주는 책이다. 누구든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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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7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1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동주의 문장
윤동주 지음, 임채성 엮음 / 홍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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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예술가중엔 고독하고, 아련하고, 애잔함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흐가 있고, 생텍쥐페리와 카뮈가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으론 배호나 김광석 등도 이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더 찾아보면 더 많이 나오겠지. 그중에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윤동주일 것이다. 


모처럼 윤동주를 떠올려 본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 않으면서 습작시를 포함한 동시와 산문까지 아마도 그의 모든 작품을 총망라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모름지기 다작, 다독, 다상량이라고 했건만 윤동주만큼은 다독과 다상량은 했을지 모르지만 다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애송하는 시로 그의 시를 떠올리길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작보다 중요한 건 사람 자체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말미에 벗들의 회고가 부록처럼 실려 있는데, 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동기인 강처중은 그는 여간해서 누구에게도 시를 보이지 않으며 보여주는 때가 있다면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라고 했다. 그는 겸허하고 온순했지만 자신의 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학교 후배인 정병욱은, 그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달 몇 주일 동안을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다가 한 번 종이 위에 적히면 그것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써진 시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쉽게 씌여진 시'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딱 잡이 뗀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후략)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이 시는 그가 천재적 영감을 갖고 있어 뚝딱해서 쓴 시가 아니다. 이 책을 엮은 저자의 해설대로, '어둡고 암울한 시대 현실에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뜻으로 쓴 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다시 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촌 송몽규를 비롯한 몇 명이 독립운동으로 뭔가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나설 때 윤동주도 함께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송몽규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결국 홀로 방에 남아 저 시를 나레이션처럼 읊는다. 감수성과 자의식이 강했을 그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시를 지었을지 알 것도 같다. 송몸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학도병은 나라를 구해 보겠다고 할 때 자신은 육첩방에 홀로 남아 신세한탄처럼 이렇게 시나 읊어대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렸을까.


흔히 윤동주의 시를 가리켜 '부끄러움의 미학'이란 표현을 하기도 한다. 워낙에 수줍음을 잘 타고 자의식이 강한 성격이니 그랬겠지만, 그의 부끄러움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의 <이런 날>이란 시를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루의 건조한 학과로 / 헷말간 권태로 깃들고 / <모순>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 부르고 싶다


이 시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으로, '이런 날'은 곧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를 함께 게양했는데 우리나라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아이들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인데 이를 보고 시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게 부끄러웠을까. 아니, 그건 안타까울지는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은 그래야 한다. 생업 외에는, 뛰어노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해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았을까. 우리나라는 조선조부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그 말기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의 나라다. 배우고, 똑똑하고,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팔아먹는데 국민이 왜 나라 잃은 현실을 아파하고 서러워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이든, 왜놈이든 먹고사는데 걱정 없게만 해 준다면 나라를 팔아먹은들 무엇이 대수랴. 그런 자포자기 한 사람이 다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시인은 평생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을 만난다. 거기서 정지용은 시인의 작품을 칭찬하지만 시를 쓰지 말라고 한다. 내 나라 말로 시를 쓸 수가 없는데 시는 써서 뭐하겠냐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며 깊은 한숨을 쉰다.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정지용의 부끄러움은 같은 것이었을까. 조국을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오직 시로만 고백했던 윤동주와 한낱 지식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책으로만 일관했던 정지용을 보면서 나라면 어찌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역사는 자꾸 독립투사를 내세워 또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독립투사들처럼 순국을 각오하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런 불행한 역사를 살아간다면 과연 나는 순국을 각오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라를 구하기는커녕 이름을 고쳐서라도 내 한 목숨 부지하고 살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럴 것만 같다. 또한 끌려가는 투사들을 지켜보며 함께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초라한 참회록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 않을까.


 <참회록>

 ......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는 시로 참회록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재(文才)였지만 친일을 했던 이광수는 끝내 문학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동주는 참회록을 썼기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보라. 이광수는 한때 문재였음을 기억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지금도 기억되고 애송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지는가. 그게 단순히 시대를 아파했던 회의주의자의 타령으로만 보이는가.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 한 권 갖지 못했다. 그나마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이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치자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를 위해 사용하여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씀으로 이때 처음 시인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그를 더욱 애잔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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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23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잔해서 예술가답지요.

순국... 참 어렵죠. 저라도 죽음 앞에선 제 자신의 생명이 제일 소중할 것 같아요. 그래서 순국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stella.K 2020-06-23 18:4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분들이 계셔서 제가 있는 건데
저는 아무래도 나라 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한가 봅니다.ㅠ

윤동주 시인만 생각하면 왜 그리 짠한지...
영화 다시 봤는데 강하늘이 연기도 잘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도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편집도 그렇고, 시나리오 자체가 시 같아요.
누가 자기는 이상과 백석, 윤동주 평전 다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던데 옛 문인을 사랑한다면 이 세 사람은 정말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더군요.
저는 이상만 가지고 있어요. 그것도 고운 걸로.ㅋ

transient-guest 2020-06-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니 민족이니, 종교도, 무엇도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종의 장치가 아닌가 싶어요. 특히 하루살기에 급급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다만 남의 지배는 확률상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할 때보다 우리를 이롭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가 중요한 가치의 척도가 아닌가 싶어요. 아이들이 식민통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부끄러울 일은 아니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 독립운동과 선각자들의 희생으로 절대로 한국을 이롭게 할 수 없는 자들을 몰아낸 그 노력과 투쟁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만. 윤동주시인은 일찍 죽어서 어쩌면 더 짠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그 만큼 더.

stella.K 2020-06-24 15:29   좋아요 1 | URL
중요한 척도죠. 리뷰에 다 쓰지 못했지만, 누가 그런 말을하더군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끝내고도 왕조를 회복하지 못한 건
왕이 나라와 백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렇겠구나 싶더군요.
유럽도 그렇고, 하다못해 일본도 왕조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게
그냥 그런 게 아니었겠구나 싶더군요.
비록 반쪽이지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도 울나라는 아직도 독재와
싸워야 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사는 걸 보면 새삼 희안한 국가란 생각도
듭니다.
짧게 살아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는 것도 크게 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ㅎ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1 - 1900-1934
장석주 지음 / 시공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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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사춘기 때 문학 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에 우리나라 문학을 좋아하기란 게 쉬운 일일까? 잘 알려진 세계 고전 문학이나 읽어낼 수만 있다면 자타 공인 문학 소년, 문학 소녀는 아닐까. 솔직히 나는 그랬다. 그 시절 우리나라 문학이 싫었다. 우리 문학을 읽는다는 게 왠지 뒤쳐지는 것만 같았고, 뭐 별거 있나 우습게 봤다. 쏟아지던 베스트셀러도 그랬지만 근대 문학은 더더욱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한동안 문고본이 유행이었다. 특히 삼중당 문고는 주머니 가벼운 문학 소녀와 소년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가방에 그 책 한 권쯤 안 넣고 다니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문고본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너무 채신머리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었다. 실용성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서용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의 오빠나 언니 세대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그런 책은 갖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문고본엔 우리 고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김동인의 <감자>나 <배따라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같은 것 말이다. 책이 좀 근사했다면 적어도 한 번은 서점에서 무슨 책인가 뽑아 봤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그냥 권장 도서 정도로만 취급할뿐이지 그 모든 책들은 교과 과정엔 없다. 이렇게 학창 시절 국어 교육은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문학 교육은 전무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소감 일부다. 그것도 겨우 1권을 읽고.


이 책이 유달리 감동스럽다거나 우리 근대문학을 요약해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무려 권당 500페이지 내외로 5권까지 근현대 우리 문학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도 아는 바도 없지만 유독 일제 강점기 또는 개화기에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과 백석 등 당대 문학인과 문학 단체와 문학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기-승-전-문학(史)인 것일까.


물론 문학사를 쓴 사람이 장석주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동일이나 문학 평론가 김윤식 교수 또 그밖의 학자나 교수들도 쓰긴 했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개론서겸 대중서로 이 책은 적절해 보인다. 문사철이 그토록 중요하다면서 우리 문학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도 알지 못한다면 뭔가를 놓치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뻗어나갈지 알 수 없다. 정사로 알 수도 있지만 나처럼 어느 특정 분야에 꽂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 책은 특별히 우리나라 근대 초입은 1900년부터 193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읽으니 우리나라 근대 사회의 한 단면이 보이는 것 같고, 문학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새삼 알겠다. 몇년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가 어떻게 하다 작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굉장한 문학적 내공을 감추고 있거나, 문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 옛날 문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문을 깨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문학이었다. 언문은 소위 있는 집 자제나 할 수 있었다. 문학엔 사상과 정서가 담긴다. 글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을 있는 표현하고, 세상을 깨우치고 싶어 했다. 하나 안타까운 건 당대의 문사들 예를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광수를 비롯해 알만한 문사들 거의 대부분이 친일을 했다는 점이다. 험악하거나 간신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친일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처럼 고고하고 선비 정신으로만 무장해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애국심은 고사하고 깨어 있는 양심으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인으로서 할 일을 다하지 않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작가로서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애국심이나 지식인의 양심과 작가는 별개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야 이광수가 작가로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또 이건 나의 사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있는 집 자제였다. 친일에 저항하면 따라 올 육체적 고통을 쉽게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안위를 도모하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결국 문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을 당대 문학인들은 스스로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문학의 대의가 구국의 대의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문인들에 관해서는 늘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책을 (늦게나마)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기 어렸다고, 자국의 문학이 자국민들에게 사랑 받기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좀 덜할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숨을 푹푹쉬며 그것도 작품이냐며 험담 아닌 험담을 했더랬다. 원래 작가와 독자는 그런 존재다. 어떤 식으로든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가 좋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작가는 잊히는 법이다. 잊히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운 일이랴. 근대의 작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이 언문을 깨우쳤다고 해서 마냥 사람들로부터 환영만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문을 깨우치고도 이것 밖에 못 쓰냐고 희롱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잊힐지 몰라도 그들의 작품은 100년을 살아남아서 후대에도 읽히고야 만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작가와 그 작품들도 그러지 않을까. 문학의 힘은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멀쩡한 책이 오늘은 파쇄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곡차곡 모아놓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세월을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100년 뒤엔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또한 역사다. 작가만이 가장 작가답게 현세를 그릴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문득 책을 읽다 작가 홍명희에게 한참 머물렀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다. 이야기의 구조만을 생각한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다른 건 <홍길동전>은 허구의 고대 영웅을그리지만, <임꺽정>은 실록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정밀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시대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임꺽정>은 1928년에서 1940년까지 몇 번이나 중단과 연재를 반복했지만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조선 초유의 대작",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란 찬사를 들으며 소설사에 남을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하지만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따로 있다. 그건 그의 독서법이다. 그는 1907년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해 1910년까지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양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3학년 2학기 때부터 독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유지하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바이런과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까지 섭렵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요즘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없지 않은데, 작가 홍명희가 살아 있다면 이 사실을 알면 썩소를 날릴 것도 같다.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이것은 보편적 독서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속독이 유행이기도 했다. 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한 책을 슬쩍 끼워 보기 시작하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반성해 본다. 물론 비판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독서의 성실함일 것이다. 작가 홍명희는 이 독서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책을 읽었을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려 놓은 책중 하나인 이 책이라도 마치기 위해 허겁지겁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펴낸 장석주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 날개 부분에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가 나와있는데 얼마나 지난했을지 감히 짐작이 간다. 그 덕분에 나 같은 독자는 편안히 앉아 읽어보지 않는가. 참고로 홍명희는 원고자 1만 3천장의 분량을 12년에 걸쳐 쓰고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장장 8년에 걸쳐 원고지 2만 장에 걸쳐 이 책을 썼다. 가히 문학계의 수도사답다. 그도 그럴 것이 1992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후 두 달만에 풀려나 무작정 제주도 서귀포에 방을 얻어 썼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이 책 마지막 5권까지 다 읽고나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생각보다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안 읽었을 때 보단 달라져 있겠지. 그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 그리고 하나. 근대 작가들도 청소년 시절엔 하나 같이 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도 사춘기 때 외국 문학만 읽고 우리 한국 문학은 안 읽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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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5-27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맞춤법 검사에서 하나도 걸리지 않고 한 번에 무사 통과된 글이다.
믿을 수가 없어 몇번씩 확인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야호!
이러다 어떤 사람 매의 눈으로 잡아내면 어쩌지..ㅋ

페크(pek0501) 2020-05-27 22:58   좋아요 0 | URL
맞춤법 검사라는 게 있습니까?
저는 자신 없는 낱말은 아예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고 쓰는 편이라서요...

그보다 저는 요즘 한글 파일의 맨 위 보면 찾기, 라고 있잖아요. 그걸로 반복되는 낱말을 걸러 내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반복적으로 쓰는 게 많은지 깜놀입니다. 예를 들면 것, 이라는 낱말을 치는 거예요. 그러면 열 몇 개가 나와요. 그러면 다른 말로 대체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있다, 라는 낱말도 반복해 쓰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또 것이다, 라는 말을 제가 잘 쓰더라고요.
참고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답니다. 미리보기로 보셔도 됩니다. 앞부분에 나와 있는 걸 보고 구입했거든요.



stella.K 2020-05-28 19:13   좋아요 0 | URL
엇, 그거 있는데. 사이트마다 있지 않나요?
한글에도 있는데 전 옛날 버전이라 그런지 많이 걸러내지 못하더군요.
작년에 브런치 개설했는데 그건 좀 많이 걸러주는 것 같아서
일단 거기에 쓰고 맞춤법 검사한 후 이쪽에 옮기죠.
그 검사시키면 빨간 줄이 쫙 뜨는데 없어서 신기했어요.ㅎㅎ

<안정효의...>는 오래 전에 사 놓고 완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읽으면 좋긴한데 참고서 같이 써 놔 가지고 꼭 어느 정도 읽으면
진도가 안 나가더라구요.
저는 글 쓰기 책은 이윤기나 김연수 작가처럼 쓰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죠.ㅋ

2020-05-27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0-05-2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겠지만, 뒤에서 두번째 단락 세번째 줄 원고지를 원고자라 쓰셨군요 찾으려고 한 건 아니고 글을 보다 보니 보였습니다 원고자라는 말이 있어서 괜찮았던 거겠습니다

홍명희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한 책을 보면 다른 책은 안 봤군요 제가 그러는데... 요즘은 책 여러 권을 보라는 말을 많은 사람이 하기도 하더군요 그건 소설이 아닌 책일 때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은 흐름이 있으니 그걸 놓치면 안 좋잖아요 그저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저는 어떤 책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군요 시작했다 그만둔 책도 조금 있지만...

저는 중, 고등학생 때는 책을 모르고 읽지도 않았네요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싶어요 그때 한국 소설을 잘 안 보는 건 국어나 문학 시간에 하는 공부여서 그랬던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그걸 알고 시나 소설 찾아본 사람도 있겠습니다 공부로 할 때는 재미없어도 그냥 볼 때는 재미있는 게 문학이 아닌가 싶어요


희선

stella.K 2020-05-28 19:04   좋아요 0 | URL
기계도 완벽한 건 아니라니깐요.ㅎㅎㅎ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단지 맞춤법 검사하면 빨간 줄이
쫙쫙 치는데 신통하게도 그게 없는 거예요.
여태까지 그런 일 한 번도 없었거든요.ㅋㅋ

저는 요즘 우리나라 근대 문학을 읽어 볼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물론 실제론 많이 못 읽겠지만 왜 진작 못 읽었을까 후회가 되더군요.
희선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 권씩 읽어보시죠.
암튼 오타 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