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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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일, 카페 과제물로 쓴 글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어떤 강의를 들었습니다. 쇤베르크 이후의 서양 현대 음악들을 두 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화음이 파괴되고 별별 시험들이 이어지더군요. 영화 도가니 보셨는지요? 분노에 찬 청각장애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는 소리가 저런 소리가 아닐까 싶은 소리부터 망치 소리, 벽을 깨부수는 소리 등등 음악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소리들이 새로운 음악으로 추대 받고 있더군요.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저는 음악이란 무엇인가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지요. 그러자니 곧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들더군요. 내게 익숙한 것이 영원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없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후크송이 제겐 음악이 아니듯 판소리에 익숙했던 구한말의 한량들에게 서양 음악은 깽깽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보편적인 美라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김사과님의 <미나>를 읽기 전부터 제겐 비슷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긴 손톱으로 유리창을 할퀴는 듯한 현대 음악을 듣는 기분은 아닐까? 김사과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 버렸습니다.(사실 이 과제를 내 준 카페에서 조금씩 얻어 들은 단어들이(네, 순전히 단어지요) 제 머리 속에서 그런 인상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김사과님이 84년생이어서 더 그랬을까요? 제 큰 조카가 80년생 둘째가 아마 83년생일 겁니다. 여기서 김사과님도 급 실망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읽어 보았자 꼰대의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던져 버리실 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리고 그것이 저도 두렵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굳어 버린 기성세대의 잔소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미나>가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쾌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장은 딱딱 끊어지는 단문이었지만, 수정은 자기가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묘사해 주었습니다. 참, 책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읽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몇 몇 단어들과 두어 개의 문장을 보게 되었지만 일부러 덮어 버렸습니다. 이 편지를 끝내고 읽어 볼 참입니다. 다만 수정을 ‘혁명적’ 인물로 해석하는 것을 얼핏 보았다고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수정에게 ‘혁명적’이란 칭호를 붙이는 것이 별로 마뜩치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번 영국에서 일어났던 폭동의 주역들과 더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단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다음날 아침 morning after’에 대한 전망은 없습니다.

 

너무 나간 걸까요? 그렇다면 좀 다른 곳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수정은 미나가 더러워졌고 그 더러움이 자기까지 더럽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나의 더러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요? 미나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 즉 기존 질서를 계승하는 것에서 온다고 수정은 판단합니다. 수정에게 기존 질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수정은 순수하게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느낀 문제는 이것입니다. 수정이 원하는 완벽한 삶은 표면적으로는 기존 질서의 파괴 위에 세워지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 질서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경쟁 사회의 맨 꼭대기에서 차가운 다이아몬드처럼 홀로 빛나는 것이지요. 수정은 경쟁사회를 혐오하지만 그것을 자연적 환경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수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경쟁사회의 차가운 논리를 벗어나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들에 대해서입니다. 그것들에 오염될까봐 수정은 미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정이 말살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파괴되어 마땅할 기존 질서 중에 유일하게 남겨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수정의 불행은 거기에 있습니다. 마땅히 파괴해야 할 것을 파괴하는 것의 불가능성 때문에 거꾸로 보존되어야 할 유일한 것을 파괴해야 할 극악한 것으로 뒤바꿔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나를 죽이기 직전 미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을 보고 수정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너에게서 악의 빛이 보인다. 아, 나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렇게 대단할 수 있는가? 우아. 아름다워. 아름다워. 나는 거의 넘어갈 뻔했지 뭐야. 하지만 니 얼굴에서 빛나던 악의 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어.” 수정은 이렇게 선과 악을 전도시켜 버립니다.

 

 

 

제 조카들과 논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몇 년 전 제 큰 조카가 저에게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어 보라고 했고, 저는 조카에게 지젝을 권유했더랬지요. 그때 제 조카가 제게 현실 감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했죠. 벌써 몇 년이 흘렀고 세계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이제는 신자유주의가 비판대 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인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바꿔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요. 그런데 세상에 바꿀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이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오히려 자본 스스로의 위기에 의해 굴러 간다고도 하고, 자본주의를 대체했던 사회주의가 처참하게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참, 라깡이란 단어가 책에 한 번 나오는 것 같았는데 라깡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정신분석에는 네 가지의 주요 담론이 있는데 그 중에서 분석가 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 분석가(의사라고 하지요 쉽게)가 분석을 통해 분석자(그러면 환자가 되겠지요)에게 하는 역할은 딱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석자가 갇혀 있는 세계는 사실 ‘만들어진production'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신이 창조한 영원불변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혹은 분석자 자신이 ’만든‘ 세계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세계는 파괴될 수 있고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또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계’ 없이 인간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세계 없이도 인간은 살 수 있는 것일까요? 모든 세계를 끝없이 파괴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세계 없는 인간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인가요? 제 조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살짝 물었던 것인데 기억하시나요? ... “저희는 소통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한글로 쓰여 진 책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한다면 합의를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네, 젊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저는 조카들과 좀 친한 편입니다. 제가 막내기도 하지만 나이 보다 여러 가지로 어린 편이라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386세대에 속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386은 어쨌든 자랑이었습니다. 물론 언저리 386이라 진짜 386들에 대해 늘 빚진 마음을 가졌지요. 그러나 다른 세대들에게 386을 부끄러워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386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먹는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주로 이삼십대 젊은 층들이 저희를 욕하더군요, 더러는 증오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실력도 없는 것들이 요직에 앉아서 다 해 처먹으면서 꼴난 운동 좀 했다고 이십대가 어떻고 젊은 것들이 어떻고 훈장질 한다는 거죠. 지들이 민주화랍시고 만들어 놓은 사회 꼬라지가 젊은 애들은 취직도 못하고, 중산층은 다 무너지고, 대학생들은 등록금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버린 사회인데도 적반하장 젊은 애들이 이기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나무란다는 거죠.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전 이 카페에서 촛불 집회에 대한 과제가 나왔는데 그 때도 그런 의견들이 있었죠. 10대들이 나서서 만들어 놓은 새로운 시위 문화를 꼰대들이 중간에 가로채서 다 망쳐 놓았다고요.

제가 지난 추석에 만난 조카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요것이 제 얼굴을 보며, 자기는 젊은 애들의 마음이 너무너무 이해가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도 386이 싫대요. 이모를 똑바로 보면서 말이죠.

 

저는 이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건 소위 말하는 계급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 계급이 어디 있냐구요? 지난 번 서울시 무상 급식 투표에서 보지 못하셨나요? 타워 팰리스를 필두로 강남 3구에서 우루루 쏟아진 투표는 그 자체로 부자들의 투철한 계급의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얼마 전에 공화당 모시기 의원이 계급에 관한 얘기를 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부자 세금 증액은 계급 투쟁이라고 했답니다. 옛 시절과는 반대로 이제 계급을 전면에 드러내는 사람들이 부유층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계급 적대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대는 세대 간에도 있습니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낡은 세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낡은 세대가 그렇게 만만하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적대가 있을 테니까요. 그건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고, 관습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이익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마 그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쩌면 궁극적 소통의 불가능성 때문에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대의 순간에 목숨을 건 진검 승부를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오해, 가짜 적대 따위들을 먼저 가려낼 수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수정처럼 엉뚱하게 미나의 심장에 칼을 꽂아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 마지막 문제가 남았는데요.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보편성이 무엇이냐구요?

호호..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강의에서 물어 보고 싶었는데, 저는 휴식 시간에 도망을 나와버리고 말았지요.

김사과님이 혹여 이 글을 읽으신다면, 혹시 답을 기대해도 좋은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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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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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4일,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줄곧 비가 온 탓일까, 아직 덥지만 어딘가 가을이 시작된 느낌이 든다. 한 여름에 손에 쥐었던 <자살론>을 이제야 끝냈다.  그나마 찬 바람이 불기 전에 끝을 내어 다행이지만, 솔직히 학교 졸업한 이후 이렇게 지루한 책을 끝까지 읽어 낸 것은 처음이다. 습작당과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열두 번은 더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문을 통과해야 선생님을 따라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무미(無味)한 수치들에 눈길을 되풀이 붙이곤 했다. 그래봤자 30분도 못돼서 꼬박꼬박 졸기가 일쑤였지만 말이다.


뒤르켐의 수치들은 대부분 1800년대의  것이다. 그리고 특히 1장의 분류방법은 현재의 눈으로 보면 너무 엉성한 면이 있다. 정신병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법 같은 것들은 좀 웃기기도 했다. 적어도 ‘자살’의 비사회적 요인을 현재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로 1장은 너무 너무 지루했다. 그러나 뒤르켐이 진짜로 주장하고 싶은, 자살과 사회적 요인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기적과 이타적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 용어와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아마 뒤르켐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자살은 사회의 통합 정도와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주의자는 세상에서 자신 말고는 의미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며, 지나친 이타주의자의 슬픔은 반대로 자신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긴다. 전자는 자신이 집착할 아무런 목적을 찾을 수 없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삶을 벗어 던지며, 후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가 삶의 외부에 존재하므로 삶이 장애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삶을 버린다.」

자기의 외부에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가 너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 살아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기주의적 자살이고, 사회의 가치가 너무나 위대하여 자신의 목숨은 초개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이타주의적 자살이다. 그리고 아노미성 자살이란, 이런 성향이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사회의 규범norm이 무너지고 새로운 규범norm이 아직 굳건히 세워지지 못한 아노미anomy 상태에서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은 급격히 분출할 수 있다.

그래서 뒤르켐이 내놓은 해법은 적절한 사회 통합의 방법으로서의 ‘조합’, ‘직업 집단의 조합‘ 이다. 조합은 국가가 하지 못하는 규범을 세우고 개인을 묶어서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집단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직업 집단이 노동자 집단을 말하고 그래서 결국 이것이 노동조합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답게(? 사회학자라는 것이 꼭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전체주의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개인은 개인으로서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사회적 통합 없이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 갈 수 없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사회 밖에서도 살아 갈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거나, 사회를 버리고 자살하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나쁘거나 혹은 더 나쁘거나 사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형태든지 사회 속의 구성원이 되지 않고는 의미 있게 살아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하다못해 속세를 버리고 떠난 스님들도 신도를 모아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내가 이 습작당에 머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사회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통합된 사회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

한때는 군부 독재가 없으면 누구나 행복한 사회가 될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만 전에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은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장밋빛 꿈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났고, 사람들은 그 어긋남에 대하여 목청껏 떠들지만 아직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은 우리 사회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에서 민노당으로 그리고 또 진보신당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이에 다리의 힘은 빠지고 기력은 쇠해간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아노미성 허무주의가 유혹한다. 사회는 어짜피 모두 다 나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마주한 것은 가장 나쁜 사회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다시 맑스에게로? 레닌에게로? ...누구는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다시 스탈린이라면....

얼만 전 진중권의 유토피아 논쟁이 불붙었던 적이 있다. 유토피아란 환영 혹은 신기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유토피아적 비전이라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통합된 사회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지지난 남자의 자격편에서 박칼린은 넬라 판타지아의 솔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솔로는 피아노에 얹혀 가는 것이 아니라 저 희망의 세상으로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수백명을 이끌고 기어이 가고 말겠다는 의지와 신념을 표출하는 강인함이라고. 그런데 앞장 선 솔로가 가리키는 저 희망의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가 그 뒤를 따르겠는가? 만약에 유토피아란 그저 이 세상에는 없는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누구나 생각해 버린다면 말이다.


사실 자살론을 읽으며 나는 내내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를 생각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사회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면, 까뮈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자면, 사회가 부조리한 것이라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 다시말해 어떤 유토피아도 그저 신기루일 뿐이라면 말이다. 물론 <시지프의 신화>는 조금 다른 것들을 다루고 있고, 나는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어 어쩌면 엉뚱한 연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선생님의 말씀과는 달리, 다 읽고 나면 최소한 자살할 마음은 없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내는데 실패한(개인적으로ㅋ) <자살론> 보다는 아마 그 효과에 있어 훨씬 더 유용할 <시지프의 신화>를 나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살에 관한 사회적, 개인적 생각은 <시지프의 신화>를 읽고 난 후에 조금 더 이어가기로 하고, 뒤르켐의 <자살론>에 관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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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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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6일,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오래전 신경숙의 <깊은 슬픔>에 깊이 빠진 이후 나는 오랫동안 신경숙의 글들을 읽지 않았다. 신경숙의 외딴방에 갇히면 나는 늘 온몸의 기운을 다 빼앗기고 기진맥진 널브러지곤 했기 때문이다. 90년대의 젊은 여성 작가들이 내게 대부분 늪처럼, 뻘처럼 느껴진 이유가 어쩌면 나 자신의 무기력함에 있었겠지만, 어쨌든 몇 년을 그렇게 허우적대다 나는 점점 그녀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간혹 공지영의 책들은 읽게 되기도 하고 그랬지만, 정말이지 신경숙은 그 많은 풍문들에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지독함은 내게 오랜 화상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몇 일전 TV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나는 그 자리에서 새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책을 빌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내가 늙은 만큼 그녀도 늙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인지,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뭐 별것이라고 말이다. 세월 따라 나는 변했지만 나의 삶은 여전히 흔들리는데, 그녀는 그녀의 명성만큼이나 확고한 삶의 뿌리를 내린 것일까? 어쩌면 단순히 아마존 베스트셀러 어쩌고 저쩌고에 현혹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마존의 밀림 만큼이나 인터넷의 그 아마존 역시 내게는 멀고 먼 곳인데도 말이다.

 

 

 

 

 

엄마를 생각하며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수 있는 딸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엄마와 단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딸이라면, 엄마를 단 한 번도 무시해 보지 않은 딸이라면, 엄마를 단 한 번도 귀찮아 해본 적이 없는 딸이라면, 엄마를 단 한 번도 사랑해 보지 않은 딸이라면, 그런 딸이 있다면 그럴 수 있을까?

<엄마를 부탁해>가 국내의 기사가 전하는 것처럼, 미국인들까지 열광케 하는 어떤 보편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딸들이 아무리 독기를 부려도 절대로 떨쳐 내지 못하는 눈물 한 방울, 엄마에 대한 그 눈물 한 방울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는 알 것 없어” “내가 알아서 해” “싫다니까!”

소리를 빽 지르고 전화를 끊고 나면 밀려드는 죄책감, 그러고도 곧 잊어버리고 일상의 소소한 일들로 돌아가는 무신경, 그런 것들에 상처받지는 않을 엄마라고 믿으면서도 그것이 상처가 될 것임을 모르지도 않는 우리 딸들이라는 것들....

책 장을 넘기다보면 나는 어느새 불려나온 나 자신의 기억 앞에 서있다. 내 눈 꼬리에 흐르는 눈물은 책 속의 엄마에 대한 눈물인지, 지금 홀로인 내 엄마에 대한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이렇게 딸들의 죄의식 위에 뿌리를 내리고, 딸들의 눈물로 무성한 잎을 피웠다.

그리고 견실한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 ....

 

 

 

 

회한과 기억 속의 엄마 박소녀는 무한 희생의 어머니 상이다. 가족들에게 자기를 모두 다 파 먹힌 후에 빈 껍질로 버려진 엄마. 그 엄마는 이제 기억마저 잃고 영원히 잃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지기 전에 이미 실제로는 가족들의 삶 속에서 잊어져 있었다.

 

‘너’,‘그’, ‘당신’ 으로 불리는 딸, 아들, 남편은 엄마를 잃은 후에야 그것들을 기억해내고 자신들의 삶이 그 엄마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너’로 불리는 딸은 엄마에게도 엄마가 아닌 시절이 있었음을, 엄마도 자신과 똑 같은 소녀 시절과 처녀 시절 그리고 하고 싶은 꿈이 있었던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너무나 놀랍게 ‘발견’ 하는 딸, ‘너’에 의해 이 소설은 엄마의 존재를 새롭게 위치지울 것을 역설하고 있다. 엄마는 가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파먹히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삶을 가진 생의 주체로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는 나는 오히려 은밀히 역전된 욕망을 읽는다. 자신들을 위해 팔,다리, 심장까지 기꺼이 내어 놓는 무한 희생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 소설 속에서 엄마의 희생은 너무나 아름답고 싱싱하게 그려진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희생이 가혹하면 할수록 엄마는 더욱 왕성한 생명력을 얻는다.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엄마의 손길은 모든 생명들을 살아나게 하고 무성하게 번식시킨다. 엄마의 손이 닿는 곡식은 씨를 뿌리기 무섭게 탐스런 열매를 맺고, 엄마가 거둬 먹인 개는 몇 배에 걸쳐 수 십 마리의 강아지를 낳는다. 엄마가 윤이 나도록 닦아 놓은 장독들은 달고 맛난 간장과 된장을 익혀준다.

 

 

그런 엄마의 상실은 모든 것을 폐허와 불모로 만든다. 마치 지금 우리의 황폐함이 그런 엄마의 부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의 부재에 기인한 듯이 말이다. 그것은 은연중에 그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추동한다. 엄마다운 엄마에 대한 그리움. 잃어버린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처럼 잃어버린 영원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 그것은 마치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엄마는 이제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복권되어야 한다고 ‘너’인 딸은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너’ 딸의 눈은 아련하게, 이제는 잃어버린 ‘무한 희생의 엄마’를 쫒고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못되처먹게 말하자면 미국인들, 이미 우리 보다 훨씬 이전에 그런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알려진 미국인들 (혹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지만)이 <엄마를 부탁해>에 열광하는 이유는 혹시 그런 희생적 엄마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지.... 나의 엄마는 그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조용히 계셔주시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엄마가 엄마의 욕망을 순수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또 얼마나 기겁을 했었던지.... (이건 또 다른 긴 이야기가 될 듯도 하다. 신경숙이 엄마의 욕망을 중심으로 엄마의 재정립이란 이야기를 풀었으면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엄마를 부탁해>가 우리를 그토록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것은,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우리의 은밀한 욕망 때문인 것은 아닌지, 나는 엄마의 희생을 그려내는 신경숙의 저 유려하고 빛나는 문장들을 보면서 삐딱한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엄마를 다시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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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칼 마르크스 지음, 최형익 옮김 / 비르투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2012년 6월 8일,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나는 프랑스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베르사이유가 있어서. 물론 나의 베르사이유는 오스칼과 앙드레와 마리 앙뜨와네뜨가 비극적 사랑을 하던『베르사이유의 장미』속의 그 베르사이유다. 그래서 내게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의 오스칼이 근위대장 견장을 뜯어내고, 혁명군을 조준하고 있던 대포를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림으로써 혁명이 깔끔이 승리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만, 프랑스 역사는 전혀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는 로베스피에르가 생 쥐스트와 함께 단두대로 끌려가고, 민중 공화정이 무너진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그리고 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열월이며, 태양력 7월 무렵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만화로만 배운 나는 그 이후로 프랑스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그가 결국 황제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 프랑스 제2 공화정의 수립과정과 몰락에 관한 일종의 연작 칼럼이다. 주간지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 칼럼들은 결국 1852년 봄부터 월간지에 발표되었다가, 총 7편이 책으로 묶여 발행되었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몇몇 다른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인용문의 출처로 표기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란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참으로 요령부득이었다. 만화의 배경 지식정도로는, 브뤼메르가 혁명력 무월(안개의 달)이며, 브뤼메르 18일이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 11월 9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브뤼메르 18일은 일테면 우리의 5.18과 같은 고유명사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니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이 연작 칼럼의 첫머리를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뜻밖에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한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세계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p10

  ‘비극’은 단적으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고통과 파멸, 죽음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어떤 ‘숭고한 대상’을 상실한 대가이다. 비극은 그 속에 채 피어나지 못한 고갱이, 소중한 그 무엇을 품고 있다. 비극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비극이 소극으로 반복될 때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숭고한 대상’ 이다. 목숨을 걸어야 할 ‘숭고한 대상’이 없다면 그 고통과 파멸은 생뚱맞기 그지없는 소동, 어이없는 광태에 불과하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으로 반복되는 역사란, 그러므로 두 번의 죽음이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러나 그 물리적 죽음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죽은 영웅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숭고한 대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소극으로’. 이 두 번째 죽음이야말로 영웅의 진짜 죽음, 영원한 말살이다. 한 바탕의 소극은 비극이 획득한 숭고함의 광채를 박탈하고 영웅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단지 우스꽝스러운 광대였음을 드러낸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광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라면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의 두목’ 이다. 공화정을 뒤엎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황제가 되었다는 면에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삼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형식적으로 반복했지만, 비극의 주인공 나폴레옹과는 달리 조카 루이는 그 어떤 숭고함도 표상하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시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 했지만, 그는 자기 시대의 임무, “곧 근대 부르조아 사회를 봉건제로부터 해방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숭고한 임무를 수행했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명언에 굳이 비극과 소극을 덧붙인 것은 그러므로, 모든 반복의 역사가 소극으로 끝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폴레옹은 로마를 반복했지만 영웅이었고,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을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광대가 되었다.

  「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혁명에서 죽은 자를 깨어나게 하는 일은 과거의 투쟁을 단순히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에 영광을 부여하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 과거의 유령으로 하여금 주변을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했다. 」p13

  그런데 루이 보나파르트는 “오직 과거의 구 유령만이 배회”하도록 했다. 루이가 반복한 것은 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혁명의 떡고물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보나파르트를 통해 나폴레옹을 보고자 했던 프랑스 인민들은 거꾸로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퇴보에 대한 어떤 의혹도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옛 시절이 다시 도래”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160여 년 전의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이 책이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 때문이다. 배회하는 유령들로 날로 음산해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박정희의 유령, 노무현의 유령, 김일성의 유령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만이 있다. 지금 다시 박정희를 반복하는 것이 유신독재로 퇴보하는 것인 만큼이나, 노무현의 반복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원칙과 상식의 환상은 깨어졌고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하물며 김일성의 유령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싶지만, 현실은 어이없는 난장판이다. 우리는 눈앞에서 주체 유령의 난장질로 산산조각 나고 있는 진보를 목격하고 있다. 이제 주사파는 더 이상 진보의 한 분파가 아니다. 경기동부든, 구당권파든,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주사파 무리들을 퇴출시키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진보에 대한 희망은 없다. ‘레닌 재장전’을 외쳤던 슬라보예 지젝도 북한 체제에 대해서만은 도무지 정체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했다. 지젝은 북한 언론을 인용하며 기막힌 사례 하나를 제시했다. “...북한 최초의 골프장에서 열린 개막 경기에서 친애하는 수령 김정일이 18홀의 경기를 19타로 끝내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선전담당 관료가 어떻게 머리를 굴렸을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 김정일 동지가 매번 홀인원을 달성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럴 듯한 상황을 만들자면 단 한번은 홀인에 2타가 필요했다고 하자....” 우연찮게도 이것은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p91)에 실려 있다. 18번의 홀인원은 몰라도 17번의 홀인원은 충분히 통용되는 곳이 북한이다. 비록 북한 인민 개개인은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전체로서의 인민, ‘대문자 People’ 로서의 인민은 그 누구도 공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탈북자 모시기의 말마따나 총살감이기 때문인지, 도대체 북한의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지젝의 유언비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악의적 음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주사파, 경기동부, 구당권파의 실체 또한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도대체 알 길이 없다. 밝히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표할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정작 그들은 양심의 자유를 운운함으로써, 국회의원의 대표성 자체를 부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무수한 논자들이 그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국민의 대표자로서 공적 가치관을 밝혀야 할 의무 사이의, 명백히 다른 층위를 설파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들 주사파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짜피 통하지 않을 대화나 어정쩡한 봉합이 아니라, 한 시라도 빨리 끝장을 보고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사태를 질질 끌어가면 갈수록 진보는 수렁으로 빠지고, 정국은 퇴보할 것이며, 박근혜는 아니 박정희의 유령은 손쉽게 권좌를 차지할 것이다.

 

 

 

  1848년 2월 혁명 직후, 프랑스에는 곧바로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노동 프롤레타리아, 민주공화파 쁘띠부르주아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심지어는 왕당파 야당까지, 다양한 정파로 구성된 이 임시 정부는 당연한 수순으로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맨 처음 노동 프롤레타리아가 제거되었고, 그 다음엔 쁘띠 부르주아지, 그 다음으로는 공화주의 부르주아지, 그리고 최후의 승자처럼 보였던 왕당파 야당 연합인 ‘질서당’이 마지막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해 축출 당했다. 혁명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하고 역사는 거꾸로 돌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다. 역사의 퇴보에는 민중의 기만적 믿음이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왜 민중들이 이런 자기기만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혁명으로 열린 공간은 나날이 혼탁해 가고, 그 혼돈 속에서 어떤 진보세력도 희망과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신성시했을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능을 질타하고 조롱한다.

  「 무기를 자신들의 수중에 확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는 공화국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시켰고, 그 정부를 사회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여기에 근대혁명의 일반적 내용이 제시되었지만, 그 내용은 주어진 조건과 관계 하에서 이용 가능한 수단이나 대중의 교육 수준으로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모든 것들과는 기묘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 p20

  순수성을 고집하며 불가능한 것들만 요구하는 현대의 좌파와도 닮아 있다. 조금만 타협해도 배신자로 낙인찍고,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순혈주의는 최근 주사파 사태가 공론화되기 전까지는 가장 비판받던 좌파적 태도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항상 상황이 무르익으면, 조건이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들의 순수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현실에서의 실천을 유예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태도를 헤겔을 들어 풍자했다.

  「 이곳이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 」p17

  이 경구는 헤겔이 이솝우화를 변용한 것이다. 로도스 섬에 살 때 엄청나게 높이 뛰었다며 자랑을 하고 다니는 허풍쟁이에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고 한 이솝우화는 말만 하지 말고 “바로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로도스가 장미꽃을 뜻하기 때문에, 헤겔은 “여기 장미꽃이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는 대구對句를 덧붙였다. 이 경구는 나도 여기저기서 보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도 “여기가 로도스다!” 는 뻥쟁이를 재갈물리는 가장 확실한 입마개가 될 터지만, 단 그 뻥쟁이가 두루 책깨나 읽은 먹물이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로도스에서는!’ 을 외치던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시들시들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 프롤레타리아 일부는 교환은행과 노동자 협동단체와 같은 공론적 실험에 몰두하며, 구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통해 구세계를 변혁하는 일을 포기하고 차라리 사회의 배후에서 사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제한된 존재조건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려 하지만,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운동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p23

 

 

  그렇다고 우리가 고소해할 처지는 더욱 아니다.

  「부르주아지를 위해 공화정을 수립하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고,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지들을 당분간 침묵하게 만든 후에 정작 부르주아공화파는 당연하게도 국가를 자신의 재산으로 접수한 부르주아 대중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 부르주아 대중은 바로 왕당파였다.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들은 부르봉이나 오를레앙의 이름이 아닌 자본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이 공동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국가형태를 발견했다.」p38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 이외의 모든 세력에 의해 혁명의 무대 바깥으로 밀려났다. 가장 거칠고 성가신 프롤레타리아가 사라지고 나자, 그 다음 희생 제물은 쁘띠부르주아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획책했던 부르주아 왕당파들 자신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날아가 버렸다. 뒤이어 등장한 루이 보나파르트는 손쉽게 혁명의 무대를 접수했다. 이제 2월 혁명이 수립했던 공화정은 완전히 파괴되고, 프랑스 제2제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혁명정신과 공화적인 헌법의 파괴였다.

  「가장 단순한 부르주아적 재정개혁에 대한 요구와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형식적 공화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사회에 대한 도발”로 단죄당하고 “사회주의”로 낙인찍힌다. 」p25

  2월 임시 정부에 함께 참여했던 각 정파들은 자신들만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가장 취약한 기반을 가진 정파들부터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그들 자신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제거한 그 세력이야말로 더 큰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유일한 힘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방어막을 해체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많이도 닮아있다. 진보정당은 역사상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성공에 의해 순식간에 몰락했다. 노무현의 실패를 통해 한 단계 더 전진하려했던 대중은 한 순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것이 진보의 맨 얼굴이라면, 차라리 적당히 타락했지만 적당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보수정당인 민주통합당이 낫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한 일반 대중이다. 내가 던진 정당투표가 국회의원 이석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20여년 개인 투표사의 치욕이다. 이 사태는 한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한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욱 철저히 파괴되는 것은 ‘진보’라는 개념이다. 통합진보당이 주사파를 끊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진보‘는 곧 ’종북‘으로 인식될 것이다. 주사파가 지금까지 보여 온 행태 중 어느 하나도 진보의 개념과 부합하지 않지만, 대중의 인식은 더 이상 그들을 분리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중은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나는 정말로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 사태는 무엇보다 최악의 조건 속에 발생했다. 이미 ‘3공, 5공의 정예’들로 구성된 박근혜의 7인회가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념전쟁’에 나선 박근혜의 지지율은 50%를 오르내리고 있다. 이제 곧 ‘가장 평범한 자유주의’, ‘가장 협소한 민주주의’도 종북주의라 낙인찍힐지 모른다. 이 시대의 종북은 과거의 빨갱이만큼이나 대중적 금기가 될지 모른다. 북한처럼 되느니, 차라리 약간의 자유와 평등을 저당 잡히려 할지도 모른다. 대중은 어쩔 수 없이 진보를 버리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대중 자신의 목 졸림으로 돌아오겠지만, 진보의 실체에 경악한데다 경제적 파산의 위기에까지 내몰린 대중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보여주는 몰락의 길을 제 발로 걷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서 완전한 패배만을 보여 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도 고난 속을 방황하고 있다. 혁명은 자신의 과업을 일정한 방식에 따라 수행한다. 1851년 12월 2일까지 혁명은 자신의 예정된 과업 가운데 절반을 완수했을 뿐이다. 지금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p137

  이 낙관적 믿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건, 분명한 것은 우리 역시 진행 중의 역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물론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 하에서” 란 단서가 있지만, 어쨌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임을 마르크스가 믿었듯이 나 역시 믿고 싶다.  역사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의 창조물인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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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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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 1조 1항이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다. 작곡가 윤민석의 CD는 지금도 차 안에서 가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노래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공화국이 뭘까, 민주공화국은 또 뭘까 잠깐 궁금해 하다가 금방 잊어버린다. 민주는 대략 민이 주인이라는 글자 풀이라도 할 수 있지만, 공화국은 사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북한의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데, ‘민주공화국’과 별반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국민이나 인민이나, 학자들이야 엄밀성을 따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눈에는 그게 그거, 국가의 구성원일 따름이고, 영어로 하면 둘 다 People 아닌가? 남북이 극과극의 체제라고 하지만, 요렇게 놓고 보면 둘 다 추구하는 이념이 같아 보인다. 그럼 이념 대립이란 뭐? 슬슬 머리가 복잡하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질문은 순전히 내 생각은 아니다. 뭔들 온전히 내 사고라는 것이 있겠냐만, 책을 읽다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을 만난다. 영국의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라는 불온한 발언을 했고, 플라톤은 아예 민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 살던 우리에게 사실 우리의 실질적 소원은 통일 보다는 민주였다. 그런 민주주의, 절대 가치인 민주주의가 이런 모독을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갸우뚱했고, 점점 의심이 갔지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난 것이고, 무엇 때문에 추문을 벗어나지 못하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이런 선거의 계절이 되면 더욱 궁금하다, 그 정체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여덟 명의 서구 사상가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이자 발제로서, 한 편당 2~30쪽 정도의 짧은 논문 여덟 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각각의 논문들은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에서부터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화, 민주주의적 제도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상이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책 자체의 통일된 시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된 개념도 없다.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촉발하기 위해 대중에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론 논쟁이 전공인 사상가들치고는 매우 쉽게 쓴 논문이고, 현실 민주주의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고, 무엇보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특별히 발제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찾아 요약해 보았다.

 

 

 

 

1.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관한 권두노트 , 조르조 아감벤 (철학·미학 교수)

 

① 민주주의 개념의 두 가지 성격

1) 구성 권력 : 공법 : 일반의지, 입법부

2) 구성된 권력 : 행정체계 : 통치, 행정부

② 서구 정치체계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묶임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정당화해주며, 서로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그 두 요소는 정치적-법적 합리성과 경제적-통치적 합리성, ‘구성형태’와 ‘통치형태’이다. p24

 

 

* 쉽게(거칠게) 말하면, 민주주의의 첫 째 의미는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자체이고, 둘 째 의미는 그 원칙을 실행하기 위한 통치 형태 즉 행정 체계이다.

 

 

 

 

2. 민주주의라는 상징, 알랭 바디우 (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상징이란 무릇 상징체계에서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p29

②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 두 가지 테제p33

1) 사실상 민주주의적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2) 민주주의적 주체는 자신이 누리는 향락의 견지에서만 구성된다.

③ 플라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세 가지 동기의 뒤얽힘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세계의 부재, 순환에 굴복한 주체성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상징, 그리고 모두가 젊은이처럼 즐기라는 정언 명령. p37

④ 끝나지 않은 황혼의 순간에, 자본-의회주의가 그것에 부여한 뜻에서 고려된 민주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그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p41

⑤ 민주주의란 단어의 본래 의미...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 p41

 

 

* 바디우는 말을 어렵게 하는 편인 듯;; 여튼 바디우는 자본주의 사회를 ‘무조음의 세계’ 즉 대의도 없고 진리도 없이 그저 욕망에 붙잡힌 사회라고 보는데.... 현실 민주주의가 자본-의회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면, 민주주의적 인간은 욕망, 욕망의 대상, 그 대상으로부터 끌어내는 찰나의 향락에 묶여서 끝없이 순환하는 주체이며, 이 순환의 상징인 돈에 매달리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다른 모든 것은 비판할 수 있지만, 이 민주주의는 건드릴 수 없는 상징으로 신성시하고 있으므로, 결국 욕망과 욕망의 숭고한 대상인 돈이 신성시되는 사회이다. 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인 인민이 스스로 권력을 갖는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고 바디우는 주장한다.

 

 

 

3. 영원한 스캔들 , 다니엘 벤 사이드 (철학교수)

 

 

* 사이드가 보기에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형태로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통치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를 구성하는 행위, 혹은 정치의 조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이드는 약간 랑시에르 쪽에 기운 듯한데 여하튼 이 둘의 대립을 기초로 민주주의 개념 자체의 모순을 설명하고자 한다.

 

 

① 민주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급진적 비판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및 상품등가성과 순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데 기초한다. 상품등가성에 따르면 모든 것은 값어치가 같고 등가적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대의라면, 그것은 먼저 그것의 형식을 담지 하는 일반 체계의 대의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거민주주의는 그것이 먼저 자본주의, 오늘날 ‘시장경제’라고도 불리는 자본주의의 합의적 대의인 한에서 대의적 일뿐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의 부패이다. 맑스가 그런 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행기적 독재밖에 없다고 봤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맑스는 그것을 포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 그 단어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의와 부패 사이의 변증법적 궤변을 명확히 해준다.” 그러나 맑스에게 독재는 민주주의와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지 않으며, 레닌에게도 ‘민주주의적 독재’는 모순 어법이 아니었다. p53~4

② '정의로운 질서‘와 정반대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 형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선 정치의 역설적 조건이다. 그 지점에서 모든 정당성이 궁극적인 정당성의 부재와 마주치고, 불평등주의적 우연성 자체를 떠받치고 있는 평등주의적 우연성과 마주친다.” ... 그것은 “통치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그것은 정치에 대한 사유를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분리해내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전혀 아니라,,,,정치의 설립 자체이다.” p57~8

 

 

*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구성하는 권력이란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인민의 권력이 구성되어야만 한다. 구성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제도나 체제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루소는 이것을 위해 최초로 ‘사회계약’의 원칙을 도입했다.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합의된 권력은 정당하므로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 ‘정당한’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어떤 권위에도 기댈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다. 제도화 될 수밖에 없지만, 그 정당성은 보증될 수 없다는 것.

 

 

③ 민주주의의 실질적 모순은 사회계약의 아포리아에 기입되어 있다.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힘이 법〔권리〕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오직 정당한 권력에만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되자마자 정당성의 토대 문제, 그리고 적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긴장의 문제가 제기된다. p61

④ 생-쥐스트는..... “제도를 통해서 개인의 영향력을 법이 지닌 힘과 불변하는 정의로 대체해야 한다. 그러면 혁명은 확고해 진다. ” 생-쥐스트도, 체 게바라도, 파트리스 루뭄바도,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 신비로운 민주주의적 등식을 해결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수수께끼를 남겼다. p66

⑤ ...위임과 대의는 피할 수 없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파업에서도 그렇고, 정당에서도 그렇다. 그 문제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그것을 꼭 껴안고서, 위임자가 수임자를 최대한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의 전문화를 제한하는 대의방식을 찾는 것이 낫다. p71

⑥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성, 비확실성, 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은총, 기적, 계시, 회개, 용서라는 신학의 모든 소지품과 함께 말이다. 이렇듯 정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겠다는 허망한 도주는 사실상 무능력을 영속화할 뿐이다. 원리의 무조건성과 실천의 조건성 사이의 모순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자처하는 대신, 정치는 그 모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모순을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지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p79

⑦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는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가?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항상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하게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p81

 

 

*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는 위임과 대의의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임과 대의를 부정한다면 결국 신에 의존하거나 정치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은 민주주의의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이게 하는 스캔들이다.

 

 

4.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 , 웬디 브라운(정치학 교수)

 

 

①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세계종교로 부상했다. 정치권력과 정치문화의 특정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서구와 그 숭배자들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제단으로서, 그리고 서구 제국주의의 십자군들을 빚어내고 정당화했던 신의 의도로서. p85

② 근대 이전의 공화제적 민주주의가 공통의 지배라는 가치 위에 세워졌고 평등의 원리를 중심으로 삼았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약속은 언제나 한결같이 자유였다. 대표나 법 앞의 평등이라는 극히 형식적인 의미 말고, 근대 민주주의가 평등을 내세운 적은 결코 없다. p95

③ 임마누엘 칸트, 루소, 존 스튜어트 밀이 그랬듯이, 근대성에서 자기-입법으로 이해된 자유는 인간 존재의 정수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욕망으로 간주된다. 사실 근대 서구의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 형태인 민주주의를 수립한 것은 근대성이 낳은 선험적으로 도덕적이고 자유로운 주체이다. 바로 이런 주체의 형상이 민주주의에 문자 그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당성을 만들어줬고, 계속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주체가 지닌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로서의 얼굴은 근대 전체에 걸쳐 민주주의의 위계질서, 배제, 예속시키기 위한 폭력을 허용하고 영속화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노골적이고도 필연적으로 비-자유가 존재하는데, 이는 설사 모든 인민을 자유롭게 만들겠다는 제국주의적 꿈이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양새를 띠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해준다. p96

④ 민주주의를 선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 조재들이 자기-입법을 원하며, 데모스에 의한 지배가 무책임하고 집중된 정치권력의 위험을 견제한다는 가정에 기초하는 것이다...그러나 오늘날 도스도예프스키가 말했듯이 인간 존재가 “빵보다는 자유를” 원한다고 주장할 수있게 해주는 역사적 증거, 또는 철학적 가르침 같은 것이 있을까? ...만일 인류가 자유에 따른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면....플라톤은 제 자신의 정치적 실존에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히지 않는 사람들이... 루소는 타락한 인민이 공적인 삶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것이 얼만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p100~102

 

 

* 웬디 브라운은 근현대의 민주주의를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결합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만들고 합의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가지지만, 이 자유로운 주체가 사실 백인, 남성, 식민지 통치자라는 특정 주체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불평등할 뿐 아니라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이 진짜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역사적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프랑스 혁명이나 아이티 혁명 같은 것은 뭐란 말인가? 여하튼 이런 의문들을 잔뜩 제기한 후 웬디 브라운은 민주주의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통치 형태로서의 민주주의가 평등을 배제한 채 유사-자유에만 결합되어 있다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5. 유한하고 무한한 민주주의 , 장-뤽 낭시(철학 명예교수)

 

 

① 민주주의의 양가성은 정치를 구성하는 이원성이나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끊임없이 이중적인 성향을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공통의 실존에 관한 유일한 규칙,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실존의 의미 또는 진리의 전제. p109

② 철학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철학처럼 정치는 신의 현전이 끝나면서 나온 발명품이다, 로고스가 뮈토스(신화)의 실추 위에 세워졌듯이, 정치도 신-왕의 소멸 위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신정의 타자다. 이는 민주주의가 ‘주어진 권리’의 타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권리를 발명해야만 한다. p110

③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루소의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음을 자각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회이자 약점이다. 우리는 이 교착어법의 핵심에 있다. p111

④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비난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진리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근본적인 정당성의 자격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p112

⑤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는 단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다시 긍정하고 작동시킬 시기이다. 인간에게는 본성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온갖 자연적인 것은 지나치게 갖고 있는 주체의 특성 말고는 다른 특성이 주어지지 않았다....정치로서의 민주주의는 초험적 원리에 토대를 둘 수 없으며, 인간 본성의 부재에 토대를 두거나 토대 자체를 갖지 않아야 한다. p116

⑥ 민주주의가 진짜 욕망하는 진짜 이름, 민주주의가 사실상 지난 150년간 자신의 지평으로서 발생시키고 젊어졌던 진짜 이름은 코뮤니즘이다. 이 이름은 모든 점에서 사회에 결핍되어 있던 공동체의 상징적 진리를 창조하고 싶은 욕망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p118

 

 

*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은 놀랍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민주주의는 더욱 가치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낭시의 논문이 내게는 좀 감성적으로 읽혔지만, 여하튼 민주주의는 코뮤니즘,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의미 혹은 진리에 관한 물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발명해나가야 하는 것이며,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6.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 랑시에르(철학 명예교수)

 

 

① 정치적 투쟁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단어들에 대한 투쟁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가 맥락에 따라 다른 것들을 의미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p131

②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의 논변이기도 하지요. 가장 강한 자의 권력은 권리라고 서술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 권리는 그냥 부과되면 그뿐이니까요. 달리 정당화할 필요가 없죠. 제 생각에 민주주의란 평등 전제이며, 우리의 것과 같은 과두적 체제조차도 바로 그 전제 위에서 스스로를 다소 정당화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에는 비판적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체에 이중으로 박아 넣은 평등의 쐐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치는 단순히 치안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있죠. p132~3

 

 

*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평등 전제’라는 정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평등은 목표가 아니라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 역시 전제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게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따지고 자시고가 아니라, 평등한 인민주권은 모든 정치체의 전제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여하튼 재미있는 것은 랑시에르가 한국을 방문한 모양이고 촛불집회를 보거나 들은 것 같은데, 이미 서구에서는 화석화된 민주주의가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스펙터클하게 상연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촛불집회란?

 

 

7. 민주주의를 팝니다. , 크리스틴 로스(비교문학 교수)

 

 

① 근대에 수용되어 온 민주주의란 투표, 다수의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 ‘최대 다수’의 법에 의한 지배로 이해된다. p149

② 유럽 헌법과 관련한 리스본 조약을 부결시킨 아일랜드의 투표 결과에 대해.. 프랑스와 EU 관리들은 재투표를 요구 ...샤르트르가 ‘바보들을 위한 덫’이라고 불렀던 대의민주주의의 선거조차도 박탈하려는 시도... 그러나 아일랜드의 투표가 보여주는 것은 이 선거라는 형식적 의례도 반-민주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③ 1869년경 프랑스의 정치계에는 각종 민주주의자들이 번성했는데 몇 가지만 열거해 봐도 ‘사회적 민주주의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자’ 등이 있었다.... 이 단어 자체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못했다. p152

④ 자네가 내게 말했지. 자네는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민주주의자라고. 이 말을 정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음모가들이 좋아하는 수법이지.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부르주아지도 아니고 민주주의자이다!”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경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들이라네....그 어떤 견해가 이런 깃발 아래에 똬리를 틀지 못하겠는가? 모든 이들이 저마다 민주주의자임을 자임하고 있지. 특히 귀족계층의 사람까지 말이야 p152

⑤ 1871년 파리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감행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가 아니었다면.... 비록 원래의 진정한 의미에서 벗어나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주의자라는 이 단어는 여전히 1789년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p153

⑥ 19세기가 시작될 때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바로 그 집단이 그 세기가 끝날 때쯤 그 용어를 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랭보의 시 속에서처럼, 민주주의는 문명화됐고 문명화되어가고 있는 서구에 필수적인 정신의 보충물이자 이상적인 무화과 나뭇잎이 됐을 뿐 아니라 문명화됐음을 알리는 깃발, 구호,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국가는 계급 살육의 역사가 개시됐음을 선언했다. 유럽에서 파리꼬뮌이 겪은 바로 그런 형태로, 그리고 식민지에서는 그 이상의 폭력적인 형태로. 2008년 국민투표 당시 아일랜드인들에게 쏟아진 위협과 비난의 언어에서 우리는 이 폭력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서구는 이 세계의 도덕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헤게모니는 전 세계에 걸쳐 진보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p159~160

⑦ 만약 민주주의를 통치형태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단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단어를 전유해 온 적들에게 내줘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민주주의란 정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는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랭보의 숱한 구호 중 하나인 사랑처럼, 민주주의는 공적 삶의 끊임없는 사유화에 맞서는 투쟁의 이름으로서 재창조되어야만 한다. p164

 

 

*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못한 채(혹은 의도적으로 정의하지 않은 채), 여러 정치 세력에 의해 이용당해 오다가,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문명화된 서구의 정신적 깃발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통치형태가 아니라 인민의 권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섣불리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으며, 민주주의는 투쟁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8.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 슬라보예 지젝 (이론정신분석학협회 대표)

 

 

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나 자유와 동일시할 수 있는 모든 특징(가령 노동조합, 보통선거, 무상 의무교육, 언론의 자유 등)은 19세기 내내 하층계급이 길고도 힘든 투쟁을 해 쟁취한 것이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다. p172

②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충격요법을 써서 민주주의에 투신하고 서둘러 자본주의를 향해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제적 파산선고였다. 이와 반대로 중국은 칠레와 한국의 경로를 따라서 견제 받지 않는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통제했고 그에 따라 혼돈을 피했다. 요컨대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지배라는 괴상은 결합은 말도 안 되는 변칙이 아니라 불행을 가장한 축복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p174~5

 

 

*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별다른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권위주의적이거나 비민주적일 때 오히려 더 빨리 발달했다는 것.

 

 

③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p187~8

④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p191

⑤ 이 사실은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가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관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이 무엇이냐?”라는 점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한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결국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의 대표자들이 텅 빈 권력의 장소를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p194

⑥ 차베스 정부는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차베스는 그들의 대통령이고, 그의 통치 아래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그들이다. 비록 민주적 선거의 규칙을 존중하고는 있지만 차베스가 근본적으로 헌신하는 대상이자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내는 원천은 그런 규칙이 아니라 빈민가의 소외계층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이것 민주적인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p194

⑦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란 선거로 집권한 급진 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따라야 한다. p195

 

 

* 어쩌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아닐까, 지젝이 다시 부활시키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은. 어쨌거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민의 신적 폭력은 인민주권이란 원칙에서 정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독재라는 개념에 관한 것인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차베스는 ‘가난을 끝장내는 방법은 빈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 이라고 했다. 처음에 차베스가 선택한 것은 대의민주제의 형식인 선거가 아니라 쿠데타였다. 실패 이후 전략을 바꾸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선거 공약은 ‘제헌의회 소집’ 이었다. 차베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베네수엘라의 지배 체계가 이미 미국과 자본가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어, 빈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그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다 결국 패배하고 대통령궁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전례를 보여주고 있다. 차베스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기존 헌법체계를 무효화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국회, 법원, 행정부는 모두 해산되고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와, 국회, 사법부가 구성되었다. 물론 차베스의 혁명 세력이 모든 국가 조직을 장악했고, 차베스는 빈민의 절대적인 지지 아래 혁명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차베스를 몰아내려는 쿠데타와 음모가 끊임없이 시도되었지만, 차베스를 지지하는 절대 다수의 빈민들은 이를 막아내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차베스의 권력은 곧 빈민들의 권력이고, 이것을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태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보면, 빈민의 권력은 인민주권의 민주주의 원리에서 나온 정당한 권력이다. 문제는 이 인민의 권력이 대의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대의민주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차베스에 대한 인민의 지지는 선거 형식과는 상관없는 포퓰리즘적 성격이 짙다. 차베스가 곧 인민의 일반의지를 직접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전체주의적 과잉’이 출현하기 쉽다. 그러나 이 전체주의적 과잉이 베네수엘라의 빈민, 즉 기존 사회 체계에서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배제되었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들의 편에 있는 것이라면, 민주적 형식이라는 것은 그다지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베스 권력의 정당성은 빈민들과 맺고 있는 특권적 관계에 있는 것이지 민주적 절차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젝의 급진적인 혹은 너무나 구식인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관해서 수용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인민주권의 원리라는 점에서 음미해 볼 여지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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