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1일에 쓴 글입니다.

 

  영국 엄마들은 딸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으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꼽는다고 한다. 로맨스 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적잖이 본 내 눈에도「오만과 편견」은 아주 세련되고 대단히 기품 있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인다. (이 책의 문학사적 가치나 지위는 통속적 독자의 영역이 아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유럽의 오래된 구전동화로, 수 백 가지의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신데렐라는 왜 왕자님을 사랑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독자는 거의 없다. 왕자님은 그 자체로 충분히, 사랑의 대상이 된다. 왕자님이라는 기표 자체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결여가 없는 전체(Whole)이다. 전체로서의 왕자님은 하나하나의 특질로 분리되지 않는다. 왕자님의 고귀함은 왕자님의 부귀와 분리되지 않고, 왕자님의 인격은 왕자님의 권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왕자님은 분열된 대상이다. 현대적 신데렐라의 눈에 비친 왕자님의 부는 ‘타고난 운’에 불과하다. 왕자님의 부가 더 이상 왕자님의 인격 혹은 가치를 보증하지 못한다. 당차고 독립적인 신데렐라에게 왕자님의 부는 오만의 표상이거나 경멸의 대상이다. 더구나 현대판 신데렐라인 캔디는 ‘세상의 모든 일에 다 관심이 있어도, 딱 하나, 왕자님의 돈에 대해서만은 전혀 관심이 없어’야 한다.

  돈 밖에 없는 왕자님과 돈에만 무관심한 신데렐라, 이 어긋남이 어떻게 행복의 열쇠가 되는 것일까?

 

  균열이 봉합되는 방식은 왕자님의 과거에 외상을 도입하는 것이다. 왕자님은 엄마나 아버지,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앓고 있다. 옛날 옛적의 왕자님은 완전한 전체-Whole 이지만, 현대의 왕자님은 구멍 뚫린 전체-(W)hole 이다. W를 상실한 (W)hole 이다.

  신데렐라의 기회는 여기, 이 구멍에 있다. 우연히 눈에 뜨인 신데렐라는 왕자님이 잃어버린 ‘진실한 사랑’ -구멍 마개(hole gap) 이다. 이것이 예쁘지도 않고, 틱틱거리기까지 하는 신데렐라들에 왕자님들이 그토록 목매는 이유이다.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 만이 왕자님의 구멍 뚫린 세계를 완전한 세계로 마법처럼 바꾸어 준다.

  그러나 신데렐라의 ‘진실한 사랑’이 마술을 부리는 것은 오직 왕자님의 세계 안에서 만이다. 진실한 사랑은 궁핍한 세계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다. 돌부리처럼 발을 걸어 넘어뜨릴 뿐이다.

 

 

 

 

  드라마「청담동 앨리스」는 ‘진실한 사랑’에 관한 변증법이다.

  세경과 인찬은 가난한 연인이다.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 고 굳게 믿으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미래는 갈수록 마이너스이다. 헤어날 수 없는 빚더미 앞에 ‘진실한 사랑’은 장애물로 전락한다. 진실한 사랑을 지키려면 미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 없이는 진실한 사랑도 불가능하다.

  인찬은 세경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사랑을 배신한다. 세경은 사랑을 지키는 척 하면서, 사랑을 버린다. 세경의 꿈이 고스란히 담긴 적금 통장은 그렇게 승조에게 전달된다. 승조는 세경의 통장을 인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증표로 읽는다. 세경은 인찬과의 ‘진실한 사랑’을 버리기 위해 꿈을 모은 적금 통장을 넘겼지만, 승조는 그것의 의미를 정반대로 읽었던 것이다. 세경은 실종되었다고 믿었던 ‘진실한 사랑’ 그 자체가 되어, 승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경의 통장은 그렇게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오해를 낳으며,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사랑을 매개한다. 사랑의 시작은 오해이다.

  승조에게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전부이다. 승조는 사랑을 잃어버린 구멍 뚫린 왕자님이다. 세경의 ‘진실한 사랑’은 승조의 세계를 완벽한 Whole로 만들어 줄 구멍 마개이다.

   눈부시게 변신한 것은 세경이 아니라 세경의 ‘진실한 사랑’ 이다. 돌부리, 장애물로 버림받았던 ‘진실한 사랑’은 하루아침에 구원의 천사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혹은 그 보다 더 나쁜 것이었던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변신했다. 단지 인찬에서 승조로 수신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난한 세계에서 부유한 세계로 장소를 이동했기 때문에, 단지.

  ‘단지’, 장소는 단지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가치를 결정하는 곳이다. ‘진실한 사랑’의 진정하고 보편적인 가치란 없다. 그것은 어디에, 누구에 작용하는가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 보다 더 나쁜 것이 될 수도, 세상을 구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보통의 캔디-신데렐라 드라마는 여기서 행복하게 끝난다. 언제나 어디서나, 외로워도 슬퍼도 결국 캔디-신데렐라는 ‘진실한 사랑’을 되찾기 때문이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종이다. 그리고 진화가 변이라면, <청담동 앨리스> 역시 신데렐라 스토리의 진화이다.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가난하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어. 근데 이제 알았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노력해도 가난하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화를 내야 되는 거야. 훌륭한 사람들은 이럴 때 세상을 바꾸지. 근데 난 그런 사람 아니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는 나를 바꿀거야. 너처럼 살거야. 나 그거 갖고 싶어. 그 옷도 갖고 싶어 나도 너처럼 남자 잘 잡아서 청담동 들어갈거야. 사고 싶은 옷 다 사고 사고 싶은 명품 다 사고 가고 싶은 데도 다 가고 천원 이천원에 벌벌 떨지 않으면서 가족들한테 사람 노릇 하면서 그렇게 살거야. 나도 너처럼!!!"

 

  세경은 더 이상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로는 왕자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다. 왕자들의 세상과 신데렐라의 세상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왕자님들은 성 밖의 신데렐라들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왕자님의 파티에 초대되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이상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작전과 계략이다.

  세경은 철저히 검어진다. 승조에게 발각 난 이후에도 세경은 멈추지 않는다. 추한 사랑이 진실한 사랑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까지 세경은 검어진다, 추해진다. 그리고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된다.

 

  대립물의 일치. 부정의 부정.

  세경은 진실한 사랑을 버리고 추한 사랑을 선택한다. 진실한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부정, 사랑의 내용을 부정한다. 그 다음 세경은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가에 대한 기준을 바꾸어 버린다. 승조도 더 이상 무엇이 진실한 사랑인지 추한 사랑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사랑을 측정하는 잣대, 그 형식에 대한 부정.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여기서 추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과 일치한다. 바뀐 것은 추한 것을 진실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엘리자베스의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 세경이 신데렐라가 되는 방법이다. 세경은 엘리자베스의 억압된 이면이다. 행복했던 신데렐라들의 시대에, 엘리자베스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한 사랑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 신데렐라들은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고, 사랑의 추잡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더욱 교활하고 더욱 대담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 수 없다면? 

  “나를 바꿀 수 없다면 나는 세상을 바꿀거야.” ...할 수 밖에 없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신데렐라에 대한 이중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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