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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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책은 언제 샀나?

 

A. 책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산 것으로 기억한다. 사 놓고 조금씩 읽다가 최근에 다 읽었다. 웬만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신간은 잘 안 사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상하게 관심이 많이 갔다. 책 자체 보다는 작가에게 관심이 많이 간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이 작가의 활동을 접했다. 자신의 SNS에 구독자 모집을 하고 독자의 이메일로 한 달에 20번. 자신의 글을 월요일부토 금요일까지 전송한다. 그리고 구독료가 1만원이란다. 그게 꽤  흥미로웠다.

 

Q.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처음엔 좀 놀라웠다. 과연 한 달에 만원씩 내고 볼만한가? 책이란 서점에서 값을 치르고 사서 보는 게 일반적인데 굳이 만원씩이나 내고 이메일로 본다는 게 어떤 의민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가가 그렇게 독자들에게 전송한 글들을 모아 책을 냈다. 어차피 이렇게 책으로 나오는데 책으로 사 보지 굳이 돈을 더 줘가며 이메일로 본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바뀌더라. 책을 사 보는 독자의 입장에선 그런 생각 당연한 것 같은데, 작가의 입장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번 내봤고, 한 때는 나도 연재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블로그에 몇 번 하다 중단했지만.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나는 그렇게 연재를 하다 중단했지만 이 작가는 그것을 무려 1년을 했다. 그것도 당당히 구독료를 받고. 이 작가는 했는데 왜 나는 못하고 중단했을까 갑자기 회의가 밀려오더라.

 

Q.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하다 중단 했지만 내가 연재를 했던 때가 아마 10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에 올리고 댓글 호응 받는 것도 감지덕지지 어떻게 독자에게 돈을 받겠는가. 그땐 그런 생각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정말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때나 이때나 책은 무조건 출판사를 통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다. 조금만 뚝심을 발휘했다면 그렇게 연재했다 책으로 냈을 것이다. 물론 그후 비슷한 방식으로 나도 책을 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 같다. 

 

사실 이 책을 사기 전 작가에 대한 기사를 어느 무가지 잡지에서 보았는데 자꾸 보게 되더라. 어떻게 이런 작가가 있을 수 있을까? 자꾸 궁금해지니 결국 책도 따끈따끈한 신간일 때 사 보게 되는 것이다.

 

Q. 책을 꽤 오랫동안 읽어 왔다. 책에 대한 생각이나 기준 뭐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

 

 A. 책을 꽤 오래 전부터 읽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책을 오래 읽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읽는데 짧아야 일주일이고 열흘을 넘겨 읽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많이 읽지도 못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 많이 오래 읽다보니 나름의 분류가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어려운 책, 쉬운 책, 객관적으론 좋으나 개인적으론 별로인 책. 남들은 그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좋은 책,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책. 좋은지 나쁜지 남도 모르겠고 나도 모르겠는 책 등등이 있을 것 같다.  

 

그중 가장 좋은 책은 나를 대변해 주거나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책이 아닐까? 더 나아가 행동하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 같다.  

 

솔직히 <안나 카레니나>나 <닥터 지바고>가 세계적인 고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걸 읽고 심장이 뛰거나 무슨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책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히려 남들한텐 별 것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에세이다. 더구나 난 작가의 나이를 한참 전에 지나왔다. 작가 특유의 진지함과 재기발랄함, 요즘 2,30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새롭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주 많이 감동스러운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확실히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뭔가 행동하게 만들었다. 

 

Q. 그게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A. 이를테면 나도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독자 직거래로 이메일 연재를 시작했다. 벌써 두 달째다. 다 이 작가 덕분이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난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건 누가  최초로 했는지 모른다. 이슬아 작가도 어떤 작가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쓰는 건 자서전? 자전 에세이 또는 자전 소설? 요즘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따로 두질 않으니 좀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그런 계통(?)의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은 <기억 수집가-유년시절>이다. 뭔지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자서전이든 자전 소설 에세이든 그건 쓰는 사람이 온전히 기억에 의해 쓰는 것이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붙여 보았고 현재는 유년시절에 관해서만 쓰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유년시절에 관한 것만으로도 결코 작지않은 분량이 될 것 같아서다. 그냥 어렸을 때 기억 나는대로 두서없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간순으로 배열되는 느낌이다. 아무튼 유년시절의 기억을 자유롭게 쓰는 중이다.

 

Q. 두 달째 이어 온다면 구독자가 꽤 있다는 말인데 직접 독자를 상대로 글을 전송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A. 구독자가 많은 건 아니다.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 같다. 난 정말 구독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구독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올렸을 때 많이 떨렸다. 나 역시 안 해 보는 일을 하는 것이고 파워블로거도 아니기 때문에 과연 구독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9명이나. 광고에 그런 문구를 넣었다. 단 한 사람만 신청해도 그 사람을 위해서 쓰겠다고.

 

사실 이 문구는 이슬아 작가가 처음 시작할 때 썼던 걸 벤치마킹 한 것이기도 한데 지금이야 핫한 작가가 됐지만 처음 광고를 했을 때만해도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는가. 누구나 처음은 있지 않은가. 독자가 많고 적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글을 읽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적잖이 안도했고 기뻤다.    

 

이슬아 작가는 일주일에 다섯 번을 보내준다는데 그건 너무 버거운 것 같고, 나는 거기서 하루를 뺀 4일 그러니까 목요일까지만 보내는데 처음엔 그것도 좀 버거웠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해 볼만하다. 

 

보내면서 순간순간 이 작가를 생각했다. 처음에 이 작가도 그랬을까? 나 보다 어리지만 당차고 배울 게 많은 작가란 생각이 든다.

 

 

Q. 아까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봤다고 했다. 지금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독자에게 연재를 보내고. 그 차이나 장단점은 뭔가?

 

음...작가중엔 연재를 싫어하는 작가가 있다. 대표적인 작가가 하루키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매일 일정량을 써서 어딘가에 보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싫다고. 그 양반은 정말 그럴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꼭 해야하는 의무가 있지 않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마감이 있어야 쓸 생각이 난다. 그건 아마도 오래 전, 교회에서 연극 대본을 썼는데 마감에 시달리며 썼다. 그게 몸에 베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재가 좋은 것 같다. 

 

또한 작가와 고독을 거의 동의어로 보고 작가는 철저하게 고독속에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떤 작가는 적당히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취미 활동도 겸하면서 즐겁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철저한 고독속에서 글을 못 쓰겠더라. 아마 그래서도 대본 쓰기를 즐겨했던 것 같다. 대본은 어느 정도 배우들과도 소통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보기도 하는데 난 그게 좋다. 이를테면 이 일이 그런 것 같다. 독자와 간간이 소통하며 글을 쓴다. 난 그게 즐겁다.  

 

하지만 이 방법이 꼭 다 좋은 건 아니다. 출판사를 통하면 일단 뭔가 보호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와 교정을 봐주는 사람이 있어 다소 부족하고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또 일정 원고료를 받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비해 독자 직거래만으로 언제 돈을 모으겠는가.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게다가 편집이며 오타, 맞춤법 심지어 광고까지 작가가 다 해야한다. 피곤한 일이다. 오타나 맞춤법의 경우, 분명 세심하게 뜯어보고 전송을 했는데 다음 날 다시 보니 어떻게 내가 이런 글을 보낼 수가 있을까 해서 다시 문장을 다듬어 보낸 적도 있다. 특히 오타는 좀비같고 신출귀몰하기까지 한다. 이걸 독자에게 보냈다고 생각하면 경악할 정도고 정말 이 일은 오래 못할 일이다 싶다.

 

하지만 작가라면(또는 작가를 지망생이라면) 한 번 정도는 수련 삼아 꼭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작가의 마음은 독자를 향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출판사에 가 있고 기타 여러 문학상에 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건 당연한 것 같다. 시스템이 그러니까.

 

하지만 이 일은 온전히 독자만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창호지 하나를 두고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물론 아주 모르지는 않지만) 그들의 실루엣을 앞에 두고 글을 쓰는 것 같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원고지 한 장 팔아 보지 않고 작가의 삶을 논할 수가 없을 것 같다.ㅎ 정말 작가가 모든 것을 다 해 보면 조금 과장해서 출판사 하나 차리겠다 싶다. 실제로 이슬아 작가는 <헤엄>이라는 1인 출판사를 운영중에 있다.

 

그리고 공부도 정말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혹시 글 쓰는데 뭔가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감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하며 보게 된다.

 

Q. 정말 생활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A. 하루살이 인생이란 말도 있는데 정말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오직 이 달만 생각한다. 그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첫 달은 그렇게 9명의 구독자가 있어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을 했다. 그리고 그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고 있을 때 다음엔 또 어떻게 하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번에 구독한 독자가 다음 달에도 여전히 구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재로 전달의 구독자 거의 반이 이번엔 구독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내가 뭘 잘못했나 약간 의기소침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빨리 떨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여전히 나에겐 독자로 남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신청하는 독자들이 있다. 물론 새로운 독자들 거의 대부분은 나의 지인들이다. 내가 어디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 글 한 번 읽어 보라고, 딱 한 달만 읽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읽어도 좋다는 장삿꾼 같은 멘트를 하고 있다.ㅎ 그야말로 매문이다. 내 글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몇주 전, 거의 10년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마치 목적있어 만난 것처럼 내 글을 권했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나 순순히 그러겠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또 어떤 사람은 놀라워 하며 한껏 관심을 표명했지만 요즘 책도 별로 읽지도 않는데다 SNS 에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구독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독자는 읽을 때마다 거의 매번 짧은 피드백을 보내 오기도 한다. 그밖에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생략한다.

 

그런 일을 통해 내가 많이 달라졌다. 좀 더 적극적이 됐고, 이렇게 저렇게 독자의 소식을 알게되면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그를 위해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결국 기도라도 하게 된다.  

 

난 요즘 거의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해 볼 수 있을까에만 골몰해 있다. 더불어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

 

Q. 그밖에 무엇을 해 봤나?

 

A. 이슬아 작가가 이달 초부터 연재 시즌2를 시작했다. 작가가 거의 매일 보내주는 연재를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독자로 체험해 보고 싶어 구독을 신청했고 지금 받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확실히 작가의 글을 책으로 읽는 것과 이메일로 읽는 건 다른 것 같다. 거의 비슷할 것 같은데, 나의 메일함을 보면 청구서나 스팸 메일 또는 업무에 관한 메일이 전부다.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인터넷에 여러 많은 글들이 넘쳐 난다. 그런데 구독료를 내고 본다는 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구독료를 내고 보니 다른 글이 아무리 좋고 유익하더라도 내가 돈 내고 보는 글부터 챙겨 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공짜를 좋아하는 것 같아도 그 보다는 돈을 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만족하면 그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가의 이메일 연재 시즌2에 적잖이 만족한다. 글을 정말로 진지하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시즌 2는 지난 시즌과 달리 작가가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뷰도 하고, 시각 장애자를 위해 음성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도 하고, 동료 작가를 위해 자신의 지면을 내어 주기도 한다. 정말 기획이나 운영을 잘 하는 것 같다.

 

Q. 부럽다는 생각 안 드나?      

 

A. 당연히 든다. 사람은 어차피 질투의 존재 아닌가. 특히 작가는 문화계 셀럽들과 인터뷰를 자주 시도할 모양인데 그게 참 부럽다. 발이 넓고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가구나 싶다. 작가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한창훈 작가는 왜 작가가 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작가는 그렇게 생각 보다 쉽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냥 웃자고 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부럽다가도 포기가 되는데 딱 한 가지 안 되는 게 있더라. 언젠가 이 작가가 자신의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그 앞에서  폼 잡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거의 만 부 가까이 팔린 것으로 안다. 넘었을지도 모르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느 싯점이 지나면 내 글을 구독해 보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구독 신청하고, 무사히 출판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

 

Q.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작가 보단 오히려 독자의 역할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승자독식의 사회 아닌가? 작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청탁은 받는 사람만 받고, 책은 내 본 사람만 내는 것 같다. 더구나 문학계 카르텔과 성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특정인이 작가를 키운다는 생각은 이제 좀 없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의 비중이 더 커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중세 시대 호사가들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사 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것이 당대 문예부흥을 이끌기도 했다. 독서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귀족이나 양반들만 할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이제 독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또한 후원은 작은 액수로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난 독자들이 단순히 어느 작가의 책을 사 보는 것에서 작가를 후원하는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는 단순히 독자가 작가의 글을 구독료를 내고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 작가를 후원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가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적어도 한 명의 작가만이라도 후원의 의미에서 구독을 했으면 한다. 이슬아 작가는 스스로를 연재 노동자라고 했는데 이 연재 노동도 해 보니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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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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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10년 전이었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란 책을 읽고 정말 문학의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신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못지않은 감동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람과 자신의 장애에 관한 글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 B 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거라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람에 대해 쓰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 썼다. 특히 화가 고 김전선에 대해 쓴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든다.

 

이뿐인가? 저자는 언젠가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미국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영화 <슈퍼맨> 출연 이후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쳤고 전신마비 중중 장애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고 중인데 그것을 매스컴이 너무 크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 되었다. 그때 리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무척 언짢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슈퍼맨이라면 그래요, 전 슈퍼맨이지요. 그러나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의 슈퍼맨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지요.”

 

이렇게 말하던 크리스토퍼 리브도 고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학생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저자의 친구 김윤을 회상했고 그 친구 역시 고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글은 2001년도에 쓴 것으로 참 새삼스럽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진짜 슈퍼맨이 되기 위해서,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을 계속한다(147p)고 했다. 그렇게 말하던 저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저 글을 썼을 때만해도 저자는 꽤나 비장했던 것 같다. 장애자의 몸으로 대학 교수로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암 치료를 끝낸 직후였다. 그러니 얼마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랐을까.

 

또한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듯도 하지만 저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측은지심 내지는 이상한 눈초리로 많이 봤을 것이다. 사실 저자 보다 좀 뒷 세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살아생전 모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전에 자신이 거의 암 투병 환자로 많이 알려진 게 부담스러워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에 초점을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받았는데 심히 불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로 나왔기 때문이다.

 

천형 같은 삶이라니. 누가 함부로 천형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봐도 불쾌하다 못해 무례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한 삶은 비장애인의 특권이고 불행은 장애인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런 이상한 이중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소치다. 그러자 저자는 즉각 해명에 들어간다. 저자는 자신의 장애는 천형이 아니라 축복이라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힌다.

 

첫째로 자신은 인간이라며 짐승이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또한 주위에 늘 좋은 사람만 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나는 10살 때 갑자기 오른쪽 팔 다리에 마비가 와 한 학기를 쉬고 전학한 뒤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때 은근 걱정했던 게 내가 장애가 있다고 아이들이 나와 안 놀아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또한 덧붙여 얘기하자면 나도 싫은 사람 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수평적 이해관계만 있을 뿐 장애인이어서 소외돼 본적은 없다. 그리고 세상엔 나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못지않게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세 번째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서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박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금은 좀 주춤하긴 하지만)나는 대본을 쓴 덕에 배우와 뛰어난 자질을 가진 연출을 만나고 그들과 웃고 떠들며 공연을 했다. 그것은 지금도 나의 자부심이다. 솔직히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누구는 잘난 척 한다고 하겠지만. (반면 속 썩는 것도 많다.) 그리고 끝으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중에서).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는 천운을 설명했는데 4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50가지, 100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인간관계 훈련 프로그램을 주도한 적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의 자랑 50가지를 쓰는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처음에 “50가지나요?” 하며 한숨을 쉬지만 하다보면 정말 50가지 이상으로도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 이건 장영희 교수가 글 말미에 가르쳐 준 건데 나도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렸다. “책은 아무나 내는 줄 아나? 이렇게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있어 책을 낼 수 있고 간간히 날 알아보는 독자가 선생님 책을 읽고 힘을 업었어요. 말해주는(182p)” 아직 그 경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책을 냈다. 그러므로 나도 저자와 똑같이 말하고 싶다.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저자는 무한긍정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난 새해 벽두에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행운 같이 느껴진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2019년 새해가 밝았고 어느 덧 첫 달이 지나간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무사히 살아지기를 바라며 조금은 불안하게 새해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불안은 나이가 들어도 안 없어지는 것 같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꼭 징크스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 온 패턴을 보면 안 좋은 일은 홀 수년에 일어났다. 올해가 홀수 해이다. 그래서 올해는 조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다. 저자가 대학교 2학년 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이란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보면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저자는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라고. (, 이 얼마나 무한긍정인가!)

 

그도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살아보니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나쁜 일을 만날까 봐, 나쁜 일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조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저자처럼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평소, 뼈만 추스르면 산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암이 재발했고 또 어느 날엔가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죽기엔 아까운 나이였지만 그래도 조심하며 살지 않고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았으니 여한은 없지 않을까.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나 아버지 장왕록 박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 같다.

 

문득 천국은 어떤 곳일까를 생각해 본다. 저자는 천국에 있으니 벌써 오래 전에 목발과 다리보조기는 벗어던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여전히 목발을 짚고 저자의 표현대로 여전히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조차 아무런 이물 없이 사는 곳 아닐까?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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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토프 리브는 진짜 슈퍼맨으로 살았죠 ~승마중에 낙마해서...정말 위기 가운데 빛나는 인물입니다 장영희님의 글도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9-01-31 20:3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데 본인은 그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잖아요.
그냥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죠.

장영희님은 정말 글을 너무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존경스러워요. 조금 더 오래 사시지 않고...ㅠㅠ

서니데이 2019-01-3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서 인용해주신 잡지사의 인터뷰 제목은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방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표현이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부분에 쓰인 말이 부적절한 것처럼 보여서요.
장영희 교수님은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영문학자가 된 거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상대를 이렇게 힘든 사람일거야, 하는 표현이나 시선으로 보는 건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쓰신 글을 읽으면서 따뜻하고 좋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떠나시고 벌써 10년이나 지났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님 따뜻한 밤 되세요.^^

stella.K 2019-02-01 14:50   좋아요 1 | URL
저때는 저렇게 얘기해도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순수할 거라고 해서
순백의 영혼이니 그런 표현도 서슴치 않았거든요.
장애자나 비장애자나 똑같이 평범한 사람인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게 벽이 느껴지는 거죠.
비장애자란 말도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인데
이 말도 그닥 적절한 단어는 아니죠.
천형 보단 나은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장영희 교수는 정말 아까운 분이예요.
살아계셨다면 좋은 글 많이 쓰셨을 텐데...

syo 2019-01-3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숲을 거닐다> 같은 유명한 책조차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작가의 글은 도리어 손대기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카알벨루치 2019-01-31 22:23   좋아요 1 | URL
손만 갖다 대면 되는데...터치 터치 터치 ㅋㅋㅋ

stella.K 2019-02-01 14:41   좋아요 1 | URL
스요님 지금 읽는 책 중에 훗날 내가 이런 책에
손댔었단 말야? 하는 책도 상당수 있을 거예요.
스요님 안 읽은 책을 제가 읽어서 기분이 묘하게
좋긴한데 이분 책 언제고 읽어 보세요.
감동이고 피톤치드 그 자체입니다.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4:51   좋아요 1 | URL
피톤치드 오오오~

stella.K 2019-02-01 14:58   좋아요 0 | URL
카알님, 저 이름을 바꿀까봐요. 피톤치드로.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8:03   좋아요 1 | URL
그것도 개안은데 많은이들이 스텔라님 몰라볼까바 걱정이네유 ㅋㅋㅋㅋ

2019-01-31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2-01 14:44   좋아요 1 | URL
아유, 이거 제가 먼저 인사 드려야 하는 건데
매번 먼저 받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님도 명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새해 복도 마지막 찬스로 듬북 받으시구요.^^

cyrus 2019-02-0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 있을 때 장영희 님의 글을 처음 알았어요. 그때 읽은 장영희 님의 글은 메마른 제 마음을 촉촉이 적셔둔 단비와 같았어요. 군 복무 중에 부고 소식을 듣게 돼서 정말 마음속으로 많이 슬펐어요.

stella.K 2019-02-01 16:09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그만도 벌써 10년이야. 돌아가신지가.ㅠ

그런데 너와 내가 안 지도 그쯤 되지 않나?
너 제대 얼마 안 남기고 처음 알았던 것 같은데.ㅋ

카알벨루치 2019-02-0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차 스텔라님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연휴 보내시고 맛난거 많이 드시고 오소서~^^

stella.K 2019-02-02 13:3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카알님도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궁. 고맙습니다.^^

후애(厚愛) 2019-02-0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행복한 설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9-02-02 18:13   좋아요 0 | URL
아, 후애님, 고맙습니다.
후애님도 즐겁고 행복한 설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서니데이 2019-02-0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서재는 올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설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19-02-03 11:22   좋아요 1 | URL
ㅎㅎ 괜찮은가요? 가끔씩 변화를 줘야죠.
서니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얄라알라 2019-02-1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교수님의 마지막 작품과 장영희 선생님의 글....

특히 장영희 선생님께서는 요즘 세상에, 진정 대학에서도 제자를 만들고 아끼시는 보기 드문 교수셨는데....

stella.K 2019-02-14 19:40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정말 아까운 분이시죠.
책 정말 좋더군요.^^
 
영화기자의 글쓰기 수업 -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영화 글쓰기 특강
주성철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먼저, 저자가 현재 다니고 있는 주간 <씨네21>에서 기자의 일주일이 눈에 띈다.

월요일엔 기회회의를 갖고, 수요일엔 이틀 전 그 회의 때 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주 잡지에 들어갈 글과 인터뷰 등을 확정한다. 최종 마감이 수요일 자정이나 목요일 새벽쯤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요일 오전에 인터뷰를 해야 한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이것들과 별개로 시사회장에 가야한다.

 

가장 바쁜 날을 화요일과 수요일이란다. 특히 수요일을 너무 바빠 변변한 식사를 해 본적이 없단다. 수요일 밤의 야식과 회식은 당연히 폭식으로 이어지고 체중이 늘어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저자는 월간지에서 일할 때보다 주간지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한다.(저자는 지금은 폐간된 월간지 키노에서도 기자로 일했다). 왜냐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쉴 수 있으니까.

 

물론 기자가 한가한 직업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엄청 바빠 보인다. 내가 왜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냐면 그런 와중에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이런 책을 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내기위해 저자가 참고한 책도 여러 권이다. 스티븐 킹의 <글쓰기의 유혹>은 물론이고 조지 오웰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 유시민의 책 기타 등등. 뭐 글쓰기 강의나 관련된 책을 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들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을 저자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읽고 참고했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못해 은근 화가 난다. 난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공공의 적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왜 일까?

 

이 책, 영화 기자의 글쓰기 수업이라고 해놓고 글쓰기에 관한 얘기 보단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다. 6473 정도?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정보를 얻겠다고 이 책을 읽는다면 약간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글쓰기에 관한 책은 포화 상태로 많이 나와 있다. 이 책을 들 쳐 볼 정도라면 그 전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어느 정도 섭렵하지 않았을까? 요는 나는 저자가 글쓰기에 관한 것 보다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 기자로서의 마인드 뭐 이런 얘기를 들려줘서 오히려 더 좋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문득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왜 교과대로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그건 시작 때 쬐금 가르치고 시국이나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게 얼마나 재밌고 신선했던지. 나중에 졸업하거나 수료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교수나 강사를 떠올리면 교과 매뉴얼대로 열심히 가르친 분 보단 열라 비판하고 까는 교수나 강사가 더 많이 생각난다. 말하자면 이 책에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불온서적 같은 걸로 오인하면 안 된다. 그냥 난 시크하고 건조한 저자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려했을 뿐이다.

 

사실 책 전반에 어떤 묘한 기류가 있는데 (그게 저자만의 것인지 영화 기자들 대부분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기자와 달리 시쳇말로 어떤 쌈마이 정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영화 기자는 영화계에선 일개 기자로 보고, 저널리스트 쪽에선 영화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90년 대 스크린 쿼터 때 영화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영화인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저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걸 읽는데 왜 그렇게 코웃음이 나던지. 그 위기의 순간에도 사람 차별을 하다니. 우리나라 영화계가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거나 덜 차렸구나 싶다.) 그러니 영화 기자가 된다는 게 보통의 정신이나 명예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 평은 영화 평론가가나 관객이 하는 것이고, 영화를 보게끔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건 영화 마케터가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기자는 이 둘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한때 우리나라 영화 잡지가 부흥기를 맞이하는가 싶더니 지난 2000년 대 들어서 굵직한 잡지들이 잇달아 폐간됐다. 저자만 해도 <키노>를 시작으로 <필름 2.0>을 거쳐 지금의 <씨네21>에 안착했지만, 그가 거쳐 온 잡지마다 폐간을 했다. 이제 <씨네21>만 폐간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지만 참 쓸쓸한 말이다. 그럼에도 그대 정녕 그 길을 가려는가?’ 식으로 영화 기자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나 역시도 뒤늦게 기자가 되겠다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게 저자를 더 쓸쓸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 처음에 영화 기자의 하루에 대해 썼지만 난 워낙에 저질체력이라 벌써 거기에서부터 결격사유다. 단지 난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영화의 감상기를 적곤 했는데 글에 정답이 어디 있냐며 잡글로 썼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도 뭔가 모르게 헛헛한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화 글을 잘 써 볼까 이런 생각에서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저자의 책을 읽을 자격이 조차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사가 최전선에서 총칼 들고 싸우고 있는데 무지몽매한 민초가 배 두들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차라리 영화 에세이 쓰는 법. 뭐 이런 책이었다면 더 떳떳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기자질을 하든, 에세이를 쓰든 나는 저자의 기준으로 보자면 영화 보는 자세조차 제대로 갖추질 못했다. 올 한해 내가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 건 거의 전무했던 것 같고 그만큼 영화를 VOD로 집에서 봤다는 것인데 저자는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다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난 그 알량한 집에서 보는 영화조차도 한 쾌에 본 적이 거의 없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몇 번에 걸쳐 이어보기로 본게 다수다. 그것도 밤에 불 끄고 누워서. 그 다음은 어떨지...

 

또한 영화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보라고 하는데 그것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영화를 본다. 물론 감독이 누구며, 누가 나오고, 장르 정도는 알고 보긴 하는데 이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야말로 나는 뭐하겠다고 영화를 보는지 모르겠다.ㅠㅠ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앞으로도 내가 영화를 계속 즐길 마음이 있다면 보는 자세만이라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말대로 하려다가 아예 영화 볼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래도 이 책 너무 좋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영화 <영웅본색>에 나온 주윤발이 생각난다(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는 확인하여 보라). 자신만의 단어가 있는 것도 멋지고. 무엇보다 저자가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영화 <넘버3>의 송강호의 대사처럼 배신이다. 배신.

언제고 저자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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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2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평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영화평보다는 영화를 분석하면서 까는 영화평을 쓰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해 영화평을 쓰는 일이 어려웠어요. 인상 깊은 영화 장면이 1도 생각나지 않거든요. ^^;;

stella.K 2018-12-20 18:34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런 말을 하긴 해.
영화에 대해 쓰려거든 장면이나 대사, 인물에 대해
쓰라고.
생각해 봤더니 나도 그렇게 쓴게 별로 없어.
느낌을 주로 많이 썼던 것 같아.
하지만 뭐든 다 관심이지.
잘 보고 쓰면 쓸 수 있을 거야.^^

얄라알라 2019-01-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보고 바로 주문했어요^^

stella.K 2019-01-07 14:35   좋아요 0 | URL
앗, 북사랑님도 영화 글 관심 많으신가 봐요.
이 책 좋아요. 고맙습니다.^^
 
시와 살다 - 이생진 구순 특별 서문집
이생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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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유독 시를 홀대했다. 사춘기 때 문학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다고 그 감수성 예민한 시절에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춘기가 영원하지 않듯 시도 사춘기가 떠날 때 같이 떠나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알만한 소설가들도 그 시작은 시였다가 소설로 전향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역시 시는 인생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인가 보다고 멋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시인이 그런 시구도 읊지 않았던가, 시 한 편이 300원이라고. 하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시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다시 생기는 것도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최근 내가 시인에 관한 책을 읽은 것만 해도 몇 권은 된다. 이 책도 어떤 면에선 시인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구순이 넘었는데 평생 시를 써 왔고 그때마다 썼던 서문을 모은 책이다. 얼마나 열심히 시를 썼으면 서문만을 모아 책을 냈을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의 저 시에 대한 하찮다는 생각이 부끄러웠다.

 

시인은 시집만 38, 산문과 편저가 5, 공저를 5권 냈다. 그는 최근에도 시집을 냈다. 시인도 이렇게 자신이 써온 서문만으로 책을 내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이라 그럴까? 아니면 살아 온 연륜 때문일까? 서문들인데도 아폴리즘 같으면서도 상당히 서정적이다. 글이 너무 좋아선지 아니면 시인의 구순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인지 어느 순간 계속 밑줄을 긋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는 워낙에 많은 서문을 써 온 터라 한 권의 자서전을 보는 것 같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 보단 왠지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에 대해 여기저기에 조금씩 흘려 놓은 것도 같다.

 

시인은 먼저 첫 시집 <산토끼> 서문에서,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지 시는 아니라고 했다. 사람 때문에 시를 희생할 수는 있어도 시 때문에 사람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없고 시만 있는 고독은 시와 함께 그 고독도 싫고, 그 고독도 시도 사람이 있는 고독이고 사람이 있는 시여야만 한다며 철학을 밝힌다. 과연 그렇다 싶다. 그 글이 아무리 명문이라 한들 사람 보다 앞서지 않는다. 읽어 줄 사람 있고 글이 있는 거지 글 있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글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볼 때 저자의 말은 새겨 둘만 하다.

 

<자기>라는 일곱 번째 시집 후기에선 이렇게 썼다. 살수록 허해지는 시간에 나의 시를 쓰며 남의 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읽는 일은 시에게서 버림받지 않으려는 일이다. 시에게서 버림받는 일 그 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니. 나에게서 시를 빼앗는 일 그 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겠니.

시야, 너는 참 고맙다. 너는 하늘이 만들어준 내 인생의 날개다. 너는 내 어머니가 만들어준 영원한 양식(37p)이라고 했다. 부지런히 쓰기 위해선 부지런히 읽어야 하는 것은 시도 예외는 아니다.

 

문득 이 구절을 읽는데 마음이 싸해지더라. 나는 내가 시를 버린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시가 나를 버린 거다. 지금이라도 끊임없이 찬미해 주고 사랑해 주면 시도 나를 사랑해 줄까? 하지만 그것이 어디 시만이랴.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내 인생의 날개며, 영원한 양식이라며 찬사를 보내줘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

 

시인은 사랑꾼이다.

시인은 평생을 두고 사랑에 열중하며, 시에 있어서 사랑은 너무나도 크고 아름답고 했다(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시인의 사랑서문에서). 그러면서 <일요일에 아름다운 여자> 후기에선, 시인은 편한 길만 갈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길도 다녀 봐야 시에 탄력이 생긴다고 했다. 시는 재사(才思)의 기술로서가 아니라 숙명적으로 떠돌며 얻어지는 마음의 도록(圖錄)이라고 했다.

 

또한 시인은 자연과 하나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사람이지만

악착같이 시를 써서

곤충이 될 거다

풀밭에서 찌르르 우는

곤충이 될 거다

                                         -‘곤충기에서

...... 나를 확대하다 보면 어디서나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이 세상엔 내가 없다는 경지까지 축소해보자. 그때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곤충은 정말 희귀한 생존인 것이다(<개미와 베짱이>후기 61p).

 

유서를 쓰듯 쓴 시. 며칠을 살자고 울다가 떠난 매미처럼 벗어놓은 껍질이 이 시집이다. 그 껍질을 들고 매미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도 이 시집에 포함된 한 편의 시(하늘에 있는 섬 서문)라고 했다. 시란 이렇게 하찮은 것에 마음을 두고, 끊임없이 무위자연해지지 않으면 써 질 수 없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은 어때야 할까?

도시의 높은 빌딩에서 악수를 하고 나오는 젊은 비즈니스맨도 알고 보면 불청객이고 외딴섬 풀밭에 앉아 땀을 씻는 불청객이다. ......집에서 쫓겨난 사람처럼 낯설다. 그런 낮으로 호박꽃을 본다. “호박꽃도 꽃이냐얼마나 섭섭한 말인가. 그래도 오늘 아침 호박꽃은 명랑하다. 외로운 데서 얻은 아름다움. 나는 그것으로 시를 썼다. 시집<섬마다 그리움이> 후기에 나오는 말이다.

... 남들은 모른다. 시심을 먹고사는 시인의 마음을 모른다. 조금은 가난하게 조금은 외롭게 조금은 춥게 살아야 시심이 생기는 시인의 마음을 모른다(‘거문도후기)고 했다. 이 외로움이 아니면 하찮아 그냥 지나쳐 버릴 것도 다시보고 새롭게 보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시심에 다가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는 어떤 의미인가?

서른여섯 번째 시집 <섬 사람들>에서, 정월 초하루 00, 보신각종이 울리는 순간 어린 학생처럼 일기장을 꺼내 무엇인가 쓰고 싶다. 앞으로 365, 이 많은 시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를 쓰겠다는 다짐. ...... 시 때문에 내가 살아나는 것이다. 시는 생존의 기록, 나를 만나게 하는 기록, 그것이 시를 쓰는 재미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했다. 삶의 질곡까지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시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시인은 평생 시와 함께 살아보고 이런 말을 남긴다.

나이 90이 되니 알 것 같다

살아서 행복하다는 것과

살아서 고맙다는 것을

그리고 보니 이제 철이 드나보다

이런 결말에 결론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거기엔 조건이 있다

첫째 건강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 90이 되어도 제 밥그릇은 제 손으로 챙겨야 한다는 것과

셋째 밥 먹듯이 시를 써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리고 제정신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

......

그 사람이 시를 쓰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리라 믿지만 그렇게 살라는 강요는 아니다 시인은 언제나 부족한 자리에서 만족해왔으니까(‘무연고서문에서)

나는 애초에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과연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외로움과 고독을 발견했고 그것을 천명으로 받아들이며 시를 썼겠구나 싶다. 그리고 저 문장을 만났을 때 뭔가 쓸쓸하지만 꽉 차 있고, 꽉 차 있지만 쓸쓸했다. 과연 뭔가에 뜻을 품은 사람은 저래야겠구나 싶다.

 

스물다섯이 되면 어떻게 사나 싶은 때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너무 나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중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이 자신은 빨리 늙고 싶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는 나 보다 3살 위였을 뿐이다. 생각해 봤더니 그때 내가 정말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나이든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스물다섯 그 나이 보다 훨씬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 한 건, 젊었을 때는 중년을 감히 가늠하지 못했다. 젊음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이든 나를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덧 중년이 되고 보니 노년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적인 노년의 삶을 보는 것도 같다. 노년은 인생의 저주가 아니다. 노년을 감사하게 살면 그건 오히려 선물이다. 시를 사랑해야지, 시인처럼 살아야지 싶다. 고독을 응시하며 순간순간 치밀어 오를지도 모르는 노욕을 지그시 누르며 시인처럼 늙어야지 한다 

 

덧붙이자면, 시인이 처음 시집을 내기 시작한 건 1955년부터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어도 우리가 시인의 책을 접할 수 있는 건 반도 채되지 않는다. 이 기회에 절판된 책들이 다시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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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2-1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작의 수를 보니 대단한 분이시군요.

˝나이 90이 되니 알 것 같다
살아서 행복하다는 것과
살아서 고맙다는 것을˝ - 저는 몸 건강하고 돈 걱정 없고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90까지는 안 됐지만 연로한 친정어머니를 보며 살아서 그런지 아직 몸 쌩쌩한 게 감사히 생각되더라고요. 산책하면서도 느낍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제가 너무 늙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당~~ㅋ

stella.K 2018-12-15 14:42   좋아요 0 | URL
언니는 늘 긍정 갑이시잖아요.ㅎㅎ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 보다 조금 더 열심히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2018-12-14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5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8-12-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stella.K 2018-12-15 14:48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님도 행복한 주말되시길...^^

청계 2018-12-22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대로입니다.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이 책이 발매되기 전 티저북을 읽었다. 가끔 출판사에선 홍보용으로 티저북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그 책의 매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을 사 보기 전에 맛보기용으로는 꽤 괜찮은 방법 같다.

 

일단 표지가 마음에 든다. 얼핏 보면 미국이나 영국스럽긴 하다만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작가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먼나라 이웃나라로선 그게 그것 아닌가?ㅋ

 

단편 모음집이고 표제작이 그러한지라 받은 티저북도 동일한 제목의 작품인 줄 알았더니 수록된 작품중 '자식들은 안 보내'이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 읽었다. 잘쓴 작품이긴 한데 단편이라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으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처음 접해 보는 것 같다.(노벨 문학상 작품은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앨리스 먼로는 문체가 좋다기 보단 묘사가 좋은 작가는 아닐까 싶다. 

 

문체가 좋았다면 기억하고 싶고, 밑줄치고 싶은 문장이 있었을텐데 딱히 그런 건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해를 돕고자 친 문장이 간혹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대가스럽긴 하다.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풍경 묘사나 상황,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꽉찬 느낌이고, 한 편의 잔잔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내용도 흔히 겪을 수 있는 결혼한 사람들의 부조리한 면들을 그럴싸하게 다뤘다. 송곳같이 날카롭고 비판적으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작가의 노련한 글 솜씨는 이렇다할 갈등이나 사건없이 어느새 주인공 폴린을 이혼녀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이혼녀라는 것도 상대적 개념 아닌가? 돌싱 또는 독신녀라고 표현해야 적절한 표현은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폴린은 결혼 생활을 하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잠시 동거를 했지만 맨끝에 보면 그와도 헤어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혼한 전 남편은 폴린에게 얘들이 아니라 자식들은 안 보낸다고 단호히 말한다. 즉 아이들은 전 아내 폴린에게 보내지 않겠다는 거다. 폴린은 이것에 대해 판자로 세게 얻어 맞은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이혼했다는 것을 가장 뼈져리게 느끼는 게 바로 이 지점은 아닐까 싶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작가가 보수적인 경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서양 사람들이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인지, 이거야 말로 조금은 놀라운 표현은 아닌가 싶다. 이혼한 사람이라면 자녀 양육을 누가 맡던지간에 자식을 맡지 않은 전 배우자에게 일정 기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건 당연한 거고, 그것에 쿨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혼이 하도 잦은 사회라 이혼하고도 전 배우자와 친구처럼 잘 지낸다는 말도 들었는데 역시 사람 마음은 동서양이 똑같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냥 친구처럼 잘 지내려고 할 뿐 한때 같이 산 세월을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오히려 쿨한 쪽은 폴린의 두 아이다. 옛날 같으면 자신들을 포기한 엄마에 대해 분노를 가질 법도 한데 엄마는 그저 엄마의 인생을 선택했을 뿐이라며 담담하게 받아 들이고 있지 않는가? 물론 거기엔 어떠한 비난도 없지만 대신 사랑이나 끈끈한 유대 관계는 없다. 그게 아쉬운 요소긴 한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떠한 선택에 결과고 감수해야할 부분이지. 

 

이혼한 가정의 쿨한 풍경은 바로 이런 것일게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받아 들일 건 받아들이고, 봉합할 건 봉합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래도 작가가 보수적이건, 서양 사회가 의외로 보수적인데가 있건 간에 이왕 보수적인 관점에서 소설을 썼다면 그래도 이혼만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다. 이혼해서 홀로 남겨진 삶도 별로 행복해 보이진 않으니까. 물론 행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불행을 막기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결혼 생활을 하다 잠시 외도할 수 있는 건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책임이 남자쪽에 있던, 여자쪽에 있던 말이다. 왜 남자는 외도를 해도 되고, 여자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기에 딜레마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이는 차이 때문에 여자가 외도를 하면 아예 이혼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작가의 글은 섬세하다.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땐 다소 지루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이는데 다시 읽게되면 정말 많은 것들은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언제고 작가의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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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5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05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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