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김광한 지음 / 북레시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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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라디오 키드 시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한때 클래식 마니아가 될 뻔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내가 속한 반이 합주 반이었는데 요한 슈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울 시내 초등학교 합주 경연 대회가 있는데 학교 대표로 이 곡이 우리의 출전 곡이었던 것이다. 난 좀 억울했다. 내가 속한 반이 어쩌다 그런 막중한 사명을 떠안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빨갱이 공산당도 아니고 모든 반 아이들이 합주에 참여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 나는 멜로디혼을 연주했는데, 다른 반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 반은 꼼짝없이 남아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합주 연습을 해야 했다. 나도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고, TV에서 하는 만화 영화도 보고, 숙제도 해야 하는데 허구헌날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울분을 참느라 10년은 늙어버릴 것만 같았다그때까지 거의 듣보잡이었던 클래식. 그것도 요한 슈트라우스의 곡이라니!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3등의 성적표를 받고 대회는 끝이 났는데 거참 묘하다. 할 때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는데 끝나고 나니 그때가 그립고, 그 그리움을 달래느라 그때부터 내가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던 거다. 그것이 아마도 나에게 추억의 생성이었나 보다. 그때부터 난 밤낮으로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클래식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아니, 그것이 나의 라디오 키드 입문이 될 줄은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것도 질릴 때가 있고, 더 좋은 게 보이면 당연 그쪽으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클래식은 들으면 들을수록 어렵고, 고전이란 틀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비해 그 시절 팝송은 그 인기가 기하급수 팽창 일로에 있었다. 그것은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또한 팝송 가수들은 어쩌면 그리도 세련되고 멋있던지. 이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시절 우리나라에선 70년대 중반 무렵부터 대학가요제를 중심으로 가요계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지만 팝송을 따라가기엔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난 그때 대중음악은 딱 두 가지만 있는 줄 알았다. 팝송과 대학가요.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굳이 들으려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들리고, 애인처럼 다시 듣고 싶어지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요한 슈트라우스 할배는 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비운의 애인쯤으로 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굳이 들으려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 들리고 애인처럼 다시 듣고 싶은 것이 가능했던 건, TBC가 언론 통폐합으로 KBS로 넘어가기 전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음악 프로를 들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TBCKBS로 이전한다고 예고가 있었고, 실제로 그날이 왔을 때 나는 잠을 자지 않고 TBC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때 황 아저씨의 그 프로가 10시에서 12시까지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사 주신 시계겸 라디오를 여느 때처럼 켜놓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난 그저 눈을 잠깐 감았다 떳을 뿐인데 12시가 지나있었다. 역시 학교를 다녀야 하는 학생으로서 12시 넘어서까지 두 눈을 뜨고 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좀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을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황 아저씨의 밤을 잊은 그에게는 그 다음에도 여전히 건재해 TBC가 사라진 사실이 실감이 안 났다. 방송국은 그렇게 사라질지 몰라도 음악은 영원한 것이다. 난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안도할 수 있었고, 위로받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KBS 2 FM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을 듣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책을 보니 그 프로는 82년도에 시작해서 무려 11년 동안 진행했었다고 한다.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가 먼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원래 라이벌 경쟁 구도가 사람의 이목을 끌기가 가장 좋은 법. 그때까지 TBCMBC와 좋은 경쟁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때 KBS는 국영과 공영의 의미가 강했던 만큼 어린 나도 감히 경쟁에 끼워줄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런 TBC가 사라졌으니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를 능가할만한 대항마가 있을까 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그의 이름을 딴 팝스다이얼이 나온 것. 그것도 똑같은 두 시에. 그 시절 두 방송을 동시에 접수하느라 주파수 맞춤의 달인이 될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밤은 밤대로 행복했다. 이종환과 황 아저씨가 밝혀줬으니.

 

아마도 이 두 쌍의 쌍두마차에 의해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DJ와 팝칼럼니스트란 직업이 각광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음악 프로그램과 그것을 이끌었던 DJ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김광한과 김기덕 또 그들 때문에 덩달아 주목을 받았던 팝컬럼니스트의 위상이란 건 가히 하늘을 찌를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라 경쟁적으로 누가 팝송 가수와 노래 제목, 레코드판을 더 많이 알고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시대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 두 방송을 오고 가면서 누가 부른 무슨 노래가 인기가 많은지, 새로 나온 곡은 뭔지 수첩에 적어놓고 다닐 정도였다. 또 그 곡이 좋으면 레코드판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샀다. 광한 아저씨는 DJ가 되기 위해 되고난 후에도 엄청난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난 그저 얻어 들을 뿐 덩달아 공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교 공부만이 공부지 그것 말고 다른 공부도 있단 말인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그때 80년대는 DJ가 직접 틀어주는 음악다방이라는 게 유행이었다. 그때 살던 동네에도 음악다방이 있었는데(지금도 어느 특정 지역을 가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대학을 갓 들어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그곳에 갔다. 난 그저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날 것만을 생각했지 음악까지 신청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 친구들은 그걸 꽤 하고 싶었나 보다. 친구들은 뭐 할까, 뭐 할까 끙끙거리기만 할뿐 나만큼 팝송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서서 그때 한창 인기 있었던 록그룹 퀸을 비롯해 생각나는 대로 서너 곡을 더 추가해 DJ 박스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얼마 후, 우리가 아니 내가 신청한 음악 중 한 곡이 선곡이 됐다. 그러면서 DJ가 그런 칭찬도 한다. 음악을 꽤 들을 줄 아는 분 같다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 같은 신청자는 없었던 말이 될 것이다. 어깨 뽕이 남산만 하게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알고 보면 다 김광한과 김기덕 키드로 자란 덕분일 것이다. 정말 그때는 그들의 음악을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목에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고, 고독한 청춘을 맞이한 때 아닌가?

 

나 개인적으론 김기덕 보단 김광한을 조금 더 좋아했다.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목소리에서 판가름 날 때가 많다. 짙은 중저음의 남성미 느껴지는 것으로야 김기덕이 좀 더 우위인 것 같긴 하다. 전달력도 좋고. 하지만 다소 가벼움이 느껴진다. 즉 중저음의 장점을 극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긴 안목으로 봤을 때 깊이와 여유, 질리지 않는 건 김광한이 조금 더 앞서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의 광한 아저씨는 그것도 알고 보면 다듬고 노력한 결과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자신은 원래 허스키 했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그 자리에서 김기덕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의 연보를 보면, 그는 11년 동안 팝스다이얼을 진행했다. 이후 다른 타 방송국에서도 음악 프로를 진행했지만 진정한 전성기는 팝스다이얼이라고 고백한다. 또 그런 만큼 이 시기 TV 프로에도 출연하기도 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든 건 그 시절 당대 유명했던 개그(우먼)맨들과 함께 진행했던 <쇼 비디오자키>는 대단히 유명했다. 그때 어깨를 들썽거리며 진행했던 그를 처음 봤을 때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목소리에 비하면 좀 많이 뒤처지는 외모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김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태도, 인격, 입담, 이미지 등이 결정할 때가 많다. 그는 그 모든 것에서 우위를 차지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타고난 성격도 한몫했다. 또한 그 특유의 성실함으로 그는 국내 최초 비디오자키 1호란 칭호를 얻기도 한다.

 

내가 알기론, 김기덕이 아나운서로 시작해 DJ로 자리를 굳힌 걸로 알고 있다. 그도 김광한만큼이나 열심히 방송 출연도 했더라면 그에 못지않은 아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런데 뭐 때문인지 시작은 김기덕이 먼저였을 모르지만 역시 김광한이 대중에 더 많은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은 어쩌면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전형은 아니었을까?

 

책이 상당히 재미있다. 그가 본격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그런데 지나친 겸손이었을까? 자전에세이에 머물렀다. 그래도 그의 인생 스토리를 읽으면서 사람은 평소 삶을 대하는 자세와 비전이 결국 그 사람을 결정하는구나 싶다. 그의 삶은 음악에 바쳐진 삶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고진감래와 와신상담으로 이루어진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가 팝스다이얼을 맡은 첫날 첫 번째로 튼 곡이 존 마일즈의 ‘Music’이란 곡이었다고 한다. ‘Music was my first love, and last love...’ 즉 음악은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또한 마지막 방송 마지막 곡도 그 곡이었다고. 그의 아내 꽃님 씨가 알면 섭섭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청취자로서 나는 그런 그의 마지막 방송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슬퍼할 수는 있어도 좌절하지 않았다. 매번 어려운 순간을 걱정하고 주저하기보다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돌파했다. 주변에 늘 많은 친구와 이성을 몰고 다녔다. 읽으면서 얼핏 조르바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자유만을 추구하진 않았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자신을 벼릴 줄 아는 지조와 청렴을 지니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니 자유라는 이름하에 일탈을 꿈꿔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잘 있으란 인사도 없이. 70을 앞에 두고. 조금 더 살아도 좋았을 나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됐다. 그의 연보를 보니 새삼 상복도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줄 무슨 상을 받았다고 나와 있지 않다. 하나 못해 공로상도 없다. 우리나라 DJ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박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개척기와 황금기를 동시에 이끌던 이종환 씨도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 DJ와 팝칼럼니스트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았을 자료들이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이것도 알고 보면 우리나라 대중문화사에 중요한 자료가 될 텐데 말이다.

 

누구라도 이 두 사람에 대한 평전도 써 줬으면 한다. 이 책은 재밌다고 한 번 읽고마는 책이 아니었으면 한다. 알고 보면 나름의 김광한 자신의 대중문화에 대한 증언이 들어있고, 소중한 우리의 추억이 배어 있기도 하다.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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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팝으로 쇼 비디오 자키로
뮤직 비디오 잠시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진짜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쉽네요.

이젠 팝송 인기가 예전만 못하고 들을 만한
노래도 없어서 점점 잘 안 듣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8-07-19 18: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오래 전에 팝송이 시들해졌어요.
그게 제 개인적 성향만은 아니었군요.
듣는다면 올드팝으로 들었겠죠.
그렇게 우리가 팝송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 고맙더라구요.
그때 우리가 팝송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할 수나 있었겠어요?
그저 추억은 아름다워입니다.ㅋ

2018-07-19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7-19 18:54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리뷰에 다 쓰지 못했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클리프 리차드였잖아요.
우리 땐 레이프 가렛이었지요.
그 인기가 엄청났어요.
이런 표현이 좀 그렇지만 그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질질 싼다고 했죠.
그가 내한 공연을 가졌을 때가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지가
바로 며칠 전이라더군요. 공연 못할 뻔 했는데 말입니다.
그걸 이책에서 읽는데 아찔하더군요.
광한 아저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저렇게 기억하는구나.
그 시절 우리는 뭐했을까 싶어요.ㅠ

hnine 2018-07-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디오 DJ로 전파를 탄것은 김광한보다 김기덕이 훨씬 먼저이긴 했지요.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써 저도 대부분 기억이 나는 사람들, 프로그램, 노래들인데, 저는 그저 조각조각의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렇게 한 줄에 꿰어 쓰시는 것이 바로 stella 님의 내공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stella.K 2018-07-19 18:59   좋아요 0 | URL
제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까 좀 들쑥날쑥 하네요.ㅋ
그런 실험이 있다잖아요. 지금 7,80 어르신을 20대를 재현한
공간으로 그 시절 옷을 입고 이동하면
뇌가 그때를 인지하고 세포가 젊어진다는 얘기 말이어요.
저는 이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때를 추억할 뿐만 아니라
젊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h님도 꼭 읽어보시기 바래요.
정말 좋았어요.^^
 
작가를 위한 집필 안내서 -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던 작가와 출판에 대한 이야기
정혜윤 지음 / SISO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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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운이 좋아서 책을 냈다. 책을 내려면 여기저기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난 그런 과정 없이 출판사로부터 먼저 제안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은가? 물론 난 아직 인생작을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작가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책을 한번쯤 내봤고, 원고료를 받아 본 적이 있다는 점에서 작가라고 생각한다.

 

책을 내봤더니 나는 어떤 과정으로 내 글을 세상에 알리고 작가로 인정받기를 바라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작가들 그들도 처음은 있을진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글을 끼적이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어떤 출판업자나 편집자의 눈에 띄어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마치 어느 연예인이 길거리 캐스팅 당해 연예의 길로 들어섰다는 고백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책을 내기위해 무수히 많은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고백을 들었다. 앞서 말한 경우는 정말 드문 경우고, 난 그 드문 경우로 그 꿈을 이루긴 했지만 언제까지 꿈만 꿀 수는 없었다.

 

꿈은 빨리 깰수록 좋다. 뭐든지 첫 번이 어렵고, 시작이 반이라지만 내가 첫 번째 책을 수월하게 냈다고 요즘의 출판 시장 상황을 볼 때 두 번째, 세 번째 책도 수월하게 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나의 책을 내준 출판사에서 또 내 책을 내준다는 보장도 못한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 아무 출판사나 턱턱 문을 두들겨보는 배포도 타고나지도 못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이 이 책이다. 담력 키우기용이라고나 할까?

 

물론 난 자계서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책들이 있긴 하다. 글쓰기를 자기계발로 연결시키는 책. 그래서 마치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을 내면 인생이 달라질 것처럼 말하는 책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난 그런 책들 믿지 않는다. 구라치는 게 환히 보이니까. 하루에도 몇 십 종의 신간들이 나왔다가 사라진다. 물론 책은 안 내는 것보다 내는 것이 좋긴 하지만, 이제 겨우 책 한 권 낸 걸 가지고 누가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 낸 기분을 한 달 넘게 유지했던 나는 (물론 그럴 만 했겠지만)어찌 보면 철딱서니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나를 용서한다. 첫 책 아닌가, 첫 책.

 

작가는 글을 잘 쓰고 못 쓰고, 역작을 내고 안 내고 보다는 인지도와의 싸움인 것 같다. 꾸준히 성실하게 책을 낼 수 있는 힘 말이다. 그런 말을 들었다. 한 두 권의 책 가지고 알아봐 주길 기대하지 말라고. 적어도 다섯 권 이상은 내야 비로소 독자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그러는 중에 처녀작이나 초기작도 재조명 받는다고. 맞는 얘기 같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리뷰 한다는 명분이 있어 그렇지 이젠 어디가 첫 책 나왔다고 자랑도 못한다.

 

이 책에서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책을 내려거든 반드시 기획안을 제출한다.

그건 당연하면서도 상당히 중요한 말 같다. 첫 책을 내기 전, 나는 막연히 글만 잘 쓰면 작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 만큼 처음 출간 제안에 동의했을 때 난 제안서를 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게 꼭 필요하겠다는 걸 거의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건 또 오래 전, 시나리오를 공부할 때 과정 중에 피팅 실습이라는 게 있었다. 즉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어느 영화사를 찾아가 관계자들 앞에서 설명하고 세일즈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짧고, 간결하며, 임팩트 있는 것을 좋아한다. 출판사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 주었더니 꽤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이걸 모르면 하나부터 상대 쪽에서 열까지 말해야 하고, 가르쳐 줘야한다. 꽤 성가신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배우는 것이긴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책을 낸다고 하면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을 할 때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를테면 개인주의적이고, 내성적이어서 자신을 드러내는 걸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자계서 전문작가들이나 강의전문 작가는 안 그렇겠지만, 문학을 하는 작가들 중에 그런 은둔형 작가들이 있다. 내가 좀 그런 스타일이긴 하다. 내는 과정에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내키지 않거나 긴장하게 만드는 순간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독자와의 만남이나 방송 출연이다. 예전 아날로그 시절엔 작가가 독자를 만나는 일이 그렇게 흔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작가는 오로지 글로 승부한다는 뭐 그런 가오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를 맞고, SNS가 활성화되면서 이젠 작가가 마케팅 전면에 나서는 시대가 됐다. 천성적으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면 상관이 없겠는데, 일일이 쫓아다니고, 만나주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도 일이겠구나 싶다. 그것이 안 맞는 사람은 얼마나 쑥스럽고 버거운 일인가? 그러나 그것이 인지도를 쌓고,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면 안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내 책을 내준 출판사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때로 나를 마케팅하고, 세일즈 할 줄 알아야 작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지적이 있지만, 책을 내려면 필히 편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듣긴 했다. 편집을 하려고 하면 전투적으로 쌍심지 켜는 작가가 있다고. 요즘도 그런 작가가 있는가 보다. 사실 이 말은 양쪽 말을 들어봐야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작가는 편집자들 중엔 더러 까칠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런 걸 볼 때 작가와 편집자 사이에 묘한 이상 기류가 존재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자존심만 앞세우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떤 출판사도 책을 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인쇄만 해서 소장만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독자와 함께 공유하고 소통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난 첫 책이라 뭘 몰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편집자의 편집권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도 내 글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최대한 그것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내 책은 오타나 어색한 문장 외에는 크게 고친 것이 없었다. 책이라는 것도 협업이고, 인간이하는 일인 만큼 불필요한 기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 책이 누군가에 의해 조금이라도 더 좋아져 독자들이 편하게 볼 수만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물론 이것만큼은 작가로서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건 최대한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자세가 돼야할 것이다. 사람들과 두루 잘 사귀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원고는 작가의 품을 떠나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 모르겠다. 더 나이 들어 책을 낼 기회가 있으면 노욕이 들어 못된 마귀 할멈 역을 자처할지. 그러기 전에 미리 미리 수양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거절에 익숙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편안한 답을 준다. 그럴 경우 자신의 원고가 무엇이 문제인지 겸손히 조언을 구하고, 문제점을 보완해 후에 또 두드려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들 중엔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그 반대로 자나치게 자존심이 세서 그렇게 해 볼 엄두를 못 내기도 하는데 그래봐야 자기 손해다. 또한 출판사마다 전문 분야가 있는데 자신의 원고가 어떤지에 따라 서점에 가서 50개 정도의 출판사 이메일 리스트를 만들어서 그렇게 출간 기획서와 함께 원고의 일부를 보내보라고 한다. 상당히 실제적인 조언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는 말은 맞는 말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요즘은 작가도 어느 정도 마케팅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출판사에선 그런 것도 본단다. 그 작가가 SNS 활동을 하고 있는지, 팔로워들과 어느 정도 소통을 하고 있는지 등등. 작가의 입장에선 좀 뜨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출판사도 작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지 않겠다는 심산으로도 읽히고, 손해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읽히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 책이 출판된 이후 얼마나 애지중지 돌봤는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보통 작가가 책을 쓰는 과정을 애를 낳는 과정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출판사는 산부인과 병원이고, 편집자는 조산사쯤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일정 부분만 도와줄 수 있다. 그것을 돌봐야 하는 사람은 결국 작간데, 작가 역시 낳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하면 내 책은 버림받은 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게다가 보통은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자기가 자기 책 자랑하면 꽤 쑥스러워 한다. 그게 유교적 사고방식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별로 바람직 한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도 블로그 활동 중에 출간 제의를 받았고, 책을 냈다. 사실 유명 작가일수록 또 그것에 가까울수록 블로그 활동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 역시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블로거는 자기 글은 올리면서 댓글 창을 막아놓기도 하는데 SNS는 소통이다. 그런 블로거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보단 유익한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그런 폐쇄적인 블로그를 보면 나 또한 마음이 가지 않아 아무리 좋은 글을 봐도 지나치거나 좋아요 누르기가 싫어진다. 나도 이럴 진데 출판사야 얼마나 꼼꼼히 따지겠는가?

 

출판 시장은 내가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호황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안에 드는 출판 대국이라고 한다. 이 책도 출판 시장에 대해 우려하는 말을 하긴 한다. 그렇게 출판 대국이어서 읽을 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성해졌는데도 책은 여전히 읽는 사람만 읽는다고.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형상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 하기 나름이란 뜻이겠지.

 

사실 이제까지 작가는 출판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선처럼 뒷짐 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집필의 기술이 아니라 집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쓴 책이다. 그래서일까? 이제까지의 작가의 자세 대해 반성을 촉구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같은 출판인의 마음이 되어보라고 하는 것 같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참고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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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7-06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인이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한 적이 있어요. 그 분은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는데, 잘 썼어요. 그 분이 출판하려는 책이 자서전 형식의 에세이였어요. 그 분이랑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책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

아무리 글을 잘 쓰더라도 댓글 기능을 막은 블로거, 자신의 글 내용에 대한 이견에 반응하지 않는 블로거의 글은 보고 싶지 않아요. 《리뷰 쓰는 법》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이견이나 비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 글을 쓰고 싶다면 공개하지 말라고요. 그렇지만 비판을 피하는 사람들은 자기 글을 공개하려고 해요. 상대방이 비판을 하든 말든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겠다는 태도예요. 그러면 저는 ‘친구‘ 해제하고, 그 사람이 쓴 글 안 봐요.

stella.K 2018-07-08 14:38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책 내기가 쉽지가 않아.
사람들이 워낙 글을 읽지 않으니.
작가의 글이 아무리 좋아도 출판사가 안는 리스크가
없다고 볼 수 없지.
나야 출판사 사장하고 그전부터 친분이 있고
내 글을 좋게 봐줘서 그저 감사할 뿐이고...ㅠ

책에도 출판을 어떻게 할 거냐가 나와 있어.
출판사가 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자비출판도 있고. 이 둘을 절충하는 방법도 있더군.
우리나란 아직 자비출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그저 친지끼리 나눠 볼 마음이라면 모를까
오죽하면 자비 출판이냐란 생각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첫번째나 세번째가 유력하겠지.

그런 사람이 좀 안타깝긴 한데 그 사람은 또 어딘가에선
소통하고 살겠지 그래.
보통 하나 이상 블로깅하잖아.
난 주로 여기서 활동하지만 몇군데 더 있긴 하거든.ㅋ

2018-07-07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7-08 14:4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저도 알라디너들의 덕을 많이 봤죠.
지금도 생각하면 늘 고마운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전 생각하시는 게 있으시면 계속 책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론 사진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뀔거라고 봐요.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시잖아요.
책 사진책 기대됩니다. 꼭 내주세요.^^

syo 2018-07-07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작가‘님이 이런 책을 읽으시면 그건 일종의 반칙인가요, 반칙이 아닌가요.....

stella.K 2018-07-08 14:47   좋아요 0 | URL
스요님도 책 한 권 내시죠.
자질이 충분한데!ㅋㅋ

공부는 잘 하고 계시죠?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겠어요. 횟팅입니다!^^

syo 2018-07-08 20:58   좋아요 1 | URL
아이쿠 별 말씀을요 ㅎㅎㅎㅎ
공부는 한다고 하고 있으나 해도해도 불안하네요 ㅎ 스텔라님 응원 기운 받아서 열심히 해볼게요

2018-07-08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8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ckrain 2019-09-2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답게 글을 참 잘 쓰신 것 같아요.
사소한 건데, ‘출판사로부터 먼저 제안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은가‘라는 부분은 말이죠. ‘출판사에게 먼저 제안을 받았으니~~‘로 쓰시는 게 맞습니다.

stella.K 2019-09-26 15:52   좋아요 0 | URL
아유, 뭘요. 벌써 오래된 이야기인 걸요.ㅠ
고맙습니다.^^
 
버자이너
나오미 울프 지음, 최가영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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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모르는 사람은 이젠 페미니즘이 하다 하다 버자이너 가지고 울거 먹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외설스럽다고, 창피하지도 않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건 정말 멋모르고 하는 말이다. 여성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 아닌가?

 

저자는 먼저 자신의 문제에서부터 이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전엔 잠자리에서 오르가슴을 느끼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뭔가 모를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주치의를 찾아가 이 문제를 상담하고 그 방면의 권위 있는 의사를 소개 받아 치유를 받으면서 전에 알지 못했던 버자이너가 뇌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창의력, 자신감 심지어 성격까지 형성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나아가 저자는 버자이너를 말초적 감각이 아니라 제2의 중추라고까지 주장한다. 또한 버자이너를 우린 간단하게 구멍으로까지 부르기도 하는데 그보단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이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린 이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을 어떻게 대해 왔을까? 굳이 이 책을 리뷰한답시고 여기에 구구하게 설명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그런데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역시 강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이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에 직접 위해를 가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과연 강간과 버자이너를 따로 떼어놓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린 보통 강간이라고 하면 단순히 어느 사이코가 겁탈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책은 거기서 더 나아가 끔찍하고 잔인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짐승 수컷이 자신의 오줌 가지고 여기 저기 묻히며 영역 표시를 하다더니, 강간범은 여자의 몸 그것도 버자이너를 난자하므로 자신의 존재를 문신처럼 남기는 걸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불구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넘어지는 일이 많으며, 멈추는 일을 잘하지 못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 비로소 멈추라고 해야 멈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자 오래 전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어느 건달 세 명에 술집 여자를 기어이 쫓아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차례로 윤간하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그 영화의 감독은 남성이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긴 했지만 보기에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로 그 장면이 필요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전후 문맥을 따져 볼 때 건달은 이렇게 개 같이 논다? 뭐 그런 리얼리티,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삽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자의 대사다. 여자는 쫓겨봐야 별 수 없으니 결국 결심한 듯 돌아서서, “좋아. 한 사람씩...”하며 체념해 버린다.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강간에 윤간이 없을 리 없고, 아무리 천한 여자고 자신을 체념했다고는 하지만 그녀 역시 강간의 흔적이 없을 거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내 기억으론 이민용 감독의 <개 같은 날의 오후>이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물론 이건 영화의 한 장면이고, 지금의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이 들끓기 전에 나온 오래된 영화라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문제적 장면은 그 영화만이 아니다. 난 과연 이것을 언제까지 표현의 자유로만 볼 것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어쨌든 이런 걸 볼 때 저자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한 건 사실이지만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편견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 주위에도 드물게 유난히 길가다 잘 넘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도 강간 피해자로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 같은 지적은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 하다.무엇보다 강간을 당한 여성은 아무리 치료를 해도 강간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사실 버자이너는 한때 신성시 여겨졌던 때도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 상처 받고 속박당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 예가 우리가 잘 아는 중세 십자군 원정 때 여자들의 정조대일 것이다. 여자들은 원정 떠난 남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정조대에 꼼짝없이 매어 있어야 했다. 마음대로 풀 수도 없고, 청결을 유지할 수 없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남자들이 돌아오면 행운이다. 거기서 죽은 사람의 아내들은 그 정조대를 평생 풀지 못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밖에도 상처받고 수난 당한 예는 수 없이 많다.

 

무엇보다 오늘 날은 여성들이 상처받은 버자이너에서 항문열상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항문열상이란 새로운 정조관념, 즉 기독교를 중심으로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처녀성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과 맞물려 항문성교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렇지 항문성교는 대부분의 남성들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항문이 찢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을 항문열상이라고 한다.

 

앞서도 영화 얘기를 했지만, 포르노의 폐해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는 포르노 산업과 그로인한 폐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하다. 책은 흥미롭게도 빅토리아 시대에 문학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에 관해 다루도 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D.H 로렌스를 얼른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춘기 시절 읽었는데 물론 그 특유의 찌릿한 감흥도 있긴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참 아름답더란 생각을 하게도 된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뭘까? 안타깝게도, 알 것 같지만 실상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여자는 전희를 해야 비로소 버자이너 즉 여신의 형상을 한 구멍이 열린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교는 여성 보단 남성이 유리하도록 맞춰졌다. 그래서 여성은 이런 전희를 과정 없이 바로 이루어진다. 남자들이 이런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지해야 하는데 오랜 세월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이 여성의 버자이너에 끊임없이 오해하도록 조장되어져 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 책은 동양의 도가사상과 특별히 인도의 탄트라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서양은 이미 포르노에 점령당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삐뚤어지고 잘못된 성의식에 이 두 가지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하다. 이것의 유익이 얼마만한 것인지 여러 페이지에 걸쳐 할애하고 있다. 또한 버자이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12가지 원리를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싣기도 했는데 참고해 볼만하다.

 

이 책은 무려 500 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인데 저자는 버자이너에 대해 이만한 책 두 권을 합쳐도 못 다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이는 이것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이 부분은 꾹꾹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었다는 말도 될 것이다.

 

엊그제도 우리나라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여성의 상당수가 남성의 성범죄에 피해를 당해 본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중 또 적지 않은 수가 말을 하지 않거나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어찌 보면 여성은 피해를 보면서 그 죄를 방조한 셈이기도 한데, 그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여자 보다 힘이 세고,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남성에 유리하도록 태곳적부터 맞춰져 있다. 거기서 여성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여성조차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란 인식 없이 살아 온 세월이 얼마인가? 거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버자이너임을 저자는 당당히 고발하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저자가 도교와 탄트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것의 관해서는 한없는 관심을 보이면서, 남성들의 잘못된 성의식의 변화를 촉구하고, 왜 상대와의 조화가 중요한지에 관해서는 다소 설명이 미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뭐 그런 거야 다른 책에서 보충할 수도 있고, 이 책이 의미하는 바와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고 보인다. 여성 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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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2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에게 변화를 촉구하는 건 옛날 방식이에요. 20세기 초 온건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방식으로 여성 운동을 했어요. 이게 안 먹히니까 거리에 나가고, 목소리 높이는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

stella.K 2018-06-22 09:43   좋아요 0 | URL
그랬겠지.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더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있어.
사람의 인식이 쉽게 바뀌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거든.
물론 그만큼 반페미니즘도 들끊겠지.
그럴지라도...ㅋ

페크pek0501 2018-06-23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이, 지적이 좋네요.
꼭 읽어야 할 사람이 사실은 읽지 않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미투 운동도 그렇고 세상을 바꾸는 사건들은 일어나는데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예요. 인간을 변화시키는 속도는 느린지라...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지요.

참, 언제부터 말하고 싶었는데요,
서재 이미지가 보기 좋네요. 파란색이 시원해 보이고 예쁩니다. 바다인가요?

stella.K 2018-06-23 19:00   좋아요 0 | URL
ㅎㅎ 저 이미지 예전에 한 번 썼어요.
그런데 다시 봐도 좋긴하죠?
여름 한철 계속 써야겠군요.^^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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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은 가급적 읽지 않으려고 했다. 요즘 그런 책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물론 읽어서 나쁠 리 없다. 하지만 읽으면 뭐하나? 중요한 건 내 글을 써야지. 그래서 글쓰기 강사가 될 것이 아니라면 가급적 안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왠지 끌렸다. 제목이 길기도 하지만, 뭔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책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지난 날 글 쓰다 엎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랴? 왠지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책인 것 같아서였다.

 

제목에서 풍기듯 이건 글쓰기 생초보를 위한 책은 아닐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면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생초보라도 읽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지 중앙의 그림에서 느껴지듯 이건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쯤 빤히 알 수 있다. (고양이를 그려 넣을 생각을 하다니.)

 

(여러 번 밝혔지만)나의 꿈은 작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룬 것도 같다. 오래 전교회에서 대본을 썼고, 2년 전엔 책도 냈으니. 하지만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이건 내가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소설로 데뷔하는 거였다.

 

사실 내가 교회에서 대본을 쓴 것도 소설을 써 보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책에서도 저자가 지적하지만, 글 쓰는 일이 지난한 것도 있지만 지지부진한 것도 많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본 쓰는 일이 그랬다. 소설이야 혼자 하는 작업이니 지지부진해질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연극이란 장르가 워낙에 여러 사람과 협업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대본은 잘 쓰든 못 쓰든 제때 나와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가 마감에 맞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한다. 기왕이면 마감에 맞추는 작가가 되라고. 마감에 못 맞추면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나 마감에 맞추면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신뢰를 얻고, 그 다음을 도모할 수가 있다. 나는 바로 이 훈련을 대본 쓰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겹쳐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감에 맞추는 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책에서, 전업 작가가 좋으냐, 아니면 자기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좋은가 했을 때, 당연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업 작가는 아마도 신이 내려준 직업일 것이다. 글만 써서 집세 내고, 공과금 내고, 생활비 한다? 이건 정말 꿈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를 잘 만나거나, 부모님 집에 그야말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입주 가사도우미가 되어, 눈물에 밥을 말아먹을지언정 절대로 부모님 그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본인이 금수저이거나.

 

결국 작가는 훌륭한 직업이긴 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거의 수익을 보장할 수 없으니 겸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글프긴 하다. 직업이 뭐가 됐든 그것은 자아실현과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작가란 직업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작가는 여타의 직업과 겸직을 하게 되는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때로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소재로 삼을 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니, 화학자 출신이고 그래서 그런지 전작들도 과학적 요소가 많기도 하다.

 

아무튼 나도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오래도록 교회에서 글을 썼으니 오죽 겪고 본 일이 좀 많겠는가? 그걸 책으로 써도 책 몇 권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겸직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작가에겐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어느 작가도 편의점에서 일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그러고, 우리나라 어느 법조인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써서 그게 현재 TV 드라마로까지 방영되고 있다(말에 의하면 작가가 직접 각색까지 했다고 하는데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작 원하는 소설을 안 쓰고 있다. 아니 못 쓰고 있다. 역시 저자가 지적하기도 했지만, 작가로 살아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두 권의 책을 내 본 것으로 작가 딱지를 달았으니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거기엔 작가의 의지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야말로 생업이 발목을 잡아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복잡하다. 그렇게 대본을 써 봤으니 소설도 금방 잘 쓰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본 쓰는 일과 소설 쓰는 일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 그동안 내가 대본을 쓰면서 소설은 안 써 봤겠는가? 그런데 꼭 실패했다. 어떤 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야말로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작가란 꿈은 가져서 이런 생고생을 하나? 차라리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발버둥쳤던 때도 있고, 글 쓰는데 매번 실패를 하니 일부러 팔짱끼고 있다가 뭔가 내 안의 욕구가 빵빵해져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을 때 써 보는 것은 어떨까 하던 때도 있었다.

 

이 책은 애석하게도 그런 심리 상태를 진단해 주는 책은 아니었다. 즉 왜 실패하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쓸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 본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저자는 베껴 쓰기가 얼마나 고역인지를 털어놓는다. 사실 베껴 쓰기는 창작을 공부할 때 빠지지 않는 수련 과정 중의 하나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 아닌 게 아니라 어떤 글을 찬찬히 베껴 쓰면, 그 글의 특징과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때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을 방해할 때가 많고 소모되는 힘과 시간도 너무 컸다. (162p) 그 뒤 저자의 설명은 그냥 기계적으로 무의미하게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글을 쓰면 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일에서 내가 뭔가를 했다고 만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나 역시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하나같이 필사가 중요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의견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솔직히 난 내 글 쓰는 것만으로도 어떤 땐 팔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베껴 쓰느라 에너지를 쓴다는 건 너무 힘들다.

 

대신 저자가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이건 나도 언젠가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 베껴 쓰기를 아주 안 할 수는 없으니 괜찮은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식으로 베껴 써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로 옮겨보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면 시나리오나 대본으로 옮겨 써 보는 것이다. 그냥 베껴 쓰기는 단순하지만, 이 작업은 상상을 해야 하고, 문체를 다듬기도 해야 하니 좀 보람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심리가 어떤지 글로 표현해 보기도 하고.

 

저자는 그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거기서 개작을 해 보라고 한다. 즉 모작을 해 보라는 것이다. 나라면 이 작품 또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해 볼 것인가를 써 보는 것이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구조를 바꾸고, 구성을 바꾸고 하면서, 새로운 창작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또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데서부터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이건 꼭 소설이나 시나리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이든 일기든 지간에 전체 쓰고 싶은 글에서 가장 쓰고 싶은 부분부터 쓰는 것이다. 그 부분을 읽으니 갑자기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거기서보면 해리는 책을 읽을 때 맨 끝 페이지를 먼저 읽은 후 첫 페이지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러자 샐리는 왜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 해리는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면 혹시 자신이 심장마비나 사고로 죽기라도 하면 맨 마지막 페이지는 못 읽게 되니 그러는 거라나 뭐라나.(워낙 본지가 오래라 정확히 옮기는 건 불가능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기가 막힌 장면을 염두에 두어두고 있는데 갑자기 죽게 된다면 이건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컴퓨터엔 워드 기능이 있다. 이것은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다. 아주 오래 전,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였는지, 제임스 조이스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암튼 원고를 보여주는데 그야말로 누더기였다. 노트에 메모를 길게 늘여 붙였는데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은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발단 쓰고, 전개 쓰다 정작 중요한 부분을 못 쓰고 중단했던 적이 너무 많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귀도 얇아 남의 말은 잘 듣는 편이다. 과거 나를 가르쳤던 글 선생님은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베껴 쓰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고, 어느 한 장면을 위해 앞뒤로 무엇인가 살을 붙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난 이 책에서 이 두 가지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움이 느껴졌고, 당장이라도 해 보고 싶어졌다. 하긴, 글쓰기에 왕도가 어디 있겠는가? 내 나름대로 쓰면 그게 내 길인 거지.

 

그런데 작가는 또 말한다. 그렇게 못 쓰겠으면 쓰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쓰서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이 좋은지. 둘 다 나름에 일리는 있는데, 결국 저자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계속 써서 끝을 보라는 것이다. 안 쓰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글이라도 어떻게든 완성하면 후에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맞는 얘기다.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희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기억할 말은 그렇게라도 완성한 후에 그 다음에도 또 쓰고 싶어지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또 쓰고 싶어지면 작가가 되는 것이고, 쓰고 싶지 않으면 작가는 내 길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나의 사부가 했던 말씀이다(왜 그 말이 생각이 나는 것일까?).

 

아무튼 글쓰기에 관한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데, 나름 알뜰살뜰 유용하게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기력보충용으로 비타민 먹듯 한 번씩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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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5-26 19:10   좋아요 0 | URL
ㅎㅎ 이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다닛!
알겠습니다.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슴다.^^

마태우스 2018-05-26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용. 저도 겸직작가설에 동의합니다. 작가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쓸 때거든요. 교회소설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감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안팔리는 책을 마구 낼 때는 마감 정말 잘지켰어요. 근데 지금은...ㅠㅠ 1년 2년 늦는 건 일도 아니더군요. ㅠㅠ초심을 잃은 걸까요.

2018-05-26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6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7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5-26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식으로 베껴 써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로 옮겨보는 것이다.˝
- 이것 좋은 방법 같습니다. 저도 해 보고 싶군요.

˝책을 읽을 때 맨 끝 페이지를 먼저 읽은 후 첫 페이지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 제가 이미 종영된 드라마를 재방송 해 주는 채널이 있어서 시청할 때가 있는데 재미가 있더군요. 만약 부부의 이야기라면, 아 저렇게 해서 처음 만났구나 또는 저런 일이 있어서 헤어지게 되었구나 하고 끝 장면과 연결해서 보는 특별한 재미가 있더라고요.

˝베껴 쓰느라 에너지를 쓴다는 건 너무 힘들다.˝
- 저의 경우엔 필사를 많이 하지 않고 며칠에 한 문단 정도 베껴 쓰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신문의 칼럼을 읽고 맘에 드는 문단이 눈에 띄면 그 문단만(5~6줄) 필사해 둡니다. 그렇게 조금씩 해 놓아도 1년이 되면 꽤 많은 글 필사가 됩니다. 티끌모아 태산이 되어요. 힘 빠질 정도로 필사하는 건 저도 반대입니다.

stella.K 2018-05-26 19:34   좋아요 0 | URL
저는 벌써 정했습니다.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로 해 보기로.ㅋㅋ

정말 좋은 글만 베껴 쓰기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책 전체를 베껴 쓴다는 건 그냥 의무에 매여서 뭐가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또 팔 힘이 약해서 서너 시간만 글을 써도 팔이 빠질 지경이라 꾸준히
할 자신도 없고. 저도 매일 조금씩이라도 해 봐야겠습니다.^^

서니데이 2018-05-27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손글씨를 매일 조금씩 쓰고 있는데, 글씨 쓰는 것에 신경을 쓰면 내용은 잘 기억이 남지 않는 것 같아요. 좋은 글을 필사해서 두면 나중에 읽어보면 좋다는 점은 있겠지만, 손글씨 쓰는 것이 시간도 많이 걸려서 워드로 작성하거나 아니면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필사하는 것을 하시니까, 아마도 제가 알지 못하는 좋은 점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stella.K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편안한 하루 되세요.^^

stella.K 2018-05-27 18:3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래요. 더구나 요즘엔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라.
과연 필사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안하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요?
전체 필사는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나
부분만 해도.
아니면 색인 카드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무엇에 관한 것이 무슨 책 몇 페이지에 있다는 거요. 암튼...

요즘엔 마음 먹은 게 있어 주로 오전과 오후에 걸쳐 글을 쓰니까
서재에 글은 잘 안 쓰게 되더군요.
전에는 오후에 글을 쓰려고 하면 잘 안 잡혀서
대신 서재에 뭐라도 써야지 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일단 오전에 글을 쓰니까 좋긴한데 서니님과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쉽긴 하더군요.ㅠ
이해하시고 가급적 댓글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 한 주도 활기차시길...!^^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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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저자는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까 제목을 그렇게 지었겠지.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랄 때만해도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만큼 인생에 있어 중요한 때를 간과하지 말고 울라는 뜻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바꿔도 되지 않을까? 울고 싶으면 수시로 울되 중요한 세 번은 지나치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말이다.(더구나 여자는 울어도 되고 남자는 울면 안 된다면 그건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사회인가.) 솔직히 어찌 어찌하다 보니 때를 놓치는 때도 많지 않은가.

 

저자는 기자면서 왜 그렇게 눈물에 관심이 많은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하긴, 우리가 세월호를 어찌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기자로써 세월호를 취재하기도 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냥 울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기자나 앵커는 울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사건을 취재할 땐 아마도 우리 보다 몇 배의 눈물을 흘리고 삼키지 않았을까? 그것을 소회처럼 남겼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이나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가적으로 세월호만큼 재난이고 슬픈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땐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취급되어 건조하게 보도만하고 지나간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보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만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더 이상 그것을 개인적 사고로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세월호는 분명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그 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했다는 건 내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일에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고, 건강한 사회가 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

 

이 책 어딘가 에도 저자가 그런 말을 한다. 눈물방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피시방, 비디오방처럼 눈물방이라는 걸 만들어서 편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소파에다 각 티슈 몇 통 갖다놓고, 종업원은 손님의 울고 싶은 심경을 건드리지 않게 최소한의 안내만 한다. “한 시간 동안 우는 데 삼천 원입니다. 필요하시면 함께 울어드리는 서비스도 있습니다.”라고.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지하철을 타고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동차 출입구에 기대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우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게 벌써 10년쯤 된 일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녀는 왜 우는 걸까? 아는 사이라면 어깨라도 빌려줬을 텐데, 오히려 무심한 척 외면하려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고, 잔칫집 가기를 바라지 말고 초상집 가기를 더 바라란 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지하철과 버스만 타면 다 스마트폰만 보고, 졸고 있는 것 같아도, 또 많은 사람이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상해 보라. 백만 년 후의 사람들은 눈에 눈물샘이 퇴화되어 웃기는 하는데 우는 것을 모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저자는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자라는 완장을 떼고 온전히 인간으로 돌아가 쓴 저자의 에세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이제 40대에 든 남자의 인생 고백이 들어있다.

 

나도 40대 이전을 생각해 본다. 20대는 좌충우돌이 많았고, 그나마 30대쯤 되니 비로소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30대 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이 팽팽했던 시절이었다. 나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를 살고 있는 선후배들 역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얼마나 자존심의 싸움이 치열했던가.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면 난 오늘 이렇게 한가하게 이 책의 리뷰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40대는 확실히 꺾였다. 옛날 같이 피터지게 싸울 힘도 자존심도 없다. 뭔지 긍휼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생 미워할 것만 같은 사람도 (물론 여전히 밉겠지만)너도 사느라 힘들겠구나 조금은 한숨 지어줄 생각이 드는 나이가 40대는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계셔줄 것 같은 부모가 정말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도 40대다. 그래서 저자는 세월호에 대한 단상 못지않게 부모에 관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모가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것 같아도 사느라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때로 미친 척이라도 해서 짐을 털어버리고 일탈을 꿈꿔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련만,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힘들게 살지 말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말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도 40이란 나이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닐까. 40대를 이 책에서 발견하고, 독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잘 건너오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밖에 책이 못지않게 할애한 건 문학과 음악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3분의 1씩을 할애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빙자해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 ()부모와 가장으로서의 이야기/ 취민지 투잡인지 모를 팟캐스트 운영자로서 문학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중간 중간 끼어드는 저자의 단상들로 구성된. 그렇게 되면 4분의 1이 되는 건가? 아무튼.

 

기자가 문학에 관한 글을 쓰면 꽤 흥미롭다. 작가나 기타 문학 종사자들이 문학 작품을 쓰는 것 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한때 작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에 관한 애정이 느껴지고 실제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작가는 무엇으로 글을 쓰는가? 나는 오래도록 분노가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 것이라던 나의 사부님의 말씀을 철석 같이 믿었고, 나는 그것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분노만이 글을 쓰게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을까? 그중 하나가 분노겠지.

 

저자는 작가를 꿈꾸기 전에, 기자가 되기 전에 오래 전부터 독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과 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좋은 소설이란 가장 잘 아파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을 잘 느끼는 작가가 등장인물의 아픔 속으로 깊이 들어간 소설이, 나는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인물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데, 좋은 소설은 그 이해의 공감대가 넓고 깊게 형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6~107p)

 

이 말을 후에 유안진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기도 한데, 유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인은 져야 합니다. 져줘야 이기는 게 시거든요. 지는 건 진실이고 이기는 건 사실이죠. 역사(사실)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진실)은 패자의 기록이잖아요. 진실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게 문학이죠.” 그리고 저자는 이 말 끝에 이런 말을 남긴다. 진실이 패자의 기록이란 말은, 진실이란 결국 패배한 이들에게서 길어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또한 좋은 소설에는 좋은 대화가 있다고 했다. 좋은 대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삶의 진실을 가장 나긋나긋한 방식으로 일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저자는 베스트셀러는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온전한 책의 힘이 아니라, 잘 설계된 기획의 산물처럼 여겨져서라고 한다. 출판시장에서, 잘 기획된 책은 잘 쓴 책을 자주 이긴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서, 잘 쓴 책은 잘 기획된 책을 항상 이기고야 만다고 했다. 이게 다 책은 단순한 글 묶음 상품이 아니라, 글 그 자체여야 한다는 편견 때문이며 당분간 그 편견을 고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독자를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작가는 글을 쓰는데 힘이 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자신의 글을 쓰기도 전에 세상의 잘 기획되고 편집된 글에 목을 매는지. 또한 독자는 요즘 잘 나가는 책이 뭔지를 알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하거나 불신하는지. 작가도 글을 쓰는데 자기 철학이 있어야하듯, 독자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자기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면 더 좋은 책 세상이 될 텐데. 너무 우주적인 바람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기자 역시 승자의 기록이나 쓰는 역사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약하고, 소외되고, 문제 많은 곳을 건드려주고 보여주는 게 기자 정신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저자는 그런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아 흐뭇했다. 또한 이곳저곳 밑줄 긋다 나중엔 그것을 포기했다. 공감하고 생각할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세월호로 돌아가서, 마침 오늘 세월호가 똑바로 세워졌다는 뉴스 속보를 보았다. 무려 4년의 일이다. 기울어졌던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데 왜 그처럼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앞서 같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좋은 사회, 건강한 공동체로 나가는 징조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사건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가족들이 상처를 받았다. 국가가 국민과 가족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난 4년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난 아무런 답도 달지 못했다. 사실은 그런 불행한 일에 함께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나눌 좋은 일이 더 많아 함께 웃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닌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 글제목은 줄리아하트 밴드가 부른 <당신은 울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제목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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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10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만큼, 아픈 만큼 사유가 깊어질 것이라 해도 역시 우린 행복의 길을 지향하죠.
더 이상 슬픈 사고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이 흘린 눈물 중 세월호로 흘린 눈물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stella.K 2018-05-11 15: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유독 세월호는 쉬 잊히지 않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미처 다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서 일까요?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ㅠ

hnine 2018-05-10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인용한 유안진 시인의 말이 명언이네요.

stella.K 2018-05-11 15:48   좋아요 0 | URL
h님 좀 생뚱맞지만 나중에 기회되시면
<미스티>라는 드라마 한 번 보세요.
거기서도 보면 사실과 진실이 뭐냐는 사유가
미스터리하게 펼쳐지는데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예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