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4일에 쓴 글입니다.

 

 

곰동씨가 가끔 세상이 망해버리기를 바란다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씩 세상이 망하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살짝 든다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세상의 멸망을 세상이 끝장난 듯이 보여 주려하는 영화들은 그 거대한 재난을 어떻게든지 막아보려는 인간의 필사적 노력과 눈물겨운 인간애를 영웅담으로 버무려 놓지만, 영화 제작자들이 지구 연합 사령부도 아니고 독수리 오형제도 아닌데 해마다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동씨는 슬쩍 궁금해진 것이다. 혜성이 충돌한다, 쓰나미가 덮친다, 지각이 이동한다, 외계인이 공격한다, 기타 등등등, 육해공을 넘어 우주까지 총동원된 이 전 세계적 '대한 뉘우성' 재난 경고 영화들이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 되는 것은 지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쫄딱 망해주길 바라는 은밀한 욕망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땅이 쩍쩍 갈라지고, 시뻘건 불덩이가 하늘을 메우고, 산더미 같은 해일이 빌딩을 집어 삼키는 장엄한 CG 너머에 또는 아래로, 그 욕망을 둘러싼 원환의 회오리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따위로 영화를 가늠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 않을까 곰동씨는 생각하며, 조금은 늙어 보여 마음이 아픈 존 쿠삭의 <2012>를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재난 영화가 흔히 그렇듯 파괴된 가족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쫒겨나고 엄마는 양부와 결혼해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지만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생부와 양부가 손을 잡은 것이다. 워낙 막강 재난이라 원수와도 손잡을 다급한 판이 아닐까 곰동씨는 잠깐 반문했지만, 어쨌든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곰동씨는 쫒겨 난 아버지가 새 아버지와 힘을 합쳐 가족을 구했다는 영웅담을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이면 그건 곧 남편이 둘? 에 생각이 퍼뜻 미치자, 곰동씨는 웃는 듯도 하고 찡그리는 듯도 한 표정을 짓는다. 두 명의 남편이 좋은지 나쁜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곰동씨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영화는 한 고비를 넘기자 양부를 사정없이 죽여 버린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하나인 법이다. 곰동씨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하나인) 법이다’ 엄정하고 절대적인 법을 서슬 푸르게 선언하던 과거의 아버지에 비해 거의 쫒겨나다시피 한 오늘날의 아버지가 법일 수 있을까 혹은 법 자체가 이미 쫒겨난 아버지처럼 바닥에 처박힌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법이 아닌 척 하는 법, 모든 것이 그저 욕망에 맡겨진 듯 보이는 세상의 법이야말로 가장 가혹하고 냉엄한 법은 아닐까 곰동씨는 생각해 보지만, 별로 자신이 없다. 아버지를 법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법이 아버지라고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인지, 법이 없는 세상은 없지만 그것이 꼭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인지, 오디푸스와 앙띠오디푸스 따위 기타 등등의 역사 속에 아버지와 법의 관계가 이제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곰동씨는 푸념한다. 몇 권의 책을 읽은 듯도 하고 귀동냥도 한 것 같긴 한데, 여전히 곰동씨는 회색암흑(그냥 멋져서 한번 써본 말일 뿐이다, 어제 어떤 책에서 읽었다) 속에서 헤매고 있다.

 

함께 영화를 본 이웃동네 ㅇㅇ씨의 말을 곰동씨는 기억한다. “그런데 왜들 이렇게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복원시키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아버지를 잃어버렸다는 불안감 때문이 아닐까요? <2012>에서 재난은 명백하게 자연 재해로 그려지지만 거꾸로 아버지의 상실이 이 재난을 불러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다문화주의적 요구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금지라는 성가신 법도 없지만,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게임 외에는 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곰동씨는 그렇다면 아버지가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늘 불친절한 ㅇㅇ씨는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난다고만 했을 뿐 곰동씨가 알아 들을 수 있게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ㅇㅇ씨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ㅇㅇ씨의 세상에서 ‘친절함’은 늘 이 세상에서는 ‘불친절함’으로 보여지는 아인슈타인적 상대성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었건 간에 양부는 죽었고 가족은 이전 보다 더 단단한 가족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아직 세상이 폭삭 망한 것은 아니다. 사실 망한 척만 했을 뿐 전혀 망한 것이 아닌데다가 어쩌면 일종의 페인트 모션이었다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어릴 때 엄마들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을 협박하던 그 수법이다. 말 안 들으면 엄마가 콱 죽어 버린다. 콱 죽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영악한 놈마저도 혹시나 진짜 엄마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할까라는 순간적인 의문이 스치는 그 찰나적인 순간에 이미 무지막지한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뻔한 거짓말의 약발은 그리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는 잠깐 새로움을 보여주는 듯 하다가 오히려 가장 뻔뻔한 스토리로 돌아가 버린다.

 

세상이 망하지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있을 리가 없다. 생부가 죽고 양부가 살아서 가족을 구원한다든가, 생부도 죽고 양부도 죽었는데 엄마가 자식들을 구한다든가, 엄마도 죽었지만 오빠가 여동생을 구한다든가, 여동생도 죽었지만 세상은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다시 열린다든가, 기타 등등...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견디라는 것에 대한, 다문화주의 시대에 꼴리는 대로 살라는 충동질에 대한, 환멸은 다시 옛날의 그 권위적인 아버지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은, 서당개도 알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재난 영화는 마치 예전의 바로 그 아버지의 귀환이 구원의 상징인 것처럼 가족의 재결합을 완성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해낸다.

 

그런데 사실 곰동씨도 마냥 욕을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니다. 세상이 폭삭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곰동씨에게도 있다. 예전에 어떤 세상이 폭삭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는데 그 세상 역시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폭삭 망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단단한 땅을 가졌는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지금 사는 세상을 탕탕 부셔버릴 용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곰동씨는.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의 단단하기를 미리 측정해 볼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세상이 거대한 심연 속으로 장엄하게 가라앉고, 자욱한 분진이 걷힌 후에라야 새로운 세상이란 놈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퇴양난이다. 일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는데, 그 다음이야 말로 회색 암흑이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소심한 곰동씨로서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 속담이 솔깃한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영화는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곰동씨의 속도 덩달아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그 과학자가 양심이랍시고 연설을 하고 자빠지신다. 갑판의 사람들을 다 태워야 한단다. 그런데 그 갑판 위의 사람들이 누구인가? 애초에 10억 유로씩 내고 세 번째인가 함선에 타게 되어있던 갑부들이다. 아, 물론 중국인 노동자들도 있다. 처음 승선이 시작될 때 내리라고 했던 함선 인부들도 그 갑부들과 섞여 있긴 하다. 여기엔 옆 동네 ㅁㅁ씨가 한 재미난 말이 있다. “그건 인도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이죠. 신세계를 건설할 노동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속도전이 가능한 중국인 노동자들인 걸요. 그러니 버리고 갈 수는 없죠.”

 

방향 감각이 거의 없는 곰동씨가 이렇게 옆길로 새기 시작하면 제 길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곰동씨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곰동씨는 재빨리 10억 유로로 돌아온다. 애초에 그 함선들에 탈 사람들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선정되지 않았다. 최후의 시간이 돌아 올 때까지 사람들은 그것이 종말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잠깐 기도할 시간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애초에 새로운 세상을 위한 법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거기에 그 잘난 인도주의란 없었다. 10억 유로가 있든가 아니면지구상에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 준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거나 (물론 명시된 바는 없지만 함선을 만들거나 운항할 과학자나 기술자 따위를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각 국가의 (그것도 선진 10여 개국 안에 속해야 할 듯하지만) 통치권자라든가 하는 일방적인 기준이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 기준에 대한 지구인들의 합의나 의사소통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법은 그냥 폭력적으로 법으로 선포되었을 뿐이다. 그런 폭력적 정초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합법이라든가 적법이라든가 따위의 법에 의한 보호 운운에 의해 보호받거나 처벌 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법의 기원을 보장해 주는 법이란 것은 없다.

렇다고 곰동씨가 그런 법은 무효라거나 비민주적이라거나 따위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곰동씨도 이런 저런 귀동냥과 몇 권의 책 덕분에 그 정도로 고지식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법이란 것은 원래 그렇게 텅 빈 것이고, 법의 기원은 그냥 폭력적 선언일 뿐이란 말에 곰동씨도 동의하는 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를 때때로 금과옥조로 삼기도 하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면에서 유효할 따름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곰동씨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곰동씨가 열이 받았다는 것이냐고 성질을 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곰동씨가 열이 받은 것은 법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원래 그런 법의 잔인함을 턱도 없이 ‘인도주의’ 따위를 운운하며 덮어 보려는 그 교활함과 사악함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곰동씨는 함께 본 여러 씨들에게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식으로 양심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도 거기 온 사람들은 10억유로씩 내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그 가증스러운 인도주의라니! 그것으로 처음부터 배제한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 폭력을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때 옆 동네의 그 ㅇㅇ씨는 “그런 면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은 그 장관 이예요. 자신의 논리에 맞는 행동이잖아요. 목적은 인류의 생존이지 양심의 구원이 아니니까요.” 라고 했었다.

 

그랬다. 사실 그건 인류 생존 프로젝트일 따름이었다. 곰동씨는 웃기긴 하지만 만약 진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솔직히 10억유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꼭 돈이 있어야 배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야 구구할 수 있겠지만 무엇인가 그런 무조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1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서 민주적 절차를 밟고 따위의 생각은 오히려 망상에 더 가까우리라고 곰동씨는 지금도 생각한다. 곰동씨가 말하려는 것은 그 폭력적 법 세우기는 그것으로 좋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원칙은 끝까지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래도 최소한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존한 인류의 신세계라는 것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차라리 잔인하게 웃으며 ,갈라진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의, 공포에 찬 굳은 눈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것, 끝까지 잔인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윤리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양심에 상처가 있다면, 기원적 배반에 대한 가릴 수 없는 간극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뎌내라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악마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인권이라는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세계를 세우고 보니, 그 구멍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죠. 그 사람들이라도 태워서 양심을 구원해야한다. 그래야만 최초의 배반, 그 근원적 폭력이 은폐될 수 있다? 선이라는 것은 차라리 기만이군요.” 곰동씨는 그 과학자의 위선을 이렇게 표현했었는데, 옆에 있던 모모씨가 결론을 내리듯 덧붙였다. “기만적이지만 그 기만 없이는 세상이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닐까요? ㅎㅎ 그것으로 최초에 배제한 인간들은 영원히 잊혀지고, 인간성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신세계가 열리는 거죠.”

 

곰동씨는 그 때 ㅇㅇ씨, ㅁㅁ씨, 모모씨 등과 영화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했다. 뭐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든, 세상이 망하길 바라는 욕망 때문이든 재난 영화의 반복은 어떤 학습 효과를 갖는 것 같다. 실제로 재난이 닥쳤을 때 너무 익숙한 상황이라 좀 덜 당황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2020년 경인가 딥 임팩트 같은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 우주로 나가 폭탄을 심어 터트릴 것 같은 것이다. 하긴 언젠가 지구가 망하기는 망할 것이라고 곰동씨는 생각한다. 지구가 망하고, 태양이 꺼지고, 어쩌면 우주 전체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르고... 태양이 45억년 살았으니 아마 자연사 한다면 50억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는 점점 식어가는 태양 때문에 아마도 더 빨리 멸망할 것이고, 그것도 자연사 한다면 그렇지만 말이다. 하긴 그것 보다 더 급한 불이 있긴하다고 곰동씨는 웃는다. 3년 뒤에 외계인들을 데리고 오겠다든 디스트릭트9의 그 외계인이 돌아와 인간의 씨를 깡그리 말려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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