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에클레시아 -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
양광모 지음 / 선율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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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역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교회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니 무슨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카페 목회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긴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법 있나?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의 알만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교회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계시고, 병원, 교도소, 양로원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니 카페라고 계시지 않을 리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장소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동굴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다. 최첨단 4차 산업을 부르짖을 때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난 왜 이 책에서 사역의 다양성과 희망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우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처음에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존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현재 너무 건강하고 스마트한 교회를 다녀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챤으로 전락한 탓일까? 아니면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한때는 모든 교회의 칭송을 받는 교회를 다녔지만(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울기도 많이 울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새 동화되고 닮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신도로서 그렇게 상처 받고, 울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선 한 번도 회의를 해 본적은 없다. 싫으면 그 조직에서 나오면 그만인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신앙을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였지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날 대형 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트렌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형 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소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의 오판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하나님이 언제 그에게 이것을 판단하고 비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요는 그도 교회를 다닐진대 비판하는 데는 빠르고 기도하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그것부터 점검해 봐야할 일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고 오해할까봐 그것도 조심스럽긴 하다. 요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런 과격하고도 이분법적인 비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해서 나온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어떤 그릇은 귀히 쓰일 그릇으로, 어떤 건 천히 쓰일 그릇으로 빚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토기장이가 그 용도에 맞게 빚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교회의 비판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왔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형 교회 자체의 내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동시에 사이비 종교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분열케 하는 사탄 마귀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형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모범적인 교회가 어느 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 비판을 받을 때 평신도로서 그것을 감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런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 나라고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나?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다니고 있는지. 늘 다니던 교회를 다니는 관성 때문이라고 말 한다면 섭섭한 말이 될 것이다. 그 교회 말고도 좋은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에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다른 건 고사하고 은혜 받은 교회는 함부로 못 떠나겠는 것이다. 선대 목사님이 한때 기독교계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분의 기독교계에 미친 설교와 공로라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교회에서 조차 상처를 받았다.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면 못 다닐 교회가 내가 지금 현재 다니는 교회다. 분명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 같이 비판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신비라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구구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 사역자들은 평신도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셨다고 교인들에게 철석 같이 가르쳐 놓고 그들은 정작 교회에 있지 않은 것 같다. 평신도는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와 함께 순교할 마음이 있는데 과연 교회 사역자들은 그럴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기는 하다. 새로운 목회를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교회를 사임을 했다. 거기에 나름의 이유와 기도로 씨름한 나날과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지금까지 알아왔고 격려해줬고 격려 받았던 교인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던가?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떠나는 뒷모습도 멋이 있더라. 그리고 당장 떠나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 서서 각 지역을 거점 삼아 2년마다 한 번씩 뺑이 돌리더라. 그러니 목사와 평신도 간에 무슨 정을 쌓겠는가? 저 목사는 길어야 2년 후면 헤어질 사람. 물론 기도 부탁 정도는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정도지 오래 두고 볼 사이는 못 되더라.

 

남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어디나 그렇지만 교회도 남성 목회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비해 평신도는 여성이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성은 대화를 원하는데 남자는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듣는 귀는 발달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이 가면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했으니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도 내내 가르쳤을 목회의 신학적 원리를 이 책에서조차도 반복하고 있더란 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간증문처럼 그 카페를 다니면서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뭔가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교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소형화시킨 건 아닌지.

 

나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옷을 벗고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만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중간자적 목회자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그것에 근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속엔 아직도 뭔가 자신이 없던 걸까? 뭔가 끊임없이 자신의 목회 형태를 설명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마치 기업을 세일즈 하는 것처럼. 하긴 이제 5년 된 사역이라고 하던데 증명 보다는 설명이 더 많은 시기 아닌가? 한 사역이 뭔가를 증명하려면 적어도 1015년은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페 목회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하는 것도 없지 않다. 결국 거기서 은혜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될 건지. 물론 그것까지 신경 쓸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교회에 대한 편견만 높아져 결국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눌러 앉을 건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 다른 측면해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분명 기성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가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명백히 필요한 거지만, 교회는 기성 교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다.

 

책을 보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게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시절 사경회를 하면 거의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씀 듣는 게 좋으면.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열 끝내주지 않는가? 물론 저자가 지적이 처음도 아니고 나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있다. 평신도들은 옛날의 평신도들이 아니다. 옛날엔 사회가 단순하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그러므로 뭐든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뭐든 편중이고 편식이 문제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서 마치 기성 교회는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주범(?)이 한때 그런 교회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 민망함은 또 어쩔 것인가? 그건 마치 괜찮은 집을 지어놓고 게스트 하우스나 마당에 텐트쳐 놓고 지내는 집주인은 아닌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다 못 짓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었다. 모름지기 왕이 지었으니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하지만 우린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뿐 그 성전이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늘 날 교회가 너무 화려하다고 사회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에 동조한다. 교회는 화려할 수도 있고 아담할 수도 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목회자와 주요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관리자일 뿐이다. 오늘 날 교회가 목회자의 권한이 큰 건 유감이긴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면 성도들이 목사를 쥐고 흔든다. 언제나 그렇듯 조화는 없고 극과 극만 있다. 중요한 건 교회에 깃든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분명 그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교회도 조직이고 보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섞지 않으려면 자정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자정 능력이 그 조직의 몇 퍼센트면 가능하겠는가? 5 퍼센트다. 이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일 뿐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근거는 있다. 성경을 보면 의인 다섯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했다. 오늘 날 교회가 그토록이나 문제가 많다면 벌써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줄어들지언정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치유하는 교회를 자처했던 모 교회는 정말 유독 새신자 보다는 기성 신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 받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순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만 등록 가능한 교회도 있다.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목회가 됐던 사명을 받아서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한다. 물론 세상적으론 틀리지 않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 편해서 그게 과연 최선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엔 차선의 것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저자의 목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을 읽어 보았더니 평신도에 대해 잘 모르기는 기성 교회 목회자와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나의 평소 생각을 밝히는 것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하던 기성 교회 목회를 하든 크게 봤을 때 평신도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선택만 할 뿐이다. 결국 목회자란 그가 옳은 선택,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전을 주고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목회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사역에 협력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게 잘못 됐다기 보다 선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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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 문제점이 더 많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권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역시 작은 교회일 듯해요.
정들만 하면 2년 후 떠나는 목사 -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요?

stella.K 2018-02-08 13:29   좋아요 0 | URL
캬~! 역시 예리하시군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작은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냐는 거죠.
마치 작은 교회는 동정을 받아야할 거처럼 되고.
물론 작은 교회에서 힘들 게 목회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니까 제 말은 교회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장단점을 보고, 긴 안목에서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조직이나 단체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도 장단점은 있는 거죠.
같은 사람 2, 3년 봐주기는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저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조직에서 2, 3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워낙에 그런 체질이 못 되서
상처 받는 일도 많답니다.ㅋㅋ

2018-02-0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
이춘기 지음, 이복규 엮음 / 학지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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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일기의 주인인 이춘기 옹은 아내가 암 발병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전엔 왜 일기를 안 썼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그가 왜 그때를 기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알 것도 같다. 물론 아내의 발병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그렇다고 속절없이 무너질 수마는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는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이 먹먹하던지. 뭔가 동화된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누구도 불치의 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불행은 다 나와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의 것인 줄 알았다.

 

당시는 1960년대가 막 시작됐을 때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셨던 90년대도 암은 어려웠는데 그 시절은 더 암담하지 않았을까? 시간차만 있다뿐이지 그나 우리 집이나 하루 세끼 밥 먹고 돈 버느라 일했고, 밤이면 자는 똑같은 일상을 살았을 텐데 이렇게 누구는 병이 들고, 누구는 그 병든 가족을 간호해야하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참 아득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춘기 옹의 일기는 참 담담하고 담백하다.

 

내가 남의 일기를 이렇게 문학으로 향유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물론 최근 카프카의 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 관음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카프카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다가 그만 학을 떼었다. 어찌나 어렵고 난해하던지. 카프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으면 모를까 나 같이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멋모르고 펼쳐들다 낭패 보기 쉽다. (그건 또 어쩌면 시간에 쫓겨서 읽느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엔 사춘기 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읽었던 감동은 여전하다. 그렇게 엄혹하고 참혹한 세상에서도 그녀의 일기는 얼마나 순수했는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최근 들어 유명 작가의 일기가 나오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동안 일기를 문학의 범주에 넣어 주지도 않았(던 것 같). 이 책 말미에도 이춘기 옹의 일기를 엮은 이복규 교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우리 학계에서 비교적 열세에 있는 일기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일기인 만큼 이춘기 옹의 개인 일상사를 다루고 있지만 아내의 간호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물가, 사람 사는 표정,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가 또 있을까?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역사를 보는 시작은 더하다. 전문가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만을 들으려고 하고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너무 한정적이다. 예를 들면, 이 책 읽다보면 1997625일에 이춘기 옹이 쓴 6.25 회상 부분이 나온다. 한 개인으로 그날이 어땠는지를 짧지만 강렬하게 쓰고 있다. 벌써 29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이 개 두 마리하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총성이 나더니 마당의 개 두 마리가 그만 피를 토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아이들은 마당에 그대로 쓰러졌다(354p).

얼마나 놀랍고 사실적인가? 그 일이 일어났던 똑같은 시간에 어떤 사람은 또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쓸지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인지하는 것이야 똑같겠지만 보고 느끼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사실이란 관점에서 이것을 좀 더 넓게 수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이야 어떻든 오직 교과서에만 의존하려고 하니 우린 역사를 너무 소극적이고 소홀하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삼 개인의 6.25 회상기란 책이 있으면 한 권 사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시대를 표현한다면 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 날을 회상하고 싶다. 그날 내가 일기를 썼는지도 기억에 없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기억해 줄만한 건 이춘기 옹이 그날의 시세를 일기에 자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화폐개혁이 있기 전이라 원 대산 환으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62년인가? 그때 화폐 개혁이 되면서 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좀 이해가 갔다. 당시론 복숭아를 재배해 그것으로 살림을 꾸리곤 했는데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을 테니 돈의 들고 남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자수성가한 자린고비 스타일이라 병으로 사경을 헤매시기 전까지 조그만 수첩에 돈의 지출내역을 꼬박꼬박 적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걸 지금도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기록이 되지 않았을까? 일기였다면 내가 어떻게든 보관했었을 텐데 저런 건 써서 뭐하나 구두쇠니까 저러시겠지 하며 관심도 갖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난 중학교 들어가면서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야 방학숙제로 썼으니 그걸 일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걸 쓴 노트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중학교는 초등학교완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가 성인이 되고부터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쫓은 건 아니지만 어떤 신념 비슷하게 안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죽을 때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일기를 쓰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 친구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래도 너만의 고백이나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일기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한데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견 타당한 것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멋있게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쓴 일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난 이때부터 일기에 대한 애증이 시작이 된 같다. 정말 나도 그 친구처럼 죽을 때 될 수 있으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기록의 의무와 흔적이 서로 충돌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에선 블로그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쓰니 굳이 일기라고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의 엮은이도 노트든, 스마트폰이든 블로그든 어디든 열심히 기록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일기를 블로그에다 쓰는 건 간단치가 않다. 그건 낙서나 잡담의 의도가 많고,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몇 번의 정서가 필요하다. 또 아니 할 말로 함부로 대놓고 누구 욕도 못하겠다(물론 비밀글로 쓸 수도 있지만 블로그의 기본은 글을 공개한다는 것에 있다). 책엔 이 옹이 재혼녀와 의붓딸에 대한 미움도 가감 없이 쓰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전적 일기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다. 누가 문법 틀리고, 철자 틀려도 뭐랄 사람이 없다. 요즘엔 다시 고전적 일기 쓰기를 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쓰는 것 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난 엮은이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무엇이 됐든 써라다.

 

사실 일기는 어떠한 비판이나 가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쓴 사람에 대한 예의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 차와 성의식의 차이로 인한 해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옹이 아내를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도 이해가 갔지만, 이후 재혼과 삼혼을 하는 동안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했다. 그것은 그때는 가부장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또 그러니만큼 여성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그는 그저 가정을 건사할 여인이 필요했다. 식모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래서 결국 재혼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데 그가 일기 중 성경 잠언을 인용한 바 있는 이 현숙한 여인이 당시의 남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됐을지 알고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봐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연구 가치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짐, 두 어린 아들에 대한 애틋함, 하다못해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바빠 예배를 드리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버거움이 일기에 올올이 드러나 찡했다. 문체가 좋은 글만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진솔한 글을 읽으면 자신이 평범해서 초라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런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다.

 

난 이 책 계기로 엮은이 말대로 우리나라가 개인의 일기를 활발히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것조차도 사대주의에 빠져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의 일기만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야에 묻힌 한 노인의 일기고, 기록이며 미시사이기도 하다. 그가 원래 유명해서가 아니라 30년을 일기를 쓰다 보니 유명해졌다. 작지만 한 가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한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상이 무료하다, 의미가 없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함에 묻혀 사는 거지만 그 평범함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이춘기 옹은 몸소 보여줬다.

 

사실 처음엔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이춘기 옹이 30년간 쓴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좀 더 편집을 다양화 하거나 내용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고 그대로를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이 옹이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뭔지 모르게 아쉬웠다. 하지만 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려면 관찰하고 일기를 쓰라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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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02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너머에서도 의미를 찾으시며 읽으시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것 같아도 꾸준히, 성실하게 한다는 것, 중요한데 갈수록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지요? 한방에 대박을 터뜨려야 성공한 것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안타까워요.
저도 6살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써왔는데, 어릴 때 쓴 그 그림일기장을 어머니께서 이사하시면서 다 버리셨다는군요 ㅠㅠ

stella.K 2018-02-03 18:19   좋아요 0 | URL
일본은 그런 풍토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작고 소소해도 재밌고 즐거우면 기꺼이 읽어 주잖아요.
우리나라는 쓸때없이 대륙적 기질이 있어서일까요?
그냥 그렇게 봐주기로 했습니다.ㅋㅋ

이책 정말 편안하게 읽혀서 좋았어요.
일찍 상처하고 가장으로 참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구나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노년엔 복락을 누려야 하는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게 참 아쉽더군요.
그런데 우리네 인생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그냥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면 좋겠어요.^^

2018-02-0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2   좋아요 1 | URL
아, 그랬나요? 옛날 선비는 그랬군요.
우린 기록을 함부로 다루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춘기 옹의 일기가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일기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일기는 잘 쓰고 계십니까?
우리 역사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요!ㅋㅋ

2018-02-03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8   좋아요 1 | URL
ㅎㅎ 그건 운이 좋아서 낸거죠.
무엇보다 저 같이 초야에 묻힌 사람의 책이
뭐 그리 대단해서 후속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겠습니까?ㅋ

그런 건 고사하고 저도 일기 쓰고 있는데
나중에 저 죽어서라도 책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ㅎ
님도 건강하시죠?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8-02-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올해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2-05 13:07   좋아요 0 | URL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말이죠.
서니님도 그리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또 새로운 한 주입니다. 힘차게 시작하시길!

페크pek0501 2018-02-0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 풀어 내서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일기를 씁니다. 제가 나중에 보려고 기록을 위해 일기를 쓰기도 하지요.
제가 죽은 다음에 글이 흔적으로 남는 건 싫어서 만약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끼면 가족에게 제가 쓴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 달라는 유언을 할 것 같아요. ㅋ

stella.K 2018-02-06 20: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이 듣지도 않을 거예요.
유산으로 남겨야죠.ㅋㅋ
 
함께 떠나는 문학관 여행
김미자 지음 / 글로세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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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발길 닿는 대로 나그네 같이 하란 말도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여행 고수이거나 바보이거나. 나는 여행 고수가 아니니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뭔가 목표 내지는 목적을 세우고 이정표대로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가 목적을 세운다면 어떻게 세워 보겠는가? 아무래도 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문학 기행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도 그저 단순히 그곳에 그게 있다더라는 주마간산식의 여행 역시 여행고수거나 바보들이 취할 자세인 것 같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그것을 알고 떠나는 것과 모르고 떠나는 건 천지 차이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책이 좋을 것이다. (딱 아는 척 하기에도 좋다.)

 

언제 한 번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국한되어 있거나, 어느 한 문학인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쓰인 책은 아닐지. 그런데 비해 이 책은 우리나라 38군데 44명의 문학인을 간결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놨다. 그야말로 음식으로 치면 잘 차려진 뷔페 같다.

 

작가는 또 언제 이런 곳을 파고 다녔을까? 처음엔 혼자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안 되겠는지 남편이 따라 나서 줬다고.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었겠는가. 나도 혼자는 너무 외로울 테니 마음에 맞는 친구 딱 한 명만 동행해 준다면 그 여행길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작가는 남편을 잘 만난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여행도 여행이지만 우리나라 문학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점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선 대접 받는 일이 없다고, 우리가 학창 시절 국어 시간이 아니면 한국 문학사를 꿰뚫을 일이 그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잊히고 잘 모르는 문학인도 부지기수일 것 같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자국민이 자국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다니.

 

하지만 이게 비단 사람의 잘못이겠는가 싶기도 하다. 출판계나 매스컴이 좀 나서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출판계에선 전집을 기획하면서 고전이나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한 질로 내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거기에 우리나라 작가들은 좀 멀찍이 있는 것도 같다. 물론 몇몇 작가들이야 여전히 관심을 받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문학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는 기획의 문제이기도 하겠는데 여행과 문학인을 한 테마로 잡은 것도 꽤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그리고 새삼 우리나라에 문학관이 이렇게도 많은가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38곳이다. 더 찾아보면 더 나오지 않을까?

 

나 개인적으론 목포 문학관에서 김우진을 다룬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냥 김우진하면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옛날 가수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졌을 때 함께 몸을 던졌던 사람이 그다. 알고 봤더니 나름 당대 출중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미 17살 때 공상과학 소설을 쓰기도 하고, 논문을 잘 써 영친왕으로부터 상과 상금을 받기도 했단다. 와세다 대학 원예과에 진학했지만 시를 쓰고 조명희 등 20명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발족하는 등 문학과 공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 후 시와 평론을 발표하고, 번역에도 힘을 쓴다. 저자 역시도 그런 그를 왜 몰랐을까 탄식하기도 했다는데, 여행이란 또 그렇게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아는 기쁨, 즐거움 아니겠는가또한 소설<혼불>로 기억되는 최명희 문학관을 다룬 부분도 먹먹했다. 최 작가가 타계한 나이는 겨우 50대의 나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숨어서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책을 읽다보면 쓸쓸함과 아련함이 밀려온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가 없다더니 꼭 이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한때는 문학계를 호령했을 이 걸출한 문인들이 지금은 어디로 다 사라졌단 말인가. 

 

글 시작 전에 그 문학관에 관한 짧은 소개와 주소, 전화번호 등 이용안내를 밝혀 놓고 있어 실용성을 높였다. 중간 중간에 간간히 저자 자신의 사생활도 밝혀놓고 있는데 그 나름 글 앞에 진실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자칫 군더더기로 비칠 수가 있어 그 점은 조금 아쉬웠다. 또한 모르는 작가에 대해선 솔직히 모른다고 하는 겸손한 자세도 좋긴 하겠지만 그게 또 보기에 따라선 좀 아마추어처럼 보일 수가 있어 그럴 땐 차라리 한 템포 쉬어 가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저자가 이전에도 책을 몇 권 내봤다면 이젠 프로가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나라 문학관을 가능한 한 많이 소개하고픈 저자의 의욕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저자가 우리나라 문학관을 소개하고자 들인 수고를 생각하면 독자로서 그런 지적이 가당키나 할까 싶기도 하다. 그저 한 지리멸렬한 독자의 시샘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꿈은 이루어진다는데 손 떼 묻혀가며 빌면 언제고 나도 이런 여행 떠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수고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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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1-1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가보았던 곳이 제법 있네요.
저의 첫 책에서 집중 다루어 썼던 곳도 세 곳 다 있구요. 반가운 책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랑 동명이라 깜짝 놀랐다가, 아니네요.
그러고 보면 문학관이 참 많은데 여행과 두 마리 토끼 잡기로 좋은 코스이지요.

stella.K 2018-01-18 17:44   좋아요 0 | URL
어쩐지... 읽으면서 저도 혹시 저자를 프레이야님이
아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근데 아닙니까? 좋다 말았는데요?ㅎㅎ
읽으면서 부럽기도하고 수고도 많이 했겠구나 했어요.^^
 
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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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교적 어릴 때부터 독서를 시작했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서문은 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정독 스타일인데다 책을 오래 읽다보니 본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니 안 읽어도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이 서문을 뛰어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책에 관한 정보를 어디선가 얻고 이미 읽기로 마음먹었는데 굳이 서문을 읽어야 할까 싶었다. 즉 서문은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모를 때, 내가 읽어도 되는 책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읽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데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서문은 대충이라도 읽는 편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생각을 정확히 알려면 안 읽는 것 보단 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왜 저자가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마침 이 책을 엮은 저자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 수영장에서 아무 준비 없이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듯이, 서문을 생략하고 곧장 본문을 읽는 독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독법은 비유하자면, 아무런 목표도 정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과 같다. 어쩌면 그러한 여행이 더 극적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독서는 독자를 오독으로 인도할 수 있다(11p)

 

물론 독자들은 자신이 선택해서 읽은 책에 관해 각자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로이 가질 필요가 있다. 하다못해 오독 조차도 온전히 독자의 것이라며 이미 저자의 손을 떠난 저자의 책에 더 이상 왈가왈부 못하도록 한다. 더구나 요즘 비판적 책읽기는 얼마나 그 효용가치를 극대화 시키고 있는가? 마치 독자가 최고인 양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디까지 독자의 비위나 맞추라는 것인가? 회의가 들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건 저자의 눈높이와 독자의 눈높이를 같이 하므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일단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는데, 일명 저술의 변은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유용한 게 바로 이 서문인 것이다.

 

물론 실제로 대부분의 독자는 저자 위에 군림하려하지 않는다. 저자의 책이 무엇이든 간에 한 번 읽기로 했다면 뭐 하나라도 건지려들지 처음부터 책을 왜 이따위로 썼느냐, 이것도 책이냐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비판적 독자가 있기 전에 성실한 독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같은 서문 불성실 일독자는 거의 없을 거라고 본다.

 

그런데 어떤 책은 굳이 저자 서문을 읽거나 안 읽거나 크게 차이를 못 느끼는 책도 있다. 그걸 경우는 독자가 서문을 이해 못한 다기 보다 저자기 서문의 중요성을 못 느껴서는 아닐까? 그러므로 서문의 1차 책임은 저자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서문은 일종의 본문의 맛보기?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치면 예고편 같은 거. 똑똑한 저자라면 서문에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보여주고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세 번째로 실린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뤼스, 일명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세의 성직자겸 철학자 에라스무스의 <격언집>은 독자의 혼을 쑥 빼놓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긴 서문으로 되어있느냐면 이 책에 실린 쪽수로만도 거의 50쪽에 달한다. 그 정도라면 서문만으로도 얇은 소책자나 팸플릿을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그것을 읽는 동안 여간 중세의 작품을 사랑하거나 저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아, 읽지 말아야겠구나로 마음을 굳힐 것만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 재량이지만 말이다.

 

서문을 쓸 뻔한 적이 있다. 결국 서문을 못 쓰고 저자후기로 썼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쓸데없는 오지랖은 아니었나 싶다. 그냥 쑥스러웠다. 그렇다고 독자들이 나의 쑥스러움을 알아줄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당당하지 못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저자후기가 그 책의 격을 떨어지게 하거나 반대로 꼭 겸손함의 미덕을 보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저자의 재량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저자의 입장에서 저자후기가 서문 보다는 좀 더 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문은, 내 책은 이런 책이야 하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서문에서 길어져 버리면 앞서 말한 에라스무스의 <격언집>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비해 저자후기는 일마치고 수다 떠는 기분으로 쓸 수 있으니 훨씬 편하다. 하지만 일장일단은 있을 것이다. 서문을 피했으니 뭔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내지는 지루하다고 하는 독자도 없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런 독자는 서문을 썼다고 한 들 더 나은 느낌을 가졌을 거라는 보장은 못할 것 같다.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문득 저자들은 서문을 정작 언제 쓸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순서대로 서문을 먼저 쓰고 본문을 쓰고 그럴까? 그렇게 쓰다보면 서문에서 밝힌 책의 의도와 조금은 빗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서문을 빈칸으로 남겨두고 본문부터 들어가 차츰 정리된 생각들을 서문으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됐던 서문은 글을 쓰는 저자에게 꼭 필요한 것임엔 틀림없다.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먼저 시놉시스를 쓰고 쓰는 것처럼. 안 그러면 배가 산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이 책을 엮은 장정일은 말한다. 서문의 역사는 곧 책의 역사라고. 부실한 서문치고 뛰어난 명저는 없다고. 그래서 저자들의 고민은 더 깊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독자로 하여금 질리지 않고, 건너뛰게도 만들지 않으며, 책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 무사히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서문을 써야하는 작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사실 엮자 장정일도 그런 얘기를 하지만 이런 시도는 그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많은 작가나 또는 작가지망생들이 글쓰기 연습으로 또는 취미삼아 모아두기도 한다. 그러므로 난 독자의 입장에서 굳이 이 책을 사 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장정일 작가가 자신의 책에 들이는 공력에 비하면 이건 좀 거져 먹기 식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만큼 엮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난 적어도 그가 왜 이것을 위대한 서문으로 뽑았는지 그 특유의 리뷰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각 책에 대한 저자와 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있고 서문만 쓰여 있다. 서문은 영화로 치면 조연 같은 것인데 덕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니 호강한다 싶기도 하지만 독자가 볼 땐 너무 성의가 없다는 느낌도 든다. 책 읽기 좋아하는 우리의 장 선생님 이런 책도 읽으셨겠군. 확인하는 정도는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 책에 별 세 개를 주는 건 그야말로 위대한 서문에 대한 예일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책을 읽든 서문을 반드시 챙겨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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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이 너무 길면 독서 몰입도가 떨어져요. 10~15쪽이 읽기 편한 적당한 분량이라고 생각해요. ^^

stella.K 2017-12-19 13:1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에라스무스 옹 너무 심했어. 그지?ㅋ

서니데이 2017-12-1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에는 서문과 후기, 그리고 목차를 안 읽을 때도 많았는데, 그래도 요즘은 한 번은 읽어보게 되네요. 어쩐지 서문과 후기는 본문을 다 쓰고 나서 쓰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 같아서요.^^
stella.K님, 오늘 날씨가 추워서 길이 얼었어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7-12-19 15:10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 책 후기에 주저리주저리 썼잖않요.
서니님 안 읽으셨구나! ㅎㅎ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거랍니다.
나중에 꼭 읽어주세요.^^

서니님도 미 투!!

서니데이 2017-12-19 15:15   좋아요 1 | URL
읽었답니다. 그 책의 후기.^^
그치만 갑자기 생각하려니 기억이 안 나요.;;;

stella.K 2017-12-19 15:19   좋아요 1 | URL
기억 안하셔도 되요.ㅋㅋㅋ

페크pek0501 2017-12-20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문과 후기, 목차 모두 꼼꼼히 봅니다. 뭔가 중요한 걸 내가 놓칠까 봐서요.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어야 독서 노트에 기입하는 습관이 있어요.ㅋ

장그르니에, <섬>에 쓴 알베르 카뮈의 서문이 빼어난 문장이라고 해서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문장이,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가 부럽다는 문장입니다.
너무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아직 안 읽은 독자가 부러워지는 경험, 저도 있습니다.

stella.K 2017-12-20 15:34   좋아요 0 | URL
와, 카뮈가 그런 서문을 썼단 말입니까?
저 그르니에 아직 안 읽었어요.ㅠㅋㅋ

역시 언니는...!!!

프레이야 2017-12-2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과 후기에 저자의 의도와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아 읽는 편이에요 저는. 서재의 달인 추카해요. 저는 몇 년 째 빠지고 있어요. 예전에 한창 몰두해서 소통하던 날들 생각나요. 그때의 그분들은 다 어디에.

stella.K 2017-12-25 11:2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모든 건 다 흘러가는 거죠.
어느 때가 되면 프레이야님도 저도 흘러갈지 몰라요.
그래도 또 다시 만날 분은 다시 만나죠. 우리처럼.ㅎ
자주 뵈요.^^
 
이상 시집 - 오감도와 날개 그리고 권태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
이상 지음 / 스타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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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시를 잊고 살았다. 꽤 오래된 것 같다.

앞으로도 시를 잊지 않고 살겠다고 그 누구한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약속할 수가 없다. 나란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니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세 시인이 있다. 백석과 이상과 윤동주.

왜 그들을 가슴속에서 잊지 못해하는 것일까? 그들 이전에도 시인은 있었을 것이다. 그들 이후에도 시인은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세 명의 트로이카를 잊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단명했다는 것과 고독을 숙명처럼 안고 그것을 노래했기 때문은 아닐까? 백석은 몰라도 이상과 윤동주는 그랬다.

 

이상의 시를 언제 한 번 읽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한들 뭣하겠는가? 너무 난해해 단 한 줄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을.

 

하긴 남의 시를 이해하려 한다는 건 기실 언어도단인지도 모른다. 이상의 시들은 여간해서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나도 그런 작가의 글은 독자로서 읽어줄 수 없노라고 작파했을 것이다. 지금도 누구라도 겉멋 든 작가가 있으면 누구기에 독자에게 수작질이냐? 독자를 무엇으로 보느냐? 결국 독자로서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건 그 작가의 작품을 읽어주지 않는 것이 고작이다. 이상의 시절에도 그랬을까?

 

지금이야 칭송을 받지만 한 자도 읽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글에 초야에 묻힌 독자는 침을 뱉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그 시대의 문맹률을 생각한다면 이상은 더 고독했을지도 모른다. 누구 하나 공감 해줄 사람 없이 아픈 폐를 부여잡고 그냥 자기 멋대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또 모를 일이다. 문맹률이 낮았으니 진짜 시를 읽을 줄 아는 사람만이 이상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가 글을 쓰면 당대의 문단과 문학잡지가 들썩했다. 독자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다. 앞에서는 욕을 할지 몰라도 결국 작가에게 무릎 꿇고 마는 존재. 다는 아닐지언정 누군가는 그 앞에 무릎 꿇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상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말았다. 특히 그의 소설 <날개>. 시는 너무 어려웠지만 이 교묘한 소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소설을 다시 읽다니! 처음 읽었을 때는 20대 중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도무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마치 뽕이라도 한 대 맞고 쓴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 서야 어떻게 현실에 발을 내리길 한사코 거부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읽은 지금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는 왜 아내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가? 왜 저항하지 않고, 화 내지 않으며,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지 않는가? 그래서 주인공이고,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무 평범해지는 것 아닌가? 필시 이 작품의 작중화자 는 이상 자신이었을 것 같다. 그가 한때 기생과 동거를 했다지 않은가? 그때를 회상하며 에피소드를 만들어 쓰지 않았을까? 그러리만큼 문체와 묘사의 생경함과 생생함이란...

 

지금도 의문인건, 그리도 똑똑했던 그가 왜 한낱 기생과 동거를 했느냐는 거다. 그리도 나긋나긋했을 금홍이 좋았더란 말인가? 아니면 자신이 얼마 못 살 거라는 걸 알고 누구한테라도 자신을 던져버릴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예술가의 치기 같은 거였을까? 금홍은 어떤 여자였을까? 비록 몸은 팔아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는 콧대 높은 기생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이상을 만나고 사랑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닌가?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왠지 금홍은 흔하디흔한 작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녀가 폐병쟁이 이상을 만난 건 행운인 동시에 불행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건강했다면 금홍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당대 최고의 시인과 살았다면 훗날 뭐 하나라도 남지 않을까?

 

이 작품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건 아내를 연구했다는 것과 종잇장만 하게 그의 방에 들어선 햇빛이다. 왜 아내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하지 않고 연구했다고 했을까? 종잇장만 하게 자신의 방을 비춘 햇빛은 아픈 에게 희망 보다는 가망 없는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 쓸쓸하다. 차라리 아픈 사람에게 외로움이나 불안 같은 건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뭔지도 모르는 삶을 하릴없는 연구나 하며, 남들은 뻔히 아는 것을 자신은 모르며 삶을 추적하다 어느 날 날개가 돋아나 이 세상에서 날아가 버리면 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이상은 다음 생에선 새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난 절대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 태어나면 좋겠다고 몇 번을 생각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죽을 때가되면 스스로 행방불명이 돼서 자기만 아는 곳에서 생을 마치는. 그러기 위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문체 자체로만은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희망적인가.

현실은 언제나 작품속의 처럼 모호하고,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 세상을 날아가 보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문학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학이나 화학처럼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으며, 이것 같으면 저것 같고 저것 같으면 이것인 것 같은 그 모호함. 알 수 없음. 그 알 수 없음의 자유를 유영하는 뭐 그런 어떤 것.

 

문학이 희망을 말한다는 건 거짓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거짓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어쨌든 살라고, 살아 보라고 말하는 뭔가의 알 수 없는 코드로 된 텍스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겨 먹은 문학을 사랑하고, 그렇게 생겨 먹은 작가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독한 이상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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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12-1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감도, 날개, 권태. 다 한 번은 읽었을 것들이네요. 이 밖에도 많이 실렸겠지요.
권태를 읽으며 신선하게 느꼈던 게 생각나네요.

새로 태어나고 싶다니요. 저는 사람으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ㅋ

stella.K 2017-12-14 18:54   좋아요 0 | URL
ㅎㅎ또 여자로요?
언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언니를 형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세요. 네?ㅋㅋㅋㅋㅋㅋㅋ

hnine 2017-12-14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동주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시인이었지만 이상과 백석은 최근 들어 좋아하게 된 두 사람이랍니다. 이상의 날개를 다시 읽고 왜 그를 천재라고 하는지 이제서야 와닿게 되었어요. 백석의 시집은 최근에 구입해서 읽어보고 있는데 심지어 혼자 소리내어 낭독하여 스마트폰에 녹음까지 해보는, 안하던 짓까지 하게 만든 시인이지요 ^^
문학이 희망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회의적이어요. 수학이나 화학처럼 딱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유영을 가능케 한다는 (이 말씀 멋있습니다!) 말씀엔 공감!

stella.K 2017-12-14 19:22   좋아요 0 | URL
와, 백석에 푹 빠지셨군요.
그리도 좋으셨습니까? 저도 얼른 읽어야겠는데요.ㅋㅋ

고맙습니다. 공감해주셔서!^^

승주나무 2017-12-15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보니 유정 생각이 나네요. 유정과 이상이 절친이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유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상한테 같이 죽자고 했다고 하네요. 그날 서로 끌어안고 서러움에 펑펑 울었다는 일화가. 시는 백석, 소설은 김유정인데 이상은 둘 사이를 가른 것 같아요~

stella.K 2017-12-15 14:12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일화가 있었구나.
알려줘서 고맙다.

근데 드디어 따끈따끈한 너의 책이 나왔나 봐.
대문 사진 너 옆에 계신 분 어머니 맞지?
암튼 수고했고 대박나라! 홧팅!!^^

cyrus 2017-12-1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김윤식 교수의 《이상 연구》를 샀어요. 워낙 귀한 절판본인데다가 중고서점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상 연구서라 안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이상 전집을 읽어보려고 해요. ^^

stella.K 2017-12-16 17:59   좋아요 0 | URL
와우, 대박! 그런 책이 있었구나.
나도 어제 중고샵에 갔었는데. 그런 건 안 보이더군.
감기만 살짝 들려서 왔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