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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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랜만에 김탁환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지금까지 작가의 작품은 대여섯 작품쯤 읽었던 것 같다.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라도 한 작가의 작품을 그 정도 읽었다는 건 내게 여간해서 없는 일로 가히 최애 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난 작가의 대표작은 (이를테면, <방각본 살인사건>이나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같은 작품은) 아직 읽지도 않았다. 하긴, 이건 좀 나의 게으름이 반영된 약간의 전략이자 변명이기도 한데, 내가 만일 이런 주요작부터 읽었다면 일찍 내게서 멀어져 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김탁환 작가를 좋아하는 건, (사람들은 흔히 역사 소설을 좀 낫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조선이란 이 역사적이며 문명사적인 시대를 소설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부지런하게.


내가 이 책에 마음이 끌렸던 건 다름 아닌 소설가의 소설 쓰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난 이 방면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파리 리뷰가 인터뷰했다던 <작가란 무엇인가>나,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같은 책이다. 그건 웬만한 글쓰기에 관한 책 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하다. 여기서 유익하다는 건, 글쓰기에 관한 책은 물론 읽을 필요는 있지만 사실 그다지 재밌거나 아주 많이 흥미로운 건 아니다. 어떤 건 애를 좀 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책들을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그리고 나도 왠지 '작가처럼'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받는다. 이 책도 그렇다. 물론 글쓰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기를 부여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역시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독특한 건, 이 작품은 얼핏 금부도사인 이명방이 화자로 나오고 그의 절친인 김진과 당대 유명한 사람들 이를테면 김홍도니 정약용, 박문수 같은 사람이 나와 남성 서사인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매설가(소설가) 임두와 그의 손녀 승혜와 궁에 사는 왕의 여자들 즉 임금의 후궁들과 책을 필사하는 궁녀들이 다수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를 표방하고 있다.


매설가 임두가 당대 얼마나 유명하냐면 궁에 사는 왕의 여자들(후궁들)과 연줄이 닿아있을 정도다. 왕의 여자니 얼마나 눈이 높겠는가? 웬만한 매설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임두가 소설을 쓸 때마다 필사 궁녀가 그의 작품을 필사하기에 바쁘다. 단순히 그렇게만 표현하기가 약했던지 임두는 약간 신비스러우면서도 무림의 고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무려 23년 동안이나 <산해인연록>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무림의 고수가 맞다. 그런데 그렇게 쟁쟁한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매병(치매)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명한 작가가 매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그래서 차라리 어딘가로 숨어 버리는 건 선택한 것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되니 마무리를 져야 하는데, 그 후보로 임두가 키우고 있는 형제인 경문과 수문이 후보로 지목된다, 하지만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지만 그 둘은 아직 그 경지를 넘 볼 정도는 아니다. 이렇듯 작품은 행방불명이던 임두를 찾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경문과 수문의 묘한 인간적 갈등과 금부도사인 이명방이 말을 못 하는 임두의 손녀 승혜를 연모하는 과정 등을 그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인물을 다룸에 있어서 좀 약하지 않나 싶다. 특별히 악한 사람이 없다. 있다면 수문 정도다. 나중에 형인 경문을 죽이고 발뺌을 하는데, 그가 확실히 죽인 증좌도 없다(맞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끝까지 읽게 만든다. 무엇보다 곳곳에 우리나라와 당나라의 고문학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소설을 각주처럼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의 흥미를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놀라운 건, 소개하고 있는 책들의 분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한 작품이 몇십 권은 축에도 들지 못한다.100권은 넘어가야 가히 대소설이라 불러줄 만하다. 그러니까 임두 같이 한 작품을 평생 쓰는 작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이다. 솔직히 우리가 고문학을 아는 건 <사씨 남정기>나 <홍길동> 같은 손에 꼽을만하고 그것도 단행본 아닌가?


사실 대소설은 우리가 잘 사용하지 않아 어색하고 낯설긴 한데, 오늘 날로 치면 시리즈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과연 한 작가가 23년 동안 한 소설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봤다. 어떻게 한 작가가 한 가지 소설만 쓸 수 있을까? 말이 좋아 23년이지 오늘날처럼 수명이 긴 것도 아니다. 옛날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40 전후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인생의 반 이상이다. 그것을 오로지 한 작품에만 바친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시절 책 읽는 것이 가장 지적이면서도 고급한 문화활동이었을 것이다. 이것 외에 무엇을 더 해 볼 수가 있을까?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게 골수에 새겨져 있다는데, TV나 영화를 보겠는가? 라디오를 듣겠는가? 책밖엔 없을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글을 깨우쳐 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능력이고, 심지어 권력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읽을 것이 많지 않다면 같은 책을 몇십 번 아니 몇백 번씩 반복해서 읽었을지 모른다. 또 그런 만큼 한 작가가 20년 넘게 붙들고 쓴다는 건 인생을 다 건다는 의미일 것이다. 쓰다가 병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제자를 키운다는 건 오늘날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즉 원작자 유고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소설도 임두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지 않고 제자가 이어 쓰도록 한 것이겠지.


그런데 과연 오늘날 그렇게 쓰는 작가가 있나 싶기도 하다. 있어도 뜯어말려야 하지 않을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한 작품만 들이 판단 말인가. 이야기도 작가 따라 늙기 마련이니 그만 쓰고 새것 쓰라고 하지 않을까? 따라서 임두 같은 대소설을 쓰는 작가가 오늘날 21세기를 산다면 크게 환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생각해 봤더니 <산해인연록>이 오늘날 쓰여진다면 100권까지 안 갈지도 모른다. 그 시절엔 글자 크기 조절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세상에 가장 가는 붓으로 작게 쓴다고 해도 요즘 컴퓨터로 글을 쓸데 흔히 쓰는 10포인트 보다 클 것이다. 더구나 책은 묶기 나름 아닌가? 300이든 400 페이지든 얼마를 한 권으로 할지 등은 만드는 사람이 정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글쎄, 아무리 많아도 30권을 넘을 수 있을까? 지하에 있는 이 모두가 알면 기함할지도 모른다. 그 많던 책들이 어디로 사라진 거냐고.


아무튼 TV나 인터넷만 들어가도 드라마나 영화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일지라도 기왕이면 입체적인 것이 좋지 침침하고 칙칙한 책이 좋을까? 그래서 이제 시리즈 (대소설)를 쓰는 소설가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최첨단 영상 시대에도 약 30년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아직도 결말을 내지 않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프리 디버다. 그는 유명한 링컨 라임 시리즈를 1997년에 내기 시작해서 아직도 결말을 내지 않은 채 계속 책만 내고 있다. 내후년이면 진짜 30주년인데 그에 맞혀서 마무리를 지으려나? 1950년 생이라니 이제 노년이다. 그를 좋아하는 어떤 독자는 부디 건강해서 대미를 장식해 주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밖에 그에 준하는 또는 그를 뛰어넘는 작가가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런 작품은 어느 시대고 있고 여전히 건재하다. 건재함이란 쓰는 소설가나 읽어주는 독자 모두를 말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임두 작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임두 작가가 그렇게 글을 쓴다는 건, 김탁환 작가가 그렇게 쓰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 모든 작가에겐 이런 체험이 필요한 것 같다. 작가들 중엔 등장인물들이 살아 꿈틀대고,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자신은 그저 받아 적을 뿐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늘 그렇기만 할까? 그런 현상에만 의존하면 그건 게 없을 때도 과연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이 잘 써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뭔가에 안주하게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런 체험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순간이 오던 안 오던 늘 언제나 변함없이 쓰는 게 진짜 작가가 아닐까?


앞서도 얘기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 작품을 남성 서사로 쓰지 않고 여성 서사로 썼다. 엄밀하게는 남성 서사를 가장한 여성서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대 여성은 모든 면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러니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읽겠는가. 물론 왕의 여자들이니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소양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긴긴 나날을 왕이 언제 자신의 처소를 찾아 줄까를 기다리지 않고, 그 시간 책을 읽고 책이 원활히 나올 수 있도록 능동성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 역시 아주 적극적여 보이진 않는데 그건 아무래도 여자가 아닌 김탁환 작가의 한계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 90년대 또는 2천 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도서 대여점 (조선 시대로 말하면 세책방이겠지)이란 게 성행했었다. 그 시절 어떤 작가가 시리즈물을 쓰면서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대여점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났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따분한 학교 수업 시간에 교과서 위에 또는 책상 서랍에 애정하는 책 몰래 내놓고 본 경험 있지 않나? 모름지기 책은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책 읽기의 긴박함이랄까? 그러다 선생님의 압수 물품이 될지라도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린 어느새 그때를 잊고 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런 건 좀 부활시켜도 좋지 않을까? 혹시 그런 얘기 알고 있으면 제보를 부탁한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책은 읽고 싶은 욕망과 긴급성을 필요로 한다. 또 작가들은 자신의 책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쓸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작가들의 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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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5-08-20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
김탁환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시는군요.
예전에는 십만부는 예사이고 백만부씩 팔리던 소설도 있었는데
요즘 베스트셀러 소설은 과연 얼마나 나갈까요.
그러고보면 소설가들 입장에서는 볼거리 없던 오래 전 그 시절이
전부 스마트폰에 눈박고 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25-08-20 12:11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예전엔 어떤 작가의 무슨 작품이 나왔다면 들썩들썩 하던 시절이 있는데 지금도 그런 게 있나 모르겠어요. 80년 시퍼렇던 시절 금서들 가방속에 들고 다니면 큰 일났던 시절도 있었잖아요. 그런 시절이 새삼 그리워졌어요.
그때를 잊어버리고 스맛폰만 보고 있다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들중엔 그래도 전자책 다운 받아 읽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버스 안에서 스맛폰 잘 못 보겠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보고 있는 것 보면
신기해요. ㅎ
오늘도 저의 누추한 서재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5-08-19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탁환작가 백탑파 시리즈가 5권까지 나왔군요. 저는 시리즈 시작인 방각본이랑 열녀문의 비밀만 봤어요. 재밌게 읽었는데 어쩌다보니 잊고 있었네요
스텔라님 글 보니까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글 중간에 제프리 디버 얘기가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링컨 라임 시리즈 저 정말 좋아하는데 요즘은 더 이상 번역이 안돼서 너무 속상해요 ㅠㅠ

stella.K 2025-08-20 12:17   좋아요 1 | URL
ㅎㅎ 바람돌이님도 김탁환 작가 읽은지 오래되셨군요.
상당히 오래됐죠.이게 2019년에 나왔으니. 이후에도 계속 책을 펴냈으니
김탁환 작가는 신기하더라구요. 강의하랴 소설 쓰랴 잠은 언제 자나 싶어요.
제프리 디버가 유명하긴 한가보군요. 이렇게 반기시는 걸 보면.
저는 루팡이나 홈즈 시리즈도 떼지 못했는데. ㅠ
암튼 저도 디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yamoo 2025-08-20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백탑파 시리즈가 아직도 나오고 있다뉘!!!
저도 방각본이랑 열녀문까지는 아는데, 그 이후는 ..^^;;
제프리 디버도 재밌긴한데...이 작가 이름을 스텔라님 서재에서 볼 줄은 몰랐네요..^^;;
추리 및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시는 줄 몰랐다눈..ㅎㅎ
그나저나 한국소설 읽지 않은 지도 10여년 가까이 되는군요. 언제 다시 읽으려나..아직까지 계획은 없어요. 세계문학 대기가 줄줄이라서요..^^;;

stella.K 2025-08-20 12:32   좋아요 0 | URL
네. 아직도 나오고 있습니다. ㅋㅋㅋ
다들 비슷한 거 같습니다. 그 정도만 읽고 손을 놓는 거. ㅎ
저도 한동안 안 읽다 오랜만에 읽으니까 도파민이 돋는 것 같더라구요.
누가 그러더군요.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워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뭘하며 사는지 모르고 1년은 금방 지나간다고.
올해 김탁환 작가 읽기. 뭐 이런 거 할 걸 그랬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어 작품 더 읽으면 좀 덜 후회할까요?
그러게요. 제가 디버 같은 작품을 읽겠습니까?
얼마 전 아는 분이 이 사람 책을 읽고 리뷰를 쓰셨길래 조금 옮겨봤어요.
세계문학도 읽을 게 많죠. 읽을 책은 많고,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돼있고
아쉬운 인생입니다. ㅎㅎ

2025-11-03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03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5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5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6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1-16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절판됐지만 내가 이 표지의 책을 살 때는 작가가 맨부커 상을 받고 난 직후였다. (지금은 작가가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새로운 표지의 책이 다시 나왔다.) 그제야 난 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사고 난 후에도 쉬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농담이지만) 결국 난 맨부커상만으로도 안 되는구나. 노벨문학상은 돼야 읽는구나 했다.

사실 노벨문학상도 나에겐 언제부턴가 그렇게 큰 의미로 와닿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큰 문학상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건 남의 나라 문학상이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없고 후보로만 만족해야 하는 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다고, 정말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나는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솔직히 얼떨떨했다. 내가 수상한 것도 아닌데 이 느낌은 뭐지? 우리나라는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런만큼 노벨문학상은 한강 작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온 나라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무엇보다 수상 작가의 작품을 원어로 읽는다는 호사와 자긍심을 갖게 했다. 모르긴 해도 세종대왕님도 뿌듯해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막상 읽어보니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작품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그랬다.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치고 좀 센 작품을 읽은 거라고. 좀 늦었지만 <소년이 온다>나 <흰 > 또는 <작별하지 않는다>부터 읽어보길 추천했다. 확실히 진입 장벽이 느껴지긴 했다. (이게 다 맨부커상 때문이다. >.<;;) 하지만 나도 좀 미안하긴 했다. 난 이 책이 단순히 작가의 소설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보니 연작 소설집이었다. 그러니까 난 그것도 모르고 샀던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는 거 아닌가.

작품이 좀 당혹스럽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효과인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지 읽고 난 후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지 모르겠는데 '아, 작가가 이렇게 쓰는구나.' 작가가 먼저 보였다. 무엇보다 문체가 상당히 안정적이다. 그냥 단순히 글을 잘 쓴다는 말이 아니다. 그 사건 또는 에피소드를 상당히 잘 구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건 또 뭔가 끝까지 쓰겠다는 작가의 결기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같은 주제라도 좀 쉬운 방법으로 쓸수도 있지 않았을까? 일부러 어려운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그것은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작가가 일부러 어려운 또는 흔치 않은 방법으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고집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쓰다가 포기하고 싶은 때가 없었을까? 글 쓰다 막히면 포기하거나, 우회하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싶은 유혹 세상의 작가라면 다 있을 거라고 본다. 꼭 이 방법이어야 했을까? 다른 방법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이 방법으로 밖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작가는 무수히 많이 물어보며 썼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이건 독자로서 작가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떤 작가는 (영감이 충만해서) 내 안에 어떤 목소리가 있어 받아쓰듯 썼다고도 하던데, 왠지 한강 작가는 그렇게 썼을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한 여자와 가족들 처참한 지경에 몰아넣고 신들리듯 쓸 수 있었을까? 오히려 펜이 바늘이 되어 한 땀 한 땀 자기 살에다 새기듯 쓰지 않았을까? 또 그런 과정에서 자주 머릿속이 하애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작가는 쉬운 방법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사실 내가 이 작품을 쉬 읽지 못했던 이유는 꼭 어떤 선입견이나 게을러서만도 아니었다. 적어도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문학은 뭔가 편중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이전 작품들이 다채로웠냐면 그렇지도 않다. 한때 민주화에 몰두했고, 그것이 사그라들자 문학은 사변화되어 인간의 허무나 일탈과 방황을 묘사하는데 급급했다. 게다가 열린 결말이라며 이도 저도 아닌 결말을 보여주는 게 트렌드였다. (물론 그런 중에도 독자적인 길을 간 작가도 없지 않다.) 그러니 연작인지도 모르고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작만 읽고 내가 느꼈던 건 잊고 있었던 그때의 문학 정서를 마주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건 나머지 두 작품을 다 읽었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젠 이 작품에 대해 감히 혹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에 맞는 사람 서넛과 술잔을 기울이며 작품을 안주 삼아, 시쳇말로 까대기를 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그에 맞는 품격을 가지고 작품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작품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대를 못 받는다고, 세상 다시없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본토 일본에선 아주 환영받는 작가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도 거지 뭐.

그런데 나의 친애하는 한 이웃분께서, 사람들이 폭력을 폭력인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람은 동물을 죽여 먹지만 식물은 남을 해치지 않고 물과 햇빛만으로 살 수 있으니 주인공이 식물이 되려고 하는 게 이해가 간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찌 보면 그건 살생하지 않다는 불교의 세계관의 역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자 애초의 당혹스러움이 줄어들면서 이해의 폭이 다소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는대서 끝나지 않고 리뷰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의 진정한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자 작가의 작품이 동티가 났다. 그러자 한 간에선 이렇게 품귀현상을 빚으면 뭐 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중 하나라도 끝까지 성실하게 읽어낼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것이다. 뭐 꼭 틀린 건 아니지만 난 왠지 그게 사실이어도 싫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또 원어로 된 노벨문학상 작품을 만져 보겠는가? 책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질기고 힘이 세다. 어떤 책은 사 놓은지 10년, 20년 만에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어떤 책은 나중에 빛을 보고 역주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사 놓기라도 해라 언젠간 읽게 될 테니!

반가운 소식은, 요즘 동네 책방이 의외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거기선 여러 가지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들을 끈다고 한다. (우리 동네는 아직 없다. ㅠ) 그 프로그램 중 빠지지 않는 건 독서 토론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사를 계기로 동네 책방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이 작품을 읽은 것도 한 온라인 플랫폼에서 이 작품을 읽고 토론한다고 해서 읽은 것이기도 하다. (온라인이라 편한 것도 있지만 약간의 한계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름 유용했다.)

노벨문학상을 비롯해 세계 주요 문학상 수상자는 그냥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우리가 입시 치르듯 무슨 상을 바라보고 문학작품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평소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토론이 부재해서 지금 국가적으로 얼마나 난감하고 해괴한 일을 겪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작가가 있기 전에 먼저 독자가 있었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우리나라 작가의 위상이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된다. 그에 맞는 독자의 품격도 갖춰야 하고, 지금이야말로 독자는 어떻게 문학을 생산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할 때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한강 작가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적어도 이 말은 올해 새로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때까지 유효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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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2-24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상이건 문학상이건 빈손이건, 누가 알아보아 주면서 크게 기리는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삶을 밝히고 살림을 노래하는 책이 차분히 고루 읽히는 나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이 터전은 아름다운 나라로 나아갈 만하지 싶습니다.

푸나무는 해바람비흙으로 살아간다고 여기는데, 곰곰이 보면 ‘흙’은 “살덩이라는 몸을 입은 사람과 짐승이 죽고 나서 돌아가는 알갱이”이기도 합니다. 해바람비만 있을 적에는 풀이나 나무가 시들시들하고, 흙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풀이며 나무가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살덩이라는 몸을 입은 삶”일 적에는 풀도 나무도 낟알도 열매도 다른 작은짐승도 먹되, “살덩이라는 몸을 내려놓고 떠날” 적에는 이 몸을 고스란히 흙으로 돌려보내어 푸나무를 살찌우는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숲일 텐데, 고기밥이 맞거나 풀밥이 옳다고 여길 수 없다고 느껴요. 그저 이 푸른별에서 온숨결은 서로 다른 몸으로 돌고돌면서 하나인 마음, 곧 사랑으로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스스로 사랑인 줄 알아보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이웃(사람·짐승·푸나무)”도 고스란히 사랑인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면, 걱정이나 멍울이나 생채기란 가뭇없이 녹으리라 봅니다.

그나저나 요즈음 ‘한국문학’은 너무 ‘주제(교훈)’에 치닫거나, 목소리(정의)만 높이거나, 글치레(문장기교·수사법)에 얽매인다고 느껴요. 그저 글꽃(문 + 학)이면 될 텐데, 그저 글꽃인 글이 사그라드는 듯싶습니다.

stella.K 님이 쓰신 이 글자락은 ‘서평’이 아닌 ‘문학’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25-02-24 15:35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조금 아까도 여기 들어와 다시 보니 글이 다듬어 지지않아 또 고쳐썼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ㅋ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할 다름입니다. 글꽃이면 되겠다는 숲노래님 말씀 저도 깊이 새겨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니르바나 2025-02-24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

훌륭한 소설가의 책은 많은 독자를 만들고,
많은 독자는 또 훌륭한 소설가를 만드는 선순환 구조가 문학계에도 적용되는 것 아닌가요.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면 물론 선수 개인의 영광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이기에 온 국민이 축하해주는 것 처럼
한 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그런 의미로 많은 사람들이 수상을 축하했다고 봅니다.
스텔라님 같은 좋은 독자를 가진 한 강 작가가 부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stella.K 2025-02-24 18:24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니르바나님! 제가 그동안 격조했죠? 죄송합니다. ㅠ 그렇지 않아도 늘 안부가 궁금했는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 말인가, 올초에 차기작 나올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나오면 니르바나님 일착으로 사실 거잖아요. 저는 신간으로는 책을 거의 안 사는 편이라 저 같은 독자는 한강 작가가 안 좋아 할 겁니다. 니르바나님 같은 독자를 좋아하지.^^

2025-02-28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1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5-03-12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은 작가 한사람보다 한나라 사람이 다 기뻐하는 일인 듯합니다 한국 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한국 사람이어서 원어로 읽을 수 있는, 저는 그런 건 생각도 못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도 기뻐하더군요 노벨문학상 누가 받든 별로 마음 안 썼지만, 지난해에는 달랐네요 좋은 일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 한국은 걱정스럽기도 하죠 좀 나아져야 할 텐데...

stella.K 님 이달 당선작 축하합니다


희선

stella.K 2025-03-15 19:2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희선님과 마찬가집니다. 다음 주 정도면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모양인데 어떤 결과가 나오든 좀 결과에 순복하는 모습도 좀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레지스탕스
이우 지음 / 몽상가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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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저자의 이름에서 조선의 왕자를 생각했다. 본명일까?

좀 놀라운 건 이 책이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2018년에 초판이 나왔고, 지금까지 3쇄가 나왔다. 조금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쇄를 거듭할 때마다 다듬고 살을 붙여 개정판을 냈다는 것. 물론 쇄를 거듭하는 책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리커버로는 나와도 여간해서 개정판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책에 애정이 남아 있을까? 책을 쓸 때 별의별 고생을 다해 썼다면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설혹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책을 보고 대대적으로 손을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 개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을 것 같다. 개정판을 냈다고 책이 잘 팔릴 거란 보장도 못 하고. 그러니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쇄를 거듭할 때마다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세 번의 작가의 말을 썼다. (모르긴 해도 근성 있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지난 초판이 나온 이래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의 문학 권력자 내지는 유수한 문학상을 주관하는 어느 출판사나 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빼어나고 훌륭한 작품이 어떻게 그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신인문학상을 비롯한 여타의 문학상은 출판된 지 1년 안의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줄로 안다. 그것도 장편이 아닌 단편에. 그것이 맞는다면 이 작품이 무슨 무슨 문학상을 받을 일은 과거에도 없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반면 뭔가 모를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은 소위 말하는 제도권을 벗어나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레지스탕스적 아닌가?


세상의 모든 작가들 대부분은 문청의 시절을 지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열망은 보통은 그 시기 전후로 갖게 되니까. 그러므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름하여 성장 문학 한 둘은 쓰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저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른다고 노래했던 지금은 중년이 되어버린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젊었을 때 나는 막상 이런 장르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동의할지 모르지만, 이런 작품은 하나같이 우울한 방황과 허무, 섹스, 일탈 뭐 이런 것들로 대표되기도 하니까. 내 삶 자체가 꿀꿀하고 허무한데 굳이 이런 책을 읽어 더 꿀꿀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성장 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데미안'도 나는 지금까지 두 번쯤 읽었지만 왜 이 작품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수긍은 할 수 있지만 강한 이펙트 같은 건 없지 않나.


이 작품 역시 '데미안'의 그림자가 짙다. 실제로 '데미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했다. 좁은 소견이지만 이문열의 일련의 작품도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젊은 날의 초상'이나 '사람의 아들' 같은.) 하긴 이쪽 장르의 작품들은 데미안의 사생아들 아닌가. 그러니 이 작품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비웃었을지 모른다. 왜 그 시절엔 조금만 뭐가 보여도 모방이니, 아류니 하면서 아는 척 조소하기 좋아하지 않는가. 문학의 'ㅁ'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만 커져 모든 게 시큰둥하고 만만하게 보였던 게지. 마치 이 작품의 화자 기윤처럼.


그런데 이 나이 되어 이 작품을 읽으니 오히려 좋았다. 작가가 철학과 역사와 문학을 기반으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썼을지 알 것 같다. 이 작품의 밑 작업만 4년이 걸렸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때 뭔가 모를 허전함과 숙연함마저 느꼈다. 왜 가끔 좋은 작품을 읽으면 이 작품 이후에 무슨 책을 읽을지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건 여간해서 잘 체험되지 않는데 아주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난 어쩌면 이 작품 이후에 다른 책들이 나의 의식에 틈입해 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단 생각도 든다.


문장이 좋다. 그렇다고 뼈를 때리고, 가슴을 후비는 뭐 그런 문장이어서 좋았다는 게 아니다. 그런 문장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쉽게 잊히면 안 될 것 같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밑줄이라도 거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따라 해 보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리고 인물이다. 공감이 간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나 형제보단 친구가 더 중요해진다. 특히 상급학교 진학을 두고 부모와 갈등을 겪으면 더 그렇다. 부모는 가급적 자식이 배경이 되어줄 만한 학교를 진학해 주길 바라지만 기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철이 없어서 이 세상이 학연, 지연 등으로 엮여져 있다는 걸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대입도 아니고 고입을 재수한다고? 그건 기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지방의 이류쯤 되는 학교에 지원해 다니게 된다. 어떤 학교가 되든 어차피 한 시절 대충 때우다 가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된다. 흔히 일진이란 불리는 불량서클에 발을 들여놓은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거기서 일진의 수장인 상민와 친해진 건 따분한 학교생활에 활력이 되고 권력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게 만드는 건 이인자인 관석이다. 그는 알게 모르게 기윤이 상민과 친해지는 것을 방해한다. 상민은 이런 권력의 역학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결국 기윤이 일진에서 떨려 나가는 사건을 맞이하는데, 그건 어처구니없게도 상민이 보다 좋은 신발을 신었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한마디로 기윤은 거기에도 엄연한 질서와 조직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즈음 <데미안>에서 화자인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소개를 하듯, 기윤은 민재를 소개한다. 민재는 기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생으로 오면서 이들의 만남은 시작된다. 하지만 기윤에게 민재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에,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인 한마디로 재수 없는 타입이었다. (사춘기는 열등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줄 아는 탁월한 시기이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잘나가는 아이가 왜 이런 지방 소도시 그것도 일류도 아닌 이류 학교에 전학을 왔을까? 특이한 건, 민재는 특별히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 늘 책을 가까이하며 홀로의 자유를 고독과 맞바꾼 아이였다.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 건, 기윤이 상민이 패거리에서 쫓겨나자 점심시간이면 급식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해서다. 상민을 피해 도서실에 가면 늘 민재는 혼자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가까워진 민재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고 여느 아이와 달랐다. 이미 그 나이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고, 독서 편력을 쌓기도 했다. 덕분에 기윤은 덩달아 책을 읽고 민재와 가까워지게 된다.


사실 민재를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몇 개가 있는데, 하나는 학교에 학생과 교사 간의 어떤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가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럴 경우 일반 아이들이라면 세를 결집해서 데모를 하거나 업무를 마비시키고, 고작 기물을 파손하는 정도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건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때 민재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학생들 편에 서는데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 때를 모방하여 학교 측에 몇 개의 반박문을 써서 대자보를 붙이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것이 레지스탕스를 연상케 해 한동안 회자가 되기도 한다.


또 하나는, 그는 문학을 사랑해 시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좌절하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의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한다. 하지만 부모가 바라는 자신은 거기 까지라며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을 계획을 세운다. 그는 떠나기 전 기윤에게 선물처럼 자신이 타던 오토바이와 쓴 많은 시중 100편을 추려 기윤에게 맡긴다. 너무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시에 큰 제목이 없다. 나중에 혹시 시집을 낸다면 제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윤이 민재가 잘 떠나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 민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슬펐지만 기윤은 민재의 장례가 끝난 후 그를 위해 시집을 출판하기로 한다. 결국 이 책의 제목 레지스탕스는 민재의 시집의 제목인 동시에 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윤에게 그토록 울림을 줬던 민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충격적이면서 동시에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내 그를 인정하기로 했다. 민재는 민재로서 민재답게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스무 살도 채 살지 않은 민재에게 함부로 연민을 갖는 건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단 얼마나 자기답게 값지게 살았냐가 아닌가. 그는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희곡도 써서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래서 신은 그렇게 민재를 일찍 데려갔나 보다. 결국 신도 인정한 삶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기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나 동창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잊고 있었던 민재를 회상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물론 작가의 그런 설정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겠지만, 나라면 민재 같은 친구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보다 몇 보는 앞서 가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주는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외톨이가 될 위기에서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준 친구다. 그런데 기윤은 지난 10년 동안 민재를 잊고 남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자각했던 것이다. 왜 그런 설정이 필요했을까?


우리의 삶은 기윤과 얼마나 다른가? 나이 들수록 몇 살에 죽더라도 사는 동안 아프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바람 아닌가? 우리도 기윤이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나이 들지 않았나? 상민이의 세계를 누구는 동경하기도 하고 누구는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린 어느덧 남들만큼 살자는 게 삶의 모토가 되어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고, 뒤처지고 소외당하는 걸 못 견뎌하지 않았는가? 우린 그런 삶에 마땅히 저항할 필요가 있는데도 오히려 끌어안고 살고 있다. 기윤이 민재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을 쥐어짜듯 괴로워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어쩌면 독자에게도 기윤이처럼 깨어날 시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소설은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여러 의견이 많을 수 있겠지. 그것은 옳고 그름으로 얘기되어 지지 않는다. 이런 소설이 있는가 하면, 저런 소설이 있다. 한동안 치유와 위로를 주는 소설이 유행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강세다. 하지만 역시 궁극의 소설은 이렇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느냐고 물어봐 주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 아닐까?


이우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한다. 소설가는 발표한 작품과 무관하게, 처음 문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의 순수함으로 사유하고, 탐구하고, 집필하는 존재라고. 작품을 출간해서 소설가가 아니라, 문학에 헌신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소설가라고 했다.


올해도 어느덧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가 마감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작년엔 천명관의 발견이 좋았는데, 올해는 이 책이다 싶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다. 또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남은 한 달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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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11-23 1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우 작가 youtube에 자기 채널도 운영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작가이지요.

stella.K 2024-11-23 18:1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한번 들어가 봐야하겠네요. 흥미로운 작가 맞는 것 같습니다. 똑똑한 거 같고요. ㅋ

니르바나 2024-11-23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니까 급땡기네요.ㅎㅎ
한달밖에 남지 않은 2024년도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24-11-23 18:20   좋아요 1 | URL
니르바나님은 안 읽으셔도 되지않을까요? 더 좋은 책 읽으시잖아요.ㅎㅎ 그래도 뭐 젊은 작가들 응원 차원에서 읽으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ㅎ
세월 참 빠르죠? 니르바나님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물감 2024-11-26 2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미안>을 포함해 이런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비교적 건강하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전에 누군가에게도 그랬었는데, 방황하는 사람만이 헤세를 찾고 읽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또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이런 장르들에 많은 위로를 얻었어요. 하지만 반대로 건강한 사람들처럼 나도 시큰둥했으면 좋겠다고 누누히 생각했고요. 그래도 별다섯 주신걸보니 정말 잘쓴 책인가봅니다 ㅎㅎ

stella.K 2024-11-27 13:39   좋아요 2 | URL
앗, 그런가요? 사실 이런 장르 답을 주진 안 잖아요. 니가 답을 찾아라는 식이죠. 어찌보면 겸손한 것 같고 어찌보면 무책임한 것 같고. 이 작가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이 책 독일에도 팔려 나가고 나름 잘 나가는 작가더군요. 자기는 매년 장편 한 권씩 낼거라는데 그 패기도 맘에 들고. 당분간 지켜보고 싶은 작가예요. 기회되면 함 읽어 보시길! (사실 민재 죽는데 눈물이 찔끔.. 나이 드니까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일단 안구건조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듯요. 😆 )

고양이라디오 2024-11-27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먼가 흥미로운 작가와 흥미로운 책이로군요! 찜해놓고 갑니다ㅎ

페크pek0501 2024-11-29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가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에겐 큰 기쁨이지요. 저도 맘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싶어지곤 해요. 전작 읽기를 하고 싶지만 우리의 인생이 짧은지라 시작하게 되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몇몇 작품을 읽으려고는 합니다. 확실히 각자 독서 취향이 있어요.

stella.K 2024-11-29 21:14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맛에 책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작가 다 보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주요작은 좀 보려고요.
마침 중고샵에도 있더라구요.^^

2024-11-3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30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3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첸을 멀리하라 - 불가능한 사랑
수잔네 아벨 지음, 김동언 옮김 / 뒤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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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단순히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줄 알았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전쟁 직후의 인간 군상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종 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생각해 보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전쟁 이후를 보여주는 소설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그레첸을 멀리하라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2차 대전 직후 독일은 아직 자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외국인 병사들과 흥청망청 술렁거리는 문화가 팽배했다. 그래서 그 외국 병사들에게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그들만이 통하는 은어 같은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한마디로 독일 여자를 조심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음껏 자유를 누렸다. 아마도 그레첸은 독일 여성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 같은 이름인듯하다. 우리나라에 순희나 영희가 여자 이름의 대명사인 것처럼.

그렇다고 전후의 모든 독일 여성이 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 그레타는 순결했다. 전쟁 중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 당하고 소모되는지 아는 가족들은 아직 어린 그레타를 보호하기 위해 일찌감치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해 사람들의 의심을 피했다. 그런 그레타가 미국의 흑인 병사 밥 쿠퍼를 만난 건 우연 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전장에 보내고 너무 오랜 나날 그리워하던 그레타가 밥 쿠퍼를 의지했던 건 당연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인간적인 호기심과 연민 뭐 그런 이끌림으로 가까워지고, 결국 자연스럽게 살을 섞고 딸 마리까지 낳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마리는 애초부터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고 상황은 역전된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다정한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전쟁 후유증을 겪는지 전같지가 않다. 가족들에게 까칠하게 대하고, 그렇게 사랑했던 딸 그레타가 미국 양놈 그것도 깜둥이와 놀아나더니 급기야 족보에도 없는 딸까지 낳았다고 대놓고 혐오한다. 결국 집에서 마리를 안전하게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레타는 마리를 어느 가톨릭 아동보호단체에 맡기게 되지만 자식을 버린 죄책감과 사라진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번갈아 드나드는 신세가 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그레타가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몬테라스란 의사와 정식으로 결혼도 하고 아들 톰을 낳고 그럭저럭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마음속엔 늘 잃어버린 딸과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과 죄책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이 들어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다. 하지만 편안히 죽을 일만 남을 줄 알았던 그녀에게 치매가 왔다. 하지만 그때까지 아들 톰은 엄마가 그런 어려운 삶을 살았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평소 그다지 좋은 모자관계는 아니었으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과거를 안 이상 톰은 엄마가 기억을 더 잃기 전에 물음표로 남아 있는 엄마의 연인과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엄마의 딸이자 피부색이 다른 누나를 찾기로 결심한다. 이 소설은 그런 톰의 여정을 그레타의 과거와 톰의 현재를 번갈아 가며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새삼 제일 먼저 깨달은 건, 전쟁 후의 상황은 어느 나라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나라만 다르다 뿐 등장인물을 우리 식 이름으로 바꿔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전쟁이 끝나면 곧 안정을 찾을 것 같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문제와 고통이 시작된다. 그런데 소설은 소설인가 보다. 흑인 병사와 독일 소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리고 있으니. 물론 그런 사랑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현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하고 참혹하지 않을까.

전쟁 직후 흥청망청 댔다는 건, 단순히 전쟁이 끝난 것을 안도하고 축하하기 위한 것마는 아니라는 것쯤 독자는 알 것이다. 그것은 집단 스트레스를 광적이면서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풀어 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인종끼리 피와 살을 섞어 태어난 제3의 인종을 보통 혼혈아라고 하지만 그들이 또 어떻게 자신의 부모와 나라로부터 버림을 당했을지 알 수가 없다. 아마 그래서도 그레첸을 멀리하라는 뜻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이 쓰인 건, TV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일했던 저자가 우연한 기회에 입양의 문제를 다루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 10년 동안 브라운 베이비 즉 그레타와 밥처럼 서로 다른 인종에게서 태어난 혼혈 아이를 해외 입양시켰던 사례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책에선 이것을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라 하여 국가적 프로젝트로 실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해외 입양이라면 그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도 있었다. 전쟁 직후와 산아제한이 없던 시절 가난해 아이를 키울 수 없어 해외입양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두 나라 다 아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과연 그들이 행복했을까? (거기에 우리나라는 인종의 문제는 빠져 있다.)

또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떠오르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그야말로 모든 사활을 걸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전쟁이 끝나면 그 나라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상처와 트라우마는 실로 재앙적 수준이 될 것이다. 또한 그건 승전국이나 패전국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승리했다고 좋아하고, 패했다고 슬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라의 지도자는 샴페인을 터뜨릴지 몰라도 전쟁의 상처를 떠안는 건 국민의 몫이다. 그런 가운데 제2, 제3의 그레타와 마리는 또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올지 상상할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독일에서는 혼혈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낸 사례는 있지만 '브라운 베이비 플랜'이란 공식 명칭을 달고 시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소설의 사실적 묘사를 위해 저자가 자의적으로 지어낸 명칭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그런 만큼 이 책은 소설임에도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실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소설이 순수 허구만을 다루는 장르는 아닌지라 사실을 각색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가히 가슴을 울리는 문제작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그레타가 마리를 잃고 생일 때마다 썼던 편지 부분을 읽는데,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간혹 우는 적은 있어도 책 보고는 여간해서 울지 않는 내가 이 책을 보고는 눈물이 났다.

답장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어미의 마음이 어떨까. 우리 역시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고 그 생모들은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을까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져 그 나라나 이 나라나 그렇게 헤어진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일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도 만나는 것이 못 만나는 것에 턱없이 낮을 것이다. 도대체 이 아픈 인간의 역사는 언제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래도 소설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그건 모르긴 해도 저자가 대중을 의식한 결과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약간은 동화적인 느낌도 들어 나 개인적으론 그게 왠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로 톰은 저자의 페르소나다.

이 책을 번역한 김동언 번역가는 이런 말을 '옮긴이의 말'에서 남겼다. 무릇 소설이란 현실과 맞서는 장르이며,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장르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욱이 시대와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우리 소설의 전통이며 미덕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미덕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잘 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 후를 생각하라고 지금의 전쟁국에 촉구하는 것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기 때 전쟁의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지문처럼 남아 아직도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그 후유증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역사가 기억하겠지. 또 오늘날의 전쟁은 훗날 어떻게 사람을 괴롭힐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해 주길 이 지면을 통해 촉구한다. (알 리없겠지만.ㅜ)


#뒤란 #그레첸을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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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4-10-31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전쟁은 악입니다.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
이를테면 십자군 전쟁 포함해서 모두 악한 행위일 뿐입니다.
역사이래 남의 것을 무력으로 빼앗는 살인 강도짓을
이념으로 포장하여 전쟁이라고 할 뿐이니까요.
전쟁은 별의 별 사건의 총집합이니 이야기 거리가 많아 문학, 예술의 소재가 되어
작품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회자되지만
총,칼을 맞는 것이 나, 또는 가족에게 해당되는 사건이라면
다만 끔찍한 행위로 몸과 마음에 절대적인 흉터로 남을테니까요.
같잖은 이유를 대고 국방의 의무를 피해 군대도 가지 않은 인간이
쉽게 내뱉는 전쟁이야기는 너무나 한심합니다.
전쟁은 아이들의 장난감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 마지막에 써주신 글,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들은 부디 지금이라도 전쟁을 중단해 주길 이 지면을 통해 촉구한다는 말씀에 니르바나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stella.K 2024-11-01 11:17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분명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반전운동을 하는 곳도 있을텐데 그런 소리는 안 들리고 온통 전쟁의 소리만 들리네요. 러시아에 북한군을 파병했다는데 같이 싸우지 말고 이참에 자기 살 길이나 찾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도 해 봅니다. 싸우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싸우지 않겠습니까? ㅋ
이책은 전후에 여성이 어떠한 삶을 살게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페미니즘 문학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글을 넘 뜸하게 올리니 니르바나님 안부도 잘 못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종종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오늘은 잘 지내시는 걸로..!^^

레삭매냐 2024-11-01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첸을 멀리하라>

리뷰를 카피해서 정독하고 나니
더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 상황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
의 상처들을 보듬는 이야기 -

근데 분량이 어마무시하네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stella.K 2024-11-01 21:07   좋아요 1 | URL
그래도 가독성은 좋은 편입니다.
매냐님이라면 일주일이면 충분히 다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 2024-11-01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우스트에 나오는데,,, 그가 사랑했던 어린 여성이고 나중에 사랑때문에 모친과 오빠가 죽고 영아살해죄로 사형당하잖아요?!
혹시 그 그레첸일까요?

stella.K 2024-11-01 22:32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파우스트 읽긴 했는데 워낙 오래 전에 읽은데다가
뭔 내용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읽어서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아, 이거 아는 척하고 쓰는 게 아니었는데 어쩌죠? ㅎㅎ
암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그거 말고도 약간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그레타니, 톰, 밥, 제인 등 미국식 이름인 것 같더라구요.
그레첸은 독일식 이름인 것 같긴한데. 작가가 왜 이름을 하나 같이
그렇게 썼을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하며 읽었습니다.
게다가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 말미에 이를 때까지 그레타를 그레첸으로
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의 다 읽을 때쯤 왜 그레첸을 그레타로 부르지?
했더니 제가 착각을 했더군요. 아놔~;;

그레이스 2024-11-01 22:34   좋아요 1 | URL
ㅎㅎ
그레트헨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레첸이라고도 하던데,,, 어쨌든 제 짐작이예요.
파우스트의 그레첸이 제일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해서요 ^^

yamoo 2024-11-02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전에 스텔라 님 리뷰 보고 좋아요 눌렀다가. 글이 길어서 지금 다시 정독했어요. 이거 재밌을 거 같아요. 전쟁 영화나 소설 좋아하는데, 쓰신 내용 보니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구매 버튼을 누르기 직전 이 소설의 분량을 보고 취소했어요...ㅋㅋ 이거 벽돌책 부류네요..^^;;

stella.K 2024-11-02 10:19   좋아요 0 | URL
아, 이런ᆢ 야무님답지 않으십니다. 전쟁 얘기 좋아하시면 당연 사셔야죠. ㅎㅎ 벽돌책이어도 가독성이 좋습니다. 잘 읽힐 겁니다. 나중에 중고샵에 넘어오면 그때 한 번 사 보세요.^^

페크pek0501 2024-11-12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니 제가 최근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그 책 역시 제2차세계대전을 다루었으니 전쟁 소설이라 할 수 있어요. 그때를 회상하며 쓴 글인데, 작가가 마치 감정 개입 없이 태연하게? 쓴 글로 읽힙니다. 그래도 독자는 끔찍하고 참혹함을 느끼게 됩니다.
전쟁은 승자가 없다고 하죠. 양 국가가 손실을 발생시킬 뿐인, 어리석은 짓이죠.

stella.K 2024-11-13 20:47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나라든, 단체든 지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푸틴도 그렇고 트럼프도 그렇고 나라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전쟁은 정말 백해무익한건데 언제까지 하려고 드는지 모르겠어요.
<제5도살장>은 좀 독특한 작품인가 봅니다. 함 읽어보면 좋을텐데
언제 읽을런지 모르겠습니다. ㅠ
 
점퍼 생각학교 클클문고
고정욱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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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다 읽어 본다. 청소년 시절을 보낸 지가 언젠데. 물론 나도 그 시절 책을 안 읽은 건 아니다. 하지만 주로 고전을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것이나 아니면 일반 책을 기웃거렸을 뿐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는 읽은 기억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책이 나에겐 처음으로 읽는 청소년 문학인지도 모른다. 사실 나 때는 청소년 문학이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장르로도 인정받지도 못했다. (어쩌면 성장 문학을 청소년 문학과 혼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좀 다르지 않나?) 게다가 내가 쓸데없이 고차원이어서 있어도 유치하다고 안 읽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제 와 있는 이 책은 완전 내 스타일이다. 글씨도 크고,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것이 읽는데 부담도 없다. 스토리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껏 난 뭐 때문에 이마에 내 천(川) 자를 그리며 힘들게 ㅜ책을 읽어왔는지 모르겠단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말하지만 가끔은 어렵고 힘든 책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고 편한 책만 읽으면 독서에 힘이 붙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와 교육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나 할까.

이 책의 주인공 박창식은 정말로 행운의 아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시간 여행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창식이 행운의 아이가 될 만큼 똑똑하고 착하고 심성 바른 아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사춘기 아이답게 뭔가의 불만과 반항기가 가득하다.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인데도 별로 또래와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내부 고발자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그것을 술로 풀고 엄마와도 이혼한 상태다. 그러니 그 영향이 고스란히 창식에게로 간다. 그나마 할머니가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께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날도 아버지와 싸우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1928년에 와 있다. 그것도 북한의 평안도 정주다. 얼마나 황당할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신분이 오산중학교 학생이라는 정도. 하지만 그는 현재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정주이라니! 물론 원래 학교가 정주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북한은 싫지만 그렇게 되고 보니 김소월과 백석 그리고 이중섭이 창식과 동기가 되어있다. 와, 이건 웬 행운인가? (아무리 허구하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람을 무려 세 사람이나 친구로 만나다니! 놀라웠던 건, 나는 위의 세 분이 같은 학교 동기동창이란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게다가 이승훈 선생이 교장이고, 김억 선생이 문학 동아리 지도교사다. 이 정도면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가히 상상이 갈 만도 하다. 그 학교를 졸업했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학생은 어깨에 힘을 줘도 무방하겠구나 싶다.

그때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거의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재밌는 건 창식이 친구들과 함께 이웃 여학교 학생들과 미팅을 하기도 하는데 그 험악한 시절에도 낭만은 있었구나 싶다. 그래도 험한 시절은 험한 시절이다. 말순이 창식과 짝이 되고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말순이 언니로부터 전보를 받는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다쳐서 위독한 상태니 급히 오라는 것이다. 즉 말순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다친 것이다. 창식은 얼떨결에 말순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하고 거기서 민족 독립의 열망과 긴급함을 목도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는 주인공 박창식을 어떻게 창조해낸 것일까. 사실 박창식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저자는 이야기 말미에 <오산학교 백 년사>란 책에 박창식을 짧게 언급해 놓았다. 그러니까 거기서 힌트를 얻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구성이며, 인물 캐릭터까지 정말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 (사실 '오산학교 백 년사'는 일반 서점에선 없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국립 중앙도서관이나 일부 대학 도서관엔 있다고 한다. 이런 책은 일반에도 많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까?)

영어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란 단어가 있다. (같은 제목의 영화로 유명해진 단어다.)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의미 한한다. 이 단어는 창식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둘 다 적용되는 단어는 아닐까 싶다. 창식은 분명 1928년을 경험해 본 이상 그때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거다. 무엇보다 그림에 관심 있는 창식으로선 당대 유명한 화가 이중섭을 만났다는 건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나라가 중요하다고 100번을 외치면 뭐 하겠는가? 한 번의 경험이 확실하지. 물론 어느 누구도 시간 여행은 할 수 없겠지만 책을 통해 우리는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창식은 그 뾰족하고 반항기 가득한 성격이 다듬어지고 한층 어른스러워진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창식이만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우리도 창식이처럼 시간 여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혹 가능하다고 해도 권할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 경험은 해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현재와 과거를 인지하는 능력이 붕괴되면서 미쳐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타임 슬립은 타임 슬립이고, 오히려 현실을 열심히 살면 그런 세렌디피티의 기적은 우연을 가장해서 오지 않을까.

이 책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구성을 통해 (보통은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해서 이 점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소설도 역시 그렇다.) 읽는 맛이 좋다. 독자가 이럴진대 저자도 소위 쓰는 손맛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유명한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의 작가로도 유명한데 급관심이 간다. 기회 있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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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10-1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스텔라님도 곧바로 청소년문학을 읽으셨군요. 이 리뷰 읽다보니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과거 유명인들과 조우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겹쳤나봐요 ㅋㅋ

stella.K 2024-10-11 20:17   좋아요 1 | URL
ㅎㅎ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나긴하죠?
그래도 우리나라고 오산학교 3인방의 청소년 시절을
다뤘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에 별 반 개는 더 주고 싶습니다. ㅋㅋ
한마디로 구성이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간간히 아이다운 유머러스한 문장도 좋고.^^

푸른기침 2024-10-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다 살다 이 나이에 <청소년 도서를 읽고 쓴 생각 글>을 읽게 되는군요.

좋은 영어 단어와 그와 얽힌 영화도 얻어 가고, 제가 살짝 쿵 좋아하는 백석, 이중섭 이름도 발음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계절이 오는 어귀 쯤이라 생각했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계절의 한 복판에 와 있네요.

아침 저녁, 쌀쌀하지만, 이쁜 하늘이 보이는 요즘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맘껏 시간을 즐기시기를...
이만, 꾸벅~~~~~

stella.K 2024-10-11 20:20   좋아요 0 | URL
저 3인방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어 단어 좋으셨습니까? 저도 이 단어 생각하고 좋았습니다. ㅋ

정말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죠?
푸른기침도 감기걸려 기침하시마시고 늘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또 뵙게되길!^^

니르바나 2024-10-11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점퍼 재미있게 읽으셨군요.
그런데 오산학교는 평양이 아니라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고,
이승훈은 오산학교 교장이 아니고 설립자입니다.
검색해보면 우리가 잘 아는 조만식, 유영모, 홍명희 선생이 교장을 지내셨고,
함석헌이 오산 학교에서 유영모 선생을 만났습니다.
오산학교는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 교사와 학생으로 있었던 민족의 학교 였습니다.

stella.K 2024-10-11 21:17   좋아요 1 | URL
ㅎㅎ맞아요! 정주! 이번에도 니르바나님의 예리함을 피해가지 못했네요.
북한하면 평양 아니면 함경도를 떠올리는지라 무의식적으로 이러네요 ㅠㅠ
근데 이 책에선 이승훈을 교장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알고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땐 설립자가 교장도하지 않았을까요?
암튼 검색이라도 하고 쓸 걸 스스로 무식이 탄로나게 만들고 큰 일 났습니다.ㅠ ㅎㅎ

니르바나 2024-10-12 02:20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제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정말입니다)
다만 제 서재에 있는 마이페이퍼 첫째 카테고리에 있는 私淑(사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영모 선생님을 나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지내다보니 남강 이승훈-다석 유영모-함석헌 선생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편이라 이 분들에 대해 여러권의 책을 읽다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민족지사들이 모이는 학교라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폐교된 오산학교다 보니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사이사이 교장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죠.
니르바나가 짧은 안목으로 검열한다고 생각마시고 그냥 스텔라님 글에 댓글을 재미있게 단다고 귀엽게 봐주세요.ㅎㅎ

stella.K 2024-10-12 09:51   좋아요 1 | URL
아이고, 감히 제가 어떻게 니르바나님을 귀엽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릴 일이죠. 실수하더라도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될 것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4-10-15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의 동화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주 특별한 우리 형‘, 같은...
저도 동화책이나 청소년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읽어 볼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 책이 괜찮은 책이 많더라고요. 정채봉 작가의 책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두루두루 읽어 보고 싶은데 한정된 시간만 남다 보니 마음만 앞서고 있네요. 그래도 알라딘에 들어와 제가 읽지 못한 책에 대한 리뷰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stella.K 2024-10-15 19:39   좋아요 0 | URL
고정욱 작가의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 있었나요?
저는 워낙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가 워낙 유명해서 다른 건 대충봤어요.
그러게요. 저는 전에 청소년 문학 문제 많다는 말을 들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도 읽어보니까 재밌더라구요.
인물 설정할 때 도움이될 것 같기도해요.
고정욱 작가 노련하고 영리한 작가라는 생각이들었어요.
전 이날까지 정채봉 작가의 책은 유명하다는 것만 알지 읽어 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어요.ㅠ 유명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죠.
TV는 딱 중2의 IQ에 맞춰있다잖아요. 그래야 모든 연령계층의
사람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하던데 책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하더라구요.
특별히 어려운 책을 읽을 양이 아니라면요. 저도 점점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기도해요. ㅎ

레삭매냐 2024-10-30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
매우 격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이었군요.
잘 쓰인 책이라고 하니 호기심
만발이네요.

쓰는 손맛, 작가에 대한 찬사네요.

stella.K 2024-10-30 15:01   좋아요 1 | URL
혹시 읽게된다면 그냥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읽어주세요. 어른의 눈높이라면 약간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ㅎ 그래도 작가가 소월과 백석과 중섭의 청소년 시절을 그렸다는 건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yamoo 2024-11-02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정욱 작가에게 실제로 작문 수업인가 들은 적이 있어요. 학부때요. 키가 무척 작은데, 목발을 짚고 다녀서(두 다리가 없는 듯) 정말 충격적인 만남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학부 2학년 때였는데...이 분을 몰랐을 때였고, 동화작가로만 자기를 소개하시더라구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었고, 자신감에 찬 수업...목소리도 카랑카랑 했던 기억이 있는데....아직도 건재하시군요!

stella.K 2024-11-02 10:26   좋아요 0 | URL
아, 만나 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다리가 안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 책 내신 거 보면 무척 열심히 사시는 분 같더군요. 어떠실지 감히 상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