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걸작선 - <오이디푸스 왕> 외 3대 비극작가 대표선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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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를 끝으로 소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읽기를 마치려 한다.  책을 선택하는데 좀 고민이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은 7편으로, 숲 출판사의 천병희 역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굳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와  『그리스 비극 걸작선』 두 권을 구매했다.  세 책 모두 숲 출판사의 '원전으로 읽는 순수 고전세계' 시리즈, 천병희 번역이지만,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는 2017년에 새롭게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옮긴이 서문에 보면 "언어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하거니와 예전 작업의 오류들도 바로잡을 때가 되어 새롭게 번역을 손보았다. 직역으로 인한 어색하고 애매모호한 표현들을 줄이는 등 우리 시대의 언어감각을 고려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고 최근에 나온 주석들과 번역들을 참고했다." 고 번역을 새로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실 가독성보다 직역이 더 나을 수 있지만, 이전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것 때문에 새로운 번역판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새로 번역하는 김에 테바이 3부작을 한꺼번에 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크기는 하지만 출판사와 역자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고전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많은 번역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원전 직역인지, 번역자는 누구인지, 해설 등을 판단의 요소로 삼지만, 막상 둘 이상의 번역본을 보게 되면 같은 책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느낌이 다를 때가 많아서 원어를 읽지 못하는 독자의 설움에 심정이 상할 때가 꽤 있다.

 

 

 

 <폴뤼네이케스 시신 앞에 선 안티고네. Lytras Nikiforos, 1865>

 

 

『안티고네』는 기원전 441년 경 소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중에는 처음으로 상연된 비극이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92919521

 

 

 

 

 

 

오이디푸스 가문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순으로 창작되어야 했으나 이 순서가 상관이 없었던 것은 오이디푸스 가문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승되어 오던 신화였기 때문이다. 희랍인이라면 트로이 전쟁과 테바이 전쟁 (오이디푸스 가문) 신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희랍의 서사시와 비극들은 대부분 이 두 신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당대의 정치 · 사회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아테네 근교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테바이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서로 형제의 피로 물든 채 죽고 죽이는' 운명을 맞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안티고네는 오빠들의 비극을 막아보려 급히 테바이로 돌아오지만 이미 전쟁은 끝나고, 왕권은 삼촌 크레온에 넘어가 있었다.

 

 

 

프롤로고스에서는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이 비극의 대립과 주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갈등 구조는 뚜렷하다. 공법과 사법,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이 충돌한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다. 크레온의 입장도 안티고네의 입장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를 취할 수는 없다. 공법이 우선시 될 때 사법은 폐기되어야 하고, 사법이 중시될 때 공법은 유명무실해 진다.

 

 

 

 

 

코러스는 등장가에서 "그가 국법과, 신들께 맹세한 정의를 존중한다면 그의 도시는 융성할 것이나, .. " 라고 노래했지만,  『안티고네』 의 국법과 신에 대한 맹세는 양립할 수 없다.  국법에 따라 반역자 폴뤼네이케스를 새떼의 먹이로 던져 두거나, 하데스에 대한 불문율에 따라 폴뤼네이케스를 장사지내 주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크레온의 입장은 단호하다.  폴리스를 배반한 인간을 폴리스의 애국자와 똑같이 취급한다면 폴리스는 제대로 통치될 수 없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적을  친구로 삼을 수는 없다. 폴리스가 안전해야 진정한 친구도 가능하다.

 

 

 

 

 

안티고네는 더욱 강경하다. 인간의 법 따위가 신들의 불문율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튼 하데스는 그런 의식을 요구" 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반드시 묻어 주어야 한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92919521

 

 

누가 정의인가? 는 오늘날에도 쉽게 답하기 힘들다.  신법을 앞세우는 자와 국법을 앞세우는 자는 가치 체계가 다르다.  기원전 441년 <안티고네>가 상연되었을 당시 아테나이는 민주정의 절정기에 있었다. 그럼 해답을 다른 곳에서 찾아보자.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관점은 이 비극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희랍인들은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자산은 이성이라고 믿었다. 인간 이성은 특출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다.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에게 "남들도 쓸만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라고 말한다.

 

 

 

 

 

강유원의 칸트 강의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보편적 인간 이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 이다.  '보편적 이성' 이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 이성' 이란 한계 때문에 신과 같이 완전한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보편적 인간 이성'은 인간의 가능성인 동시에 한계를 뜻한다. 인간 개개인은 진리에 도달하기 힘들지만,  모든 인간들의 이성을 모아 인식을 확대해 나간다면 완전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

 

 

 

 

 

하이몬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인들의 민주정도 이런 인식에 기반해 있다.  폴리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 혼자의 독단보다는 시민들 대다수의 판단이 올바름에 가깝다고 믿는 것이 아테나이다.

 

"누군가 자기만 현명하고, 언변과 조언에서 자기만 한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막상 검증해보면 속이 비어 있음이 드러나지요.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때로는 양보할 줄 아는 것은 수치가 아니예요. "

 

 

 

 

 

 

이쯤해서 소크라테스가 생각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이몬의 대사는 소크라테스를 겨냥하는 것도 같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 를 지지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그리고 확실히 플라톤은 민주정을 우민정치라 생각했다. 바보들 백 명, 천 명이 머리를 맞댄다고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그리고 훈련된 철학자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민주정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경고한다.

 

"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비극을 관람하는 아테나이인들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민주정은 시민들을 괴롭힌다.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 무엇이 폴리스를 위한 것인가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싸우고 결정해야 한다. 아테나이 민주정은 누구나 통치를 할 수 있고 통치해야 하는 직접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통치가 남의 일이 아니다. 크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누구나 공적인 일을 통해 인간 자체를 평가받는 곳이 아테나이였다. 

 

 

 

 < ‘폴리네이케스에게 제주(祭酒)를 바치는 안티고네’. 1825. 세바스티앵 노르블랭.>

 

 

 

『안티고네』는 완전히 정치적인 텍스트이다. 아테나이 당대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민주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계속된다.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민주정을 사는 시민들은 한 사람에게만, 한 계층에게만 국가를 맡겨둘 수 없다. 그것은 민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테나이는 모든 시민들이 극장에 모여 앉아 무대 위에 올라온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보려 노력하면서 민주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였다. 희랍 비극을 통해 보는 아테나이와 실제의 아테나이가 얼마나 다르건, 우리가 고대 희랍을 얼마나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있건,  우리는 희랍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공동체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비극과 같은 공동의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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