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평점 :
『아듀 데리다』, 9명 저자의 글을 순서 없이 읽었다. 첫 번째 글인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를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읽었는데, 그제야 나는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을 알게 되었다. 데리다 사망 직후, 싸가지 없는 일부 무리들이, 그것도 주로 영미 대중문화계의 무지한 것들이, 추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공격했고, 열 받은 인문학자들이 ‘아듀 데리다’란 제목의 시리즈 강연을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책이 발간되었다는, 그런 사연이다. 강연은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 인문학연구소 주최로, 2005년 5, 6월에 이루어졌다.
안면이라도 익혀서 그랬는지, 먼저 읽고 리뷰를 쓴 네 명의 글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대체로 명확했다.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이해력에 달린 문제였다. 그런데 나머지 다섯 명의 글은 너무 감성적이고, 은유적이고, 또 시적이기도 하고, 광기도 살짝 비치는 것도 같고, 하여튼 이성 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글들이다. 아마도 데리다의 글쓰기가 이랬던 것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데리다를 읽은 적이 없어서 그건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래서 요약해 볼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들 5명의 이름을 거의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장 뤽 낭시 만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의 공동 저자로 스무 쪽 정도의 글을 읽어 보았을 뿐이다. 그 때도 조금 감성적이란 느낌이 있었는데(기억하는 건 아니고, 그 책의 발제로 쓴 글을 찾아보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듀 데리다』에 실린 글 제목이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여서 그런지, 그런 느낌을 좀 더 받았다. 어쨌든 책을 끝낸 기념으로 5명 저자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대해서 간단히 메모해 놓으려 한다. 그리고 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한 꼭지가 데리다를 다루고 있어서, 읽어 보았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 내용이라서 그런지 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덧붙이려고 한다. 이 강연은 진태원의 것이며 제목은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이다.
코스타 두지나의 <데리다의 추모사>
책이 발간된 배경과 9명 저자의 글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보통 책의 서문에 해당한다. 고유명사 즉 명명하기를 통해 그 시작과 마지막인 세례식과 추도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삶의 여정은 그 두 찬사 사이의 간격, 타자(언어, 의식, 아버지)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는 것과 타자에게 그 이름을 잘 지켜달라고 내놓는 것 사이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p16
장 뤽 낭시의 <광기에 사로잡힌 데리다>
‘푸코 대 데리다 논쟁’이란 것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다. 장 뤽 낭시는 이 논쟁의 쟁점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광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그 논쟁은 데카르트를 읽는 방법과, ‘이성’과 ‘광기’가 전제하는 통상적인 구분을 해석하는 방법을 둘러싼 토론이다.
“..푸코가 고전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제도 안에서 비이성이 배제된다는 점을 확인했다면, 데리다는 소위 이성의 주체라는 것이 그 혹은 그녀의 주관성 그 자체로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서는 결정, 확인,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p38
장 뤽 낭시는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데리다가 ‘주체를 없애려고 모의한 적이 없’ 으며, ‘주체 안에서 동일성과 차이(동일성과 그 자신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교차함을 확인했다’ 고 한다. 장 뤽 낭시가 데리다의 주체 개념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읽는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데리다는 코기토를 ‘작별의 코기토’라고 불렀던 모양인데, 이것에 대해 장 뤽 낭시는 “존재와 사고의 오랜 일치 -이성과 어울리는 일치-는 존재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가버릴 때, 그것이 스스로와 접촉할 때 상실된다.” p55 고 설명한다. 고백하자면 카페인 가득 각성 상태에서 정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별의 코기토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이 상실과 연관된 주체의 광기에 대해 소화된 언어로 요약할 처지가 아니다. 체면치레로 인용문 하나만 남긴다.
“ 자신의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 흔적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다.(데리다,주체) 그는 자신이 흔적에 불과함을 발견하고 광기에 사로잡힌다. 그는 스스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스스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즉 자신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것은 비록 그가 만질 수는 있지만 언제나 만질 수만 있을 뿐, 보거나 알지 못하고, 소유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한다. 심지어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품거나 그것이 야기하는 격정을 감수한다 해도 소유 할 수 없으며, 이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p48
아마도 이것이 ‘작별의 코기토’이며 그래서 주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의 <자크 데리다의 찬사에 부치는 소고>
페미니즘 이야기도 나오고, 칸트의 ‘as if~' 뭐 이런 말도 많이 나오는데, 전반 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이름도 어렵다.
드루실라 코넬의 <데리다>
지젝이 신종야만주의라고 표현한, 데리다의 죽음을 향해 영미 지식인들이 추잡 하게 드러낸, 야만성에 대해, 드루실라 코넬은 데리다가 용감하게 미래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코넬이 <데리다>에 붙인 부제는 ‘미래라는 선물’ 이다. 데리다의 이 미래는 ‘도래할’ 미래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상황은 늘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시기상조란 행위를 지연시키는 핑계로 이용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야만적인 무지와는 달리, 데리다의 ‘시기상조’는 ‘일종의 만들어지는 중인 시기적절함’ 이다. 나의 근거 없는 편견과는 달리 데리다는 행위를 끝없이 미루는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지금 행동해야 한다’의 철학자이다.
“데리다는 우리의 의무가 ‘진행중인 시기적절함’에 주의를 기울이기라고 아름답게 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그것은 가상적이고, 금지된 상태이며, 미래에 수용될 가능성으로 충만한 채 기다리고 있다. 내 생각에 데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침묵하고 있는 ‘소수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힘에 대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던 날까지 여전히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듯이, 데리다는 그들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마도 그가 임종하는 순간에 절실하게 느낀 것은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이 강력한 요청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이 요청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p191~2
J. 힐리스 밀러의 <故 데리다>
데리다의 <로빈슨 크루소> 읽기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 문화연구 측면에서 접근하여, '프로테스탄트적인 자본주의 경제적 인간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주류 학풍과는 달리, 데리다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에 주목한다. “고독은 데리다가 <크루소>와 함께 읽는 작품인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의 기본적인 주제들 중 하나이다.” p252
데리다의 사유는 고독한 크루소의 ‘발자국’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죽음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데,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p253. 하이데거에게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 이다.
데리다는 소설의 한 문장, 시 한 구절로 두 시간의 강연이나 한 권의 책을 엮는다. 데리다는 끝없이 이야기한다. 제 시간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목표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왜? 죽음을 향한 존재가 제 시간에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에. 故데리다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는 오고야 말고 우리는 故데리다를 본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중
진태원의 <해체, 차이, 유령론으로 읽는 자크 데리다>
『아듀 데리다』를 읽은 기념으로, 때마침 함께 구매한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데리다만 먼저 읽었다. 이 책은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가 시민을 상대로 연 강좌를 묶은 책이다. 아무래도 『아듀 데리다』보다는 쉽고 편안하다.
진태원은 데리다의 사상 전반을 요약하는 모험 대신 그의 주요 개념 세 가지를 통해 데리다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해체, 차이, 유령 이다.
1. 해체
데리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해체’는 여러 번 들어 보았다. 그 만큼 많이 쓰인다는 것인데, 그렇게 널리 쓰이면 쓰일수록 원래의 의미가 희석되고 왜곡된다고 한다. 해체는 그렇게 손상된 대표적인 개념이다.
‘해체’는 데리다가 처음 사용한 말이지만, 사실은 하이데거의 ‘데스트룩치온’ 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을 해체한다고 할 때, 이 해체는 파괴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데리다가 수행했던 해체 작업은 기존의 개념적〮이데올로기적 틀을 동요시키고 기존의 위계적 대립항들을 해체·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기존의 문제 틀에서는 사고되고 실행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p313」
해체는 단순히 대립항들을 뒤집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틀 내에서의 자리바꿈일 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틀 자체는 존속된다. 데리다의 해체란 말하자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를, 새로운 틀을 발명해 내는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라는 사례로 해체 작업을 보여주는데, 이걸 요약하기는 어렵고,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단순무식하게 노예-주인에 비유해 보았다.
해체를 이렇게 볼수 있다면, 해체는 지젝이 분석하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 비슷한 것 같다. 기존의 대립항을 전복하는 것은 기존의 틀 내에서 그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 이 관계의 틀 자체를 해체하는 것. 지배-피지배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정-반-합 삼항조가 아니다. 합은 없다. 두 번의 ‘반’에 의해 ‘정’은 그 틀 자체가 붕괴되는, 이중의 부정을 당한다. 물론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이렇다고 나는 읽었다.
데리다의 해체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해체의 대상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해체의 가능성 내지 잠재성들이 어떤 균열과 모순 또는 맹목을 통해, 증상을 통해 이러저러한 텍스트적인 또는 콘텍스트적인 사건들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p316」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텍스트의 맹목점은 텍스트의 가장 본질적인 논리와 절차의 귀결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내재적인 동시에 텍스트의 고유한 논리와 관점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설명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텍스트 외재적이기도 합니다. p317」
라캉의 용어 중에 ‘외밀한’ 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맹목점은 누빔점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쩌면 대상a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텍스트를 떠받치는 동시에 해체하는 지점이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도 같은 지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맹목점은 반드시 ‘삐딱하게’ 보아야만 보일 것이고. 시차적 관점. 라캉과 지젝에 너무 딱 들어맞아서 좀 긴가민가 싶지만, 거칠게 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해체의 이런 성격을 따져보면 ‘해체’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고 진태원은 주장한다. ‘탈구축’이 더 적절하단다. 왜냐하면 “본질주의적이고 동일성 중심적이고 위계적인 기존의 질서를 되풀이 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내지 짜임새를 형성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2. 차연 또는 차이
차연은 디페랑스diffèrance의 우리말 번역이다. 디페랑스diffèrance는 차이diffèrence라는 단어에서 ‘e'를 ‘a'로 의도적으로 오기해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e든 a든 하여튼 이 단어의 어근인 diffèrer은 ‘다르다, 차이나다’ 란 의미와 동시에 ‘지연하다, 연기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말 ‘차연’은 여기에 착안에 차이의 差와 지연의 延을 합쳐 만든 번역어다. 그런데 진태원은 ‘차연’이란 번역어에 이의를 제기한다. 번역어의 문제란 곧바로 디페랑스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진태원의 설명과 관계없이 내 생각에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은 늘 우리에게 골칫거리로 보인다. 그것이 신조어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권에는 별 문제도 아니다. 서로 번역하지 않아도 불어나 독어 영어는 눈치로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우리에겐 끝도 없이 씨름할 일에다, 합의도 못보고, 번역자마다 다른 단어를 갖다 붙이고, 그 피해는 결국 일반인 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가타리가 과타리가 되는 것은 애교지만, 예지적·본체적·가상적이 모두 noumenal의 번역어라면, 이런 빌어먹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플라톤의 『공화국』정도는 눈치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국가』가 『정체』인 것은 그렇다 쳐도, ... 하여튼 나는 플라톤이 공화국도 쓰고, 국가도 쓴 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 독자의 수준이다. 번역어의 엄격함만큼이나 대중성도 좀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 번역어의 통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태원은 차연이라는 번역어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e를 a로 오기한 데리다의 의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와 a의 발음은 둘 다 디페랑스다. 음성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오로지 문자로만 구별되게 만든 것이다. 데리다는 문자기록이 음성이나 말에 대해 홀대받는 전통에 반대하며, 문자기록이 ‘로고스 자체를 성립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 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우리는 ‘차으’ 라고 해야 되나? 경상도 사투리는 ‘ㅡ’와 ‘l'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우리에겐 어떤 번역어를 쓰든 그 의미를 온전히 번역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두 번째는 ‘기원의 탈구축’ 이라는 데리다의 의도인데, 내용이 어렵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여튼 ‘기원의 탈구축’이란 ‘자기-차이화’의 효과들을 낳는다고 한다. 기원은 어떤 움직이지 않는 근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며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고 하는데, 여하튼 어렵고, 진태원은 이런 점에서 ‘차연’은 지나치게 협소한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다. 데리다는 e를 a로 오기함으로써, 서양 학계에 자연스레 배어 있는 ‘음성 중심주의’를 일깨우고자 한다. 내게는 차연도 충분히 낯설긴 하지만, 이 낯설기와 데리다의 낯설기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 우리에게는 해결방법이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진태원은 차연의 대안으로 김남두 교수와 이성원 교수가 주장한 차이差移를 지지한다. 差異에서 異를 移로 바꾼. 이것이 세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데, 한문을 가지고 와서 낯설게 하기, 새로운 합성어 운운하는 것이 글쎄 내게는 별로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 보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해체’ 만큼이나 유명한 ‘차연’에 대해, 번역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데리다가 실제로 사용한 사례 등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그런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차연이 혹은 차이가 뭐라는 건지 잘 감이 안 온다.
3. 유령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데리다의 책이 있다. ‘의’ 의 애매성 혹은 이중성을 짐작하겠지만, 마르크스의 유령이란 마르크스라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마르크스에게 나타나는 유령으로 읽을 수도 있다. 데리다는 이 둘 다를 가리키고 있다.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라는 유령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유산 없이는 누구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 p330” 이다.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해방의 운동’ 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억압과 착취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우리 곁을 배회하며 해방운동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 역시 자신의 유령에 시달린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도 물신숭배도 없는 세계를 믿었지만, 아무런 환영 없는, 유령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 곧 상품 이전의, 교환가치 이전의 순수한 기원, 순수한 사용가치의 낙원(원시공산주의)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 이후의, 물신 숭배 이후의 가상 없는, 환영 없는 사회(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 p335” 았다.
그렇다면 유령은 사라져야 할까? 데리다는 여기서 오히려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The time is out of joint" 는 유령이 출몰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순간, 그 틈새로 유령은 출현한다. 시간이 딱 맞물려 연속적으로 정확히 흐르는 세계는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어떠한 전복, 어떠한 균열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근원적인 탈구의 시간, out of joint, 은 “메시아적인 장래가 도래하기 위한 조건이자 정의가 실행되기 위한 기회p336”이다.
데리다의 이 out of joint는 벤야민의 통찰과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데리다 자신은 벤야민과는 유사성 못지 않게 중대한 차이가 있다고 역설했다. 어떻게?
진태원은 이 질문을 궁금증으로 남기며 데리다 강의를 끝맺는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는 무언가 부인의 태도가 있지 않을까요? 현대 사상의 핵심 중 하나가 이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337"
강의 예고편인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