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1일 쓴 글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멋지다.

그랜 토리노가 무엇을 말하려하든, 그랜 토리노에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이건 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말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이 노배우에 관해 아는 것이 있다거나(솔직히 ‘많다거나’가 아니다.) 그의 팬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형형한 눈빛과 은색의 짧게 깍은 머리, 당당한 어깨를 빼놓고는 그랜 토리노를 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하다. 아마도 그 모습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진정 보여 주고 싶은 오늘날의 ‘미국’, 바로 그 자체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늙고 쇠락했지만 지는 해처럼 아름다운 혹은 꺼져가는 노을처럼 안타까운 모습 말이다.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1877년 작품이다. 장사와 주식으로 떼돈을 번 미국의 젊은 사업가가 유럽으로 건너와 유럽의 오래된 문화와 귀족 사회를 접촉하면서 겪는 일들을 통해 우아하지만 음흉하고 쇠락한 유럽과 활기차고 투명한 젊은 미국을 세밀하게 대비하고 있는 소설이다. 불과 130여 년 전만해도 미국은 힘차고 밝고 생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우리가 기만 속에 들어 왔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아!,아! XXXX” 란 노래에 적합한 나라가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있다면, 마땅히 그 나라여야 할 듯한 아 메 리 카, 바로 그 아메리카라는 젊은 청년 말이다. 물론 <아메리칸>의 주인공은 그 젊음과 막대한 부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유럽의 모호한 중핵으로서의 그녀라고 할 수도 있는, 그 귀족 부인을 얻지 못하지만 말이다. 유럽이라는 낡은 성은 곧 허물어 질듯 하면서도 바로 그 때문에 더욱 신비롭고 더욱 모호하고 더욱 매력적이며, 그래서 자신감만 충만한 순진한 청년에게는 쉽사리 열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좌절로서 굳게 닫혀있다. 비록 그 성 안에는 낡은 거미줄과 기울어진 문 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이 투명한 아직은 순박한 청년 ‘아메리칸’에게는 성을 걸어 잠근 육중한 문은 그 자체로 성의 견고한 가치로 인식된다. 성 안에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귀족 부인이 외로이 갇혀 있을 것이다...

 

고작 130여 년이 지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카’는 창고 안의 움직이지 않는 그랜 토리노이다. 한국전과 포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그랜 토리노는 이제 이방인 갱 패거리들이 노리는 한낱 노획품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총 한 자루 이외에는 그 시시껄렁한 애새끼들을 몰아 낼 방법도 없다. 자식들은 멀리 있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하지도 이어받으려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랜 토리노를 탐낼 뿐이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단순히 값나가는 빈티지 차가 아니다. 그랜 토리노는 물려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물려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 자본주의적 가치의 성지, 아메리카를 지켜낼 수 있는 자만이 그랜 토리노의 진정한 상속인이다. 그것이 폴란드계건 이태리계건 몽족이건 말이다.

 

처음에 몽족은 이방인 침입자였다. 말도 예의도 통하지 않는 낯선 야만인. 그러나 그의 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타자들이다. 싹싹하고 착하든, 진중하고 과묵하든, 껄렁거리고 위험하든, 히스페닉이건 몽족이건 모두 타자이다. 타자 없는 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싫든 좋든 그들과 엮이고 그들의 삶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싫다면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의 핏줄은 모두 그를 떠나 그가 혐오하는 천박하고 무가치한 세계를 살고 있다. 그는 타자와 함께 존재하거나, 핏줄과 함께 무가치한 세계에 생존해야 한다. 그는 몽족의 과묵하고 착실한 남자 아이를 진정한 ‘아메리칸’으로 만들기로 한다. 거친 남자들의 농담, 아메리카를 건설했던 기술, 미인을 꼬드기는 방법까지. 그러나 정의를 명분으로 한 어설픈 힘의 과시는 몽족 갱들의 보복을 불러 오고, 남자 아이의 누나는 처참한 유린을 당한다. 과거의 힘에 대한 무의식적 과신이 불러 온 참담한 결과는 그를 어떤 선택으로 몰아간다. 죽거나 혹은 또 죽거나! 고개를 숙이고 죽어 살거나, 대의 속에 살아 죽거나. 대의의 세계에서 죽거나 생물학적으로 죽거나. 이제 그에게는 그 자신의 대의가 속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면 그 세계 자체가 쇠락하여 죽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은 핏빛 노을처럼 저무는 것이다. 매트릭스 3부의 네오처럼, 혹은 진정한 God처럼 죽음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몽족의 사내 아이는 그의 개를 옆에 앉히고 그랜 토리노로 아메리카를 질주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키고 싶은 미국적 가치는 무엇일까? ‘이 땅은 아메리카의 식민지’라는 어느 시인의 외침 속에 성장한 동방의 이방인에게는 진정한 미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식민 제국인지 자유의 수호자인지에 관한 명확한 입장이 있을 뿐, 저 개척 시대와 독립 선언을 거쳐 자본주의 종주국에 이른 미국이란 나라의 본질적 가치, 그 진정한 보수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의 쇠락을 바라보는 진정한 ‘아메리칸’의 회한은 무엇인지, 그 쇠락에 대한 반성의 의의는 무엇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애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뿐이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장엄함 속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지듯 말이다. 헨리 제임스가 쇠락해 가는 유럽에서 만났던 단단한 중핵, 그 숭고함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뻗어 나가는 힘 속에서 , 과거 우리를 속박했던 미국을 삼킬 수도 있다는 패기만만한 젊은 대한민국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겨우 200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미국 자체가 이룩했던 것이라곤 어짜피 표피적인 물적 부에 그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전혀 개인적인 무감각, 몰 역사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떤 아메리카를 위해 식코의 무어 감독을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했는지 이다. 그랜 토리노의 그는 한국전에 참가했다. 그는 그 때 받은 훈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영광인 동시에 고통이다. 그 훈장이란 것이 결국 반항하지도 못하는 어린 소년병(?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들을 학살하듯 죽인 대가라는 것을 그는 고통 속에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몽족 소년의 가슴에 그 훈장을 달아 준다. 그것은 어떤 아메리카적 가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자본주의를 수호했다? 혹은 작은 식민지 하나를 개척했다? <미스틱 리버>의 월남전에 대한 상흔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불현듯 닥쳤고 겪어 내었고 고통 속에서도 상처를 봉합하고 아메리카를 위해 거리를 행진한다. 비록 그 행렬 속에 누군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 할지라도.

 

미국인이 보는 ‘아메리카’와 타자들, 특히 미국의 식민지민들이 보는 ‘아메리카’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의 고통스러운 반성은 때로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반성이 가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타자의 시각에는 명백한 ‘잘못’도, 그들에게는 어렴풋이 인식하는 것조차 그토록 힘겹다. 더욱이 진정한 문제는 그 ‘인식’ 혹은 ‘인정’으로 범죄 자체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은 스스로 인정했다는 그 사실에 도취되어 있다. 범죄 자체의 잔혹함은 오히려 깨달음의 황홀경을 위한 배경으로 전도된다. 그렇게 미국적 반성은 범죄의 은폐물이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그래서 극단적인 위험일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들에게 1차적으로 가장 위험하리라고 생각되지만, 타자들에게도 때때로 그 당당한 아름다움은 미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인들 자신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실제로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굽히지 않는 완고함만도 아니고 지식인의 섬세한 고뇌만도 아니다. 그 눈은 마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것 같다. 나는 당당히 의지를 갖고 살았지만, 그것이 때론 과오를 저지르게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를 회피하지도 않았고 그 고통에 굴복 당하지도 않았다. 우리 삶은 느닷없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지켜내야 할 어떤 가치가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성직자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는 필요하고 신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애초에 신을 몰랐으니 무신론자가 될 필요도 없고, 처음부터 삶은 재난도 행운도 아니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했으니 지켜야 할 어떤 가치도 알지 못한다고, 때때로 막연히 우울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매혹 당한 이유는. 그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지라도, 나는 그 노인의 깊은 주름에서 그 매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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