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4일에 쓴 글입니다.

 

 

곰동씨가 가끔 세상이 망해버리기를 바란다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씩 세상이 망하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살짝 든다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세상의 멸망을 세상이 끝장난 듯이 보여 주려하는 영화들은 그 거대한 재난을 어떻게든지 막아보려는 인간의 필사적 노력과 눈물겨운 인간애를 영웅담으로 버무려 놓지만, 영화 제작자들이 지구 연합 사령부도 아니고 독수리 오형제도 아닌데 해마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동씨는 슬쩍 궁금해진 것이다. 혜성이 충돌한다, 쓰나미가 덮친다, 지각이 이동한다, 외계인이 공격한다, 기타 등등등, 육해공을 넘어 우주까지 총동원된 이 전 세계적 '대한 뉘우성' 재난 경고 영화들이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 되는 것은 지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쫄딱 망해주길 바라는 은밀한 욕망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땅이 쩍쩍 갈라지고, 시뻘건 불덩이가 하늘을 메우고, 산더미 같은 해일이 빌딩을 집어 삼키는 장엄한 CG 너머에 또는 아래로, 그 욕망을 둘러싼 원환의 회오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따위로 영화를 가늠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곰동씨는 생각하며, 조금은 늙어 보여 마음이 아픈 존 쿠삭의 <2012>를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재난 영화가 흔히 그렇듯 파괴된 가족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쫒겨나고 엄마는 양부와 결혼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생부와 양부가 손을 잡은 것이다. 워낙 막강 재난이라 원수와도 손잡을 다급한 판이 아닐까 곰동씨는 잠깐 반문했지만, 어쨌든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곰동씨는 쫒겨 난 아버지가 새 아버지와 힘을 합쳐 가족을 구했다는 영웅담을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이면 그건 곧 남편이 둘? 에 생각이 퍼뜻 미치자, 곰동씨는 웃는 듯도 하고 찡그리는 듯도 한 표정을 짓는다. 두 명의 남편이 좋은지 나쁜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곰동씨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는 한 고비를 넘기자 양부를 사정없이 죽여 버린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하나인 법이다. 곰동씨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하나인) 법이다’ 엄정하고 절대적인 법을 서슬 푸르게 선언하던 과거의 아버지에 비해 거의 쫒겨나다시피 한 오늘날의 아버지가 법일 수 있을까 혹은 법 자체가 이미 쫒겨난 아버지처럼 바닥에 처박힌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법이 아닌 척 하는 법, 모든 것이 그저 욕망에 맡겨진 듯 보이는 세상의 법이야말로 가장 가혹하고 냉엄한 법은 아닐까 곰동씨는 생각해 보지만, 별로 자신이 없다. 아버지를 법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법이 아버지라고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인지, 법이 없는 세상은 없지만 그것이 꼭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인지, 오디푸스와 앙띠오디푸스 따위 기타 등등의 역사 속에 아버지와 법의 관계가 이제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곰동씨는 푸념한다. 몇 권의 책을 읽은 듯도 하고 귀동냥도 한 것 같긴 한데, 여전히 곰동씨는 회색암흑(그냥 멋져서 한번 써본 말일 뿐이다, 어제 어떤 책에서 읽었다) 속에서 헤매고 있다.

 

함께 영화를 본 이웃동네 ㅇㅇ씨의 말을 곰동씨는 기억한다. “그런데 왜들 이렇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복원시키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요? <2012>에서 재난은 명백하게 자연 재해로 그려지지만 거꾸로 아버지의 상실이 이 재난을 불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다문화주의적 요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금지라는 성가신 법도 없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게임 외에는 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곰동씨는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늘 불친절한 ㅇㅇ씨는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난다고만 했을 뿐 곰동씨가 알아 들을 수 있게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ㅇㅇ씨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ㅇㅇ씨의 세상에서 ‘친절함’은 늘 이 세상에서는 ‘불친절함’으로 보여지는 아인슈타인적 상대성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건 간에 양부는 죽었고 가족은 이전 보다 더 단단한 가족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아직 세상이 폭삭 망한 것은 아니다. 사실 망한 척만 했을 뿐 전혀 망한 것이 아닌데다가 어쩌면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었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어릴 때 엄마들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협박하던 그 수법이다. 말 안 들으면 엄마가 콱 죽어 버린다. 콱 죽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영악한 놈마저도 혹시나 진짜 엄마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할까라는 순간적인 의문이 스치는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이미 무지막지한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뻔한 거짓말의 약발은 그리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잠깐 새로움을 보여주는 듯 하다가 오히려 가장 뻔뻔한 스토리로 돌아가 버린다.

 

세상이 망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있을 리가 없다. 생부가 죽고 양부가 살아서 가족을 구원한다든가, 생부도 죽고 양부도 죽었는데 엄마가 자식들을 구한다든가, 엄마도 죽었지만 오빠가 여동생을 구한다든가, 여동생도 죽었지만 세상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시 열린다든가, 기타 등등...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것에 대한, 다문화주의 시대에 꼴리는 대로 살라는 충동질에 대한, 환멸은 다시 옛날의 그 권위적인 아버지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은, 서당개도 알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마치 예전의 바로 그 아버지의 귀환이 구원의 상징인 것처럼 가족의 재결합을 완성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해낸다.

 

그런데 사실 곰동씨도 마냥 욕을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세상이 폭삭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곰동씨에게도 있다. 예전에 어떤 세상이 폭삭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그 세상 역시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폭삭 망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단단한 땅을 가졌는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지금 사는 세상을 탕탕 부셔버릴 용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곰동씨는.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의 단단하기를 미리 측정해 볼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세상이 거대한 심연 속으로 장엄하게 가라앉고, 자욱한 분진이 걷힌 후에라야 새로운 세상이란 놈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퇴양난이다.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는데, 그 다음이야 말로 회색 암흑이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소심한 곰동씨로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 속담이 솔깃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영화는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곰동씨의 속도 덩달아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그 과학자가 양심이랍시고 연설을 하고 자빠지신다. 갑판의 사람들을 다 태워야 한단다. 그런데 그 갑판 위의 사람들이 누구인가? 애초에 10억 유로씩 내고 세 번째인가 함선에 타게 되어있던 갑부들이다. 아, 물론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다. 처음 승선이 시작될 때 내리라고 했던 함선 인부들도 그 갑부들과 섞여 있긴 하다. 여기엔 옆 동네 ㅁㅁ씨가 한 재미난 말이 있다. “그건 인도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이죠. 신세계를 건설할 노동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도전이 가능한 중국인 노동자들인 걸요. 그러니 버리고 갈 수는 없죠.”

 

방향 감각이 거의 없는 곰동씨가 이렇게 옆길로 새기 시작하면 제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곰동씨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곰동씨는 재빨리 10억 유로로 돌아온다. 애초에 그 함선들에 탈 사람들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선정되지 않았다. 최후의 시간이 돌아 올 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이 종말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잠깐 기도할 시간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애초에 새로운 세상을 위한 법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거기에 그 잘난 인도주의란 없었다. 10억 유로가 있든가 아니면지구상에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 준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거나 (물론 명시된 바는 없지만 함선을 만들거나 운항할 과학자나 기술자 따위를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각 국가의 (그것도 선진 10여 개국 안에 속해야 할 듯하지만) 통치권자라든가 하는 일방적인 기준이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 기준에 대한 지구인들의 합의나 의사소통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법은 그냥 폭력적으로 법으로 선포되었을 뿐이다. 그런 폭력적 정초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합법이라든가 적법이라든가 따위의 법에 의한 보호 운운에 의해 보호받거나 처벌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법의 기원을 보장해 주는 법이란 것은 없다.

렇다고 곰동씨가 그런 법은 무효라거나 비민주적이라거나 따위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곰동씨도 이런 저런 귀동냥과 몇 권의 책 덕분에 그 정도로 고지식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법이란 것은 원래 그렇게 텅 빈 것이고, 법의 기원은 그냥 폭력적 선언일 뿐이란 말에 곰동씨도 동의하는 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때때로 금과옥조로 삼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면에서 유효할 따름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곰동씨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곰동씨가 열이 받았다는 것이냐고 성질을 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곰동씨가 열이 받은 것은 법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원래 그런 법의 잔인함을 턱도 없이 ‘인도주의’ 따위를 운운하며 덮어 보려는 그 교활함과 사악함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곰동씨는 함께 본 여러 씨들에게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식으로 양심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도 거기 온 사람들은 10억유로씩 내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그 가증스러운 인도주의라니! 그것으로 처음부터 배제한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 폭력을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때 옆 동네의 그 ㅇㅇ씨는 “그런 면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은 그 장관 이예요. 자신의 논리에 맞는 행동이잖아요. 목적은 인류의 생존이지 양심의 구원이 아니니까요.” 라고 했었다.

 

그랬다. 사실 그건 인류 생존 프로젝트일 따름이었다. 곰동씨는 웃기긴 하지만 만약 진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솔직히 10억유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꼭 돈이 있어야 배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야 구구할 수 있겠지만 무엇인가 그런 무조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1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서 민주적 절차를 밟고 따위의 생각은 오히려 망상에 더 가까우리라고 곰동씨는 지금도 생각한다. 곰동씨가 말하려는 것은 그 폭력적 법 세우기는 그것으로 좋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원칙은 끝까지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래도 최소한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존한 인류의 신세계라는 것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차라리 잔인하게 웃으며 ,갈라진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의, 공포에 찬 굳은 눈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것, 끝까지 잔인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윤리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양심에 상처가 있다면, 기원적 배반에 대한 가릴 수 없는 간극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뎌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악마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세계를 세우고 보니, 그 구멍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죠. 그 사람들이라도 태워서 양심을 구원해야한다. 그래야만 최초의 배반, 그 근원적 폭력이 은폐될 수 있다? 선이라는 것은 차라리 기만이군요.” 곰동씨는 그 과학자의 위선을 이렇게 표현했었는데, 옆에 있던 모모씨가 결론을 내리듯 덧붙였다. “기만적이지만 그 기만 없이는 세상이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닐까요? ㅎㅎ 그것으로 최초에 배제한 인간들은 영원히 잊혀지고, 인간성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신세계가 열리는 거죠.”

 

곰동씨는 그 때 ㅇㅇ씨, ㅁㅁ씨, 모모씨 등과 영화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뭐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든,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욕망 때문이든 재난 영화의 반복은 어떤 학습 효과를 갖는 것 같다. 실제로 재난이 닥쳤을 때 너무 익숙한 상황이라 좀 덜 당황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2020년 경인가 딥 임팩트 같은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 우주로 나가 폭탄을 심어 터트릴 것 같은 것이다. 하긴 언젠가 지구가 망하기는 망할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지구가 망하고, 태양이 꺼지고, 어쩌면 우주 전체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르고... 태양이 45억년 살았으니 아마 자연사 한다면 50억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는 점점 식어가는 태양 때문에 아마도 더 빨리 멸망할 것이고, 그것도 자연사 한다면 그렇지만 말이다. 하긴 그것 보다 더 급한 불이 있긴하다고 곰동씨는 웃는다. 3년 뒤에 외계인들을 데리고 오겠다든 디스트릭트9의 그 외계인이 돌아와 인간의 씨를 깡그리 말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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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21일 쓴 글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멋지다.

그랜 토리노가 무엇을 말하려하든, 그랜 토리노에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이건 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말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노배우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거나(솔직히 ‘많다거나’가 아니다.) 그의 팬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형형한 눈빛과 은색의 짧게 깍은 머리, 당당한 어깨를 빼놓고는 그랜 토리노를 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아마도 그 모습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진정 보여 주고 싶은 오늘날의 ‘미국’, 바로 그 자체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늙고 쇠락했지만 지는 해처럼 아름다운 혹은 꺼져가는 노을처럼 안타까운 모습 말이다.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1877년 작품이다. 장사와 주식으로 떼돈을 번 미국의 젊은 사업가가 유럽으로 건너와 유럽의 오래된 문화와 귀족 사회를 접촉하면서 겪는 일들을 통해 우아하지만 음흉하고 쇠락한 유럽과 활기차고 투명한 젊은 미국을 세밀하게 대비하고 있는 소설이다. 불과 130여 년 전만해도 미국은 힘차고 밝고 생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우리가 기만 속에 들어 왔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아!,아! XXXX” 란 노래에 적합한 나라가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있다면, 마땅히 그 나라여야 할 듯한 아 메 리 카, 바로 그 아메리카라는 젊은 청년 말이다. 물론 <아메리칸>의 주인공은 그 젊음과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유럽의 모호한 중핵으로서의 그녀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귀족 부인을 얻지 못하지만 말이다. 유럽이라는 낡은 성은 곧 허물어 질듯 하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더욱 모호하고 더욱 매력적이며, 그래서 자신감만 충만한 순진한 청년에게는 쉽사리 열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좌절로서 굳게 닫혀있다. 비록 그 성 안에는 낡은 거미줄과 기울어진 문 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투명한 아직은 순박한 청년 ‘아메리칸’에게는 성을 걸어 잠근 육중한 문은 그 자체로 성의 견고한 가치로 인식된다. 성 안에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귀족 부인이 외로이 갇혀 있을 것이다...

 

고작 130여 년이 지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카’는 창고 안의 움직이지 않는 그랜 토리노이다. 한국전과 포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그랜 토리노는 이제 이방인 갱 패거리들이 노리는 한낱 노획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총 한 자루 이외에는 그 시시껄렁한 애새끼들을 몰아 낼 방법도 없다. 자식들은 멀리 있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하지도 이어받으려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랜 토리노를 탐낼 뿐이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단순히 값나가는 빈티지 차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는 물려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물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 자본주의적 가치의 성지, 아메리카를 지켜낼 수 있는 자만이 그랜 토리노의 진정한 상속인이다. 그것이 폴란드계건 이태리계건 몽족이건 말이다.

 

처음에 몽족은 이방인 침입자였다. 말도 예의도 통하지 않는 낯선 야만인. 그러나 그의 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타자들이다. 싹싹하고 착하든, 진중하고 과묵하든, 껄렁거리고 위험하든, 히스페닉이건 몽족이건 모두 타자이다. 타자 없는 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들과 엮이고 그들의 삶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싫다면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핏줄은 모두 그를 떠나 그가 혐오하는 천박하고 무가치한 세계를 살고 있다. 그는 타자와 함께 존재하거나, 핏줄과 함께 무가치한 세계에 생존해야 한다. 그는 몽족의 과묵하고 착실한 남자 아이를 진정한 ‘아메리칸’으로 만들기로 한다. 거친 남자들의 농담, 아메리카를 건설했던 기술, 미인을 꼬드기는 방법까지. 그러나 정의를 명분으로 한 어설픈 힘의 과시는 몽족 갱들의 보복을 불러 오고, 남자 아이의 누나는 처참한 유린을 당한다. 과거의 힘에 대한 무의식적 과신이 불러 온 참담한 결과는 그를 어떤 선택으로 몰아간다. 죽거나 혹은 또 죽거나! 고개를 숙이고 죽어 살거나, 대의 속에 살아 죽거나. 대의의 세계에서 죽거나 생물학적으로 죽거나. 이제 그에게는 그 자신의 대의가 속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면 그 세계 자체가 쇠락하여 죽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은 핏빛 노을처럼 저무는 것이다. 매트릭스 3부의 네오처럼, 혹은 진정한 God처럼 죽음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몽족의 사내 아이는 그의 개를 옆에 앉히고 그랜 토리노로 아메리카를 질주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키고 싶은 미국적 가치는 무엇일까? ‘이 땅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라는 어느 시인의 외침 속에 성장한 동방의 이방인에게는 진정한 미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식민 제국인지 자유의 수호자인지에 관한 명확한 입장이 있을 뿐, 저 개척 시대와 독립 선언을 거쳐 자본주의 종주국에 이른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적 가치, 그 진정한 보수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의 쇠락을 바라보는 진정한 ‘아메리칸’의 회한은 무엇인지, 그 쇠락에 대한 반성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애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뿐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장엄함 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듯 말이다. 헨리 제임스가 쇠락해 가는 유럽에서 만났던 단단한 중핵, 그 숭고함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뻗어 나가는 힘 속에서 , 과거 우리를 속박했던 미국을 삼킬 수도 있다는 패기만만한 젊은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겨우 200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미국 자체가 이룩했던 것이라곤 어짜피 표피적인 물적 부에 그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전혀 개인적인 무감각, 몰 역사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떤 아메리카를 위해 식코의 무어 감독을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했는지 이다. 그랜 토리노의 그는 한국전에 참가했다. 그는 그 때 받은 훈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영광인 동시에 고통이다. 그 훈장이란 것이 결국 반항하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병(?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들을 학살하듯 죽인 대가라는 것을 그는 고통 속에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몽족 소년의 가슴에 그 훈장을 달아 준다. 그것은 어떤 아메리카적 가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자본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작은 식민지 하나를 개척했다? <미스틱 리버>의 월남전에 대한 상흔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불현듯 닥쳤고 겪어 내었고 고통 속에서도 상처를 봉합하고 아메리카를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비록 그 행렬 속에 누군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미국인이 보는 ‘아메리카’와 타자들, 특히 미국의 식민지민들이 보는 ‘아메리카’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의 고통스러운 반성은 때로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반성이 가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타자의 시각에는 명백한 ‘잘못’도, 그들에게는 어렴풋이 인식하는 것조차 그토록 힘겹다. 더욱이 진정한 문제는 그 ‘인식’ 혹은 ‘인정’으로 범죄 자체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은 스스로 인정했다는 그 사실에 도취되어 있다. 범죄 자체의 잔혹함은 오히려 깨달음의 황홀경을 위한 배경으로 전도된다. 그렇게 미국적 반성은 범죄의 은폐물이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그래서 극단적인 위험일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들에게 1차적으로 가장 위험하리라고 생각되지만, 타자들에게도 때때로 그 당당한 아름다움은 미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굽히지 않는 완고함만도 아니고 지식인의 섬세한 고뇌만도 아니다. 그 눈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것 같다. 나는 당당히 의지를 갖고 살았지만, 그것이 때론 과오를 저지르게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를 회피하지도 않았고 그 고통에 굴복 당하지도 않았다. 우리 삶은 느닷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지켜내야 할 어떤 가치가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성직자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는 필요하고 신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애초에 신을 몰랐으니 무신론자가 될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삶은 재난도 행운도 아니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했으니 지켜야 할 어떤 가치도 알지 못한다고, 때때로 막연히 우울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매혹 당한 이유는.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 노인의 깊은 주름에서 그 매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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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6월 26일 쓴 글입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화는 그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고향 제주의 갯내음을 안고 곧장 독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후 7년이 지나 개봉을 했지만, 영화에는 더 이상 뒷이야기가 없다. 그는 더 이상 경계인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했을까?

 

내가 송두율이라는 학자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아마 2003년, 그가 귀국하여 검찰 조사를 받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그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인가 아닌가로 논란이 뜨거울 때였는데, 그때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석연치 않았고 그의 두리뭉실한 사과는 그 석연치 않음을 더욱 석연치 않게 했다. 나는 그때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김철수인지 아닌지, 노동당 서열 23위인지 아닌지 그가 몰랐다는 것도, 그가 모르지는 않았다는 듯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가 독일에서 어떤 학문을 하고, 어떤 책을 썼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나는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가 남북의 통일을 위해 경계인으로 살고 싶어 했다는 것 외에는. 그가 김철수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남한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더라면 그가 내세운 ‘경계인’도 홍세화의 ‘똘레랑스’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키 워드가 될 수 있었을까? .... 나는 경계도시2를 보면서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사실 한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송두율이 구속 수감되기 전 대국민 사과 기자 회견을 하기 위해 송두율 진영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검찰은 이미 송두율이 김철수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여론 뿐 아니라 민주 진영조차 그 사실에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송두율은 여전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자기를 김철수라고 부르는 것을 인지한 시점이 스스로에게도 모호하고, 노동당에 가입했지만 일종의 요식행위라고 생각했고, 정치위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활동을 한 바 없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송두율은 김철수라 불리긴 했지만 사람들이 의심하는 그런 김철수는 아니고, 노동당 정치위원에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오로지 이름으로서만 정치위원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북한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오로지 경계인이었을 뿐, 북한도 남한도 아니었다. 그의 국적은 독일이었다. 독일인으로 남과 북의 경계에 서서 두 나라의 화해와 통일에 견인차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한은 그에게 실정법을 들이대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은 비단 국가보안법이라거나 하는 법체계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남한 사회는 한 목소리로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남이냐? 북이냐? 남한에서 살기 위해서는 북한을 부정해야 하고, 북에 갔던 것을 사과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의 ‘경계인’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 그의 국적 독일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야만 송두율은 남한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단호한 쪽은 오히려 부인이었다. ‘경계인’은 송두율의 정체성인데, 그 정체성을 포기하고 남한에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받아야 할 고난에는 의연했지만, 정체성을 잃은 남편은 더 이상 남편 송두율일 수 없음을 확언했다. 송두율 자신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송두율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두율의 입국을 추진했던 oo씨(이름을 모름;;)는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송두율이 개인의 양심만을 고집할 경우 민주 진영은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송두율이 노동당 서열23위임이 밝혀졌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났다. 통일 논의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초빙했던 송두율이 이제 통일 세력의 핵폭탄이 되었다는 듯이, 무조건 항복 외에는 자멸뿐이라는 듯이, 그는 극단의 언어를 쏟아 내었다. 그의 부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인’ 송두율을 포기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자, 화면 바깥쪽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극기를 휘감은 경계인도 많습니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왜 송두율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는지를. 그의 ‘경계인’이 왜 그렇게 맹숭맹숭했는지를. 그가 원한 것은 제3의 자리였다.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자리, 그 경계에 서서 제3의 객관적 시선과 판단을 원했다. 그 전지적 시점을. ... 가능할 것인가?

 

남에도 북에도 돌아 갈 수 없었던 최인훈의 ‘명준’은 바다 속을 택했다. 실제로 6.25 정전 후 제3국을 선택한 76명의 반공포로들은 남도 북도 모두 포기하고, 그냥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제3의 길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실제로 그가 김철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북한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가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지만 사실 북한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지식으로서의 북한이 아니라 실재의 북한, 북한이라는 곳의 삶, 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아마 남한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아니 김철수 사건을 겪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경계인으로서 부푼 꿈을 품고 남한의 공항에 내렸을 때,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는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자신을 지지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자신을 초빙했던 당사자들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세우고 사과하기를 주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남한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JSA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지도 모른다. 따뜻한 감성과 균형 잡힌 이성으로 형제애를 나누던 그 네 명의 군인들이 순식간에 갈라서서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그 순간에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믿고 있던 것의 차이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던 그 순간에 말이다. 어쩌면 인공기를 휘감고 있던 오경필(송강호)이야말로 경계인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유혈과 혼란의 현장에서 차분하게 이병헌에게 총을 쥐어주며 자신의 어깨를 쏘아 현장을 수습하게 하던 오경필은 어떤 의미에서 경계인이 아닐까....

 

나는 지금 송두율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사실 궁금하다. 가혹한 말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경계인이 되고자했다면 그의 남한에서의 경험이야말로 그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한 사회가 노동당원 김철수를 앞에 두고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던 그 순간에 보았던, 그리고 겪었던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남한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눈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가 오히려 진정한 김철수였기를 진심으로 바래보았다. 정치위원 김철수로서 그가 하고, 보고, 느꼈던 것이야말로 그에게 북한에 대해 진정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경계인이 그저 제3의 외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태극기를 휘감은 경계인이나 인공기를 휘감은 경계인 이외의 중립적, 객관적 경계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힘들고 힘든 고난의 길이다. 이미 김구 선생이 보여주었고, 문익환 목사가 보여주었 듯이 말이다.

 

경계 도시 2에서 보이는 송두율의 모습은 착하고 유약해 보였다, 우리가 천상 학자라고 말할 때의 그런 모습처럼 말이다. 그냥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해 연구하고 발언하는 송두율은 나쁘지도 않고 문제될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통일의 도구로 규정하고, 역사가 지우는 그 책임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의지가 있었다면 그는 이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저 잊히면 그만일 뿐이다. 노래 가사처럼 그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이.... 이 영화의 감독은 나레이션을 통해서 송두율 사건은 우리 사회에 던져진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것은 그대로 송두율 자신에게도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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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1일에 쓴 글입니다.

 

  영국 엄마들은 딸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꼽는다고 한다. 로맨스 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적잖이 본 내 눈에도「오만과 편견」은 아주 세련되고 대단히 기품 있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인다. (이 책의 문학사적 가치나 지위는 통속적 독자의 영역이 아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유럽의 오래된 구전동화로, 수 백 가지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왜 왕자님을 사랑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는 거의 없다. 왕자님은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의 대상이 된다. 왕자님이라는 기표 자체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결여가 없는 전체(Whole)이다. 전체로서의 왕자님은 하나하나의 특질로 분리되지 않는다. 왕자님의 고귀함은 왕자님의 부귀와 분리되지 않고, 왕자님의 인격은 왕자님의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왕자님은 분열된 대상이다. 현대적 신데렐라의 눈에 비친 왕자님의 부는 ‘타고난 운’에 불과하다. 왕자님의 부가 더 이상 왕자님의 인격 혹은 가치를 보증하지 못한다. 당차고 독립적인 신데렐라에게 왕자님의 부는 오만의 표상이거나 경멸의 대상이다. 더구나 현대판 신데렐라인 캔디는 ‘세상의 모든 일에 다 관심이 있어도, 딱 하나, 왕자님의 돈에 대해서만은 전혀 관심이 없어’야 한다.

  돈 밖에 없는 왕자님과 돈에만 무관심한 신데렐라, 이 어긋남이 어떻게 행복의 열쇠가 되는 것일까?

 

  균열이 봉합되는 방식은 왕자님의 과거에 외상을 도입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엄마나 아버지,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앓고 있다. 옛날 옛적의 왕자님은 완전한 전체-Whole 이지만, 현대의 왕자님은 구멍 뚫린 전체-(W)hole 이다. W를 상실한 (W)hole 이다.

  신데렐라의 기회는 여기, 이 구멍에 있다. 우연히 눈에 뜨인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잃어버린 ‘진실한 사랑’ -구멍 마개(hole gap) 이다. 이것이 예쁘지도 않고, 틱틱거리기까지 하는 신데렐라들에 왕자님들이 그토록 목매는 이유이다.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 만이 왕자님의 구멍 뚫린 세계를 완전한 세계로 마법처럼 바꾸어 준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이 마술을 부리는 것은 오직 왕자님의 세계 안에서 만이다. 진실한 사랑은 궁핍한 세계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돌부리처럼 발을 걸어 넘어뜨릴 뿐이다.

 

 

 

 

  드라마「청담동 앨리스」는 ‘진실한 사랑’에 관한 변증법이다.

  세경과 인찬은 가난한 연인이다.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 고 굳게 믿으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미래는 갈수록 마이너스이다. 헤어날 수 없는 빚더미 앞에 ‘진실한 사랑’은 장애물로 전락한다. 진실한 사랑을 지키려면 미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 없이는 진실한 사랑도 불가능하다.

  인찬은 세경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사랑을 배신한다. 세경은 사랑을 지키는 척 하면서, 사랑을 버린다. 세경의 꿈이 고스란히 담긴 적금 통장은 그렇게 승조에게 전달된다. 승조는 세경의 통장을 인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증표로 읽는다. 세경은 인찬과의 ‘진실한 사랑’을 버리기 위해 꿈을 모은 적금 통장을 넘겼지만, 승조는 그것의 의미를 정반대로 읽었던 것이다. 세경은 실종되었다고 믿었던 ‘진실한 사랑’ 그 자체가 되어, 승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경의 통장은 그렇게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오해를 낳으며,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사랑을 매개한다. 사랑의 시작은 오해이다.

  승조에게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전부이다. 승조는 사랑을 잃어버린 구멍 뚫린 왕자님이다. 세경의 ‘진실한 사랑’은 승조의 세계를 완벽한 Whole로 만들어 줄 구멍 마개이다.

   눈부시게 변신한 것은 세경이 아니라 세경의 ‘진실한 사랑’ 이다. 돌부리, 장애물로 버림받았던 ‘진실한 사랑’은 하루아침에 구원의 천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그 보다 더 나쁜 것이었던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변신했다. 단지 인찬에서 승조로 수신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난한 세계에서 부유한 세계로 장소를 이동했기 때문에, 단지.

  ‘단지’, 장소는 단지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진실한 사랑’의 진정하고 보편적인 가치란 없다. 그것은 어디에, 누구에 작용하는가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 보다 더 나쁜 것이 될 수도, 세상을 구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보통의 캔디-신데렐라 드라마는 여기서 행복하게 끝난다. 언제나 어디서나, 외로워도 슬퍼도 결국 캔디-신데렐라는 ‘진실한 사랑’을 되찾기 때문이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종이다. 그리고 진화가 변이라면, <청담동 앨리스>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의 진화이다.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가난하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어. 근데 이제 알았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노력해도 가난하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화를 내야 되는 거야. 훌륭한 사람들은 이럴 때 세상을 바꾸지. 근데 난 그런 사람 아니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나를 바꿀거야. 너처럼 살거야. 나 그거 갖고 싶어. 그 옷도 갖고 싶어 나도 너처럼 남자 잘 잡아서 청담동 들어갈거야. 사고 싶은 옷 다 사고 사고 싶은 명품 다 사고 가고 싶은 데도 다 가고 천원 이천원에 벌벌 떨지 않으면서 가족들한테 사람 노릇 하면서 그렇게 살거야. 나도 너처럼!!!"

 

  세경은 더 이상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로는 왕자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다. 왕자들의 세상과 신데렐라의 세상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왕자님들은 성 밖의 신데렐라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왕자님의 파티에 초대되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이상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작전과 계략이다.

  세경은 철저히 검어진다. 승조에게 발각 난 이후에도 세경은 멈추지 않는다. 추한 사랑이 진실한 사랑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까지 세경은 검어진다, 추해진다. 그리고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된다.

 

  대립물의 일치. 부정의 부정.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추한 사랑을 선택한다. 진실한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부정, 사랑의 내용을 부정한다. 그 다음 세경은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가에 대한 기준을 바꾸어 버린다. 승조도 더 이상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 추한 사랑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사랑을 측정하는 잣대, 그 형식에 대한 부정.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여기서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과 일치한다. 바뀐 것은 추한 것을 진실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엘리자베스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세경이 신데렐라가 되는 방법이다. 세경은 엘리자베스의 억압된 이면이다. 행복했던 신데렐라들의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한 사랑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 신데렐라들은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고, 사랑의 추잡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더욱 교활하고 더욱 대담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 수 없다면? 

  “나를 바꿀 수 없다면 나는 세상을 바꿀거야.” ...할 수 밖에 없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신데렐라에 대한 이중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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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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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잡설

 

  지젝을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 하나. 까뮈의 냄새가 나는 걸? 지인은 웃어 넘겼어. 실존주의는 폐기된 이론이라고. 실존주의? 물론 나는 모르지. 대학 때, 우연히 <시지프의 신화>를 읽었고, 까뮈를 찾아 헌책방까지 돌아다녔고, <반항인>은 내가 읽은 최초의 철학서쯤 되나? 까뮈의 소설들은 영 취미가 아니었지만, <시지프의 신화>와 <이방인>은 지금도 갖고 있지. 말하자면 까뮈는 내 철학적 인식의 기원?

  부조리한 세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 굴러 떨어지는 바위, 고통 속의 쾌락. “시지프의 말없는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 달라지는 건 없지. 바위는 어김없이 떨어져. 그래도 모든 것이 달라져. 바위를 떠맡고, 신을 운명에서 추방하자, 바위와 함께 운명은 오로지 나의 것이 되고, 고통은 삶의 생생한 기쁨이 되는 거야.

 

  실존주의는 왜 구박받는 걸까? 나도 모르지. 샤르트르를 읽은 적은 없어. 그래도 까뮈가 나는 좋아.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 첫 문장에 홀려버린 이래로 지금까지. 지젝에게 끌렸던 것도, 라캉에 이른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야. 닮았어, 뭔가. 구조에 갇혔지, 인간은. 언어에, 상징계에. 그래도 주체는 도약 할 수 있어. 믿음의 도약. 환상을 가로질러 심연과 마주하고. 인과의 매듭이 풀리는 한 순간, 사건이 일어나. 사건? 여기서 바디우 등장!

  바디우는 참 어려워. 몇 편의 글, 책 한권 정도지만. 더럽게 어렵더군. 그런데 오늘 본 바디우는 너무 너무 친절하고 쉬운 바디우였어.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와 루디네스코가 일테면 라캉을 두고 잡담을 한 거지. 100쪽 정도, 얇고 읽기 쉽고. 루디네스코는 라캉 전기를 쓴 정신분석가야. 엄마가 라캉의 동료였대. 어릴 때 라캉을 아저씨, 아저씨하고 불렀던 운 좋은 여자지. 덕분에 남들은 모르는 라캉의 시시콜콜 변덕스런 뒷얘기도 많이 알고. 이 여자가 쓴 라캉 전기는 두꺼워. 재미있다기 보다는 라캉, 이 웃기는 자식!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뭐 그런 면이 있는 책이야. 라캉이 생겨먹은 모습이 궁금하다면 추천. 하지만 라캉을 간명하게 알고 쉽다면 차라리 이 얇은 책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이 더 낫겠어. 루디네스코는 라캉을 “계몽적인 보수주의자”로, 바디우는 일종의 혁명가로 보고 있거든. 이 둘의 수다에서 라캉의 양면이 드러나지.  

  나는 바디우 편! 왜냐고? 오늘의 수확!! 내가 어떻게 지젝에게서 결과적으로 라캉에게서 까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 바디우가 시원하게 설명해 주고 있거든. 턱도 없이 실존주의를 갖다 붙인다고 구박받았던 그 서러움을 바디우씨께서 위로해 주셨다 뭐 그런 거지. 그럼 잡설은 이만, 끝.

 

 

2.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가 라캉을 자기 철학의 토대로 삼는 이유는 라캉적 “주체” 위치의 고유성 때문이다. 바디우는 라캉이 “현상학과 구조주의가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 p61”의 힘든 길을 걸었다고 표현한다.

  「 라캉의 이론적 저작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움직임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체 문제에 대해 아주 독특한 하나의 입장을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저는 다른 젊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앞서 말했듯, 저는 확신에 찬 사르트르주의자였어요. 그런데 알튀세르의 영향도 있었고, 사르트르가 대표하던 현상학과 단절할 때가 온 겁니다. 어째서 그런 피할 수 없는 단절이 있었을까요? p24」

  이어서 바디우는 “현상학은 주체의 사유를 의식 철학으로 몰아갔”다고 비판하면서, 이 때문에 주체는 의식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이해와 혼동되어 버렸다고 한다. 즉 주체란 반성적 자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혁명적 해방의 사유p25”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미 모든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모욕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p25”, 라캉은 이것의 세 가지 중요한 예를 들고 있다. 첫째는 우주론적 차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 둘째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윈의 진화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심리학적 차원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자아는 주체의 주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디우는 “반성적이고. 실존적인, 현상학적 주체 모델에서 빠져나올 필요가p25”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구조주의”가 그 탈출구였다.

  「구조주의는 현상학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구조주의의 깃발 아래 모인 잡다한 사유들은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어요. 바로 전통적 주체 이해에 대항하는 반란에 모두 동참한다는 점입니다. 구조주의의 성좌는, 알튀세르의 유명한 표현을 따른다면 “이론적 반인본주의”, 혹은 푸코를 인용한다면 “인간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p26」

  전통철학에서 주체 개념이란 “자기의식을 동반하는 개인 individual, 말 그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성” 을 가리킨다고 옮긴이 주해는 설명한다. 그런데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주체는 환상이거나, 구조가 만들어내는 효과에 불과하다며 주체 개념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현상학(혹은 실존주의)과 구조주의 사이에서 라캉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라캉은 일단 현상학자들과 단절한다. “모든 경험의 중심으로서의 반성적 주체p27” 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비반성적 구조”에 달려 있고, “개인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의식철학 대신 무의식의 과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 주체라는 범주만큼은 지키고 p27" 싶어 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임상경험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캉은 “구조주의자들의 맹공 속에서 주체를 구해낸p27"다.

 

  라캉에게 그리고 바디우에게 이 반쪼가리 ‘주체’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여기저기 읽은 책을 떠올려 본다면, 구조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not-all이다. 인과 사슬에 완벽하게 닫힌 세계라면, 주체의 자리는 없다. 자유도 없다. 그러나 상징계는 구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고, 이 구멍은 은폐되지만 메꾸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W(hole)이다. 이 구멍, 틈이 순간적으로 열릴 때, 주체는 출현한다. 바디우의 사건이 발생한다.

  「제 작업은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저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를 온당히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죠. p40 」

  바디우는 라캉의 “자신의 욕망에 타협하지 말라” 는 주장을 주체의 윤리적 행위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라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대담자인 루디네스코는 이에 반대하면서 라캉을 “계몽적 보수주의자”로 부른다. 라캉은 평생 정치적 행위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인간 다수성의 어두운 마법”을 경계했다고 한다. 라캉 자신이 어쨌든 바디우는 그의 사상에서 해방 정치의 싹을 본다.

  「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라캉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저의 방식이죠. 해방이, ‘법’을 비틀고 거기에서 예외를 만드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해방은 어떤 국지적 형상 속에서, 어떤 예외 속에서, 정해진 질서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 속에서 돌발하는 겁니다.p52」

 

  라캉의 학문 속에서 그 제자들이 바라보는 지점은 제 각각이다.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고 배반한다. 모호하고 다의적인 이론을 가진 라캉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라캉을 계승할 것인지, 어떤 라캉의 제자를 따를 것인지에 따라, 바디우의 라캉 해석은 적절할 수도 부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바디우의 라캉은 누구인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근본적인 차원에서 반대하는 루디네스코의 반론에 비추면 조금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오랜 만에 보는 쉽고 간명한 라캉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라캉과 실존주의의 관련성이 입증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너무도 반가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반복되지만, 현상학과 구조주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라캉과 그 결과로서의 윤리적 주체에 대한, 바디우의 종합적 설명을 덧붙인다. 복습용 ^^

 

  「1950~60년대의 전환기에 철학계는 쇠퇴하던 현상학(사르트르, 메를로퐁티)과 한창 도약하는 구조주의(레비스트로스,알튀세르,푸코 외 다수)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던 상황이었죠. 그런 데 이 두 경향 사이에서 라캉은 이론적으로 아주 독특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임상 경험에 의해 식견이 생기고 과학적 확실성의 모델에 의해 인도되어, 주체적 경험을 결정하는 체계로서 무의식 개념을 혁신했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부 다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현상학의 핵심을 이루던 주체 개념 -특히 주체를 의식과 자유의 이론에 결부시키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견지하려 했습니다. 라캉은 힘든 길을 걸었죠. 구조주의와 현상학이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를 말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 된 무의식이 주체의 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조주의의 유산을 끌어모아 재주조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윤리적 성격의 자유로운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을 단언함으로써 주체의 개념을 그 모든 급진성에 재구성하죠. 라캉의 주요한 세미나들 중 하나가 ‘정신분석의 윤리’ 라고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윤리적 차원은 주체 자신이 자기 욕망의 구조를 단언하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라캉의 유명한 표현을 고쳐 말한다면, 명령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인데, 라캉은 이 표현이 대체로 ‘자신의 의무를 행하라’는 의미라고 말하곤 했죠.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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