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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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일, 카페 과제물로 쓴 글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연히 어떤 강의를 들었습니다. 쇤베르크 이후의 서양 현대 음악들을 두 시간 이상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화음이 파괴되고 별별 시험들이 이어지더군요. 영화 도가니 보셨는지요? 분노에 찬 청각장애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는 소리가 저런 소리가 아닐까 싶은 소리부터 망치 소리, 벽을 깨부수는 소리 등등 음악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소리들이 새로운 음악으로 추대 받고 있더군요.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저는 음악이란 무엇인가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들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지요. 그러자니 곧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들더군요. 내게 익숙한 것이 영원히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없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후크송이 제겐 음악이 아니듯 판소리에 익숙했던 구한말의 한량들에게 서양 음악은 깽깽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보편적인 美라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김사과님의 <미나>를 읽기 전부터 제겐 비슷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긴 손톱으로 유리창을 할퀴는 듯한 현대 음악을 듣는 기분은 아닐까? 김사과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 버렸습니다.(사실 이 과제를 내 준 카페에서 조금씩 얻어 들은 단어들이(네, 순전히 단어지요) 제 머리 속에서 그런 인상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김사과님이 84년생이어서 더 그랬을까요? 제 큰 조카가 80년생 둘째가 아마 83년생일 겁니다. 여기서 김사과님도 급 실망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읽어 보았자 꼰대의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던져 버리실 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리고 그것이 저도 두렵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굳어 버린 기성세대의 잔소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저희가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미나>가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쾌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장은 딱딱 끊어지는 단문이었지만, 수정은 자기가 알고 느끼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묘사해 주었습니다. 참, 책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읽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몇 몇 단어들과 두어 개의 문장을 보게 되었지만 일부러 덮어 버렸습니다. 이 편지를 끝내고 읽어 볼 참입니다. 다만 수정을 ‘혁명적’ 인물로 해석하는 것을 얼핏 보았다고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수정에게 ‘혁명적’이란 칭호를 붙이는 것이 별로 마뜩치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번 영국에서 일어났던 폭동의 주역들과 더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단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다음날 아침 morning after’에 대한 전망은 없습니다.

 

너무 나간 걸까요? 그렇다면 좀 다른 곳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수정은 미나가 더러워졌고 그 더러움이 자기까지 더럽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나의 더러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요? 미나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 즉 기존 질서를 계승하는 것에서 온다고 수정은 판단합니다. 수정에게 기존 질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수정은 순수하게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느낀 문제는 이것입니다. 수정이 원하는 완벽한 삶은 표면적으로는 기존 질서의 파괴 위에 세워지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 질서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경쟁 사회의 맨 꼭대기에서 차가운 다이아몬드처럼 홀로 빛나는 것이지요. 수정은 경쟁사회를 혐오하지만 그것을 자연적 환경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수정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경쟁사회의 차가운 논리를 벗어나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들에 대해서입니다. 그것들에 오염될까봐 수정은 미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정이 말살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파괴되어 마땅할 기존 질서 중에 유일하게 남겨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수정의 불행은 거기에 있습니다. 마땅히 파괴해야 할 것을 파괴하는 것의 불가능성 때문에 거꾸로 보존되어야 할 유일한 것을 파괴해야 할 극악한 것으로 뒤바꿔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나를 죽이기 직전 미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을 보고 수정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너에게서 악의 빛이 보인다. 아, 나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렇게 대단할 수 있는가? 우아. 아름다워. 아름다워. 나는 거의 넘어갈 뻔했지 뭐야. 하지만 니 얼굴에서 빛나던 악의 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어.” 수정은 이렇게 선과 악을 전도시켜 버립니다.

 

 

 

제 조카들과 논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몇 년 전 제 큰 조카가 저에게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어 보라고 했고, 저는 조카에게 지젝을 권유했더랬지요. 그때 제 조카가 제게 현실 감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했죠. 벌써 몇 년이 흘렀고 세계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이제는 신자유주의가 비판대 위에 올라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적인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바꿔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요. 그런데 세상에 바꿀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이 있을까요? 자본주의는 오히려 자본 스스로의 위기에 의해 굴러 간다고도 하고, 자본주의를 대체했던 사회주의가 처참하게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참, 라깡이란 단어가 책에 한 번 나오는 것 같았는데 라깡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정신분석에는 네 가지의 주요 담론이 있는데 그 중에서 분석가 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 분석가(의사라고 하지요 쉽게)가 분석을 통해 분석자(그러면 환자가 되겠지요)에게 하는 역할은 딱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석자가 갇혀 있는 세계는 사실 ‘만들어진production'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도와주는 것이지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신이 창조한 영원불변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혹은 분석자 자신이 ’만든‘ 세계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세계는 파괴될 수 있고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또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계’ 없이 인간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세계 없이도 인간은 살 수 있는 것일까요? 모든 세계를 끝없이 파괴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세계 없는 인간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인가요? 제 조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살짝 물었던 것인데 기억하시나요? ... “저희는 소통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좀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한글로 쓰여 진 책은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한다면 합의를 할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네, 젊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저는 조카들과 좀 친한 편입니다. 제가 막내기도 하지만 나이 보다 여러 가지로 어린 편이라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386세대에 속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386은 어쨌든 자랑이었습니다. 물론 언저리 386이라 진짜 386들에 대해 늘 빚진 마음을 가졌지요. 그러나 다른 세대들에게 386을 부끄러워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386이 무지막지하게 욕을 먹는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주로 이삼십대 젊은 층들이 저희를 욕하더군요, 더러는 증오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실력도 없는 것들이 요직에 앉아서 다 해 처먹으면서 꼴난 운동 좀 했다고 이십대가 어떻고 젊은 것들이 어떻고 훈장질 한다는 거죠. 지들이 민주화랍시고 만들어 놓은 사회 꼬라지가 젊은 애들은 취직도 못하고, 중산층은 다 무너지고, 대학생들은 등록금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버린 사회인데도 적반하장 젊은 애들이 이기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나무란다는 거죠.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 전 이 카페에서 촛불 집회에 대한 과제가 나왔는데 그 때도 그런 의견들이 있었죠. 10대들이 나서서 만들어 놓은 새로운 시위 문화를 꼰대들이 중간에 가로채서 다 망쳐 놓았다고요.

제가 지난 추석에 만난 조카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요것이 제 얼굴을 보며, 자기는 젊은 애들의 마음이 너무너무 이해가 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도 386이 싫대요. 이모를 똑바로 보면서 말이죠.

 

저는 이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건 소위 말하는 계급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 계급이 어디 있냐구요? 지난 번 서울시 무상 급식 투표에서 보지 못하셨나요? 타워 팰리스를 필두로 강남 3구에서 우루루 쏟아진 투표는 그 자체로 부자들의 투철한 계급의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얼마 전에 공화당 모시기 의원이 계급에 관한 얘기를 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부자 세금 증액은 계급 투쟁이라고 했답니다. 옛 시절과는 반대로 이제 계급을 전면에 드러내는 사람들이 부유층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계급 적대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대는 세대 간에도 있습니다.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낡은 세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낡은 세대가 그렇게 만만하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적대가 있을 테니까요. 그건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고, 관습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이익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마 그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쩌면 궁극적 소통의 불가능성 때문에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적대의 순간에 목숨을 건 진검 승부를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오해, 가짜 적대 따위들을 먼저 가려낼 수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수정처럼 엉뚱하게 미나의 심장에 칼을 꽂아 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 마지막 문제가 남았는데요.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보편성이 무엇이냐구요?

호호..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강의에서 물어 보고 싶었는데, 저는 휴식 시간에 도망을 나와버리고 말았지요.

김사과님이 혹여 이 글을 읽으신다면, 혹시 답을 기대해도 좋은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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