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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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잡설

 

  지젝을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 하나. 까뮈의 냄새가 나는 걸? 지인은 웃어 넘겼어. 실존주의는 폐기된 이론이라고. 실존주의? 물론 나는 모르지. 대학 때, 우연히 <시지프의 신화>를 읽었고, 까뮈를 찾아 헌책방까지 돌아다녔고, <반항인>은 내가 읽은 최초의 철학서쯤 되나? 까뮈의 소설들은 영 취미가 아니었지만, <시지프의 신화>와 <이방인>은 지금도 갖고 있지. 말하자면 까뮈는 내 철학적 인식의 기원?

  부조리한 세계,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유, 굴러 떨어지는 바위, 고통 속의 쾌락. “시지프의 말없는 모든 기쁨이 거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바라볼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한다.” 달라지는 건 없지. 바위는 어김없이 떨어져. 그래도 모든 것이 달라져. 바위를 떠맡고, 신을 운명에서 추방하자, 바위와 함께 운명은 오로지 나의 것이 되고, 고통은 삶의 생생한 기쁨이 되는 거야.

 

  실존주의는 왜 구박받는 걸까? 나도 모르지. 샤르트르를 읽은 적은 없어. 그래도 까뮈가 나는 좋아.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이 첫 문장에 홀려버린 이래로 지금까지. 지젝에게 끌렸던 것도, 라캉에 이른 것도 아마 그래서일 거야. 닮았어, 뭔가. 구조에 갇혔지, 인간은. 언어에, 상징계에. 그래도 주체는 도약 할 수 있어. 믿음의 도약. 환상을 가로질러 심연과 마주하고. 인과의 매듭이 풀리는 한 순간, 사건이 일어나. 사건? 여기서 바디우 등장!

  바디우는 참 어려워. 몇 편의 글, 책 한권 정도지만. 더럽게 어렵더군. 그런데 오늘 본 바디우는 너무 너무 친절하고 쉬운 바디우였어.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와 루디네스코가 일테면 라캉을 두고 잡담을 한 거지. 100쪽 정도, 얇고 읽기 쉽고. 루디네스코는 라캉 전기를 쓴 정신분석가야. 엄마가 라캉의 동료였대. 어릴 때 라캉을 아저씨, 아저씨하고 불렀던 운 좋은 여자지. 덕분에 남들은 모르는 라캉의 시시콜콜 변덕스런 뒷얘기도 많이 알고. 이 여자가 쓴 라캉 전기는 두꺼워. 재미있다기 보다는 라캉, 이 웃기는 자식!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뭐 그런 면이 있는 책이야. 라캉이 생겨먹은 모습이 궁금하다면 추천. 하지만 라캉을 간명하게 알고 쉽다면 차라리 이 얇은 책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이 더 낫겠어. 루디네스코는 라캉을 “계몽적인 보수주의자”로, 바디우는 일종의 혁명가로 보고 있거든. 이 둘의 수다에서 라캉의 양면이 드러나지.  

  나는 바디우 편! 왜냐고? 오늘의 수확!! 내가 어떻게 지젝에게서 결과적으로 라캉에게서 까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 바디우가 시원하게 설명해 주고 있거든. 턱도 없이 실존주의를 갖다 붙인다고 구박받았던 그 서러움을 바디우씨께서 위로해 주셨다 뭐 그런 거지. 그럼 잡설은 이만, 끝.

 

 

2. <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바디우가 라캉을 자기 철학의 토대로 삼는 이유는 라캉적 “주체” 위치의 고유성 때문이다. 바디우는 라캉이 “현상학과 구조주의가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 p61”의 힘든 길을 걸었다고 표현한다.

  「 라캉의 이론적 저작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움직임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주체 문제에 대해 아주 독특한 하나의 입장을 정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저는 다른 젊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앞서 말했듯, 저는 확신에 찬 사르트르주의자였어요. 그런데 알튀세르의 영향도 있었고, 사르트르가 대표하던 현상학과 단절할 때가 온 겁니다. 어째서 그런 피할 수 없는 단절이 있었을까요? p24」

  이어서 바디우는 “현상학은 주체의 사유를 의식 철학으로 몰아갔”다고 비판하면서, 이 때문에 주체는 의식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투명한 이해와 혼동되어 버렸다고 한다. 즉 주체란 반성적 자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지성계는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혁명적 해방의 사유p25”라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미 모든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모욕을 가져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p25”, 라캉은 이것의 세 가지 중요한 예를 들고 있다. 첫째는 우주론적 차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 둘째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윈의 진화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 않다. 셋째는 심리학적 차원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자아는 주체의 주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디우는 “반성적이고. 실존적인, 현상학적 주체 모델에서 빠져나올 필요가p25”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구조주의”가 그 탈출구였다.

  「구조주의는 현상학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구조주의의 깃발 아래 모인 잡다한 사유들은 적어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어요. 바로 전통적 주체 이해에 대항하는 반란에 모두 동참한다는 점입니다. 구조주의의 성좌는, 알튀세르의 유명한 표현을 따른다면 “이론적 반인본주의”, 혹은 푸코를 인용한다면 “인간의 죽음”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p26」

  전통철학에서 주체 개념이란 “자기의식을 동반하는 개인 individual, 말 그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성” 을 가리킨다고 옮긴이 주해는 설명한다. 그런데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주체는 환상이거나, 구조가 만들어내는 효과에 불과하다며 주체 개념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현상학(혹은 실존주의)과 구조주의 사이에서 라캉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라캉은 일단 현상학자들과 단절한다. “모든 경험의 중심으로서의 반성적 주체p27” 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비반성적 구조”에 달려 있고, “개인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의식철학 대신 무의식의 과학을 선택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 주체라는 범주만큼은 지키고 p27" 싶어 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임상경험의 핵심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캉은 “구조주의자들의 맹공 속에서 주체를 구해낸p27"다.

 

  라캉에게 그리고 바디우에게 이 반쪼가리 ‘주체’는 왜 이렇게 중요할까? 여기저기 읽은 책을 떠올려 본다면, 구조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는 not-all이다. 인과 사슬에 완벽하게 닫힌 세계라면, 주체의 자리는 없다. 자유도 없다. 그러나 상징계는 구멍을 중심으로 구조화되고, 이 구멍은 은폐되지만 메꾸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W(hole)이다. 이 구멍, 틈이 순간적으로 열릴 때, 주체는 출현한다. 바디우의 사건이 발생한다.

  「제 작업은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저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를 온당히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죠. p40 」

  바디우는 라캉의 “자신의 욕망에 타협하지 말라” 는 주장을 주체의 윤리적 행위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라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대담자인 루디네스코는 이에 반대하면서 라캉을 “계몽적 보수주의자”로 부른다. 라캉은 평생 정치적 행위에 참여한 적이 없으며, “인간 다수성의 어두운 마법”을 경계했다고 한다. 라캉 자신이 어쨌든 바디우는 그의 사상에서 해방 정치의 싹을 본다.

  「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에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면, 라캉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라캉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저의 방식이죠. 해방이, ‘법’을 비틀고 거기에서 예외를 만드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해방은 어떤 국지적 형상 속에서, 어떤 예외 속에서, 정해진 질서 속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균열 속에서 돌발하는 겁니다.p52」

 

  라캉의 학문 속에서 그 제자들이 바라보는 지점은 제 각각이다. 제자는 스승을 넘어서고 배반한다. 모호하고 다의적인 이론을 가진 라캉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라캉을 계승할 것인지, 어떤 라캉의 제자를 따를 것인지에 따라, 바디우의 라캉 해석은 적절할 수도 부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바디우의 라캉은 누구인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해석에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근본적인 차원에서 반대하는 루디네스코의 반론에 비추면 조금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오랜 만에 보는 쉽고 간명한 라캉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라캉과 실존주의의 관련성이 입증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너무도 반가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반복되지만, 현상학과 구조주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라캉과 그 결과로서의 윤리적 주체에 대한, 바디우의 종합적 설명을 덧붙인다. 복습용 ^^

 

  「1950~60년대의 전환기에 철학계는 쇠퇴하던 현상학(사르트르, 메를로퐁티)과 한창 도약하는 구조주의(레비스트로스,알튀세르,푸코 외 다수)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던 상황이었죠. 그런 데 이 두 경향 사이에서 라캉은 이론적으로 아주 독특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임상 경험에 의해 식견이 생기고 과학적 확실성의 모델에 의해 인도되어, 주체적 경험을 결정하는 체계로서 무의식 개념을 혁신했죠.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부 다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현상학의 핵심을 이루던 주체 개념 -특히 주체를 의식과 자유의 이론에 결부시키는 사르트르의 개념-을 견지하려 했습니다. 라캉은 힘든 길을 걸었죠. 구조주의와 현상학이 가파른 사면을 이루는 능선 위를 말입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처럼’ 구조화 된 무의식이 주체의 구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조주의의 유산을 끌어모아 재주조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윤리적 성격의 자유로운 위험을 떠안을 가능성을 단언함으로써 주체의 개념을 그 모든 급진성에 재구성하죠. 라캉의 주요한 세미나들 중 하나가 ‘정신분석의 윤리’ 라고 명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윤리적 차원은 주체 자신이 자기 욕망의 구조를 단언하고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라캉의 유명한 표현을 고쳐 말한다면, 명령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것인데, 라캉은 이 표현이 대체로 ‘자신의 의무를 행하라’는 의미라고 말하곤 했죠.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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