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걸작선 - <오이디푸스 왕> 외 3대 비극작가 대표선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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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를 끝으로 소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읽기를 마치려 한다.  책을 선택하는데 좀 고민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은 7편으로, 숲 출판사의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굳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와  『그리스 비극 걸작선』 두 권을 구매했다.  세 책 모두 숲 출판사의 '원전으로 읽는 순수 고전세계' 시리즈, 천병희 번역이지만,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는 2017년에 새롭게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서문에 보면 "언어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하거니와 예전 작업의 오류들도 바로잡을 때가 되어 새롭게 번역을 손보았다.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최근에 나온 주석들과 번역들을 참고했다." 고 번역을 새로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실 가독성보다 직역이 더 나을 수 있지만, 이전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번역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새로 번역하는 김에 테바이 3부작을 한꺼번에 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크기는 하지만 출판사와 역자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고전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번역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원전 직역인지, 번역자는 누구인지, 해설 등을 판단의 요소로 삼지만, 막상 둘 이상의 번역본을 보게 되면 같은 책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느낌이 다를 때가 많아서 원어를 읽지 못하는 독자의 설움에 심정이 상할 때가 꽤 있다.

 

 

 

 <폴뤼네이케스 시신 앞에 선 안티고네. Lytras Nikiforos, 1865>

 

 

『안티고네』는 기원전 441년 경 소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중에는 처음으로 상연된 비극이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92919521

 

 

 

 

 

 

오이디푸스 가문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순으로 창작되어야 했으나 이 순서가 상관이 없었던 것은 오이디푸스 가문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신화였기 때문이다. 희랍인이라면 트로이 전쟁과 테바이 전쟁 (오이디푸스 가문)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희랍의 서사시와 비극들은 대부분 이 두 신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당대의 정치 · 사회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아테네 근교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테바이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 형제의 피로 물든 채 죽고 죽이는' 운명을 맞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안티고네는 오빠들의 비극을 막아보려 급히 테바이로 돌아오지만 이미 전쟁은 끝나고, 왕권은 삼촌 크레온에 넘어가 있었다.

 

 

 

프롤로고스에서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이 비극의 대립과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갈등 구조는 뚜렷하다. 공법과 사법,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이 충돌한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다. 크레온의 입장도 안티고네의 입장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를 취할 수는 없다. 공법이 우선시 될 때 사법은 폐기되어야 하고, 사법이 중시될 때 공법은 유명무실해 진다.

 

 

 

 

 

코로스는 첫 번째 정립가에서 "그가 국법과, 신들께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 " 라고 노래했지만,  『안티고네』 의 국법과 신에 대한 맹세는 양립할 수 없다.  국법에 따라 반역자 폴뤼네이케스를 새떼의 먹이로 던져 두거나, 하데스에 대한 불문율에 따라 폴뤼네이케스를 장사지내 주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크레온의 입장은 단호하다.  폴리스를 배반한 인간을 폴리스의 애국자와 똑같이 취급한다면 폴리스는 제대로 통치될 수 없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적을  친구로 삼을 수는 없다. 폴리스가 안전해야 진정한 친구도 가능하다.

 

 

 

 

 

안티고네는 더욱 강경하다. 인간의 법 따위가 신들의 불문율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튼 하데스는 그런 의식을 요구" 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반드시 묻어 주어야 한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92919521

 

 

누가 정의인가? 는 오늘날에도 쉽게 답하기 힘들다.  신법을 앞세우는 자와 국법을 앞세우는 자는 가치 체계가 다르다.  기원전 441년 <안티고네>가 상연되었을 당시 아테나이는 민주정의 절정기에 있었다. 그럼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자.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관점은 이 비극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희랍인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자산은 이성이라고 믿었다. 인간 이성은 특출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에게 "남들도 쓸만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라고 말한다.

 

 

 

 

 

강유원의 칸트 강의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보편적 인간 이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 이다.  '보편적 이성' 이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 이성' 이란 한계 때문에 신과 같이 완전한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보편적 인간 이성'은 인간의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를 뜻한다. 인간 개개인은 진리에 도달하기 힘들지만,  모든 인간들의 이성을 모아 인식을 확대해 나간다면 완전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

 

 

 

 

 

하이몬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인들의 민주정도 이런 인식에 기반해 있다.  폴리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 혼자의 독단보다는 시민들 대다수의 판단이 올바름에 가깝다고 믿는 것이 아테나이다.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면 속이 비어 있음이 드러나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 것은 수치가 아니예요. "

 

 

 

 

 

 

이쯤해서 소크라테스가 생각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이몬의 대사는 소크라테스를 겨냥하는 것도 같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를 지지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그리고 확실히 플라톤은 민주정을 우민정치라 생각했다. 바보들 백 명, 천 명이 머리를 맞댄다고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그리고 훈련된 철학자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정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경고한다.

 

"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나이인들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민주정은 시민들을 괴롭힌다.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 무엇이 폴리스를 위한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결정해야 한다. 아테나이 민주정은 누구나 통치를 할 수 있고 통치해야 하는 직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통치가 남의 일이 아니다. 크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누구나 공적인 일을 통해 인간 자체를 평가받는 곳이 아테나이였다. 

 

 

 

 < ‘폴리네이케스에게 제주(祭酒)를 바치는 안티고네’. 1825. 세바스티앵 노르블랭.>

 

 

 

『안티고네』는 완전히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아테나이 당대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민주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계속된다.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민주정을 사는 시민들은 한 사람에게만, 한 계층에게만 국가를 맡겨둘 수 없다. 그것은 민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아테나이는 모든 시민들이 극장에 모여 앉아 무대 위에 올라온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보려 노력하면서 민주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였다. 희랍 비극을 통해 보는 아테나이와 실제의 아테나이가 얼마나 다르건, 우리가 고대 희랍을 얼마나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건,  우리는 희랍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공동체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비극과 같은 공동의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이다.

 

 

 

<인문고전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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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기획 특강 <지식의 기쁨>  중  서양 고전 학자 김헌의 '한눈에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두 번째 강의를 정리하였다.  이 강의는 독서 스타디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기 위해 함께 듣고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희랍 신의 계보나 신들의 특성은 전승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 강의는 기본적으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를 따르고 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희랍 최초의 신은 카오스,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이다. 이후에 탄생하는 신들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계보를 따른다. 







 

생산력이 가장 왕성한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우라노스, 호론, 폰토스 즉 하늘과 산과 바다를 낳았다.  가이아는 우라노스를 선택해 남편으로 삼고 그 사이에서 티탄 신족 열 둘과 키클롭스들과 헤카톤케이르들을 낳는다. 키클롭스들은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외눈박이 거인들이다. 


 



신들이 많아지자 가이아는 통치권을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에게 이양한다. 이 이야기는 모계가 가졌던 최초의 통치권이 부계로 넘어간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그런데 우라노스는 통치권을 함부로 휘두르며 폭력을 자행한다. 


우라노스는 가이아가 낳은 자식들을 다시 가이아의 뱃속에 가둬버리는 데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자신의 틀에 가두는 것으로 풀이된다.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두려워하며 자신 안에 가두려 한다. 





자식들을 강제로 자신의 뱃속에 넣게 된 가이아는 우라노스를 응징하기 위해 뱃속의 자식들을 소집하여 아버지와 싸우도록 종용한다.  막내인 크로노스가 가이아의 뜻을 따르겠다고 나선다.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로부터 받은 거대한 낫으로 아버지 우라노스의 남근을 자른다. 우라노스는 깜짝 놀라 타르타로스로 숨어들고 잘린 남근에서 튀어나온 정액과 피가 가이아 위로 떨어져  복수의 여신들, 물푸레나무 요정들 그리고 거인신족들 (gigas)이 탄생한다.  거세된 남근은 바다로 떨어지는데 이때 거품이 부글거리며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다. 


Patroktonia , 친부 살행의 전통이 시작된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틀에 새로운 세대를 가두려하고, 새로운 세대는 그런 기성세대와 싸워 이겨야만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테바이의 새로운 왕이 되는 것 역시 최초 신들의 전쟁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닐까. 


크로노스는 가이아 → 우라노스에 이어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  크로노스는 후에 시간의 신으로 여겨진다. 시간의 신에 대해서는 다른 說이 있지만, 신화가 전승되면서 크로노스가 시간을 의미하게 된다. 





크로노스는 남매인 레아와 결혼한다.  기득권이 된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뺏을까봐 두려워 한다.  결국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스스로 삼켜 자신의 뱃속에 가둔다.  레아는 6명의 자식을 낳는데 막내인 제우스를 낳고는 크로노스를 계략으로 속여 넘긴다. 강보로 감싼 바위를 제우스 대신 내미는데 크로노스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 바위를 삼킨다. 제우스는 크레타섬으로 빼돌려져 몰래 성장한다. 





크로노스의 폭력에 화가 난 할머니 가이아가 제우스를 찾아온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조언에 따라 계략을 써서 아버지 크로노스가 삼켰던 형제자매들을 토해내게 만들고 아버지에 대항해 전쟁을 한다.  티타노마키아가 시작된다. 





제우스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들인 티탄신족들에 대항해 자신의 형제들 뿐 아니라 주류에서 배제되었던 삼촌들, 키클롭스들과 헤카톤케이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연합군을 형성한다.  10년 간의 전쟁 끝에 제우스가 이끄는 올림푸스 신족들이 승리한다.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새로운 통치자로 등극한다.  어쩌면 친부살해는 늘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막강한 기성세대도 결국은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다.  기존의 틀에 고착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소멸되기 마련이다. 





제우스는 지금도 건재하다.  기원전 776년에 처음 시작된 올림피아 제전은 로마제국 말기인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피아 제전은 천 여년을 묻힌 채 잊혀졌었으나, 1896년 제1회 올림픽이 아테네에서 개최되면서 부활한다. 올림피아 제전이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의 승리를 기념하여 시작된 것이라 하니, 올림픽의 부활은 제우스의 부활이기도 하다. 


우라노스나 크로노스와 달리 제우스가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제우스는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올림푸스의 여러 형제 신들과 나눔으로써 안정적인 체제를 만들었다.  또한 모든 기성세대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기성세대를 끌어 안음으로써 신·구의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희랍인들은 제우스에게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시켜 주면서 통치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신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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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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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미케네 시대의 테바이 전쟁을 직접 다루고 있다.

 

 

 

 

 

 

테바이는 스파르타, 아테나이, 코린토스, 아르고스와 함께 희랍 패권을 다투는 5강의 하나였다.

 

 

 <변신 이야기>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테바이와 코린토스는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담하여 아테나이와 전쟁을 치루었다.  아르고스는 중립을 지켰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자 테바이와 코린토스는 아테나이를 멸망시키고 아테나이 시민을 노예로 삼으려고 하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나이를 존속시키는 대신 30인 참주가 통치하는 과두 정체를 수립했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8072774101>

 

 

 

기원전 403년 아테나이는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1년 만에 민주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상흔은 깊었다.  '민주정 → 과두정 → 민주정 ' 으로의 체제 변혁을 거치며 분열과 반목, 보복은 되풀이 되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8072774101>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사망하기 직전 완성했지만, 공연은 기원전 401년 손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파르타가 세운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정을 되찾은 아테나이인들은 적국 테바이의 오래된 비극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조국 테바이에서도 쫓겨난 오이디푸스를, 희랍의 어떤 폴리스도 받아주지 않던 재앙 덩어리 오이디푸스를 오직 정의를 분별할 줄 아는 아테나이만이 받아들였다는 것,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예언지로 아테나이를 선택하여 테바이로부터 아테나이를 지켜주겠다고 신성한 약속을 했다는 것 등은 아마도 아테나이인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는 테바이 전쟁과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중심 사건을 이룬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샤를 잘라베르>

 

 

테바이로부터 추방당한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에 의지해 희랍을 떠돌다 아테나이 근교의 콜로노스에 이른다. 콜로노스는 소포클레스의 고향이다. 아테나이의 왕은 테세우스이다. 크레타섬의 미궁에 사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아테나이의 그 영웅이다.  

 

 

 <미노타우로스 , 그리스 도기, 기원전 515년 경>

 

 

오이디푸스와 테세우스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이 생경하다. 지금도 무대에 공연되는 오이디푸스는 매우 현대적인 느낌인데 반해 테세우스는 글자 그대로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가 콜로노스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허락한다. 그 대가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걸고, 죽어서 아테나이를 수호할 것을 맹세한다. 

 

 

 

 

 

테바이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사이에 왕권 다툼이 일어나 폴뤼네이케스가 추방당한다. 폴뤼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을 가서 일곱 부대의 창병을 모아 테바이를 공격한다. 이 테바이 전쟁에서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는 서로를 죽이고 동시에 죽는 운명을 맞는다.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실현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 Jean-Antoine-Théodore Giroust >

 

 

 

폴뤼네이케스는 테바이를 공격하러 가는 길에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만나러 온다. 신탁에 따르면 테바이의 안녕은 오이디푸스에 달려 있고, 테바이 전쟁에서 오이디푸스가 편드는 쪽이 이기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내쫓은 테바이와 자신의 추방을 방관한 두 아들에 대한 분노를 폭발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오이디푸스 가문의 남자는 이로써 모두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해설에서 양운덕은 베르낭과 지라르가 오이디푸스를 희생양으로 해석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35487.html>

 

 

 

맥락이 많이 다르지만 서양 고전학자 김헌도 '제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말한다. 비극 공연 자체가 예배이며, 무대 위에 등장한 오이디푸스는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이다. 재앙의 원인임이 밝혀지자 오이디푸스는 제물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눈을 찔러 도시를 정화한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에 대해서는 신에 대한 저항, 인간의 자유 의지 등으로 보는 다른 관점들이 다수 있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2쪽>

 

 

아테나이는 실제로도 매년 폴리스를 정화하기 위해 희생양을 희생시켰다. 이때 선택되는 희생양은 전형적인 약자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4쪽>

 

 

베르낭에 따르면 희생양 의식은 카니발과 같다. 축제가 끝나면 반왕은 그가 구현한 모든 무질서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 그의 죽음은 공동체를 정화한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29쪽>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것 자체가 일종의 카니발이라는 것이다.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고도 테바이의 영웅으로 살았던 오이디푸스는 축제가 끝나자 테바이의 모든 재앙을 짊어지고 추방당한다. 베르낭이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라고 하면서 오이디푸스를 이중적 존재로 규정할 때, 희생양의 이중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제거되어야 하는 오물이지만 제거됨으로써 성스러워진 존재가 희생양이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신탁이 두려워 자신을 데려가려고 테바이에서 사신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스메네 :  아버지께서는 살아 계시든 돌아가셨든, 언젠가는 테바이  인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를 찾게 된다고 했어요.

 

이디푸스 :나 같은 사람에 의해 누가 행복해질 수 있겠느냐?

 

이스메네 : 신탁에 따르면, 그들의 안녕은 아버지에게 달려 있대요.

 

오이디푸스 :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비로소 영웅이 된다는 말이냐?

 

 

something이라고 자부했을 때 실제로 nothing이었던 반면, 세상 모두에 nothing으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something이 되는 아이러니가 오이디푸스를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든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3쪽>

 

 

베르낭이 재앙의 원인이자 구원자라는 희생양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했다면,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이 어떻게 희생양으로 만들어지는가를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사회의 위기를 오염의 탓으로 돌리고 정화를 통해 벗어나려 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희생양이다.  희생양이 위기를 조장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그렇게 믿을만한 지표나 징후를 만들 수 있으면 된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9쪽>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나 랑시에르의 '몫없는 자' 같이,  배재와 차별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4쪽>

 

 

오이디푸스는 희생물의 징후를 모두 갖추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 공동체의 명예와 부를  독차지한 이방인 오이디푸스에 대한 시기와 분노가 역병의 원인을 오이디푸스에게 덮어 씌우게 만든다. 지라르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이 없었어도 오이디푸스에 대한 박해는 실행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은 조선인이었다. 왜 이방인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일까?  공동체의 위기는 공동체 내부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내부의 원인은 쉽게 해결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면 분열과 그에 따른 연쇄적인 폭력이 수반된다.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내부의 폭력을 분출할 외적 대상이 필요하다.

 

 

 

 

한·일 학계는 조선인 6,60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강점기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단 위에 올려진 희생 제물이었다. 물론 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진짜 우물에 독약을 풀고, 치마 속에 폭탄을 감추고 있다고 믿으며 학살을 자행했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98.  플크랑-장 아리에>

 

 

신화와 달리 강점기 재일 조선인들은 희생 제물이었을 뿐 신성화 되지는 않았다.  베르낭은 희생양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했다. 지라르도 희생제물이 신격화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테바이의 재앙으로 추방당한 <오이디푸스 왕> 은 아테나이를 지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로 신격화된다.  희생자 sacrifice는 신성하다 sacred.  희생자에 의해 공동체가 정화되고, 질서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50쪽>

 

 

 

희생양에 대한 폭력으로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현대적 시도는 1930년대의 전체주의에서 폭발했고 가공할 야만성을 드러낸 채 실패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추기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펠로폰네소스 동맹 vs 아테나이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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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기 위하여
    from 말리 2020-08-20 21:26 
    희랍 문화는 고대 아테나이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민주정이 발전하기 시작한 아테나이는 기원전 5세기 초에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절정기를 맞는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희랍 세계를 호령하면서 아테나이는 제국의 길로 들어선다. 아테나이의 야망에 두려움과 시기심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한다. 양분된 희랍 세계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27년 간의 내전을 겪
  2.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 <오이디푸스 왕>
    from 말리 2020-08-20 21:27 
    <https://blog.naver.com/chanwoolee/221618153604> <오이디푸스 왕> 은 그냥, "원전 완역을 읽었다." 로 리뷰를 끝내야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니 읽을 것도 볼 것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에 너무도 다양한 해석이 더해져 수천 년 동안 오이디푸스가 사로잡은 정신이 얼마나 많았는 지를 짐작하게 한다. '숲' 출판사의 '푸른시원'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의
 
 
 
신격화된 희생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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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log.naver.com/chanwoolee/221618153604>

 

 

 

<오이디푸스 왕> 은 그냥, "원전 완역을 읽었다." 로 리뷰를 끝내야 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자료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니 읽을 것도 볼 것도 너무 많다. 너무 유명한 이야기에 너무도 다양한 해석이 더해져 수천 년 동안 오이디푸스가 사로잡은 정신이 얼마나 많았는 지를 짐작하게 한다.

 

 

 

 

 

 

 

'숲' 출판사의 '푸른시원'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의 끝에는 철학자 양운덕이 쓴 '『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몇 가지 방식' 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여기서 ' 몇 가지'는 베르낭의 해석, 지라르의 해석, 구스의 해석을 말한다. 이 세가지 해석을 엮어서 양운덕 본인의 해석을 만들어 냈으니, 이 책에만 벌써 네 가지 해석이 소개되어 있다.

 

해석은 언감생심이고 해설도 턱없지만, 여기 저기 주워 듣고 읽은 것을 짜집기 해서 읽은 흔적을 남겨둔다.

 

 

 

 <낙소스 스핑크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https://www.dailian.co.kr/news/view/452680

 

 

스핑크스는 이집트에서 유래했지만 희랍으로 건너와 다른 의미를 획득했다. 인간을 해치는 괴수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고, 인간의 사후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https://news.v.daum.net/v/20140720181008209

 

https://www.dailian.co.kr/news/view/452680

 

 

희랍 각 지역에서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스핑크스 상이 발굴되었다. 특히 희랍 최고의 신탁으로 숭배되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보물창고 앞, 원주 위에 서 있던 '낙소스의 스핑크스' 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낙소스인들이 아폴론에게 봉헌한 것으로 길이 12m의 높다란 원주 위에 세워져 있다.

 

 

 

 앵그르,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08

 

 

오이디푸스가 만난 스핑크스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신탁이 내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나,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스핑크스였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오이디푸스에게는 매우 익숙한 문제였다.  오이디푸스는 '발을 아는 자' 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0쪽>

 

 

 

오이디-푸스의 'pous'는 발이다.  'oidi'는 부은(oidos) 혹은 아는 (oida) 이다. Oidi-pous는 발이 부은 자이지만, 발을 아는 자이기도 하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바로 그 '발pous을 아는oida가' 였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했다. 스핑크스는 자살하고, 테바이의 재앙은 사라졌다. 정답인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을 알았다. 인간에 관한 한 가장 지혜로운 인간으로 인정받은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이 되고 전왕의 부인을 왕비로 얻었다. 오이디푸스의 지혜가 테바이를 구하고 오이디푸스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귀스타브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무의식으로 억압되었다. 마주보고 있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마치 거울상과 같다. 이제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누구인가?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7쪽>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구한 대가로 받은 선물인 이오카스테는 전왕 라이오스의 왕비인 동시에 오이디푸스의 엄마이다. 둘은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는다. 이 네 명은 오이디푸스의 자식인 동시에 형제이다. 선물은 재앙이 되고 3세대가 뒤섞인다.

 

 

 

https://blog.naver.com/ccr124/80027071939

 

  

 

1세대는 세 발, 2 세대는 두 발, 3 세대는 네 발 이라고 생각해 보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진정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말하기 전에 오이디푸스 자신이라고 답해야 했다.  수수께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 "나는 무엇인가" 로 귀착된다.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37쪽>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생각한 자기와 정반대인 자기를 대면하고 파멸한다. 테바이의 영웅이 테바이의 재앙이고, 수수께끼를 푼 자가 수수께끼 자체이고, 가장 지혜로운 자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 먼자이다.

 

 

 

 <문학 고전 강의>

 

  

 

점토판에 갈대 끝으로 새긴 인류 최초의 영웅 이야기, 『길가메쉬 서사시』도 질문 한다. "너는 누구인가?" 혹은 "너는 무엇인가?" "너의 본질은 무엇인가?" 

 

 

적어도 4천년 전 무렵 길가메쉬 서사시가 토판에 쓰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질문해 왔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길가메쉬는 인간은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고, 너 자신을 알라고 무수히 외친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무엇을 알았는가? 이집트인의 수수께끼는 이집트인에게도 수수께끼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면서 인간은 인간에게 수수께끼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유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사유이다. 의식이 인간의 주인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발견을 한 이래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의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쫓아낸 코페르니쿠스, 특별한 창조물의 지위에서 인간을 추방한 다윈, 그리고 인간 자신의 주인의 위치마저도 빼앗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인간의 굴욕이 완성되었다.

 

(이 책의 해설이 소개하는 '구스의 해석'에는 스핑크스를 무의식으로 보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다르다. 의식적인 주체만이 무의식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보며, 프로이트와 선을 긋는다 . p301~2)

 

 

 <오이디푸스왕/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240쪽>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질문을 종결짓지 못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답해지지 못했고, 오이디푸스는 그 자신이 질문이 되었다.

 

 

* 덧붙임 (2020.10.22)

 

1. 구조에 관해 :  원환적?

 

 

 

2. 주요 문제

 

 1) Who am I ? : reflection

 2) 자유 의지 : 귀책성과 윤리

 3) 희생양의 역사 : 재앙과 정화

 

 

 

 

* 여기에 사진찍어 올린 이 책의 해설 내용은 모두 베르낭의 해석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베르낭의 해석을 따라 쓰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했을 뿐이므로, 베르낭의 견해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양운덕의 해설과도 거리가 있다. 그냥 이것 저것 생각나는 대로 써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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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기 위하여
    from 말리 2020-08-20 21:31 
    희랍 문화는 고대 아테나이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민주정이 발전하기 시작한 아테나이는 기원전 5세기 초에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절정기를 맞는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희랍 세계를 호령하면서 아테나이는 제국의 길로 들어선다. 아테나이의 야망에 두려움과 시기심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한다. 양분된 희랍 세계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27년 간의 내전을 겪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 <오이디푸스 왕>
신격화된 희생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푸른시원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양운덕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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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 문화는 고대 아테이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민주정이 발전하기 시작한 아테나이는 기원전 5세기 초에 페르시아 전쟁에 승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절정기를 맞는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희랍 세계를 호령하면서 아테나이는 제국의 길로 들어선다. 아테나이의 야망에 두려움과 시기심을 느낀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한다. 양분된 희랍 세계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27년 간의 내전을 겪고 몰락의 길을 간다.

 

 

 

 

 

 

아테나이 문화는 페르시아 전쟁부터 펠로폰네소소 전쟁까지 이어진 기원전 5세기 전 기간에 걸쳐 피어난 눈부신 문명의 결정체다.  아테네 민주정을 정점으로 끌어 올린 페리클레스, 희랍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서양 철학의 표상 소크라테스가 동시에 출현하였다.

 

 

 

 

 

 

 

 

서양 정신은 서사시 → 비극 → 철학으로 이어진다.  서양 최초의 서사시를 노래했던 호메로스는 기원전 8세기 인물로 추정된다. 서사시가 쇠퇴하고 서정시가 등장했다가 기원전 5세기에 비극의 시대를 맞는다.

 

 

 

<서양 고대사 강의>

 

 <그리스 비극 걸작선>

 

 

 

희랍 3대 비극 작가는 모두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하였다. 기원전 5세기 말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고 희랍의 폴리스 시대가 쇠퇴하면서 아테나이 시민들의 공적 활동도 위축되었다. 희랍에서 철학의 시대는 폴리스의 쇠퇴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테나이의 비극은 민주정과 함께 발달했다. 비극 공연은 신에게 봉헌하는 정화 의례인 동시에 시민의 덕성을 훈련시키는 교육의 장이었다.

 

 

<서양 고대사 강의>

 

 

 

비극은 수 백년 전의 신화를 소재로 하여 당대의 정치 현안과 전쟁 등을 쟁점으로 삼았다. 아테네 시민은 자신들이 참전한 전쟁을 함께 관람하며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오이디푸스 왕의 가혹한 운명을 슬퍼하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함께 하였다.

 

 

 

 

 

 

비극 (Tragedy)은 '염소의 노래' 란 뜻이다. 비극은 아테나이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 축제  때 경연 형식으로 상연되는데,  비극 공연 시작 전에 염소를 제물로 바친 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테네 디오니소스 극장>

 

<김헌의 그리스 비극 '서구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2016>

 

 

 

비극이 공연된 극장과 비극의 구성은 현대까지 공연장과 공연물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희랍 비극의 중심은 코로스이다. 코로스가 서서 합창을 하는 자리를 오케스트라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반원형의 저 위치에 오케스트라라고 부르는 관현악단이 자리한다. 무대에는 2명 혹은 3명의 배우가 자리해 대화를 주고 받는데 코로스와 코로스 사이의 대화를 에페이소디온 이라고 한다.

 

 

 

<그리스 비극 걸작선>

 

 

 

 

도입부와 마지막 대화를 뻬면 합창 - 대화 - 합창으로 이어지는데, 이 세트는 여러번 반복된다. 희랍 비극은 코러스가 극의 흐름이나 의미를 설명하고, 배우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므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비극 뿐 아니라 서사시에서도 주로 다루는 소재는 청동기 미케네 문명의 두 가지 전쟁이었다.  테바이 전쟁과 트로이 전쟁이다. 

 

 

 

 

 

 

 

테바이 전쟁에 참여했던 영웅과 그 자식들이 트로이 전쟁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테바이 전쟁이 트로이 전쟁보다 앞서있다. 기원전 13세기 경에 있었던 전쟁으로 추정된다.

 

 

 

 <오뒷세이아>

 

 

 

이 이야기들이 구전되다가 그 중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에 의해, 테바이 전쟁은 소포클레스에 의해 탁월한 문학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물론 여러 작가들이 이들보다 앞서 그리고 이후에도 이 전쟁에 관한 작품들을 남겼다. 테바이 전쟁에 관한 작품은 비극 이전에 서사시로 먼저 만들어진 바 있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희랍 비극의 최고 걸작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이상적인 드라마로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하면서 일찌감치 판가름이 났다. 소포클레스는 테바이의 오이디푸스 가문을 배경으로 세 편의 작품을 남겼다.  

 

 

 

 

 

 

 

 

테바이 3부작 혹은 오이디푸스 3부작으로 불리는 것으로 사건의 흐름 순으로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가 있다.

 

 

 

 <변신 이야기>

 

 

 

테바이는 희랍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다섯 개의 폴리스들 중 하나로 카드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 

 

 

 

 <오뒷세이아>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아버지 라이오스가 저지른 범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라이오스는 자신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궁전의 아름다운 왕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강간을 저지르는데, 왕자의 아버지가 원한에 가득차 라이오스를 저주했기 때문이다. 라이오스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 행동이 바로 저주를 실현하는 방아쇠가 되어 오이디푸스 가문은 희랍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파멸하게 된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 푸랑수아 자비에 파브르> 

 

 

 

희랍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이 가문의 저주는 소포클레스의 손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비극 작품으로 탄생한다. 이제 테바이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 을 읽어 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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