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읽어야 할 손자병법 - 읽으면 힘을 얻고 깨달음을 주는 지혜의 고전 삶을 일깨우는 고전산책 시리즈 4
손무 지음, 미리내공방 엮음 / 정민미디어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병법서가 필요할 만큼 크게 싸울 일이 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기는 하다.

뭐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겠는가?

가만있는데 치고 들어오는 인간들이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쌍욕을 장풍 같이 날려 준다고 해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쌍욕을 찰지게 잘하면 싸움을 잘한다고 사람이 아직도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의 기술을 조금이라도 알면 이건 가장 낮은 수준의

싸움이란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백중세면 빤스 바람으로 드러눕는 사람도 있다더라.

그건 무슨 생지랄이란 말인가? 이런 승자독식과 패권주의가 난무하고,

무림고수의 세상에서. 수준 낮아 못 싸워주겠다.

알아서 남 주는 세상이 아니다. 싸움은 더더욱.

그건 나를 지키는 최고이면서 최후의 방어수단 되어야 한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하긴, 빤스 바람으로라도 승리를 쟁취하거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것도 이기는 방법은 방법일 것이다.

책에 보니 미친 척 하되 진짜 미치지는 말라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가볍게 읽는 일종의 손자병법 안내서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싸우면 이기고, 저렇게 싸우면 진다는 걸

예를 들어가며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데 싸울 일이 별로 없고 늘 평화로운 나날을 살고 있는 사람에겐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병법서이기 전에 처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승자독식과 패권주의의 세상이라는 걸 안다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새삼 깨달은 점이 있다면 역시 전쟁은 역시 사람이 한다는 것이다.

사드니 핵무기니 세상에 말도 못하는 살상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게 다 소용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무기가 없고 오로지 칼과 창만 있어서 병법이 필요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또 어찌 보면 그것만 있었기 때문에 더 지혜로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드가 있고, 핵무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넋놓고 사는 세상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전쟁도 깜냥이 돼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병권을 쥔 높으신 분들

이런 병법서도 안 읽고 설마 그 자리를 꿰차고 계신 건 아니겠지?

장신 바짝 차리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패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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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8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8-19 15:13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진짜 이기는 거라는 건데
지는 게 이기는 것이기 때문인가 봅니다.ㅋㅋ

cyrus 2017-08-18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이 책은 손자병법을 뻔한 처세술 형식으로 편집했을 것 같습니다.

stella.K 2017-08-19 15:30   좋아요 0 | URL
이걸 읽을 바엔 진짜 손자병법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긴 해.
내가 고전 울렁증이 있잖니.특히 동양철학은.
싸움을 잘해 볼까 해서 읽어 본 건데 좀 아쉽긴 해.
그래도 요즘 사람 읽기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페크pek0501 2017-08-19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히 제게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읽어 두면 나쁠 것 없을 책 같습니다.

stella.K 2017-08-20 11: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손자병법이란 말에 혹해서 읽었습니다.ㅋ
 
광신자 치유 - 우리 안의 나쁜 유전자, 광신주의를 이기는 상상력의 힘
아모스 오즈 지음, 노만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몇 가지 있기는 하다.

무엇보다 아모스 오즈란 작가를 난 이 책에서 처음 접한다.

책이 얇아서 아모스 오즈를 아는데 용이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또한 나는 현재 교회 세계  선교 기도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여러 지역 중 중동 지역을 위한 기도 모임에 나가고 있다.

물론 주로 그곳에 파견된 선교사님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참석하다 보면 중동 지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할 수가 있다.

같은 선상에서 이 책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사실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모스 모즈가 말하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어찌보면 간단하다.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존중하며 평등하게 잘 살자는 것.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제 한 세기가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나라 한반도도 문제고, 유럽 난민도 문제다.

 

역사상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 없다.

그것이 기독교가 됐던, 무슬림이 됐던 아니면 제3의 신이 됐던 말이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광신과 신앙 그리고 신념은 서로 구분되어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광신을 비판하고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상처를 받으면 안 된다.

원래 신앙은 원초적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거기에 인간의 신념과 권력이 수반이 되면 그 신앙은 변질되고

광신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변질된 신앙심을 이용한 살육과 영토 전쟁.

이것이 광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앙은 인간의 권력을 위한 필요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중동 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각만큼 그렇게 과격하지 않다.

오히려 현지인들과 상호호혜의 원칙에 따라 잘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복음은 언제 전할 것인가 서두는 것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 따라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그리고 과격하게 복음을 전할 환경이 되지도 못한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니 사소한 갈등은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것을 확대해석하거나 곡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아모스 오즈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일까?

당연 세상의 권력자들에게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들.

무고한 양민을 조정하는 악의 세력을 향해.

우린 확실히 이성을 되잖을 필요가 있다.

 

사실 오즈는 광신을 치유하는 건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글쎄, 내가 너무 문학을 얕보는 걸까?

그게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다.

문학이 언제 그러리만큼 대중적이고 파급력이 강했던가?

 

그러나 오즈가 가진 힘은 믿고 싶다.

사람은 무엇이 됐던 어떤 힘을 가졌든 인류의 안녕과 번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꿈이 그저 돈이나 벌고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얼마나 허무하고 동시에 위험한 것이 될까?

그럼 점에서 오즈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권력을 세계 평화를 위해 외쳤다. 

 

그는 불을 끄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하나는 방화자를 쫓아 응징하는 것이고,

아니면 여기 불났다고 신고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세 번째는 불에 직접 뛰어들어 끄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게 설혹 티스푼의 물이어도 말이다.

티스푼 가지고 무슨 불을 끄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티스푼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너도 나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불은 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꼭 오즈 같이 유명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바람이 그러하면 언젠가

이룰 날이 온다는 말도 되겠지.

그렇다면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저 북한의 짧은 머리 광신자의 우두머리도 어느 땐가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인간의 희망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조금만 더 힘을내고 갈망하자. 

그가 어떻게 이성을 되찾고 굴복하게될지 지켜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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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05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광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진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진실에 기초하되 상상력을 채워 넣은 문학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진실의 비중이 적고, 상상력이 넘치는 문학은 수면 위로 뜨지도 못하고 가라앉습니다.

stella.K 2017-08-05 12:49   좋아요 0 | URL
명언이군.
혼자 멋있으면 어쩌자는 건지...ㅠㅋㅋㅋ
 
보길도 기행 - 비밀의 정원 보길도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들
김나흔 지음, 구자호 사진 / 현실문화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보길도. 언젠가 들어 본 이름이긴 하다. 하지만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에 섬이 600 곳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대표 여행지도 아직 채 다녀보지도 못한 내가 이렇게 입술로나마 떠올려 주는 것만으로도 보길도는 충분히 이름값을 다하지 않을까? 그런데 보길도. 언제 누구한테서 들은 이름일까? 그리고 난 그곳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세도가 이이첨 등의 불의를 폭로하다가 오히려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을 맞은 임금께 서둘러 문안인사를 올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두 번째 귀양살이를 했다. 또 이는 잘못 알려진 바, 사실은 임금을 구하러 가솔들을 데리고 강화도를 출발했지만 도중에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원래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야했지만 풍랑에 잠시 머문 곳이 이곳이다.

 

아무튼 입신양명의 길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윤선도가 평생 좋아했던 곳이 보길도이기도 했다. 특히 세연정이라는 곳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새삼 이 역사적인 귀양지도 세월이 한참 흐르면 기념비적인 곳이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어느 한곳도 허투루 여길 곳은 없겠다 싶다.

 

책은 그런 역사적인 추적을 비롯해 그곳의 천혜의 비경과 특산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해 놓고 있다. 사진과 함께 보면 이 글에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고 써야하는 것이 맞는 것 같긴 하지만, 평생 날지 못하는 공작새처럼 우아하게 사는 나에게 이건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싶다. 아니 떠나지 못하니까 이렇게 책이라도 보며 위로를 삼아야 하는 것이 맞는 걸까?

 

책 뒤에 보면 여행서답게 먹을 곳과 잠잘 곳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그래도 언젠간 꼭 떠나 보세요라고 속삭이는 것도 같다. 언제고 이 책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 그땐 책 들고 꼭 한 번 떠나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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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8-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서 보길도로 향하는 여행을 해 보고 싶군요.
책과 함께하는 여행, 머릿속에서 상상해 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가을 여행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를 생각하며...

stella.K 2017-08-02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차피 여름에 떠나지 못할 여행이라면
가을에 떠나는 여행이 좋죠.
햇볕은 여전히 따갑겠지만 습기는 없을 거잖아요.
읽으면서 귀양도 꼭 불행한 것만도 아니겠구나 싶어요.
천혜의 자연이 위로에 줄 텐데 말이죠.
암튼 조만간 언니의 보길도 여행 사진 볼 수 있겠군요.ㅎ
 
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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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문학소년 또는 문학소녀에 비유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문학소년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문학소녀의 대응어로 훗날 이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문학에 뜻을 두었다면 문학청년 줄여서 문청이란 말로 불러준다. 그리고 이는 작가지망생의 또 다른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학소녀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다. 일반인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땐 시나 소설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들이 그 꿈을 가지고 성인이 되어 작가가 된다면 여류작가가 될 것이지만 이루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학소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여류작가란 말도 일제 강점기 몇 되지도 않았을 여성 작가를 비하해서 썼던 말이다. 게다가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가를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눠 남자는 그냥 작가라고 부르면서 여자는 굳이 여류란 말을 붙여 차별을 두고, 여자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조장한다는 반발론을 제기해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새삼 언어의 음모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여류작가란 말은 폐기했지만 문학소녀란 말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우리의 의식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문학소녀란 말은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아직도 여성작가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저자는 문학소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전혜린에서 찾고자 했다.

 

사실 사춘기 시절 자신이 문학소녀였다면 전혜린의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줬다는 말로, 그만큼 전혜린은 당대뿐 아니라 모든 여성 문학인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책은 주로 일기나 단상을 자유롭게 쓰며 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누구인가?

전혜린은 한마디로 고관대작의 영애 소리를 들을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저자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 전봉덕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해방 당시 경시(총경) 직위까지 올랐고, 나중에 반민특위로 헌병사령부의 친일파의 도피처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폐일언하고(전혜린이란 예외적 존재란 곳을 읽어 보라) 딸에 대한 아버지 사랑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4세 때부터 한글과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고, 딸에겐 심부름이나 주방 일 같은 건 절대로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떻게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였고, 아버지가 친일파로 책 읽는 것을 직접 가르쳐 줄 정도라니 그녀는 자연스럽게 서양을 동경했을 것이다. 게다가 지식욕이 대단한 노력파이기도 하지만 겉으론 모던 걸처럼 자유분방 했다. 문학소녀가 어떤 캐릭터인지를 안다면 문학소녀=전혜린이란 등식도 설득이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전혜린은 그토록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했음에도 소설이나 시를 쓰지 않았다. 전혜린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은 오로지 에세이였다. 그나마 그것도 그녀의 사후 그녀가 알던 지인을 통해 엮어낸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녀는 살아생전 책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혜린은 오로지 번역가로만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평자들로부터 그녀를 저평가하기 좋은 것으로 작용한다.

 

오늘 날의 에세이는 어느 정도 인문학적 교양과 격식을 갖춘 것도 많지만, 당시의 에세이 즉 수필이라는 것은 마음가는대로가볍게 쓴 이지 고잉(easy-going)’ 즉 만필이었다. 그러니까 수필은 시나 소설 보다 못한 하위 문학으로 취급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혜린은 문학소녀이면서 만필이나 쓰는 어느 팔자 좋은 모던걸 또는 유한마담처럼 평가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읽고 쓰는 여자들의 흑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을 또 어디까지 낮췄냐면, 문학소녀의 일탈 행위를 지적하며 정신적 환상증으로 치부하고, 나아가 문학소녀의 자살로까지 확대해석하며 문화발전에 따른 향락욕과 태타욕(怠惰欲)과 사치욕에 기인한 좋지 못한 사상의 결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154p). 이렇게 보는 관점은 여성은 남자보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전혜린을 비롯한 당대 엘리트 여성을 가리켜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는 형용구를 쓰기도 했다. 언뜻 들으면 여성을 존경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것은 여자를 경멸하여 이른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손은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특권 지배층의 손이라며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 또한 불란서 시집을 읽으며 허황된 꿈에 잠긴 소녀야 말로 일하지 않는 자라며 비난하고, 문학소녀는 공공의 적이자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잘 아는 고종석이나 김화영 같은 지식인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요즘 같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신의 위신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파급력이 강한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남자들이 글을 쓰고 문학을 하는 건 고양된 정신적 행위이거나 생존이 달린 문제로 진지하게 봐주면서, 왜 똑같은 행위를 여성이 하면 그건 일탈이거나 아니면 잉여 행위로 보는지 모르겠다. 물론 전혜린이 문학 위해 죽은 건 아니지만(그녀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문학을 하다 죽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전혜린을 저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여성들이 볼 때 전혜린은 확실히 앞서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독일 유학생이자 독일 문학자요 번역가다. 그녀가 살아생전 독일 문학을 열심히 번역하지 않았다면 헤르만 헷세나 루이제 린저 같은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알았던 때보다 훨씬 늦게 접했을 지도 모른다. 한국의 평자들이 그런 싸구려 저평가를 늘어놓고 있을 때, 그녀가 독일에서 얼마나 생활에 쪼들리며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 건 확실히 그녀를 모독하는 거나 다름없다.

 

전혜린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성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이 나라의 정치가와 문학권력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문학 발전의 길은 멀어 보인다.

 

일례로 193, 40년대 우리나라 여성의 문맹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비해 일본 여성들은 그때 문맹을 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5, 6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것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이 여성에게 전파되는 속도가 일본 보다 늦는다는 말이기도 하니, 우리나라 문학은 전반적으로 일본 보다 훨씬 뒤져 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일본도 문학소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여성 문학인에 대한 저평가를 쏟아낼 때 일본의 여성 문학은 저만큼 앞서갔다는 얘기다

         

사실 이 책은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이어서 마치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 같다. 또한 여성 문학의 앞으로의 전망은 뚜렷이 제시하지 않고 있어 그 점은 좀 아쉽긴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우리나라 문학소녀들도 이런 읽고 쓰는 여자의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번쯤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이 문학소녀란 말도 여류작가란 말과 함께 사라져야할 말은 아닐까 싶다. 여성문학도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그냥 문학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건 필요하지만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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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3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읽기》(푸른역사, 2017)에 전혜린 작가의 이야기가 나와요. 작년에 최남선, 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추진한다고 말이 많았어요. 다행히 상 제정은 무산되었어요. 그런 친일 작가 이름을 딴 상 만들지 말고, ‘전혜린 에세이 문학상‘이라든가 ‘전혜린 번역상‘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stella.K 2017-07-24 14:55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그런 책이 있었네.
그런데 전혜린이 그런 평가를 받지 않더라도
그녀의 아버지가 친일파였잖아.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전혜린을 저평가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거야.
에세이는 번역물은 좋은데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낮게 보는 시각이 많지.

페크pek0501 2017-07-2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전혜린의 번역이어서 작가와 번역가를 동일시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인상깊게 읽은 책이라서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stella.K 2017-07-27 17:44   좋아요 0 | URL
저는 전혜린 번역본으로는 못 읽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를 동경하지 않는 문학소녀는 없었다고 봐요.
우리 여자들이 그러고 있을 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게
씁쓸하긴 하죠?
책이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transient-guest 2017-07-3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혜린이 낮은 평가를 받는 다는 건 몰랐네요. 항상 뭐랄까,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이미지로 남아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TV드라마 명동백작에서 이재은씨가 연기한 잠깐 나온 모습이 기억나네요.

stella.K 2017-07-31 17:5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번에 새롭게 알았어요.
적어도 전혜린만큼은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명동백작에 전혜린이 다뤄졌던가요?
저도 그 드라마 너무 괜찮아서 빼놓지 않고 봤다고
생각하는데 전혜린 나온 건 기억에 없네요.
잠깐 나왔다면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남성 문학인 일색이란 말이겠네요.ㅠ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스테판 말테르 지음, 용경식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 <동물농장><1984>는 두 개의 등대처럼 우뚝 서 있다. 이 두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존재를 본다. 그러나 그는 유언에 자신의 전기를 원치 않는다고 썼다.(283p)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전기를 담고 있으며, 나는 이 책을 읽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하긴, 언제 선대의 사람이 무엇을 원한다고 해서 후대의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지켜 준 적이 몇이나 될까? 역시 이번에도 그것을 보기 좋게 어기고 이 책이 나와 준 것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다. 그런 작가의 변변한 평전 하나 없어서야 말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국내외 작가들이 그에 대한 책을 낸 것도 사실이다. 그를 모르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안 다면 그에 대한 책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나는가 보다. 그건 아마도 조지 오웰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나온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비교적 전기에 충실해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조지 오웰의 두 권의 책을 읽었는데(유감스럽게도 그 유명하다던 위의 두 책은 아직 이다) 처음 읽었을 땐 그의 책을 읽기가 불편하다고 불평도 했지만 그의 유명세 때문일까? 어느 새 그에 대해 알고 싶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의 문학의 원천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난 그가 짧은 생애를 살았던 건 알고 있었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결혼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결혼을 했다. 그것도 두 번. 첫 번째 결혼은 비록 그가 원하던 상대와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결혼 생활 중 다소 병약했던 아내를 진정으로 배려하지 못하고 잠시 다른 상대에게 마음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며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충실했고 결혼 생활에 대해 불만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에겐 여자들이 원치 않은 일을 거의 충동적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의 첫 사랑이었던 재신터를 비롯해 몇 명의 여자를 숲속으로 유인에 겁탈하려고 했다.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이성 편력과는 다른 것으로도 보인다. 왜 그가 그런 충동을 보이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나와 있지는 않다. 오늘 날 같으면 문제가 될 법도한데 그의 시대만 해도 옛날이었을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더구나 그가 유명해지기 전이기도 했으니.

 

또한 창녀와 동거한 이력도 있다. 창녀와 진지한 관계가 되고 또 나중에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도둑맞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여자 보는 눈이 없었던 모양인가 보다. 하지만 그건 일부러 자신을 밑바닥 삶으로 몰고 간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는 극단적인 환경에 처한, 사회의 밑바닥인생, 즉 거지, 부랑아, 범죄자, 창녀와 같이 생활하면서 밑바닥까지 내려갈 결심을 한다. 그가 그런 결심에서 글감을 구하고 싶어 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중 가장 하등한 인간들곁에서 자신을 정화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결심은 그를 접시닦이로까지 몰고 간다(122p).     

 

아버지가 공무원이기는 했지만(인도의 아편국. 그는 인도 태생이기도 하다) 아주 부유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정도? 하지만 여느 부모가 다 그렇듯 그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튼스쿨을 다니기도 한다. 알려지다시피 이튼스쿨은 명문대로 갈 수 있는 정통 코스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나름 우수한 학생이기는 했지만 학교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선생님은 좋아했다. 이를테면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 같은 선생님. 그는 헉슬리에게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배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더구나 헉슬리의 소설은 나중에 그가 미래의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1984>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니 선생님에 대한 존경은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또 이 시기에 엄청난 독서를 하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경찰 공무원이 돼서 (지금의 미얀마)버머로 발령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가 원해서이기도 했다. 그곳에서의 경찰로서의 삶은 길지 않았지만, 그곳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만큼 그는 영국인의 버마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을 보면서 거기서 제국주의를 경멸하기에 이르고 그것은 평생에 걸쳐 그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국으로 다시 귀환해서도 호텔 청소와 광산의 광부 일 등을 하면서 밑바닥의 삶을 살기도 하는데, 특히 그는 스페인 내전의 종군 기자로 참전하면서 파시즘의 괴물과 마주했고 평생 반파시스트로 살기도 한다. 그가 어떻게 파시즘과 마주했는지는 그의 유명한 소설 <카탈로로니아 찬가>에 잘 나와 있는데, 역시 작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경험했는가가 그 작품 경향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동물농장><1984>는 어떻게 탄생되었을까?

 

<동물농장>은 그가 스페인에서 돌아온 즈음 착상되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주의 운동에 끼치는 소비에트 신화의 새로운 영향을 깨달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눈이 열려서 소비에트 체제가 무엇인지, 스탈린이 이끄는 전체주의 국가가 무엇인지 깨닫기를 바랐다. 그는 영국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역시 우롱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238p)

그런 <동물농장>의 출판이 쉽지는 않아 어떤 출판사든 받아만 주면 이후의 그의 모든 책은 그 출판사에서 내는 것으로 마음먹었다니 그가 이 작품을 얼마나 절박하게 출판하게 되길 원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책도 우화를 동화로 착각해 아동용 도서로 분류되기도 했다니 웃프기도 하고.

 

<1984>1946<폴레믹>에 발표된 문학이 죽은 곳에 밝히기도 했는데,

분명하고 힘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정통파가 될 수 없다...... 책들은 관료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큰 테두리 안에서 수태되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일단은 완성되고 나면,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조립라인의 끝에서 탄생하는 포드자동차와 다를 게 없다. 이런 문학은 명백히 쓰레기임을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쓰레기 외의 다른 것은 모든 국가구조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과거의 문학이 살아남으려면, 일단 전부 다시 쓰여질 것을 각오해야한다.(257p)

<1984>는 이렇게 출발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뭔가 오늘 날의 문학에도 시사 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그는 그렇게 작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러면서 작가에 대한 생각들을 고취시켜 나갔을 것이다. 그는 죽기 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첫째 의무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시의 적절하지 않다거나 이런저런 불길한 영향력을 본의 아니게 행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은폐하거나 주관적인 감정을 왜곡하도록 강요당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271p)

 

작가는 늘 불온함과 부조리를 느끼며 그것과 맞서는 존재는 아닐까? 그는 병약했다. 평생 폐가 약해 고생을 했고 역시 그 때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은 약하고 고독했을지 모르나 작가로서는 강했고 외롭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그는 작가로서 충실했다. 난 이제 그의 작품을 보고 불편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읽지 않은 나머지 작품을 보면서 세계를 조망할 것이다. 독자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책이 다큐를 보듯 짜임새가 있고 유려하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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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7-08 14:16   좋아요 1 | URL
저는 좀 의외로 조지 오웰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엔 막연하게 고독하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밑바닥 삶이야 그가 자청해서 선택한 삶이었고.

무덤덤한 건 우리의 삶이 평안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족한 게 없잖아요.ㅋ

2017-07-10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7-07-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조지 오엘의 주요 작품은 다 읽었습니다.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 1984..
1984가 단연 좋더군요. 나머지 작품들도 다 괜찮았습니다. 헉슬리의 작품도 그렇고 조지 오엘도 그렇고 문체가 좋은 작가는 아닌 듯합니다. 문장이 아름답고, 문학적 기교가 뛰어난 작가들은 아닌거 같다는 인상...하지만 뭐, 한국 작가 작품읽을래, 오웰 작품 읽을래...라고 하면 단번에 오웰 작품을 읽을 거라는..ㅎ

stella.K 2017-07-11 12:55   좋아요 0 | URL
ㅎㅎ 야무님 소설 별로 안 좋아하시죠?
그럼에도 조지 오웰을 전작하셨다니 확실히
조지 오웰이 난 사람이긴 한가 봅니다.ㅋ
맞아요. 문체는 그닥 좋은 작가는 아니죠.
하지만 역시 작가정신이 빛나고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17-07-2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농장>과 <1984>를 읽고 나서 조지 오웰의 문장이 별로 좋은 편 아니라는 평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훌륭한 소설입니다. 훌륭한 소설이라면 문장력이 크게 돋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stella.K 2017-07-27 17:4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게 또 은근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구요.
우린 왜 문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내용이 좋아서 세기에 남을 책이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를 생각해요.
그러니까 작가가 문장에 매달리는 걸까 싶기도 하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