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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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듀 데리다』, 9명 저자의 글을 순서 없이 읽었다. 첫 번째 글인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읽었는데, 그제야 나는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을 알게 되었다. 데리다 사망 직후, 싸가지 없는 일부 무리들이, 그것도 주로 영미 대중문화계의 무지한 것들이, 추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공격했고, 열 받은 인문학자들이 ‘아듀 데리다’란 제목의 시리즈 강연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책이 발간되었다는, 그런 사연이다. 강연은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 인문학연구소 주최로, 2005년 5, 6월에 이루어졌다.

 

  안면이라도 익혀서 그랬는지, 먼저 읽고 리뷰를 쓴 네 명의 글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대체로 명확했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이해력에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명의 글은 너무 감성적이고, 은유적이고, 또 시적이기도 하고, 광기도 살짝 비치는 것도 같고, 하여튼 이성 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글들이다. 아마도 데리다의 글쓰기가 이랬던 것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데리다를 읽은 적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래서 요약해 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들 5명의 이름을 거의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장 뤽 낭시 만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공동 저자로 스무 쪽 정도의 글을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 때도 조금 감성적이란 느낌이 있었는데(기억하는 건 아니고, 그 책의 발제로 쓴 글을 찾아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듀 데리다』에 실린 글 제목이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여서 그런지, 그런 느낌을 좀 더 받았다.  어쨌든 책을 끝낸 기념으로 5명 저자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대해서 간단히 메모해 놓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한 꼭지가 데리다를 다루고 있어서, 읽어 보았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이라서 그런지 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덧붙이려고 한다. 이 강연은 진태원의 것이며 제목은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이다.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

 

  책이 발간된 배경과 9명 저자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한다. 고유명사 즉 명명하기를 통해 그 시작과 마지막인 세례식과 추도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여정은 그 두 찬사 사이의 간격, 타자(언어, 의식, 아버지)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는 것과 타자에게 그 이름을 잘 지켜달라고 내놓는 것 사이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p16

 

 

장 뤽 낭시의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푸코 대 데리다 논쟁’이란 것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장 뤽 낭시는 이 논쟁의 쟁점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광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 논쟁은 데카르트를 읽는 방법과, ‘이성’과 ‘광기’가 전제하는 통상적인 구분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싼 토론이다.

  “..푸코가 고전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제도 안에서 비이성이 배제된다는 점을 확인했다면, 데리다는 소위 이성의 주체라는 것이 그 혹은 그녀의 주관성 그 자체로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결정, 확인,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p38

  장 뤽 낭시는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데리다가 ‘주체를 없애려고 모의한 적이 없’ 으며, ‘주체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동일성과 그 자신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교차함을 확인했다’ 고 한다. 장 뤽 낭시가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읽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데리다는 코기토를 ‘작별의 코기토’라고 불렀던 모양인데, 이것에 대해 장 뤽 낭시는 “존재와 사고의 오랜 일치 -이성과 어울리는 일치-는 존재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가버릴 때, 그것이 스스로와 접촉할 때 상실된다.” p55 고 설명한다.  고백하자면 카페인 가득 각성 상태에서 정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별의 코기토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이 상실과 연관된 주체의 광기에 대해 소화된 언어로 요약할 처지가 아니다. 체면치레로 인용문 하나만 남긴다.

  “ 자신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 흔적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다.(데리다,주체) 그는 자신이 흔적에 불과함을 발견하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는 스스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스스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즉 자신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것은 비록 그가 만질 수는 있지만 언제나 만질 수만 있을 뿐, 보거나 알지 못하고, 소유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품거나 그것이 야기하는 격정을 감수한다 해도 소유 할 수 없으며,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p48

  아마도 이것이 ‘작별의 코기토’이며 그래서 주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자크 데리다의 찬사에 부치는 소고>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고, 칸트의 ‘as if~' 뭐 이런 말도 많이 나오는데, 전반  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이름도 어렵다.

 

 

드루실라 코넬의 <데리다>

 

 지젝이 신종야만주의라고 표현한, 데리다의 죽음을 향해 영미 지식인들이 추잡 하게 드러낸, 야만성에 대해, 드루실라 코넬은 데리다가 용감하게 미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코넬이 <데리다>에 붙인 부제는 ‘미래라는 선물’ 이다. 데리다의 이 미래는 ‘도래할’ 미래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은 늘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시기상조란 행위를 지연시키는 핑계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야만적인 무지와는 달리, 데리다의 ‘시기상조’는 ‘일종의 만들어지는 중인 시기적절함’ 이다. 나의 근거 없는 편견과는 달리 데리다는 행위를 끝없이 미루는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지금 행동해야 한다’의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우리의 의무가 ‘진행중인 시기적절함’에 주의를 기울이기라고 아름답게 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가상적이고, 금지된 상태이며, 미래에 수용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하고 있는 ‘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힘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날까지 여전히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듯이, 데리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임종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이 강력한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이 요청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p191~2

 

 

J. 힐리스 밀러의 <故 데리다>

 

  데리다의 <로빈슨 크루소> 읽기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문화연구 측면에서 접근하여, '프로테스탄트적인 자본주의 경제적 인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주류 학풍과는 달리, 데리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에 주목한다. “고독은 데리다가 <크루소>와 함께 읽는 작품인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의 기본적인 주제들 중 하나이다.” p252

  데리다의 사유는 고독한 크루소의 ‘발자국’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p253. 하이데거에게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 이다.

  데리다는 소설의 한 문장, 시 한 구절로 두 시간의 강연이나 한 권의 책을 엮는다. 데리다는 끝없이 이야기한다. 제 시간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왜? 죽음을 향한 존재가 제 시간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故데리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는 오고야 말고 우리는 故데리다를 본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진태원의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

 

  『아듀 데리다』를 읽은 기념으로, 때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데리다만 먼저 읽었다. 이 책은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시민을 상대로 연 강좌를 묶은 책이다. 아무래도 『아듀 데리다』보다는 쉽고 편안하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사상 전반을 요약하는 모험 대신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통해 데리다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해체, 차이, 유령 이다.

 

1. 해체

 

  데리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해체’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 만큼 많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널리 쓰이면 쓰일수록 원래의 의미가 희석되고 왜곡된다고 한다. 해체는 그렇게 손상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해체’는 데리다가 처음 사용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의 ‘데스트룩치온’ 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이 해체는 파괴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 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p313」

 

  해체는 단순히 대립항들을 뒤집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 내에서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틀 자체는 존속된다. 데리다의 해체란 말하자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틀을 발명해 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라는 사례로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이걸 요약하기는 어렵고,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단순무식하게 노예-주인에 비유해 보았다.

   해체를 이렇게 볼수 있다면, 해체는 지젝이 분석하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한 것 같다. 기존의 대립항을 전복하는 것은 기존의 틀 내에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 이 관계의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 지배-피지배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 삼항조가 아니다. 합은 없다. 두 번의 ‘반’에 의해 ‘정’은 그 틀 자체가 붕괴되는, 이중의 부정을 당한다. 물론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이렇다고 나는 읽었다.

 

  데리다의 해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p316」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동시에 텍스트의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p317」

  라캉의 용어 중에 ‘외밀한’ 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맹목점은 누빔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쩌면 대상a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떠받치는 동시에 해체하는 지점이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도 같은 지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맹목점은 반드시 ‘삐딱하게’ 보아야만 보일 것이고. 시차적 관점. 라캉과 지젝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좀 긴가민가 싶지만, 거칠게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해체의 이런 성격을 따져보면 ‘해체’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진태원은 주장한다. ‘탈구축’이 더 적절하단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 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2. 차연 또는 차이

 

  차연은 디페랑스diffèr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디페랑스diffèrance는 차이diffèrence라는 단어에서 ‘e'를 ‘a'로 의도적으로 오기해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e든 a든 하여튼 이 단어의 어근인 diffèrer은 ‘다르다, 차이나다’ 란 의미와 동시에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차연’은 여기에 착안에 차이의 差와 지연의 延을 합쳐 만든 번역어다. 그런데 진태원은 ‘차연’이란 번역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어의 문제란 곧바로 디페랑스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태원의 설명과 관계없이 내 생각에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은 늘 우리에게 골칫거리로 보인다. 그것이 신조어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는 별 문제도 아니다. 서로 번역하지 않아도 불어나 독어 영어는 눈치로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에겐 끝도 없이 씨름할 일에다, 합의도 못보고, 번역자마다 다른 단어를 갖다 붙이고,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 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가타리가 과타리가 되는 것은 애교지만, 예지적·본체적·가상적이 모두 noumenal의 번역어라면, 이런 빌어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플라톤의 『공화국』정도는 눈치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정체』인 것은 그렇다 쳐도, ... 하여튼 나는 플라톤이 공화국도 쓰고, 국가도 쓴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 독자의 수준이다. 번역어의 엄격함만큼이나 대중성도 좀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번역어의 통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태원은 차연이라는 번역어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e를 a로 오기한 데리다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와 a의 발음은 둘 다 디페랑스다. 음성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구별되게 만든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 음성이나 말에 대해 홀대받는 전통에 반대하며, 문자기록이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차으’ 라고 해야 되나? 경상도 사투리는 ‘ㅡ’와 ‘l'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어떤 번역어를 쓰든 그 의미를 온전히 번역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두 번째는 ‘기원의 탈구축’ 이라는 데리다의 의도인데, 내용이 어렵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여튼 ‘기원의 탈구축’이란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낳는다고 한다. 기원은 어떤 움직이지 않는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여하튼 어렵고, 진태원은 이런 점에서 ‘차연’은 지나치게 협소한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다. 데리다는 e를 a로 오기함으로써, 서양 학계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일깨우고자 한다. 내게는 차연도 충분히 낯설긴 하지만, 이 낯설기와 데리다의 낯설기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우리에게는 해결방법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진태원은 차연의 대안으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가 주장한 차이差移를 지지한다. 差異에서 異를 移로 바꾼. 이것이 세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데, 한문을 가지고 와서 낯설게 하기, 새로운 합성어 운운하는 것이 글쎄 내게는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해체’ 만큼이나 유명한 ‘차연’에 대해, 번역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데리다가 실제로 사용한 사례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차연이 혹은 차이가 뭐라는 건지 잘 감이 안 온다.

 

 

3. 유령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데리다의 책이 있다. ‘의’ 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을 짐작하겠지만,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마르크스라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르크스에게 나타나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다. 데리다는 이 둘 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 p330” 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운동’ 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억압과 착취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해방운동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유령에 시달린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도 물신숭배도 없는 세계를 믿었지만, 아무런 환영 없는, 유령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곧 상품 이전의, 교환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 p335” 았다.

 

  그렇다면 유령은 사라져야 할까? 데리다는 여기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 는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순간, 그 틈새로 유령은 출현한다. 시간이 딱 맞물려 연속적으로 정확히 흐르는 세계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떠한 전복, 어떠한 균열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근원적인 탈구의 시간, out of joint, 은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p336”이다.

  데리다의 이 out of joint는 벤야민의 통찰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는 유사성 못지 않게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어떻게?  

  진태원은 이 질문을 궁금증으로 남기며 데리다 강의를 끝맺는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37"

강의  예고편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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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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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데리다의 이름을 너무 늦게 들었다. 누군가가 '어제 데리다가 죽었어.’라 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에 새겼다. 그러나 너무 늦음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 이미 한물갔다는 세간의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귀동냥 했던 일부 인문학자들 사이의 풍문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데리다란 인물에 대해서 알려고도 해보지 않았다. 이미 알튀세르와 라캉,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그리고 지젝이 있었고, 이들의 반대편(?)에는 이진경 때문에 서둘러 무시할 수 없었던 들뢰즈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체’와 ‘차연’ 같은 말들은 무시로 들려왔다.

 

  『아듀 데리다』는 어쩌면 데리다의 논쟁적 적대자들이 나와 같은 머저리에 보내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9명의 명단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을 발견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저자 9명 중 이들 4명은 내가 한두 권이라도 그의 책을 읽어 보았던 철학자들일 뿐 아니라, 내가 알기로 데리다와 어느 정도 대립하는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라는 표제의 글에서, 1969년 이후 최근까지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0년대라는, ‘사상사에 있어서 각별했던 순간에 대한 집단 서명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데리다를 꼽으며, 자신은 데리다에 대해 마땅히 ‘철학적 경의’를 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철학적 경의란 ‘차이를 나타내는 경의이며, 그 차이에 합당한 무게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실린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의 글은 바디우가 의도한 ‘철학적 경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글은 먼저 데리다식 개념의 사상사적 지위나 의의를 설명한다. 네 명의 저자들이 주목하는 데리다 사상의 측면은 모두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과 가장 인접한 데리다의 개념에 주목하는데, 그 친밀성을 통해 역으로 그들 자신과 데리다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데리다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지만 또한 데리다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철학적 경의’ 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네 편의 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편에서도 아마 이런 경의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 들 네 명만으로도 이미 내 기억과 사고는 뒤엉켜 쑥대밭이 되었다. 물론 이 네 명이 어떤 개념을 다루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메모에 불과하겠지만, 이것이라도 먼저 정리해 두지 않고는 나머지 글들을 읽기가 실로 벅차다. 번거롭지만, 할 수 없이 두 편의 글로 나누어 리뷰를 쓰기로 한다. 물론 리뷰2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 데리다에 대한 이 사상가들의 독해를 제대로 읽어내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알랭 바디우의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바디우가 주목하는 개념은 ‘비실존의 기입’ 이다. 데리다의 이 작업을 바디우식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비실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영도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무無’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비실존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의 원존재를 위해 싸우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라고. 이것이야 말로 혁명의 정의이다. 즉 비실존이 자신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다수적 원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즉 세계의 초월성을 변화시켜야 한다. P83」

  실존과 초월적 관계에 있는 원존재는, 세계 내에 출현할 때 다수의 형태로 실존한다. 그런데 실존의 정도는 그것의 강렬함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실존들 중에서 가장 미약한 실존, 가능한 최소한의 실존을 ‘비실존’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집합의 부분집합들 중 공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집합도 집합이다. 비실존도 실존이다. 그것의 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 비실존을 강력한 정치적 실존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말 부분을 당겨와 썼지만, 사실 인용문이 데리다 자신의 이론인지, 바디우식 해석인지 잘은 모르겠다. 내겐 바디우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비실존의 기입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원존재와 실존의 형이상학적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것은 사라지는 소실점으로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라짐’을 보여주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래서 데리다의 글쓰기는 모호하며, ‘하얀 잉크’로 쓰는 글이다.

「데리다는 분류된 사항을 해제한다. 한마디로 데리다는 용기 있는 평화주의자를 요청하는 운동에 몰두한 것이다. 그가 용감했다는 것은 이미 구축된 분류를 수용하거나 그에 적응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구성된 대립체계 너머를 탐색하는 것은 대체로 평화와 사색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스듬한 태도를 고집하는 것, 즉 형이상학에 뿌리를 둔 단정적 구분을 거부하는 것은 항상 결정의 법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격동의 시대인 지금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1968년에서 1976년에 이르는 ‘공산주의 시기’에 데리다가 진리의 바깥에 머문 것은 이 때문이다. P80」

  데리다는 한마디로 끝없이 ‘미끄러진다’. 원존재에서 비실존으로, 비실존에서 원존재로. 데리다의 논리는 긍정과 부정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바디우는 여기서 데리다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서두에서 바디우는 1969년 이후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는 ‘진리 사건’의 철학자이다. 바디우는 불가능한 것을 명명하기를 주장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으나, 아마 눈치로 보건대 데리다는 어떤 사건도 진리로 기입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에 대한 ‘용감한 평화주의자’ 란 명명은 바디우와 데리다 사이의 차이를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아마도 현대 사상사 혹은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해 기초 지식 정도는 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출간되었을 것이다. 내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독자라 씁쓸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제에 이런 리뷰를 쓰는 ‘용감함’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이 씁쓸하다. 말인즉 이 리뷰가 받아야 할 것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다. 데리다의 말과 바디우의 말, 그리고 내 생각까지, 뒤엉켜 뒤죽박죽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보편의 구축과 해체>

 

  발리바르는 보편의 철학자로 알려진 헤겔의,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의 Ⅰ장(?) 제목이 “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 이다. 이 개념을 발리바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감각적 확신이라는 관념을 요약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단독성과 보편성이 순수한 지시작용의 격으로 간주될 경우 상호 구분하기 어렵다는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논의에 대면하게 하는지 돌아보았다. p122」

  나는 『정신현상학』을 보았다. 차마 읽었다고 할 수는 없고, 모든 페이지를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있다. 물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의식의 수수께끼 같은 여행이라고 할까. 하여튼 발리바르의 말은, 단독성과 보편성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대립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인 듯하다.

  발리바르는 여기에 방브니스트의 ‘인칭 대명사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온다. 장 클로드 밀네는 방브니스트의 논의가 곧바로 헤겔의 감각적 확신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데, 발리바르가 이를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다음으로, 데리다가 방브니스트의 핵심 논제를 (전복적으로) 취했다고 보고, 결론적으로 데리다와 헤겔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방브니스트, 장 클로드 밀너, 발리바르를 우회하여 헤겔과 데리다가 만난 것이다. 그 교차점이 바로 ‘감각적 확신’ 이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요약 보다는 전체 글에 대한 꼼꼼한 독해가 필요할 것이다.

  발리바르가 해체와 보편을 연관 짓는 방식은 흥미롭다. 발리바르는 해체를 보편의 파괴가 아니라 보편의 재출현을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해체가 파괴가 아니라는 것, 즉 형이상학적 보편적 범주들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거나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해체란 그러한 범주들이 재현되지 못하도록 억압한 것들과 관련된 내적 긴장 및 한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잉여, 대체보충, 지연의 형태로 재현해서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p137」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주체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돌려받는다.” 는 라캉의 명언에 대한 전혀 다른 데리다식 독법이다.

  「데리다는 ‘편지가 수취인에게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사건에 대해 열린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오히려 그것은 절대로 수취인에게 도달해서도, 또는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실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어질 수도 있다는 점, 바로 실패하거나, 심지어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는 점, 그래서 특히 질문이나 호출에 대한 완벽하고도 적절한 대답은 실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이중성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해체적 독법을 되풀이한다면 대답은 무한히 지연되고, ‘연기되며’, 차연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인칭들 간의 대화적 대칭에 주의를 집중하는 대신 ‘산종되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닿을 수 없는 곳에 남아 상실될 위기에 처한다. p131」

  라캉에게 편지의 최종 수신인은 발신자 자신이다. 그래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발리바르의 데리다식 독법이 이 점을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라캉에 있어서도 편지의 표면적 수신인으로 가정된 타자는 항상 그 메시지를 읽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이 둘을 비교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발리바르에게 질문할 주제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고, 누군가 이 의문에 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랑시에르지만, 천만 다행히도 이 글은 매우 명료하여 비교적 쉽게 읽힌다.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1990년대 들어 점점 더 데리다 사고의 전방에 등장하게 된 한 가지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에 대한 추모글로 삼은 이유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구조’에 대한 데리다의 탐구와 랑시에르 자신의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개념 사이의 공통분모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케란 철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국어사전에는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원리’ 로 정의되어 있다. 민주주의란 말하자면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여섯 가지 지배의 자격을 열거했지만,  ‘제비뽑기’라는 일곱 번째 원칙을 추가하면서 폭탄을 던졌다. ‘제비뽑기’에 의한 지배,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주인이나 귀족, 강자, 철인, 부모, 나이 등, 어떤 자격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다. 즉 일체의 아르케도 없는, ‘자격 없는 자격’, 역설적 체제인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아르케의 결여는 ‘바람직한’ 자격들, 즉 적절한 아르케를 보여주는 자격들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실로 바람직한 자격들 말이다. 그것들은 정확히 무엇에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p174」

  「신성한 목동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추가로 존재하는 자격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지배받기보다는 지배할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의 힘’이란 어떤 아르케도 그 힘을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다. 민주주의란 명확하게 규정된 일련의 제도들도, 특정 집단의 힘도 아니다. 그것은 보충적이고 근거를 구성하는 힘으로, 모든 기성 제도들과 어느 특정 집단 사람들의 힘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그 정당성을 박탈하기도 하는 힘이다. p165」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기도 하고, 정확히 동일한 이름으로 같은 사람에게서 권력을 빼앗기도 한다. 고정된 아르케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렇게 ‘근거를 구성하는 힘과 파괴하는 힘이 일치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의 자동 면역’ 이라는 개념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랑시에르는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데리다의 한계는 ‘타자성’ 이다.

  「이 자동면역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한 무제한의 자기 비판역량으로, 이는 반민주주의적 선전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것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사용하여 반민주주의적 투쟁을 일삼는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권리를 제한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양쪽 모두 민주주의는 동일성 혹은 자아의 검증되지 않은 힘에 여전히 매달린다.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은 타자성이며, 이는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다. p165~6」

  「내가 제기하는 이의는 간단하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정치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 자체의 타자성, 즉 자기 자신 안에 이질성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 원칙이다. p166」

  랑시에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이미 그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힘이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올 때 실제 사라지는 것은 ‘실천적 민주주의’다. 데리다의 논리에서 정치는 소멸한다.

  데리다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 구체적 내용은 꼼꼼한 독해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요약의 범위를 넘어선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서만 어떤 대상이 파악되고 있다면, 그 대상 즉 데리다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데리다 자신은 이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펼 기회조차 없으니, 데리다의 온전한 저서를 통해 그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지젝은 데리다의 ‘차연’과 자신의 ‘시차’ 개념 사이의 친연성을 통해 데리다를 추모하고자 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극소 차이’를 의미하며, 이것은 실증적이고 실체적인 속성에 근거한 차이가 아니다.

  지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차적 관점』은 철학적 시차, 과학적 시차, 정치적 시차에 관한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의 ‘서주’에서 이미 지젝은 『시차적 관점』의 많은 지면이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p 63)」

  시차적 관점은 하나의 불변하는 대상이 있고, 그에 대해 두 개 이상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균형 잡힌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진중권이 『이매진』에서 ‘촛불은 왼쪽에서도 깜박거리고, 오른쪽에서도 깜박거린다’ 란 소제목으로 소개한 지젝의 시차적 관점은 이런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지젝이 시차적 관점의 시각적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루빈의 꽃병’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두 개의 얼굴을 보거나, 하나의 꽃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차에 따라 오로지 꽃병이거나, 오로지 얼굴일 뿐이다. 지젝 이론의 근간인 헤겔을 통해 표현한 시차란 이런 것이다.

  「오히려 헤겔이라면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주체와 대상은 내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며’, 그 결과 주체의 관점에서 발생한 ‘인식론적’ 변화는 언제나 대상 그 자체의 ‘존재론적’ 변화를 반영한다. p227」

  시차란 관점의 주관적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상 자체의 속성을 실체적으로 변화시킨다.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의 운명이 그 명시적 사례를 제공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30년간 독재 권력을 휘둘러 왔으나, 한순간에 쫓겨났다. 이집트 민중이 더 이상 그를 대통령으로 바라보지 않는, 관점의 변환을 가져왔을 때 그는 순식간에 힘없는 노인이 되었다. 왕은 그 실체적 속성 때문에 왕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불러주기 때문에 왕인 것이다. 인식론적 변화가 존재론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에서 읽은 지젝의 개념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지젝은 자기 복제로 유명한 작가이다. 여기 이 짧은 글에서도 이미 다른 책에 쓰였던 내용들이 적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한 문단을 통째로 ‘복사’ 해서 ‘붙여 넣기’ 한 부분도 있다.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쓰는 작가라는 지젝의 명성에는 이런 ‘비법’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적 게으름으로 비난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광고문구 맨 앞에는 지젝이 등장한다. “지젝과 랑시에르, 바디우가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 지젝의 인기가 그만큼 높은 것이겠지만, 지젝에 대한 반감 역시 그 인기에 못지않다. 그것은 헤겔이나 라캉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오로지 지젝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지젝을 통해 본격적인 ‘철학 읽기’에 돌입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시차적 관점 역시 한없이 삐딱할 것이다. 언젠가 지젝을 오독하지 않고 읽어내게 되었을 때, 그 때가 오면 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책읽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넘어야 할 산은 최근에 번역된 지젝 평생의 역작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이다. 한 사상가의 역작에 붙인 제목치고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출판사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Less Than Nothing :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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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2일 쓴 글입니다.

 

 

‘ 1박2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만든 손두부... ’

‘두부마을’은 내가 가끔 두부나 콩물을 사다 먹는 집이다. 주인 총각(?)은 3,000원짜리 두부 한모에도 거의 배꼽 인사를 하는 아주 예의바른 청년인데,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이면서도 그 눈매며 짧게 자른 머리가 범상치 않아 전직이 살짝 궁금해지게 만드는 청년이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드나드는 그 가게에서 저 광고가 눈에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가게에서 직접 두부를 만들어 하루에 세 번 두부 나오는 시간을 정해 놓고 있는데, 내가 갈 때 마다 주인 총각은 두부 물을 젓고 있거나 콩을 씻고 있거나 커다란 솥을 닦고 있었다. 1박2일 동안이나 정성을 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성실히 만드는 두부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특히 고소한 두부 맛을 보면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1박2일’은 몰라도 ‘정성을 다하여’는 아마도 수사(修辭)일 것이다. 사실 ‘정성을 다하여’란 말은 그 자체가 수사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짜피 정성을 다했는지 안했는지를 판단할 기준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길을 지나다 우연히 저 문구를 보게 된 사람은 ‘1박2일’ 조차도 단순한 수사로 읽을지 모른다. 예능프로 1박2일의 인기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또 어떤 단골 할머니는 ‘정성을 다하여’에 진짜로 공감하실 지도 모른다. 낯설고 건조한 ‘1박2일’이란 말 보다는 ‘정성을 다하여’란 말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사실일 수 있다, 그 할머니에게는.

 

그렇다면 수사란 혹은 rhetoric이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 아버지 묘 어떻게 할 거야? 공원묘지로 옮길 거야? "

  "안그래도 내가 저기 외할머니랑, 외갓집 묘 모셔 놓은 OO 공원을 갔는데.....흙 아래에 묻는 게 아니고 시멘트로 이렇게 저렇게 발라서 ...... ......... 거기 모셔 놓은 XX 친구가 전화가 와서 물어 봤는데 ..... ........ ...... 네 아버지는 자기 묘를 왜 그런데다가 썼는지....... 그런데 거기 옆에 신성일이가 묘를 크게 ......."

  "엄마! 옯기겠다는 거야? 안 옯기겠다는 거야?"

  "그것이아니고....... 너희 오촌 아저씨들이 왜 거기다가 묘를 안 쓰는지..... 아버지 자리는 왠만해도...내 자리는 ....."

  "엄마!!! 그 얘기는 저번에도 했잖아! 그래서 어쩔건데!!!!" 」

 

엄마와의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끝난다. 나는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요점만 말하라고 다그치고(?), 엄마는 하나부터 열까지 끝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한다. 안부 전화를 해도 이런 식이다. 아픈데 없냐고 물으면, 엄마는 그 대답은 없이, 내가 운동을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데...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다리가 아팠다든가 허리가 좋아졌다든가 하는 결론이 나오려면 30분은 족히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 그 30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엄마 그래서 아프다는 거야? 안 아프다는 거야?” 갑자기 말문을 중단당한 엄마는 황급히 괜찮으니 걱정마라며 전화를 끊는데, 엄마의 풀죽은 목소리가 멀어지면 벌써 후회가 시작되지만 번번이 나는 소리를 지르고 또 후회를 되풀이한다. 남편은 왜 그렇게 유독 장모님에게만 못되게 구냐고 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다. 엄마니까 그렇지 뭐 ㅡ.ㅡ;;

 

정신분석학 입문서를 보면 욕망과 요구와 욕구의 관계라는 것이 있다. 라캉의 공식이라는데,

욕망 desire = 요구 demand - 욕구 need

요구는 말로서(혹은 울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 때 정확히 그 상대가 말해진 요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고 해도 즉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고 해도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욕망 desire이다. “나는 너에게서 이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네가 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생트집을 잡는다고 하는 것이 있다. 애들이 뭘 달라고 막 떼를 쓸 때, 정확히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주면 오히려 그것을 집어 던지고 더 크게 울면서 뒹구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 아이가 말로서 요구했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관심일 수도 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여하튼 욕망이란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대개 수수께끼로 남는다. 나도 내가 욕망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틀린 설명이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가 읽은 바로는 대충 이런 뜻인 것 같다.

 

엄마의 욕망은 그러니까 그 30분 동안의 끝없는 이야기 속 어딘가에 있다. 엄마가 허리가 아파서 전화를 했을 때조차, 내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병원으로 가라든지, 어떤 약을 먹으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의 말을 말 그대로, 요구로서만 이해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방법(욕구의 해소)만을 재빠르게 제시할 줄 알았지,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엄마의 욕망을 모를 것이다. 위로, 위안, 속에 있는 것들을 말로서 풀어내기 ... 이런 것들로서 엄마의 30분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따뜻한 말이 듣고 싶고, 상한 속을 풀어내고 싶은 것이 진정한 욕구였을 수는 있지만, 비록 내가 그 30분을 애정으로 응대했다고 하더라도 엄마에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은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콕 집어서 이걸 원한다,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번번이 운동화 끈을 조이는 것에서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30분이 의미 없음 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30분은 오히려 빼앗겨서는 안 될 30분, 내가 귀 기울여 들어 주어야 할 30분일 수가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욕망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인간, 히스테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욕망에서 충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라캉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일단 나는 여기까지만 풀어 보기로... 뒤는 너무 어려워서...)

 

예전 글들에서 선생님의 ‘레토릭에 관하여...’란 글을 발견했다. 간간히 ‘인간의 언어’를 주장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인 것 같았다. 레토릭이란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에 따라 그 글은 찬반양론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학생들에게 말 할 때는 쉽게, 현학적이지 않게가 원칙이란 말로 이해하면 일단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 글을 읽고 두부를 사러 나갔다가 ‘1박2일 정성을 다하여..’란 문구를 읽고 문득 ‘레토릭’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레토릭이 되는지는 수신자 각자에게 모두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정보(지식, 주장 등)의 정확도’라는 욕구를 충족 시켜주는 말(요구)인지, 어떤 것이 단순 레토릭인지의 기준이란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무릎 쓰고 한 발 더 나아가면 레토릭이야 말로 욕망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 장황한 혹은 화려한 혹은 현학적인 수사修辭 속에, 말하는 자의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스스로 과녁을 맞출수 없는 발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흘러넘치는 레토릭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표적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엄마는 딸의 무안쩍은 고함 소리를 번번이 예상하면서도, 그 장황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욕망을 멈출 수 없듯이..... 그러므로 결론도 없고 요점도 없는 엄마의 길고 긴 이야기는 차라리 레토릭의 강물이 아닐까..

 

그렇다면 레토릭을 듣(읽)는 사람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레토릭에 욕망이 있다면, 레토릭에 ‘요구- 욕구 = 욕망’ 인 잔여가 있다면,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그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지젝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도 칸트도 라캉도 프로이트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지젝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의 문체가 매혹적이었고, 그의 말하는 방식이 독특했고, 그래서 아마도 그것에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강한 느낌, 강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젝의 책은 어렵고 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지만, 내게 왜 지젝을 읽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첫 번째는 여전히 그 끌림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전달하는 지식 보다는 그의 레토릭에 대한 끌림이라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그 레토릭 속에는 무엇인가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이 있는 듯도 하고, 그 물음 주위를 계속 맴돌게 하는 자력 같은 것이 있는 듯도 하다. 그러니 레토릭이란 현학적인 태도, 젠체하는 우월감이 전부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 같은 것, 무엇이라고 콕 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 효율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 이해 불가능한 그 무엇이 우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게 하는 동력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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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6일 쓴 글입니다. 씨네21의 <독자 영화 클럽> 에 응모한 글입니다. 여러명이 함께 쓴 글입니다.

 

 

말리는 기가 막혔다. 카페에 올라 온 세 편의 글은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친절한 설명도 없고, 각자의 장(場)에서 통통 치고 올리고 받으며 놀려 본, 날 것 그대로를 던져 놓았다. 이리 저리 뜯어 붙여 형태나마 잡아 보려고 해도 도대체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아무래도 멋을 낼 수 없을 바에야 덕지덕지 분칠 보단 맨 얼굴이 상책이다. 그래서 이 글은 40여년만의 대설로 전국이 얼어붙은 2010년 1월의 첫 째 수요일, 칼바람을 뚫고 기어이 강남에 모여야 했던 사연에서 시작한다.

 

 

1.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이 재결성(?) 되기까지

 

외상은 없었지만 내상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2월의 독자 영화 클럽 응모에서 떨어진 것이다. 넉넉한 망년회 회식비는 고사하고 영화표 1장도 얻지 못했다. 당선자 발표까지의 열흘 남짓의 기간은 5,000원짜리 로또가 주머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뿌듯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마도 내상의 형태는 각자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소리 내어 물어 보지 않았다. 단지 ‘1월에는 기필코!’를 외쳤을 뿐이다. 마플이 이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우리의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위안인 동시에 소통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1월의 선정 영화는 전우치였다. 말리가 1등 전우치, 2등 나인을 외쳤고, 뒤이어 겁사가 전우치를 재청했다. 마플은 1등 아바타, 2등 셜록 홈즈를 들고 나왔다... 약간의 긴장이 흘렀다고 해야 할까? 모두 갈매를 기다렸다. 그러나 갈매는 역시 평화주의자인 듯하다. 산뜻하게 그럼 1월의 영화는 전우치라고 선언해 주었다. 우리 셋은 전우치가 갈매의 기호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갈매의 선택 또한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7년 가까이 조금씩 서로를 알아 왔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기상(氣象) 역사에 남을 2010년 1월의 첫째 주, 두텁게 쌓인 눈과 칼바람 속에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강동원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2. 주점에서 난상 토론?

 

“어땠어요?” “ 뭐 할 말이 없는데요.” “도대체 영화 선택은 누가 한 것이야?” 대체로 이렇게 시작했다. 간장 종지만한 술잔이 한 순배씩 돌아가도 별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잖아요?” 라고 말리가 1등으로 전우치를 외친 죄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저는 엄청 지루했어요” 라는 겁사의 말에 또 입이 닫히고 말았다. 겁사는 판타지 애호가인데, 전우치는 도대체 판타스틱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우치를 영웅이라고 할 수 있나요?” 갈매가 문득 말했다. 갈매는 대체로 말이 없는 편이지만, 문득 문득 화두를 던지는 신묘함이 있다. 우리는 잠깐 동서고금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홍길동과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까지 이야기가 번졌으나, 불행히도 말리의 귀에 쏙쏙 들어오지 못했다. 말리는 이해력이 뛰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한참 모자란달 수도 없지만, 이 클럽의 회원들은 각자의 분야에선 때때로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보여 주기 때문에 평범한 말리로서는 따라 잡지 못할 때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은 늘 말리의 몫이기 때문에 (말리는 안타깝게도 백수다), 말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글이 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또 장자를 거쳐서 표훈 대덕과 초랭이가 여자라는 것의 전복성(?) 혹은 진부함과 현대의 신선이 스님, 신부, 무당으로 묘사된 것의 의미, 국회의원과 돈 다발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딴나라당을 요괴로 그린 것이냐라든가, 화담이 요괴이면 결국 유가 보다 도가가 더 높다는 것이냐는 등등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인지 전 모르겠어요. 일단 각자 하신 말씀을 카페에 올려 주세요. 그것 보고 글을 써 볼께요.” 드디어 말리가 소리쳤다. “아니, 왜 못알아 들어요?” “나는 십이지신들이 나온 병풍도 못 봤고, 송영창이 왜 스님이란 건지도 모르겠고, 전우치전이라는 설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요. 여튼 내일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럼 언제까지 올려야 되죠?” 겁사가 물었다. “아, 오늘이나 내일 기억이 생생할 때 써야 좋죠 ㅋㅋ" 마플이 대답하고, 갈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쨌든 씨네21 정훈이 만화는 꼭 보셔요. 전우치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죠.” “정훈이 만화 시리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훈이는 아직도 씨네21에 연재하나 보죠?” 다들 보았다는 정훈이 만화를 혼자만 못 본 말리는 기어이 한번 퉁퉁거리고 말았다.

 

3. 각자가 카페에 올린 글

 

(클럽 ‘화사’는 독서 토론을 위해 자체 비공개 카페를 갖고 있다)

 

맨 처음 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은 갈매였다. 말은 없지만 행동은 의외로 민첩하다. 항상 말은 많은데 행동은 굼뜬 세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갈매는 혼자 속이 터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 조선 시대 설화 속 인식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왕이었다. 왕이 현명하면, 백성은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런 인식 아래서 어리석은 왕을 희롱하고 돈과 곡식을 빼앗아 흉년을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전우치는 영웅일 수 있다. 하지만, 왕이 없고 기업가들이 일자리를 만드는 현대사회에서 전우치가 영웅일 수 있을까?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호그와트 학교뿐만 아니라 마법사 사회가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들이 해리포터와 같은 영웅은 아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현대로 불려온 전우치가 영웅이 되려면 화담이나 그와 관련된 세력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기와 자기 주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미리 상정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설정이 이 영화에서는 없었다. 이 부재가 영화 전우치가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없는 이유이다. 」

이 영화를 영웅, 전우치란 면에서 본다면 함량 미달이라는 결론인 것 같다. 난세에 영웅인데, 난세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니 영웅이 하고 있는 짓도 무슨 짓인지 도통 요령부득이란 말을 하는구나, 말리는 갈매의 글을 이렇게 해석해 버린다.

 

다음은 겁사다. 평소의 습관대로 절대로 따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갈매의 글에 댓글을 길게 길게 달아 놓았다. 본 글 보다 훠얼씬 긴 댓글이다.

「 혹시 다른 맥락이 있을까 싶어서 제 딸에게 <전우치전>의 결말에 대해 물어 봤어요. 그런데 원래 얘기에 따르면 전우치의 위치가 손오공과 약간 유사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우치가 신통력을 뽐내려다가 실패한 다음에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고 자기가 선택한 스승 화담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간다니까요. 이 부분만 보면 영화에서 화담이 악당으로 묘사되는 것은, 스승의 부재 또는 권위의 부재를 목 놓아 부르는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어제 보았던 드라마 <추노>가 훨씬 낫습니다. 특히 장혁이, 자신이 쫒는 여종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잔디 아버지를 찾아간 장면에서 나온 대사가요. 소현 세자가 어떠니 제주도에서 어떤 학살이 벌어졌느니 하는 나라의 일이 그리고 조정의 일이 도대체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모든 개인적인 일이 정치적인 일이라고? 상부 구조는 하부 구조를 그 원인으로 하는 단순한 결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부 구조와 전적으로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다시 말해 시차적 관점을 가진 것이라고? 씨네21에서 최동훈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는데도, 도대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만들고 싶었다는 말만 기억이 나요. 정말 마플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화 정훈이가 훨씬 더 훌륭합니다. 적어도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르니까요. - 우리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똑 같은 하나들인가? 아니면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등등인가? 아니면 하나를 향한 욕망을 가진 하나들인가?

이번 주 씨네21에서 김소영 교수가 쓴 ‘전영객잔’에는 요런 구절이 있습니다. “해적이 난무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참혹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나라에서 백성을 돌보지 않자 격분한 전우치는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 결단한다. 전우치의 둔갑술과 도술은 도적의 토벌, 가난한 선비의 구제, 가난한 백성을 원조하는 데 쓰인다. 반면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장난질과 망나니 사이를 오갈 뿐이다. 홍길동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의로운 전우치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 자체를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하는 시대성은 무엇일까? 그 반시대성은 어떤 것일까?”

정말 반가웠어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서요. 특히 ‘백성으로 몸을 삼으리라’는 대목을 읽는데 갑자기 너무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요새 화두가 백성 개념이거든요. 왜냐하면 그 어떤 정치 원리도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그 형식은 기울어진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요. 백성을 향해서, 없는 자들을 향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런 이유로 드라마 <추노>가 너무 기대됩니다. 홈페이지에 가보니, 장혁은 요런 인물이래요. - 나라 또는 정치와 상관없이 살고자 했으나 결국 휩쓸리고 마는. 영화 <전우치>에는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따라서 결론은 <추노> 만쉐이~ 」

 

헉헉... 기~ㄹ다. 뭐 읽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은데, 그대로 다시 옮겨 입력하자니 엄청 길다.(왜 ‘복사하기’를 안하고 미련하게 자판을 두드렸는지에 대한 구구한 사연은 접어두고 싶다;;) 일단 말리도 전우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실존 인물이긴 한데, 전해오는 이야기는 썰(說)일 가능성이 많고, 여튼 도술을 부려 백성도 도와주고, 임금도 골탕 먹이고, 장난도 치고 그랬다는 것이 여러 이설(異說)들에서 공통점인 듯하고, 어쨌거나 결국 도통의 경지는 아득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화담 서경덕을 싸~부님으로 모시고 입산수도 했다는 얘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화담은 요괴가 아니라 사부님이다. 그런데 왜 영화는 스승을 요괴로 만들었는가? 겁사의 질문은 여기서 씨네21 김소영 교수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신물 나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서 스승 따윈 필요 없어, 권위 따윈 필요 없어는 이제 의로움 따윈 필요 없어와 동의어가 되었고,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마저 시대착오를 넘어 반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처한 곤경은 이제 이런 낙인쯤이야 말로 오히려, ‘포스트 모던한 현대의 자화상에 대한 무의미한 반복’, 일종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그러니 전우치 전설의 정치적 배경을 한낱 장난질의 배경으로 바꿔 버린 영화 <전우치> 보다는, 비정치적이고자 했으나 정치적인 것 속으로 휩쓸리고 마는 또 하나의 전설적 인물을 그리고자 하는 드라마 <추노> 가 진정 ‘새로움’이라고 겁사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말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정리해 두고, 어려운 말들은 늘 그렇듯 흘러 보냈다. 그런데 가끔 말리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렇게 한 귀로 들어 와서 한 귀로 내보냈던 말들이 어느 날 문득 대화 속에서, 책 읽기 속에서, 글쓰기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나타나 말의 아귀를 맞춰 주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삼년이면 읊는다는 서당 개의 풍월도 이렇게 어느 날 문득 터진 말문이 아닐까?

 

마플이 소식이 없다. 제일 먼저 올릴 줄 알았는데, 기어이 쪼아야 할 판이다. 사실 글쓰기 전공은 마플이다. 마플의 글은 독특한 향취가 있지만, 읽기 쉬운 친절한 글은 아니다. 언젠가 김연아의 트리플 점프에 자신의 글을 비유한 적이 있다. 순식간에 회전하는 트리플 점프는 보기에 무척 아름답지만, 정확한 동작 하나하나를 읽어 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부적은 환상의 아이맥스 3D, 아니 온갖 색이 만발한 매트릭스의 세계로 사람들을 홀리는 안경 같은 것이렷다. 그러니깐두루 전우치는 오늘날로 치면 제임스 카메론이나 아키텍터일진데, 문제는 모시냐. 이놈의 전우치가 애시당초 정통이 아니라 그것이여. 나랏님을 홀려서 함경도 빈민을 구제해 봐야, 본시 삐딱한 사고뭉치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스스로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로다.

그렇다면 진정 바람을 다스리고 기후도 다스리는 도사는 어떠한 것인가? 전우치는 하나 남은 부적의 힘으로 여인을 구한 뒤 청계천 바닥에 코를 박는다. 그러고는 갑자기 네오처럼 부적 없이도, 이 현실 세계 자체가 환상인 비밀을 알고는 신출귀몰 몸을 놀리게 되나니,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로다. 유가의 입신양명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쫒던 미천한 계급 출신인 주인공은 “사랑”으로 타자를 살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환상을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진정한 도사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의 일부로서 그림을 바꿔야 할 터? 나랏님이 다스리건, 장사치들이 먹여 살리건, 그림은 수묵화에서 미술관 유화로 바뀐 것 뿐이러나, 그렇다고 허허하면 그것도 가짜 사도, 아니 도사라 이말이시. “사랑”하면 통하고, 그래야 그림이 바뀐당께로. 활동사진으로, 3D로, 리얼디 4D 등등. 영화 속 영화도 바뀌었자너. 일단은 코디가 주인공이 된거지만. 그래서, 인제야 말이지 전우치가 내 아바타라면, 영화를 들어 엎겄다 이 말이여. <정훈이 만화>가 잘 보여 주더만. 전우치 전문, 무한 아바타 생성 신공으로다가, 합법적인 일자와 다수의 차이는 무엇인지, 누가 정한 그림의 법도인지 물음을 던져서 떡하니 웃음보에다가 꽂아 버리는 거. 초랭이와 표훈대덕이 모두 여자라고 하면 뭘해. 바다 갖고 되냐 이 말이여, 바다. 인연의 실이 얽힌거나 뒤집힌 거, 옛날과 오날이 뫼비우스의 띠이며 반복인거 이제 누가 몰러.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

 

말리는 단순하다. 늘 이 쪽인가 저 쪽인가를 갈라놓고 시작한다. 우리 편인가? 적군인가? 또는 좋다는 말인가? 나쁘다는 말인가? 일단 대세 판단이 틀리지 않으면, 상세한 것의 잘잘못을 모른다 해도 결정적으로 오판할 위험은 그 만큼 줄어든다. 이것이 말리의 처세술 중 하나이다. 그런데 겁사와 마플은 이런 말리를 두고 늘 웃는다. 말리는 결과가 중요한 응용과학 전공이고 (전공이라고 하기에 좀 쑥스럽긴 하다. 대학 4년간 별로 배운 것도 없다), 겁사와 마플은 결과에 이르는 ‘길’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문학 전공자들이다. 그러니 마플에게 그래서 결론이 뭐요? 라고 묻는 것은 또 한번 웃음을 짓게 할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말리는, ‘바보야, 문제는 차이여, 차이!’에서 답을 찾는다. 말리가 주목하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바보’다. 일단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우리 영화 클럽은 영화 <전우치>가 졸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과감하게 단언한다.

 

4. <전우치>, 정훈이 만화 속에서 완성되다!

 

아무래도 말리는 정훈이 만화를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글을 끝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 <전우치>가 폼나게 그렸으나 진정으로 보여주지는 못한 ‘전대미문의 한국형 히어로’, 영웅 전우치는 씨네21의 <정훈이 만화> 속에서 비로소 그 막강한 도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합법이란 가면을 쓴 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영웅은, 서울 광장에서 오십만으로 분신(分身)한 바로 그 소박하지만 무시무시한 전우치(들)이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고!’를 외치는 오십만 전우치(들)! 그것이야말로 텅 빈 법의 야만성과 눈먼 폭력성을 통쾌하게 고발하고 사정없이 농락하는 신통방통 오묘신묘한 진정한 도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은 피리 부는 표훈 대덕이 아니라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빵꾸똥꾸 해리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에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세 회원의 글 속에서 말리가 읽어 낸 일종의 맺음말이지만, 그들이 꼭 그렇게 썼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읽은 자는 말리이고 혹은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있다면, 독자들일 것이니 말이다...

 

2010년 1월의 독자 영화 클럽에 응모할 글은 이렇게 완성 되었다. 그냥 이런 저런 수다를 재미있게 배치하면 간단할 것을 불행히도 클럽 <화사>에는 그런 오묘한 재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의 쓰라림이 되풀이 될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다시 이렇게 길고도 까탈스런 길을 걷는 것은 떡고물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려니와 소통에 대한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읽히고 이해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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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5일 쓴 글입니다.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프로야구가 창단되면서 삽시간에 야구 열풍에 휩싸였던 것이. 나는 집에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면서도 늘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곤 했는데, 삼성 라이온스의 승률은 물론 장효조와 이만수 등의 타율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야구를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를 들어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기록들 뿐 아니라 선수들의 이름도 잊어갔다. 내가 열광했던 것은 사실 야구 그 자체는 아니었다.  

  열심히 TV화면을 보면서도 여전히 혼자서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하지 못했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TV 앞에 나를 붙들어 매었던 것은 야구 그 자체의 묘미도, 선수들의 순수한 기량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승부에 대한 열광과 환희였다. 대구 삼성과 광주 해태의 경기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버스가 불타오르고 선수들은 운동장을 도망쳐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생각해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해태를 미워했고 무조건 해태는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경기에서도 무조건 일본은 이겨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왜 하필 해태인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이유 따위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자명한 사실이었다. 뉴튼 이전에,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연아의 트리플 러츠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단지 아이스 쇼였다면 나는 진정 그 점프에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또 그렇게 안도하며,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트리플 악셀의 아사다 마오가 자빠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즐기면서, 그렇게 심술쟁이가 되어, 스무살 앳된 얼굴을 적시는 진짜 눈물을 가증스럽다고 느낄 수 있었을까? SBS를 켜기만하면 넘쳐 나는 광고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따위 광고들에 넌더리를 내다가도, 막상 이승훈이 모태범이 이상화가 금메달을 따냈다는 해설자의 비명 소리에 덩달아 으악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있었던가? 나는 여전히 소위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알지 못하는 자’, 혹은 ‘나는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믿는자)’ 란 말인가?

 

  벤쿠버 올림픽 기간 중 우리나라 학생 한 명이 러시아에서 스킨해드 족의 테러에 희생당했다. 그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뉴스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러시아의 인종주의에 관한 심층 보도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에서도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이 우려할 만한 수준 이상으로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했다. 신나찌란 말이 심심찮게 나도는 것도 벌써 오래 전부터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구동구권의 인종주의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이 책은 1990년대에 씌어 진 것이지만, 지금도 동구권의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적 복수주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이 지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나라들에서의 종족 긴장의 원인에 대해 좌파가 제안한 표준적 분석들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테제는 종족 긴장이 집권당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할 수단으로서 집권당 관료에 의해 선동되고 조종되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에서 민족주의적 강박, 위대한 루마니아의 꿈, 헝가리 및 여타 소수민족의 강압적 흡수는 차우세스쿠의 권력 장악을 적법화하는 항상적 긴장을 만들어냈다.....그렇지만 이러한 가설은 최근의 사건을 통해 매우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논박되었다. 일단 공산주의 관료지배가 무너지고 나자, 종족 긴장은 한층 더 강력하게 출현했다. 왜 종족적 원인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것을 낳은 권력 구조가 붕괴한 이후에도 존속하는가? 」

 

  보통 간간이 들려오는 동구권의 종족 분쟁에 대한 느낌은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종족 따위에나 매달려 있으니 자기들끼리 총질이나 하고 있지. 공산당 독재가 무너졌으면 열심히 일해서 경제를 살려야지 츳츳츳, 뭐 그런 것. 그런데 저자의 분석은 완전히 거꾸로다. 인종주의 때문에 시장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경제 즉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변화 그 자체가 인종주의를 한층 더 강화시킨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불균형을 낳는다.” 지극히 심란하고 피곤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사실이다. 취업을 포기한 청년 인구가 사십만, 구조 조정, 중산층의 몰락, 기타 등등은 우습게도 1인당 GNP라거나 세계 몇 번째 경제 대국이라거나 하는 소위 경제 발전 지표와 비례한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은 내속적인 구조적 불균형, 그 최심중의 적대적 성격으로 이루어진다’ 같은 문장이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적은 공산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라는 것인데, 민족주의는 자본주의가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파시즘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파시스트의 꿈은 단순히 “과잉”없는, 구조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적대가 없는 자본주의를 갖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에서 한편으로 사회적 직조의 안정과 균형을 보증하는, 즉 사회의 구조적 불균형에서 다시금 우리를 구해주는 주인-지도자의 형상이 복귀하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이 불균형에 대한 이유가 “과도한” 축적과 탐욕으로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귀속되는 것이다.... 주인의 기능은 과잉의 원인을 분명하게 한정된 사회적 작인에 위치시킴으로써 과잉을 통제하는 것이다..... 주인의 형상과 더불어 사회적 구조에 내속적인 적대는 권력의 관계로, 우리와 그들, 적대적 불균형을 야기하는 저들 사이의 지배 투쟁으로 변형된다.」

 

  초기 자본주의의 참상은 올리버 트위스트라든가 기타 소설이나 역사서, 채플린의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히틀러가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속성이라는 것을 알았던 몰랐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터질 것 같은 불만을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빈곤은, 자본주의적 결실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유대인’, 우리의 것을 도둑질해 간 ‘유대인’ 이라는 외적 대상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다. 내적 적대는 봉합되었고, 외부의 적은 그럴듯하다.

  “집 안 싸움을 하다가도 도둑이 들어오면 합심해서 도둑을 잡아야한다”는 의 말은, 집 안 싸움은 집 밖에 도둑을 만듦으로써 봉합되어야 한다는 주인의 주문에 다름 아니다. 현명하게도 혹은 고지식하게도 그녀는 “그런데 집 안 사람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도둑으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부지불식간에 그녀는 진짜 도둑은 원래 집 안에 있었다는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도요타 사태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는 미국 경제가 공공연하게 쇠퇴하는 단계에서 징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1990년대 초반에 벌써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점차로 유대인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즐길 줄을 모른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미국의 미디어를 보라. 일본이 점점 더 미국보다 경제적 우월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다는, 그들이 너무 많은 부를 축적한다는 다소 불가사의 한 사실에 놓여진다...」

  도요타 사태에 열광(?)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는 미국 정부와 미국 미디어의 태도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기지 대출 사태로 격발된 모든 경제적 불안과 불만이 갑자기, 광적으로 도요타를 상대로 분출하고 있다는 바로 그 느낌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 자신은 도요타 사태의 이 과잉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인종적 뿌리에 관한 이야기는 애초부터 “기원들의 신화”이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현재의 적대를 흐려놓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창조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화석이 아니라면 “민족유산”이란 무엇이겠는가? .... 민족주의로의 이와 같은 반전의 충격적인 신속함 때문에 외상적 방향 상실을 겪으면서 놀라는 대신... 이 외상적 방향상실을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해결의 열쇠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리라.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초래한 외상적 방향상실로부터, 발밑에서 근거를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붕괴는 과소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혼란과 상실을 겪게 되는지는 솔직히 미루어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 사회들의 자본주의 적응기는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난폭하게 날뛰는 신흥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그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적 적대를 드러내는 부정적 증표인 동시에,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어떤 그 무엇에 대한 가치를 반증하는 긍정적 증표이기도 하다. 여전히 레닌주의자인 저자의 지향점이 무엇인건 간에,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차적 관점을 제공한다.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어떤 특이한 지점, 어떤 결정적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를 은폐하는 장막이지만, 반대쪽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내부적 적대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해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시차적 관점인 것 같다.

 

  지난해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국가대표>가 벤쿠버의 성화와 함께 OCN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진 않지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무난한 영화인 것 같다. 콧물 찍, 눈물 찍은 촌스럽다는 통념이 오래되어서인지 몰라도 국가대표라는 제목 자체의 중압감에 비해서는 다행히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는 딱 그만큼이 좋은 성동일의 연기 덕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태극마크와 애국심의 상관관계를 애초에 단절하고 들어가는 전제에 힘입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태릉선수촌의 그 누구도 애국심 따위를 고된 훈련의 동력으로 삼을 리 없는 시대에 그 정도야 기본이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 네 명(혹은 다섯)의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조직위(?)까지도 철저히 개인적이고 정념적인 이유로 국가대표를 꾸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는 자연스럽게 생겨나던 혹은 진심에서 우러나던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 여기서는 오히려 국가에 의해 강요된다고도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국가에 대한 너의 애국심과 능력을 증명해 보라! ...라는 식의 무엇이 있다.

  하정우는 엄마에 의해 버려진 해외 입양 고아이다. 이유야 어떻건 간에 자식을 버린 것은 엄마이다. 귀책 사유는 엄마에게 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하정우는 자신을 버린 국가, 혹은 엄마(보통은 아버지가 국가를 은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진정한 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코치 성동일은 대표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정우에게 너를 버린 국가를 이용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는 국가에게 너의 능력을 먼저 인정받아야 비로소 국가를 혹은 엄마를 되찾을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과 같다. 매주 되풀이 되는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는 여전히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라”던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애국심이란 물론 목적을 위한 수단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단지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의 장 안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국 구구한 개인적 사연으로 얽힌 선수들과 코치 사이에 화합과 형제애(혹은 민족애?)가 싹트는 과정을 보며주며, 국가대표 혹은 태극마크 안에서 하나됨을 대단원의 막으로 그리고 있다. 어쩌면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그 핏줄에 대한 강박 관념 자체가 하나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애국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화 <국가대표>는 첫 인상과는 달리, 그 제목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애초에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예찬하는 참으로 솔직한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난해 그 흥행 성공이 보여 준 것처럼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에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렇다면 나의 관점은 무엇일까? 대답을 위해 다시 김연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하다.

 

  김연아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는 언론의 집요한 물음(오히려 추궁이라고 해야 할 듯하지만)에도 3월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신중함일 수도 있지만 거부의 느낌이 더 강한 침묵이다. 나는 그녀에게 동의하지만 어쩌면 동의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열되어 있다. 자연인 김연아와 피겨퀸 혹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나는 김연아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 되어 가끔 기분이 내킬 때만 스케이트를 신는 진짜 전설이 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트리플 악셀을 훌륭하게 구사하여 4년 뒤에도 아사다 마오를 납작하게 이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김연아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해야 옳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끼어든다. 김연아는 이미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 막대한 광고 수입을 흔쾌히 동의한 까닭은 김연아가 국가대표로서의 의무를 기꺼이 완수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분열되어 있다. 국가대표, 국가대표로 대표되는 국가주의를 냉소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도, 혹은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그 국가주의에 열광하고 있다. 그 민족적 자부심에 은근히 뿌듯해 하고 있음을 들키고 만다. 김연아 효과가 몇 조인가를 몇 일째 되풀이 보도하는 뉴스는 물론 한심하다. 벤쿠버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나도 더 잘할 수 있다거나, 우리 민족이 더 잘 살 수 있다거나,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물론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벤쿠버의 성공을 마치 정부의 성공인양 우려먹고 또 우려먹을 것만 같은 정부를 생각하면 성공이 아니라 실패 같기도 하다. 나는 믿지 않지만, 김연아의 금메달 소식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스포츠를 이용한 우민화 정책이 먹혀들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나는 국가 대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니 어쩌면 올림픽 자체가 거대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적대를 은폐하는 전 지구적 우민화 정책일지도 모른다. 100일 뒤에 빨간 셔츠를 입고 뛰쳐나와 목이 터져라 외칠 월드컵 응원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나는 안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나는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민족주의에는 그 모든 기만에 이용당하고도 남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 자체가 주는 어떤 잔여가 있는 것일까?

 

 

 

** 인용문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에서 따온 것이다. 벤쿠버 올림픽과 영화 <국가 대표>와 러시아 등 유럽의 신흥 인종주의와 이 독서가 함께 맞물려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 왔지만, 지젝의 책이 여전히 어렵게 읽히는 것만큼이나 이 글은 산만하고 어쩌면 오독에 기인한 틀린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무엇보다 국경별로 뚜렷한 빈부 격차와 국가에 의해 존재가 보장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 산 죽음 (호모 사케르)으로 취급받는 이 냉혹한 세계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등에 대한 일관된 의견을 가질 수 없음이 혼란스럽다. 그것은 물론 S1과 대상a, $의 개념에 대한 여전한 혼돈의 탓도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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