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명이 모였고요. 한분이 참관하셨습니다.

강점기를 끝내고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혼란한 시기를 공부하였습니다. 오늘이 역사상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있는 날이라 공부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이 비극적인 남북 분단과 길고긴 대치가 바로 이 해방 공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남북대치 혹은 이념대립 속에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추종했던 친일파가 청산되기는 커녕 오히려 애국자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기막힌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친일파 재산 환수 소송에서 국가가 패소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은 일제로부터의 작위 수여는 친일 행위가 아니라 왕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요. 나라를 빼앗긴 왕족이 빠앗은 나라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이 그렇게 당당한 일인가 봅니다.  친일 후손의 권리를 떳떳이 주장하는 이해승의 손자가 그랜드 힐튼 호텔 이우영 회장이랍니다.  http://www.insight.co.kr/news/152278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940년대 초부터 국내외서 독립운동단체들이 건국을 준비해 왔습니다. 1940년에 중국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주석체제 등을 확립한 후  1941년 건국강령을 선포하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1942년 중국 옌안에 자리잡은 조선독립동맹 또한 예하에 조선의용군을 두고 건국을 준비하였습니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 여운형이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건국작업을 추진하다가 해방이 되는 그날 좌우합작으로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습니다. 건준위는 치안대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물러간 한반도 내의 비상 시기에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여운형은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9월 6일 서둘러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틀 뒤인 9월 8일에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곧바로 점령군임을 명시하고 군정을 선포합니다. 우리민족이 만든 국내외의 어떤 정부나 행정조직도 인정하지 않고, 대부분의 남한 민중들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 강점기의 통치조직을 존속시키고 그뿐 아니라 통치의 수족 노릇을 했던 친일파들이 해방이전에 했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해나가도록 합니다.  일본 총독부가 미군정으로 이름만 바뀐 기막힌 현실은 해방 이후 남한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으며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한 과거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이후 꼭 3년만에 UN 소총회의 의결에 따라 남한에 단독 정부가 수립됩니다.  그 첫 출발이 5.10 총선입니다. 5.10 총선을  반대하는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끝까지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고 남한과 북한은 각각 연이어 단독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하며 단정을 반대하고 평양에 올라가 남북협상을 주도했던 김구는 정부 출범 후 1년이 채 못되어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안두희는 미군정보 요원이었다고 합니다. http://v.media.daum.net/v/20010904124632890?f=o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5.10 총선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 제주도입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과정에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어, 당시 제주 인구의 1/4이 희생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4.3 사건은 금기시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진상규명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였습니다.

 

 

 

 

다음주는 이승만 정부부터 노태우 정부까지 공부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122 ~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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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열 한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대에 나타난 사상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 시대가 무너지고, 아직 새로운 시대는 자리잡지 못한 혼란과 혼돈의 시기에  다양한 사상들이 다투어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어떤 사상은 고대로, 어떤 사상은 미래로, 또 어떤 사상은 내면을, 또 다른 사상은 자연과학을, 그리고 여전히 초월적인 것을 꿈꾸는 사상도 있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100년이 넘도록 유럽 곳곳에서는 종교 전쟁과 종교의 이름 아래 자행된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철저하게 파괴된 삶 속에 사람들이 간절히 원한 것은 신을 대신할 새로운 진리, 눈에 보이는 확실성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흔히 '인문학의 부활'로 대표되지만, 근대를 예비한 것은 고대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이었습니다. 르네상스가 토대를 놓은 것은 초월적인 것을 本으로 삼고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했던 고대의 윤리적 정치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한 철저하 세속적인 국가였습니다. via antiqua와  via moderna의 대결은 moderna의 승리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신에 예속되었던 중세를 벗어나 인간을 중심에 놓게 된 것에는 고대 인문학의 영향이 지대하였습니다.

 

근대로의 길을 제시한 인물들은 마키아벨리, 루터, 베이컨, 홉스 등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의 katholikos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정치적 권력의 세속적 기원을 정초하였습니다. 그의 세속국가는 철저하게 인간의 손으로만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베이컨은 이천 년 가까이 학문의 도구로 기능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을 자신의 『신기관』(novum organum) 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베이컨의 새로운 도구는 관찰과 실험입니다.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켜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꿈꾸었습니다.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의 이행을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홉스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이 일어나는 자연상태가  사회계약을 통해 평화로운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적 폭력을 공적 폭력으로 전환하고 폭력을 독점한 절대군주가 강력한 힘으로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 루터, 베이컨, 홉스에서 비롯된 철학은 근대 사회를 정초하고, 지금까지도 우리 삶의 근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다음 16회부터는 근대 철학에 들어갑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313 ~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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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복잡한 무장 독립 전쟁사를 마쳤습니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비밀결사가 조직되고, 국외에서는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 진행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이른바 문화통치 국면에서 국내에서는 다양한 사회 운동이 일어났고, 국외에서는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해졌습니다.

 

1920년대 초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기에 빠진 한편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 의열 투쟁이 활발하였습니다.  의열 투쟁이란 비밀 결사를 통해 요인 암살· 테러, 관청 파괴 등을 전개하는 독립운동을 말합니다.  1919년 노인 동맹단 소속의 강우규가 사이토 총독의 부임길에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져 1920년대 의열 투쟁을 촉발하였습니다.

 

 

 

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1919년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총독부, 경찰서,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결행하였습니다. 의열단은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강령으로 채택하여  민중 직접 혁명을 주창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별적 의열활동에 한계를 느낀 의열단은 1925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시작으로 노선을 전환하여 조직적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부 분열과 자금난, 일제 탄압 등으로 침체를 계속하다가 1931년 산하에 의열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였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도쿄 히로히토 천황 투탄과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홍코우 공원 의거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뤄양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편성하였으며, 이것이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편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이광수 등은 총독부에 회유되어 문화 운동을 주도하며 민족개조, 자치론 등을 설파합니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열등감과 성격의 결함' 때문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우리 민족의 국민성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민족운동 진영은 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로 분열됩니다.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승인하에 자치할 것을 주장했던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30년대 후반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노골적인 반민족 친일행위의 길을 걷습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20년대에 크게 성장한 사회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민족유일당 운동의 최대 성과인 신간회를 결성합니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운동을 벌였습니다. 

 

 

   

1929년 우발적인 충돌로 발생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한 신간회는 이후 이 운동을 민중대회로 확산하려다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는 탄압을 받습니다. 새로 뽑힌 신간회 집행부는 최린 등 개량적 자치론자와 연결을 모색하며 신간회를 자치 운동에 동원하려다 지방 지회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이에 더하여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 등 국제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신간회는 1931년 자진 해소하였습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끈질기게 전개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 창설된 한국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하였습니다. 1945년에는 미국과 연합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국내 침투를 눈앞에 두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발표됩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을 반길 수 없었던 안타까운 심정을 표출하였습니다. 그 안타까운 우려가 현실이 됨으로써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왜곡된 역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다음주는 강점기를 끝내고 해방 직후 혼란기까지 공부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116 ~ 121

 

* 첨부된 모든 자료는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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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 교재에서 <서양 밖에서의 철학적 종합> 장을 공부할 차례였는데요. 사실 책은 한줄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워낙 분량 자체도 적지만 내용도 별달리 없어서 오늘 공부는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철학사 강의> 중 송명이학에 해당하는 3개의 강의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text도 없고 기본지식도 없이 오로지 강의에만 의존하여 걱정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서 기본 개념을 찾아가며 짜집기한 내용이 맞는지도 모르겠고요. 잘은 모르지만 유학의 문장들은 사람에 따라 해석도 다양한 것 같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자체가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논어 위정편에 마침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다... 정도로 해석했는데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앎의 시작임을 깨우치는 글이 아닐까 합니다.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또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 'uknown unknown' 은 아니었을까, 지금도 반성이 됩니다. 이점 인지하시고, 다음에 성리학을 공부할 때 오늘 우리의 눈먼 공부가 장애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송나라 때 지배계급은 사대부입니다. 지주전호제를 경제적 토대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계층이 사대부입니다. 하지만 송의 수도가 금에 의해 함락당하고 남송시대가 이어지면서 사대부들은 과거 대신 향리 공간의 자치를 꿈꿉니다. 어수선한 시대에 황제 일원적 통치가 불가능해진 틈을 타 사대부들이 지역사회를 직접 통치하려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향리공간의 거점으로 서원을 세우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합니다. 조선시대 사림들의 향촌자치의 연원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 성리학입니다. 성리학은 일반적으로 한당 시대의 유학과는 달리 매우 철학적·사색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송도학 운동은 향촌자치라는 매우 분명한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송시대부터 발달한 道學 즉 性理學을 집대성한 인물이 남송의 주희입니다. 주희가 사대부의 필독서로 정립한 四書가 대학, 논어, 맹자, 중용입니다. 주희 이전에는 유교 경전을 대표한 것이 五經입니다. 주희는 오경 중 하나인 예기에서 두 편을 따로 떼어 독립시키고 논어와 맹자를 더하여 사서라 불렀습니다. 예기의 42편이 대학, 31편이 중용입니다. <대학>은 '수양론과 정치론을 아우르는 교설'로 조선시대 왕들의 교과서로도 불렸습니다. <중용>은 형이상학적 원리에 대한 책입니다. 우리는 <대학>과 <중용>에서 대표적인 문장을 보면서 성리학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았습니다.

 

<大學>의 구조는 삼강령 팔조목입니다. 삼강령 팔조목은 '학문의 大要' 입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큰 학문을 하는 길로 삼강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안의 밝은 덕을 닦고, 백성과 친해지고, 지극한 선에 이른다, 입니다.  주희는 원문의 親民을 新民으로 바꾸어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나를 닦는 것은 백성을 잘 통치하기 위해서입니다. 유학이 실현하고자 하는 진리 구현의 방식이 修己治人인 것입니다. 나를 닦은 후에 타인을 다스려야 합니다. 팔조목은 修己治人을 위한 구체적인 교육방법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문장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고 뜻을 성실히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修己에 해당합니다. 사회적 자기를 닦고 일가를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治人의 방법입니다. <대학>이 조선에서 제왕학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일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학문의 목적이 뚜렷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中庸>이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책이리라는 짐작을 하게 해줍니다.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한 문장은 天命之謂性 입니다. 직역하면 천명을 성이라 일컫는다, 일까요? 天命이 그대로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오면 性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분은 天이 download 된 것이 性이라고 설명하셨는데요. 天은 하늘의 이치(理)입니다. 天理 즉 우주의 근본원리가 그대로 사람에게 들어 온 것이 性,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天과 人이 공유하는 것이 理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곧 理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性卽理가 도출됩니다. 학교에서는 성리학을 간단히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배웁니다. 천명지위성에 따르면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이 다르지 않습니다. 둘다 참다운 이치를 품고 있습니다. 학문을 열심히 하여 자기를 잘 수양하면 참다운 이치를 발현할 수 있습니다. 본성에 내재된 참다운 이치를 발현하여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다음주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278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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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일곱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임정수립 기념일인 4월 13일에 임시정부를 공부하였습니다. 오늘 이낙연 국무총리는 그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임정수립 기념일을 100주년이 되는 내년부터 4월 11일로 수정하여 기념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재에 쓰인대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다음과 같이 공부하였습니다. 4월 10일에 임시 의정원이 구성되고, 4월 11일에 임시헌장을 공포하고,  4월 13일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그런데 1989년 12월에 정부에서 처음으로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지정한 후부터 임정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기념일이 잘못 지정되었다는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4월13일이 아니라 임시헌장과 국호를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이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라는 주장입니다. 그간 연구 용역등을 통한 확인작업 끝에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오늘 이낙연 총리가 임정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정정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1946년 4월 11일에 거행된 입헌기념식의 임시정부 요인들로, 4월 11일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 출범하였습니다. 3.1운동은 대외적으로는 1차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난 러시아혁명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을 촉발한 대내적 영향은 1917년 상하이의 대동 단결 선언,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성 교포들에 의한 대한 독립 선언, 1919년 동경 유학생들에 의한 2.8독립 선언 등이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지도할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각지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조직적인 기반을 갖춘 것은 연해주, 상하이, 한성에서 조직 · 발표된 3개의 임시정부입니다. 임정수립 기념일로 지정된 4월 13일, 내년부터 변경될 4월 11일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입니다. 1919년 9월 11일에 헌법을 개정(1차개헌)하고 세 곳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임시정부는 해방이 될때까지 다섯 번의 개헌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임시정부 초기의 위기는 독립 투쟁에 대한 방법론적 차이가 큰 이유를 차지했습니다. 외교론을 대표하는 상하이파와 무장 투쟁론을 주장하는 만주,연해주파의 대립에 이승만의 부적절한 행위가 불을 붙였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1919년 2월에 국제연맹에 제출한 위임 통치 청원서 사건이 불거졌기 때문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925년 이승만은 임시 의정원 의결에 의해 탄핵되었습니다.  2,3차 개헌을 통해 체제를 정비했지만 임시정부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1940년 충칭에 정착하여 조직을 강화하였습니다. 1941년에는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에 미국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후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우리민족이 만든 일체의 행정 조직이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도 인정받지 못하고 임정요인들은 결국 개인자격으로만 해방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1945년 11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을 앞두고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청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다음주는 1920년대의 독립운동을 공부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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