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고고한 연예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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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토록 고고한 연애'인 줄 알았다. 그런데 '... 고고한 연예'다.
연예하면 요즘 연예인들의 예능 프로에서의 활약상이나 아니면 그들의 험담을 연상시키지 않나. 그런데 연예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대중 앞에서 음악, 무용, 만담, 마술, 쇼 따위를 공연함. 또는 그런 재주.'라고 나와있다. 그런 연예가 조선 시대에도 있어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조선 시대 광대들의 삶을 이름이다.


이 책은 마치 저자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외전 같기도 하고 연작 같기도 도하다.  <서러워라,......>에서는 모독과 김만중과 그의 유명한 작품 <구운몽>와 <사씨남정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림자로만 나오고 전작이 모독과 김만중의 서사라면 이 작품은 모독과 달문의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서러워라...>를 통해 소설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면, 이 작품은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캐릭터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다뤘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는 두 소설을 통해 소설 쓰기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달문이다. 그는 처음 연암 박지원의 소설에 나온다. 18세기 광대였고 그 모습이 괴이하여 우는 아이 눈물을 뚝 그치게 만드는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즉 울음을 안 그치면 달문이 와서 잡아가라고 할 거라고 겁을 주면 뚝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마다 그런 인물이 하나씩은 전해 내려오는가 보다. 나 어렸을 땐 그 대상이 망태 할아버지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김탁환 작가는 바로 이 달문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오히려 달문의 외모에 대한 괴이함 보다는 그의 인물됨에 초점을 맞춘다. 생김에 대한 묘사를 보면 얼핏 조커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의 인물됨을 보면 한마디로 대인배를 넘어 금상이 가질 법한 자질을 가졌다. 그런데 그가 광대이기 전에 거지라는 것이다. 거지라면 뼛속까지 거지일 텐데 과연 이런 고귀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가능할까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그렇게 말하면 듣는 거지 기분 나쁘다고 할지 모르겠다. 우리 거지들 중엔 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금수저라고 그 인간성까지 금수저란 법 없지 않은가. 내내 읽으면서 달문의 그런 사고방식과 인간됨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없고 인간 된 도리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고 고민이 없다.  


그는 거지지만 산대놀이의 리더이기도 하다. 산대놀이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가면극이다. 이것을 언제 누구에게서 배웠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사람이 자기 밥그릇은 타고난다지 않는가. 어쨌든 그런 재주가 있으니 잘 갈고닦아서 거지 팔자를 면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그것을 불가피할 때나 사용할 뿐 광대 보다 거지이기를 더 좋아한다. 이쯤 되면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다른 거지들은 달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그 정도라면 저 노트르담의 꼽추인 콰지모도나 희랍인이라던 조르바를 넘어 조선 시대 예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독이 누군가의 모함에 빠져있을 때 달문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사지로 뛰어든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금상을 만나는 자리다. 


그뿐인가, 달문이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라.) 그렇게 기괴한 모습을 하고 워낙에 거지로 산지라 몸에 밴 거지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데도 그를 아는 기생들은 하나 같이 그를 연모한다. 이쯤 되면 작가가 구라를 쳐도 너무 친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 역시 인간의 뇌는 팩트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작가가 그렇게 묘사를 하니까 긴 기민가 하면서도 믿게 되는 것이다. 안 믿으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소설 아닌가. 문제는 소설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믿을만한가 하는 것이다. 즉 소설의 관건은 얼마나 독자를 그럴듯하게 속일 수 있느냐인 것이다. 잘 속이고, 깊이 속이고, 많이 속이면 속일수록 독자는 기꺼이 그것에 환호한다. 대신 어설프게 속이면 화를 내고 분노한다. 


캐릭터는 일상에선 있을 법하지 않지만 어딘가 있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가 캐릭터가 된다. 독자는 바로 인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나타나는 인물에  빠져드는 것이다. 달문과 모독의 관계도 보라. 달문과 모독이 내내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 하지만 그 과정이 모독이 꼭 무슨 일이 생기면 달문이 나타나 문제 해결을 해 주고 떠난다. 또 그러기를 세 번쯤 반복하는 것 같다. 그건 이야기의 법칙 중 하나다. 그것 이상을 넘어가면 떠날 거란 달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


가끔 작가들 중에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논 등장인물들이 살아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하고 무엇인가를 하는데 그럼 난 그것을 받아 적을 뿐이라고. 그게 실제로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려면 캐릭터를 깊이 파야한다. 작가 스스로가 인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코 독자를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릭터에 대해선 빙산의 일각의 법칙을 말하기도 한다. 즉 말 그대로 우리가 작품에서 보는 인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수면 밑으로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달문이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6백 페이지를 별 무리 없이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건 작가가 달문에 대해 여러모로 연구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달문을 위한, 달문에 의한, 달문의 소설 즉 인물 중심의 소설이다. 뭐 인물 중심의 소설이든 아니든 캐릭터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실 매설가인 모독이 처음부터 달문이 하도 특이한 인물이라 소설로 쓰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를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하고 또한 쥐 영감과 그의 아들의 응원으로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모독이 초기엔 별 볼 일없는 작가 지망생에서 확실한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난 이 부분에서 왠지 김탁환 작가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지금까지 조선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모르긴 해도 누군가의 성원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역사 소설의 묘미는 당시 사회 문화상을 읽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책방은 오늘 날로 치면 서점에 해당하겠지만 출판 인쇄가 발달하기 전이었으니 판매 보단 대여의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소설은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거기에 쥐 영감이 있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쥐 영감의 임무는 아무 소설이나 가게에 내놓을 수 없고 읽힐만한 소설을 가려내는 소위 감별사의 역할이었다. 얼핏 오늘 날로 치면 평론가일까 했는데 그 보단 기획이나 편집, 마케팅 등의 일을 하는 인물은 아닐까 한다. 그런 일은 오늘날엔 서점이 아니라 출판사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비해 달문이 했다던 산대놀이나 운심의 칼춤에 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여 그 점은 좀 아쉽다.


하지만 '고고한 연예'는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당대의 연예인들 즉 기생을 포함한 광대들을 우습게 보면 큰 코 다친다. 그들은 자신의 웃음을 팔았지 자존심을 판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삶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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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0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 이리뷰도 읽었고 댓글도 달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내댓글 사라져버린 ㅜ.ㅜ
역시 북플에서 뭔가 쓰면 날아가버리나봐요.

스텔라 케이이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추카~

stella.K 2021-01-09 21:06   좋아요 0 | URL
엇, 정말요?
지금이라도 무플을 방지해 주시니 감읍할따름입니다.ㅠ

저도 스콧님의 이달의 2 관왕을 감축드립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소설 조선왕조실록 1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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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바람이 무섭다고, 이제야 김탁환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다. 오래전 <노서아 가비>를 읽을 때만 해도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책이란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나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역사에 크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드는지 역사 소설이 가끔 당기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내가 관심 있어하는 글 쓰기 그것도 소설에 관한 성찰과 물음을 하고 있다.    


글 쓰기에 관한 책이야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종목이긴 하지만 주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 또는 전기류로 많이 나오지 소설로 나오기는 드문 것 같다. 김탁환 작가는 아주 능숙한 솜씨로 소설이란 장르에 그것을 담아냈다. 그것도 서포 김만중의 작품을 모티브로 했다. 조선 시대 고문학이 그의 전공이고 보면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역사 소설가들에 대해 조금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김탁환 작가도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평가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라기 보단 스토리텔러라는 약간의 비아냥. 


물론 순수 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장르로 보자면 별로 맞지 않아 보인다. 요즘 순수 문학이 그렇게 환영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자세는 문학을 너무 작게 보는 시도는 아닐까 싶다. 역사 자체가 스토리텔링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한 것이 역사 소설이다. 하지만 이만큼 잘 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눈에 보이는 듯하고, 손에 잡히는 듯하다. 왜 독자들이 김탁환, 김탁환 하는지 알 것 같다. 좋은 작가는 독자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고맙지 않은가. 김탁환 같은 역사 소설가 (그는 현대물도 쓰지만)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그것은 또 '제탁 월드'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서포 김만중의 <사 씨 남정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서포 김만중과 희빈 장 씨와 작중화자라 할 수 있는 모독에 관한 이야기다. 짐작하겠지만 모독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작품을 위해 가공한 인물이고 그것은 김탁환 작가의 페르소나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꼭 같지는 않아도 그와 비슷한 이름이 그 시대에 흔히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시절 양반들이나 성에 이름을 붙였지 보통의 사람은 예명인지 별명인지 본명 인지도 모를 이름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모독도 그리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모독의 직업은 매설가. 조선시대엔 소설가를 그렇게 불렀나 보다. 물론 이 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매설가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싶어 진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그 시대 의원이나 예인들처럼 중인 이상의 신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담가, 이야기꾼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직업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매설가가 되는 것도 역시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팔도의 있는 책, 없는 책을 다 주워 읽는 것도 모자라 대국의 책까지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오늘날 남의 나라 소설을 읽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만 당시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대에 매설가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지 않았을까. 그때는 매설가가 아니면 양반이고 평민이고 어디서 이야기를 접하겠는가. 그 시대 작가와 독자들은 아직 문명의 이기를 경험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렇다면 문명의 이기 앞에 소설가들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라디오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소설가들은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을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 성우를 내세워 이야기를 들려주니 비로소 이야기가 재밌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소설을 더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극장이 생기면서 소설가들은 그때야 불안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활동사진이란 것이 큰 스크린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데 자기네들도 빨려 들어가겠는데 영화를 보지 무슨 소설을 읽겠냐며 이제 소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라디오 쟁이들도 마찬가지다. 극장이 생겼는데 무슨  라디오 극장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게다가 TV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것의 등장 때문에 라디오는 물론 극장의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아 졌다. 이쯤 되면 소설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은 약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 SNS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시대 매설가들의 인기와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했을지도 모른다. 가히 제왕은 아니었을까. 그러니 오늘날 '제탁 월드'처럼 누구누구의 월드는 이미 그 시대에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재미만 보장이 된다면 세책방에 내놓으면 되는 일이다. 서로 간에 질투와 경쟁은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처럼 문명의 이기 때문에 약화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오늘날 문학판의 복잡한 카르텔의 문제도 없지 않았을까. 글 쓰는 게 권력이 되고 누군가의 비호를 받아야 한다니. 상업주의를 견제하고 문학의 권위를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독자를 즐겁게 해 줄 의무가 있고 그런 점에서 소설가를 포함한 모든 스토리텔러들이야 말로 가장 대중적이야 하고 상업적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역설을 주장하고 싶어 진다.


물론 현대의 모든 작가들이 카르텔에 편승하지는 않는다. 어떤 작가는 누가 무슨 상을 받고 누구에게로부터 사사를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하이틴 로맨스 같은 B급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또한 그런 책을 내주는 출판사와 서점이 있고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다. 그게 꼭 의미 없는 독서라고 어떻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책들 중 당대엔 B급으로 취급받던 책도 있다. 이 B급이라는 것도 요즘에나 정의 내린 거지 당대엔 굳이 그런 구분이 필요 없지 않았을까.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가 가장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의 B급이라고 말하는 마이너 한 형태가 그 시대엔 가장 보편적 형태는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해 본다. 또 그런 점에서 지금의 서점은 아직 공평한 것 같기도 한다. 매대의 구조를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서점은 돈 되고 고급 취향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온갖 잡다한 책들을 다 구비해 놓고 있지 않은가.      


김탁환 작가는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서포 김만중을 통해 답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매설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 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서포 김만중도 소설을 썼지만 그를 두고는 매설가라기 보단 문필가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냈던 것을 보면 학식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문필가로서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서는 모독과의 대비를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매설가는 그냥 이야기를 팔아먹고사는 존재일 뿐이다. 결국 매설은 양반도 쓸 수 있는 거지만 그런 문필가를 통해 그 격을 한층 높이지 않았을까.


서포 김만중이 <사씨남정기>는 희빈 장 씨를 겨냥해서 쓴 작품이다. 임금의 성은으로 희빈이 된 것도 부족해 황후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던가. 그것이 얼마나 인륜을 거스르는 파렴치한 짓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썼다. 물론 오늘날 장희빈에 대해선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이 유교 사회이고 보면 지식인이었던 김만중이 그런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정이란 곳은 온갖 거짓과 술수가 난무한 곳이고 보면 일일이 상대하여 싸우는 건 피곤하지만 이걸 소설로 쓴다면 글감은 넘쳐났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김만중이 누군가를 겨냥한 소설을 써도 되는지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글을 써도 쓸 것이 많을 텐데 굳이 그런 글을 쓰는 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장 그 책은 오늘 날로 말하면 불온서적으로 읽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 참극을 면치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책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분서를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과연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지식인의 양심 때문었을 것이다. 또 매설만큼 사람과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본노가 없이는 글을 쓸 수 없고,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분노 거기엔 반드시 분노를 유발하게 만드는 부조리한 인물과 상황이 있고 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싸우는 건 작가의 일이 아니다. 작가는 오직 글로만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글은 그들의 무기다. 그건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닐 것이다. 행복한 글을 쓰므로 독자도 행복하고 작가도 행복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세상은 고대로부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두 세계의 작가는 있을 수 있지만 김탁환 작가는 이것을 굳이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작가의 딜레마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도 완벽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고발하고 훈계 아닌 훈계해야 하는 존재.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전지적 시점을 견제해야 하는 작가의 맹점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의 매설가 모독은 자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죄하고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독이 맞다. 솔직히 왜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모독일까 조금은 불편했다. 작가 후기를 읽으니 김탁환 작가는 자신을 지독한 자기 모독적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모독이란 이름을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고. 무엇이 그토록 스스로를 모독하게 만드는 것일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기를 사랑하라. 이기적이 되라고 부추기는 시대가 아닌가. 하긴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너무 괴로워 앓아누울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 <목격자>에서 침몰하는 조운선에 죽어가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의 한자 이름인 '제탁'을 끼워 넣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책에서도 보라. 모독의 정인이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무라기보단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려 하지 않던가. 이 또한 어쩌면 자기를 모독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새삼 소설가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모독해야 쓸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부쩍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읽고 싶어 졌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감히 읽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국어 강의를 들어도 언급된 책을 읽을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건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잘못된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김탁환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나라 고전에 대해 읽어 볼 생각이라도 해 보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읽을 그의 책이 몇 권은 더 남아 있다는 게 나로 하여금 뭔가의 기대와 행복감을 갖게 만든다. 내친김에 우리 고전도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그가 참고한 자료 목록이 나오는데 과연 그는 자료 벌레고 아무나 역사 소설 쓰는 게 아니구나 싶다.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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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 한글로 쓰여진 문학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특히 구운몽 사씨남정기는 스토리 구성 재미가 뛰어난 고전이죠.
stella k님 페이퍼를 읽으니 다시 읽고 싶어졌네요.

김탁환은 리심, 노서아 가비 정도만 읽어봤는데,,,,
이렇게 한국적인 소재 한국 전통문학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써내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줘야 할것 같아요.
옆나라 일본은 헤이케, 겐지 이야기, 괴담류 모노가타리 형식에 일본 전통 고전을 현대 작가들이 끊임없이 활용하고 이어가고 있는데 ,,,

stella.K 2020-11-28 16:13   좋아요 0 | URL
스콧님은 어떤 면에선 성향이 약간 비슷한 것 같네요.
하루키도 그렇고, 저도 노서아 가비 별로라서
리심도 있었는데 안 읽었어요. 마침 전 신경숙판으로
읽었던지라 김탁환까지 읽는 게 별로 안 땡기더라구요.
이 책이나 방각본 살인사건인가 백탑파 시리즈 1권부터 읽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백탑파에 이덕무나 박지원 같은
조선의 걸출한 문인들이 나오잖아요.
그냥 무협 소설류 같아서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근데 스콧님은 도대체 안 읽은 책이 뭔가요?
여긴 독서 고수들이 많은데 스콧님도 예외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20-11-29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선 맘에 드는 작가가 생긴 거 축하드려요. 유익하고 기쁜 일이죠.
옛날엔 화가도 얕보고 환쟁이, 라고 했잖아요. 지금의 예술가 위치와 많이 달랐죠.
역사 소설을 쓴다고 해서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글을 써야 독자들이 쉽게 역사에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누군가는 칼럼도 얕보더라고요. 소설 밑이라는 거죠. 게다가 문학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우회해서 상황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 있는 반면 메시지를 바로 직선으로 날리는 칼럼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짧은 글로 메시지를 읽어야 하는 것도 필요하거든요. 매번 메시지를 소설을 다 읽어야만 알 수 있다면 피로하죠. 신문에 칼럼이 많은 이유죠.

평론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게 안 되니깐 평론가가 된 거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맞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평론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평론을 쓰는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댓글이 길어졌어요. 이만 스톱...ㅋ

stella.K 2020-11-29 18:46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우린 좀 글을 포괄적으로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너무 시야가 닫혀 있어요. 이건 좋고 저건 별로다란 인식이
필요없는 것 같은데. 옛날이나 어떨지 몰라도 요즘 칼럼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말이어요.

평론가에 대해선 그런 말이 있긴하죠.
조선 시대 땐 세책방마다 평론가에 해당하는
쥐영감이 있었나 봐요. 뭐 평론가라기 보다
이 책을 팔아도 될지 안 될지 감별사 노릇을 했나 봅니다.
재밌죠?^^

레삭매냐 2020-12-02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적해 주신 대로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질은 매설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탁환 작가는 오래 전 책 읽기 시작하던
시절에 자주 만났더랬는데...
<노서아 가비>를 마지막으로 끊었나
봅니다.

stella.K 2020-12-02 19:29   좋아요 1 | URL
그래도 주요 작품들은 다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됐죠.
전 솔직히 어느 작가가 막 좋다가도 어느 순간
권태로워질까 봐 그게 좀 불안하더군요.
전 김훈 작가가 여전히 좋긴한데 어느 순간 잘 안 읽게되더군요.
싫어서라기 보단 여지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야 좋아하는 게 오래도록 유지될 것 같다는 변명 아닌 변명 같은 변명을...
김탁환은 워낙에 써 놓은 책이 많아서 오래 좋아할 것 같습니다.ㅋㅋ
 
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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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이란 책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과 이것은 내용도 결도 다르다. 더구나 뒤에 '삼대'가 붙었다. 그러니 또 염상섭의 소설이 생각났다. 어쨌든 철도원과 삼대라는 조합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책 표지도 마음에 든다. 무슨 책인가 했더니 전에 모 인터넷 서점의 무가지 잡지에 '마터 2-10'이란 작가의 소설 연재를 단행본으로 내면서 제목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어떻게 해서 처음에 그런 제목을 정하고 그것이 뜻하는 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터 2-10'라니 무슨 SF물 같기도 하고 영 낯설었다. 역시 책은 제목이 반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무려 30년 동안 묵히고 어르고 달래서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생각한 게 1989년 방북을 했을 때였다고 하는데 물론 30년 동안 이 작품만 붙들었다는 얘기는 아닐 테다. 작가는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만큼이나 왕성한 글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쓴 작품만 해도 결코 만만치 않고 짬짬이(?) 근대 작가들의 작품을 편집도 했다. 언제 그 많은 작업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중에 이 작품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근대 문학작품을 보면서 일제 시대 노동사를 다룬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작품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해 왔다. 지금도 여전하고. 그러니 노동사 자체를 다루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녹여낸 작품은 더더욱 기대할 수가 없다. 모르지. 북한 문학엔 우리 남한보다 많이 있을지. 솔직히 우리나라 근대 문학이라는 것도 한정적이란 느낌이 들긴 하다. 근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든, 근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는 요즘 작가든지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 작가의 이 작품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 흔치 않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최근에 읽었던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도 포함)와도 맥락을 같이해 뭐 이런 우연이 있나 반갑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를 들여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든 만날만한 인물들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작품을 엮는 재주는 거의 신기에 가까워서 읽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그려진다. 누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 싶다. 한동안 역사 드라마가 붐이었는데 요즘엔 좀 뜸한 편이라 좀 아쉽다.


특히 이 작품은 현대와 근대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첫 장면부터 나오는 노동자의 크레인 고공 농성을 사실적으로 그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난 몇 년 전 뉴스나 신문에서 고공 농성 소식을 접하면서 그들이 허공에 매달려서 뭘 하는가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내가 우리나라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구나 뜨끔했다. 


노동 문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난 8월 14일은 우리나라 택배 역사 28년 만에 처음으로 택배 없는 날이었다고 한다. 난 아직도 그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당연히 택배 기사들도 남들 쉴 때 쉬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공휴일에 택배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28년 역사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어서 그런 특별한 날을 지정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기본적인 게 어떤 사람에 이처럼 특별해야 하는 것일까. 마침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날 하루를 쉰 택배 노동자들은 그만큼 밀린 일을 그다음 주에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하루 쉴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고 한다. 그건 내가 고공 농성 때 농성자는 크레인에 매달려 뭘 하고 지내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말 우리나라 노동 문제는 양파 같아서 까도 까도 새롭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빨갱이란 이름 아래 노동자의 문제를 얼마나 많이 숨겨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386 세대 언저리쯤 노동 문학이 나왔던 것을 감안해 얼핏 그 무렵부터를 생각하면 큰일 난다.


이런 작품은 황석영 같은 걸출한 작가가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황석영 작가에게 매료당하지 못했다. 본문만 600쪽이다. 유장한 문체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권할만하다. 독서는 내가 소화해 낼 수 있는 분량만 읽는 것이 아니라 가끔 미친 척하고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에 도전해 봐야 는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이 책을 훗날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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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19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석영작가와는 딱히 안맞더라구요. 기념비적인 객지같은 작품도 있지만 문학사적 역사적 의의로 읽었지 작품이 확 좋다는 아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ㅜ이 책도 고민좀 하다가 살짝 빼놓았는데 읽지는 않을것같아요

stella.K 2020-08-20 16: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네요.
저도 전에 한 3권쯤 읽었는데 딱히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그림은 그려지는데 문체의 맛은 별로 없는. 그냥 스토리텔링이나
서사에 강한 그런 작가라고 봐야할 것 같아요.
주로 남성 작가들이 이렇지 않나요? 김탁환도 그렇고.
저도 사실은 안 읽을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관심이 있어
읽었는데 과유불급이더군요.ㅋㅋ

카알벨루치 2020-08-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의 문체도 좀 끌리는데... 600쪽이라 큰 일 하셨습니다 ^^

stella.K 2020-08-21 15:18   좋아요 1 | URL
ㅎㅎ 역시 황석영 작가는 여자 보단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은가 봅니다.
끌리면 읽으셔야죠.^^
 
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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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책을 이제야 완독 했다.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책이다. 역사적 사실을 거의 그대로 소설로 옮긴 저자의 필력이 좋다.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와 이후 해방정국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일본을 비롯해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기도 했고, 온갖 사상이 난무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여기선 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의 활약과 삶을 다루고 있는데, 읽다 보면 우리나라 노동 운동이 생각보다 오래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노동 운동은 80년대 어느 날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나름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노동 운동을 했지만 성과는 미미해 보인다.


어찌 보면 사회주의가 나름 이상 적여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성공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에 대해선 더 많은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건 어떤 사상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책에 나오는 실존했던 인물들은 나름 이유 있는 삶을 살았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상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이 책은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의 흐름도 꼭 경성 트로이카라는 남성들에만 매어있지 않고, 여자 주요 등장인물에게도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193,40년대 여성들이 얼마나 자유분방하며 진취적이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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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기침 2020-06-0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 여름한 햇살입니다.
살짝쿵 눈부신 나날이 되시길....
참, 몸도 건강하시고요.....^^
이상, 뜬금포 안부 인사요...

stella.K 2020-06-07 18:5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
진짜 여름어요. 덥긴해도 아직 습도는 그다지 높지 않아
지낼만은한데 장마진 여름이 문제죠?
전 여름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하루하루 가는 게 아까울 정돕니다.ㅎ
기침님도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늘 오시면 인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20-06-09 0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독립운동이나 한국역사의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문학사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고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라서 바로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건강하시죠?

stella.K 2020-06-09 15:4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0-06-20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공부하겠다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뭔 얘기를 하는 거야? 번역이 잘못 된 거 아냐? 이러면서 읽었던 기억이...
책에 열정을 갖고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너무 천천히 읽습니다. ㅋ

stella.K 2020-06-20 19:05   좋아요 0 | URL
와우, 대단하셨네요. 저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러겠죠?
요즘엔 해설판도 많이 나온 모양인데 말이죠.ㅠ
 
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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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경성 트로이카>로 유명한 안재성 작가의 작품집이다. 9편의 작품이 실려있고, 일제 강점기로부터 시작해 최근의 노동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읽다 보면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구나 싶다. 일정 정도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면서 서사의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노동 문학에 천착을 해서 그런지 다소 진보적 성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평소 일제 강점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라 1부에 해당하는, <이천의 모스크바>나 <두 발 자전거>, 표제작인 <달뜨기 마을> 같은 작품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정치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시절 그저 막연히 억압받는 백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노동자란 좀 더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인상 깊었다. 과연 작가는 어디서 자료를 얻어 이런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좀 놀랍기도 했다. 하긴 사람이 게을러서 그렇지 찾고, 발굴하고, 연구하다 보면 이런 자료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 세 편의 작품들을 읽어 나가면서 새삼 내가 우리나라 노동사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스스로 좀 민망해졌다. 어쩌다 가물에 콩 나기로 노동 문학을 읽기도 하지만 그 역사에 관해서는 딱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과연 그런 자료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자도 어느 글에선가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우리나라는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좌익이니 빨갱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연 우리나라가 그렇게 봐도 좋을 만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잘 대우해 왔던가를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직도 자본가들의 갑질 논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 역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전태일 열사가 죽은 지 올해로 50년이란다. 또한 그것을 우리나라에선 현대 노동운동의 효시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엔 상놈이 양반에게 이리 밟히고, 저리 밟혔고, 일제 시대엔 일본인에게, 일본이 물러가고부터는 러시아와 미군이, 후엔 몇몇의 독재자들에게 짓밟혔다.


나는 뒷부분에 갈수록 특히 3부 같은 경우 읽을수록 흥미가 반감되는 걸 느꼈는데, 원래 책이라는 게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다. 앞부분에선 긴장감이 느껴지다가도 뒤로 갈수록 맥이 좀 풀린다.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봤더니, 독자인 내가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작가에게도 일정 부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노동 문제가 근본적으로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아서는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각, 노동 쟁의의 대처 방법이 딱히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이는 노동 현실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뉴스는 연일 코로나 사태로 힘들어하는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보였고, 어느 노동자는 기업을 상대로 고공 농성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이를 심각하게 보고, 누구는 피해자 코스프레한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다양성과 유연한 자세로 사회 문제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노동 문학도 조금 더 진화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수록 작품들은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다. 문학이란 언제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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