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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데리다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최용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7월
평점 :
나는 데리다의 이름을 너무 늦게 들었다. 누군가가 '어제 데리다가 죽었어.’라 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에 새겼다. 그러나 너무 늦음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 이미 한물갔다는 세간의 소문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귀동냥 했던 일부 인문학자들 사이의 풍문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그 덕분에 나는 데리다란 인물에 대해서 알려고도 해보지 않았다. 이미 알튀세르와 라캉,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그리고 지젝이 있었고, 이들의 반대편(?)에는 이진경 때문에 서둘러 무시할 수 없었던 들뢰즈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해체’와 ‘차연’ 같은 말들은 무시로 들려왔다.
『아듀 데리다』는 어쩌면 데리다의 논쟁적 적대자들이 나와 같은 머저리에 보내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데리다를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는 9명의 명단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을 발견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저자 9명 중 이들 4명은 내가 한두 권이라도 그의 책을 읽어 보았던 철학자들일 뿐 아니라, 내가 알기로 데리다와 어느 정도 대립하는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라는 표제의 글에서, 1969년 이후 최근까지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0년대라는, ‘사상사에 있어서 각별했던 순간에 대한 집단 서명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데리다를 꼽으며, 자신은 데리다에 대해 마땅히 ‘철학적 경의’를 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철학적 경의란 ‘차이를 나타내는 경의이며, 그 차이에 합당한 무게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 실린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 지젝의 글은 바디우가 의도한 ‘철학적 경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글은 먼저 데리다식 개념의 사상사적 지위나 의의를 설명한다. 네 명의 저자들이 주목하는 데리다 사상의 측면은 모두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철학과 가장 인접한 데리다의 개념에 주목하는데, 그 친밀성을 통해 역으로 그들 자신과 데리다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데리다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지만 또한 데리다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철학적 경의’ 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네 편의 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편에서도 아마 이런 경의를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 들 네 명만으로도 이미 내 기억과 사고는 뒤엉켜 쑥대밭이 되었다. 물론 이 네 명이 어떤 개념을 다루었는가에 대한 간단한 메모에 불과하겠지만, 이것이라도 먼저 정리해 두지 않고는 나머지 글들을 읽기가 실로 벅차다. 번거롭지만, 할 수 없이 두 편의 글로 나누어 리뷰를 쓰기로 한다. 물론 리뷰2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 데리다에 대한 이 사상가들의 독해를 제대로 읽어내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알랭 바디우의 <자크 데리다에게 경의를 표하며>
바디우가 주목하는 개념은 ‘비실존의 기입’ 이다. 데리다의 이 작업을 바디우식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비실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영도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무無’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비실존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의 원존재를 위해 싸우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라고. 이것이야 말로 혁명의 정의이다. 즉 비실존이 자신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다수적 원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세계, 즉 세계의 초월성을 변화시켜야 한다. P83」
실존과 초월적 관계에 있는 원존재는, 세계 내에 출현할 때 다수의 형태로 실존한다. 그런데 실존의 정도는 그것의 강렬함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실존들 중에서 가장 미약한 실존, 가능한 최소한의 실존을 ‘비실존’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집합의 부분집합들 중 공집합에 해당하는 것이다. 공집합도 집합이다. 비실존도 실존이다. 그것의 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 비실존을 강력한 정치적 실존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 글의 결말 부분을 당겨와 썼지만, 사실 인용문이 데리다 자신의 이론인지, 바디우식 해석인지 잘은 모르겠다. 내겐 바디우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비실존의 기입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원존재와 실존의 형이상학적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것은 사라지는 소실점으로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라짐’을 보여주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래서 데리다의 글쓰기는 모호하며, ‘하얀 잉크’로 쓰는 글이다.
「데리다는 분류된 사항을 해제한다. 한마디로 데리다는 용기 있는 평화주의자를 요청하는 운동에 몰두한 것이다. 그가 용감했다는 것은 이미 구축된 분류를 수용하거나 그에 적응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구성된 대립체계 너머를 탐색하는 것은 대체로 평화와 사색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스듬한 태도를 고집하는 것, 즉 형이상학에 뿌리를 둔 단정적 구분을 거부하는 것은 항상 결정의 법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격동의 시대인 지금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1968년에서 1976년에 이르는 ‘공산주의 시기’에 데리다가 진리의 바깥에 머문 것은 이 때문이다. P80」
데리다는 한마디로 끝없이 ‘미끄러진다’. 원존재에서 비실존으로, 비실존에서 원존재로. 데리다의 논리는 긍정과 부정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바디우는 여기서 데리다를 명시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서두에서 바디우는 1969년 이후 데리다와 거리를 두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는 ‘진리 사건’의 철학자이다. 바디우는 불가능한 것을 명명하기를 주장한다.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으나, 아마 눈치로 보건대 데리다는 어떤 사건도 진리로 기입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에 대한 ‘용감한 평화주의자’ 란 명명은 바디우와 데리다 사이의 차이를 바디우가 암묵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아마도 현대 사상사 혹은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해 기초 지식 정도는 있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출간되었을 것이다. 내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독자라 씁쓸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제에 이런 리뷰를 쓰는 ‘용감함’에 대해 변명할 말이 없는 것이 씁쓸하다. 말인즉 이 리뷰가 받아야 할 것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다. 데리다의 말과 바디우의 말, 그리고 내 생각까지, 뒤엉켜 뒤죽박죽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보편의 구축과 해체>
발리바르는 보편의 철학자로 알려진 헤겔의,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한다. 『정신현상학』의 Ⅰ장(?) 제목이 “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 이다. 이 개념을 발리바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감각적 확신이라는 관념을 요약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단독성과 보편성이 순수한 지시작용의 격으로 간주될 경우 상호 구분하기 어렵다는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논의에 대면하게 하는지 돌아보았다. p122」
나는 『정신현상학』을 보았다. 차마 읽었다고 할 수는 없고, 모든 페이지를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있다. 물론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의식의 수수께끼 같은 여행이라고 할까. 하여튼 발리바르의 말은, 단독성과 보편성은 겉보기처럼 그렇게 대립적인 개념은 아니라는 것인 듯하다.
발리바르는 여기에 방브니스트의 ‘인칭 대명사에 대한 논의’를 가지고 온다. 장 클로드 밀네는 방브니스트의 논의가 곧바로 헤겔의 감각적 확신을 연상시킨다고 주장하는데, 발리바르가 이를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 다음으로, 데리다가 방브니스트의 핵심 논제를 (전복적으로) 취했다고 보고, 결론적으로 데리다와 헤겔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방브니스트, 장 클로드 밀너, 발리바르를 우회하여 헤겔과 데리다가 만난 것이다. 그 교차점이 바로 ‘감각적 확신’ 이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요약 보다는 전체 글에 대한 꼼꼼한 독해가 필요할 것이다.
발리바르가 해체와 보편을 연관 짓는 방식은 흥미롭다. 발리바르는 해체를 보편의 파괴가 아니라 보편의 재출현을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해체가 파괴가 아니라는 것, 즉 형이상학적 보편적 범주들을 궁극적으로 극복하거나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해체란 그러한 범주들이 재현되지 못하도록 억압한 것들과 관련된 내적 긴장 및 한계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잉여, 대체보충, 지연의 형태로 재현해서 다시 출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p137」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주체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돌려받는다.” 는 라캉의 명언에 대한 전혀 다른 데리다식 독법이다.
「데리다는 ‘편지가 수취인에게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 주장한다. 만약 그것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사건에 대해 열린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오히려 그것은 절대로 수취인에게 도달해서도, 또는 대답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실은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깨어질 수도 있다는 점, 바로 실패하거나, 심지어 실패할 것이 틀림없다는 점, 그래서 특히 질문이나 호출에 대한 완벽하고도 적절한 대답은 실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이중성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해체적 독법을 되풀이한다면 대답은 무한히 지연되고, ‘연기되며’, 차연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인칭들 간의 대화적 대칭에 주의를 집중하는 대신 ‘산종되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나 닿을 수 없는 곳에 남아 상실될 위기에 처한다. p131」
라캉에게 편지의 최종 수신인은 발신자 자신이다. 그래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발리바르의 데리다식 독법이 이 점을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라캉에 있어서도 편지의 표면적 수신인으로 가정된 타자는 항상 그 메시지를 읽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이 둘을 비교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발리바르에게 질문할 주제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고, 누군가 이 의문에 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유효한가?>
결코 만만하지 않은 랑시에르지만, 천만 다행히도 이 글은 매우 명료하여 비교적 쉽게 읽힌다. 감사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1990년대 들어 점점 더 데리다 사고의 전방에 등장하게 된 한 가지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에 대한 추모글로 삼은 이유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아포리아 구조’에 대한 데리다의 탐구와 랑시에르 자신의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개념 사이의 공통분모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케란 철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지만, 국어사전에는 ‘만물을 지배하는 우주의 근본원리’ 로 정의되어 있다. 민주주의란 말하자면 지배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여섯 가지 지배의 자격을 열거했지만, ‘제비뽑기’라는 일곱 번째 원칙을 추가하면서 폭탄을 던졌다. ‘제비뽑기’에 의한 지배,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주인이나 귀족, 강자, 철인, 부모, 나이 등, 어떤 자격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다. 즉 일체의 아르케도 없는, ‘자격 없는 자격’, 역설적 체제인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아르케의 결여는 ‘바람직한’ 자격들, 즉 적절한 아르케를 보여주는 자격들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실로 바람직한 자격들 말이다. 그것들은 정확히 무엇에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p174」
「신성한 목동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추가로 존재하는 자격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지배받기보다는 지배할 자격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자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미이다. ‘데모스의 힘’이란 어떤 아르케도 그 힘을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힘이다. 민주주의란 명확하게 규정된 일련의 제도들도, 특정 집단의 힘도 아니다. 그것은 보충적이고 근거를 구성하는 힘으로, 모든 기성 제도들과 어느 특정 집단 사람들의 힘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그 정당성을 박탈하기도 하는 힘이다. p165」
우리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주기도 하고, 정확히 동일한 이름으로 같은 사람에게서 권력을 빼앗기도 한다. 고정된 아르케란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렇게 ‘근거를 구성하는 힘과 파괴하는 힘이 일치하는’ 것이다. 이 일치는 데리다의 ‘민주주의의 자동 면역’ 이라는 개념보다 더 급진적이라고 랑시에르는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데리다의 한계는 ‘타자성’ 이다.
「이 자동면역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한 무제한의 자기 비판역량으로, 이는 반민주주의적 선전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그것은 민주주의적 자유를 사용하여 반민주주의적 투쟁을 일삼는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권리를 제한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양쪽 모두 민주주의는 동일성 혹은 자아의 검증되지 않은 힘에 여전히 매달린다.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은 타자성이며, 이는 외부에서 올 수밖에 없다. p165~6」
「내가 제기하는 이의는 간단하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정치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 자체의 타자성, 즉 자기 자신 안에 이질성의 원칙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가 바로 이 원칙이다. p166」
랑시에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이미 그 타자성을 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힘이다. 타자성이 외부로부터 올 때 실제 사라지는 것은 ‘실천적 민주주의’다. 데리다의 논리에서 정치는 소멸한다.
데리다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판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그 구체적 내용은 꼼꼼한 독해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요약의 범위를 넘어선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서만 어떤 대상이 파악되고 있다면, 그 대상 즉 데리다는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데리다 자신은 이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펼 기회조차 없으니, 데리다의 온전한 저서를 통해 그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
지젝은 데리다의 ‘차연’과 자신의 ‘시차’ 개념 사이의 친연성을 통해 데리다를 추모하고자 한다. 이 두 개념은 모두 ‘극소 차이’를 의미하며, 이것은 실증적이고 실체적인 속성에 근거한 차이가 아니다.
지젝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차적 관점』은 철학적 시차, 과학적 시차, 정치적 시차에 관한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의 ‘서주’에서 이미 지젝은 『시차적 관점』의 많은 지면이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한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p 63)」
시차적 관점은 하나의 불변하는 대상이 있고, 그에 대해 두 개 이상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균형 잡힌 중립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진중권이 『이매진』에서 ‘촛불은 왼쪽에서도 깜박거리고, 오른쪽에서도 깜박거린다’ 란 소제목으로 소개한 지젝의 시차적 관점은 이런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지젝이 시차적 관점의 시각적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루빈의 꽃병’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두 개의 얼굴을 보거나, 하나의 꽃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시차에 따라 오로지 꽃병이거나, 오로지 얼굴일 뿐이다. 지젝 이론의 근간인 헤겔을 통해 표현한 시차란 이런 것이다.
「오히려 헤겔이라면 이렇게 표현했겠지만, 주체와 대상은 내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며’, 그 결과 주체의 관점에서 발생한 ‘인식론적’ 변화는 언제나 대상 그 자체의 ‘존재론적’ 변화를 반영한다. p227」
시차란 관점의 주관적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상 자체의 속성을 실체적으로 변화시킨다.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의 운명이 그 명시적 사례를 제공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30년간 독재 권력을 휘둘러 왔으나, 한순간에 쫓겨났다. 이집트 민중이 더 이상 그를 대통령으로 바라보지 않는, 관점의 변환을 가져왔을 때 그는 순식간에 힘없는 노인이 되었다. 왕은 그 실체적 속성 때문에 왕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불러주기 때문에 왕인 것이다. 인식론적 변화가 존재론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에서 읽은 지젝의 개념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지젝은 자기 복제로 유명한 작가이다. 여기 이 짧은 글에서도 이미 다른 책에 쓰였던 내용들이 적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한 문단을 통째로 ‘복사’ 해서 ‘붙여 넣기’ 한 부분도 있다.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쓰는 작가라는 지젝의 명성에는 이런 ‘비법’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적 게으름으로 비난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광고문구 맨 앞에는 지젝이 등장한다. “지젝과 랑시에르, 바디우가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 지젝의 인기가 그만큼 높은 것이겠지만, 지젝에 대한 반감 역시 그 인기에 못지않다. 그것은 헤겔이나 라캉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오로지 지젝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지젝을 통해 본격적인 ‘철학 읽기’에 돌입한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시차적 관점 역시 한없이 삐딱할 것이다. 언젠가 지젝을 오독하지 않고 읽어내게 되었을 때, 그 때가 오면 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책읽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넘어야 할 산은 최근에 번역된 지젝 평생의 역작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이다. 한 사상가의 역작에 붙인 제목치고 민망하기 짝이 없지만 출판사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Less Than Nothing : Hegel and the shadow of dialectical materialism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