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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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_

피히테의 선택

 

 

 

 

  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럴 것 같았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서문과 1,2장은 읽을 만 했다. 그동안 독해가 좀 늘었나 싶었는데, 웬걸 3장에서 탁 걸렸다.

  지젝은 피히테를 가끔 언급하긴 했지만, 한 장에 걸쳐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은 ‘Anstoss' 의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하자면 피히테의 ‘Anstoss'는 라캉의 ’대상a‘와 같다. 이 책 3장에서도 ‘Anstoss'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된다. ‘Anstoss'처럼 라캉에 빗댄 개념은 오히려 이해할만 하다. 그 외의 것들은 머리가 아프다.

 

  “절대자는 오직 동시에 그것의 대립물, 즉 출현이 출현에게도 출현할 때만 출현할 수 있다.” 같은 문장투성이다. 째려보고 노려보아도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쳐다볼 기력도 없다. 진이 빠지는 것 같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어떻게 읽기는 했는데,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연결은 안 되지만 그냥 멋지게 보이는 것들 토막토막 옮겨 놓는 것이 내 수법이다.

 

 

 

 

 

0.

 

 

  독일관념론은 ‘공식적으로’는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진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 장점은 이어받고 단점은 극복하며 매끄럽게 진보한 것은 아니다. 선임은 후임의 비판을 거부하고, 후임은 선임의 핵심 개념을 놓치는 등 굴곡이 많은 역사다. 그러나 이런 충돌을 지젝은 오히려 철학 발전의 촉매로 본다. 칸트라면 헤겔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 헤겔이라면 마르크스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 그것이 철학의 근본 모습에 다가가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1. 피히테적 내기

 

 

  「피히테는 주체성의 핵심 자체에 있는 기묘한 우연성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철학자였다. 피히테적 주체는 모든 현실의 절대적 기원으로 과장된 에고=에고가 아니라 영원히 지배를 벗어나는 우발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유한한 주체다. 동인 Anstoß, 즉 처음에는 텅 빈 주체의 점진적인 자기한정과 자기규정을 가동시키는 원초적인 충동은 단지 기계적인 외적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유의 심연 속에서 나의 자유를 한정하도록/규제하도록, 즉 추상적인 이기주의적 자유로부터 합리적인 윤리적 세계 속에서의 구체적인 자유로의 이행을 완수할 것을 강요하는 요청으로 기능하는 또 다른 주체를 암시하고 있다. p281」

 

 

  Anstoß. 두 가지 상반된 뜻을 가진 독일어다. 억제, 방해 저지 등 저항의 의미와  동인, 자극 등 행위를 촉진하는 의미가 있다. 지젝은 이 Anstoß (영어 번역어는 Anstoss) 를 대상a, 주체를 분열시키는 욕망의 대상-원인과 동일시한다. 피히테는 Anstoß를 “주체가 텅 빈 절대적 주체와 비(非)나에 의해 제한되는 유한한 한정된 주체로 분할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로 규정하고 있다.  피히테의 유명한 공식이라는 ‘나=나’ 를 불가능하게 하는, 목 안의 가시 같은 이물이다. “Anstoß는 절대적 나의 관념성의 한가운데로의 ‘난입’, 실재와의 위험한 부딪힘, 마주침의 순간을 가리킨다.”

 

 

  「우리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칸트적인 예지체적 물과는 분명히 반대로 동인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외-밀하다. 주체의 핵심 자체에 있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 자체인 것이다. 피히테 본인이 강조하듯이 동인의 역설은 그것이 나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데 있다. 만약 이 동인이 ‘순전히 주관적인 것’ 이 아니라면, 만약 이미 이 비나, 객관성의 일부라면 우리는 다시 ‘독단주의’에 떨어질 것이다. 즉 동인은 실제로는 단지 칸트적 물 자체의 어슴푸레한 잔여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단지 피히테의 비정합성 (그에 대한 가장 흔한 비난)을 확인해줄 뿐일 것이다. 만약 동인이 단지 주관적일 뿐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자신과 얼빠진 놀이를 하는 것일 것이며, 우리는 결코 객관적 현실이라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피히테는 실제로 독아론자 (그의 철학에 가해지는 또 다른 상투적인 비난)가 될 것이다. 핵심적 요점은 동인이 ‘현실’의 구성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를 가진 순수한 나가 중심에 있다. 주체가 형식이 없는 동인의 실재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하며, 그것에 객관성의 구조를 부여한다. p282~3」

 

 

  지젝은 피히테가 통상적인 비판과는 달리 독아론자도 아니고 비정합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그 이유가 책의 내용이지만, 보다시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그냥 결론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피히테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결정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물론 또 책 안에 다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통과한다.

  뭐.. 그 오류라는 것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자면 , “나 자신을 볼 때 어떻게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라는 피히테 자신의 질문에 대해 피히테는 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지젝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는 어떻게든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지젝은 그 전제의 ‘불가능성’이 답이라고 한다. “ 나는 알지 못한다. 인식은 오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원래 공백이며, 존재의 질서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의 실패이다. 나와 나의 실체 또는 대상으로서의 나인 것 사이에는 구성적 간극이 있다.”

 

 

 

 

2. 동인 Anstoß 과 행위-행동

 

 

「동인은 형식적으로 라캉의 대상a와 상동적이다. 이것은 자장처럼 나의 정립 행위의 초점, 그것을 중심으로 히 행위가 순환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적으로 비실체적이다. 그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 자체에 의해 창조되고- 정립되고,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p284」

 

 

  Anstoß에 관해서는 뒤에도 이어진다. 하나 더 가져오면,

 

 

  「동인은 정확히 출현appear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가상appearance, 즉 무엇인가로 나타나는 무가 아닐까? 바로 이것이 피히테의 동인을 기묘하게 라캉의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  - 이것은 또한 어떤 결여의 실정화, 공백의 대리물이다-  에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 p313」

 

 

  「모든 동일성의 원조 격의 모델은 나=나, 즉 주체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라는 피히테의 주장이 옳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동일성이라는 형식 논리적 개념은 두 번째로 오며, 이것은 나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초월론적 논리적 개념에 정초되어야 한다. 피히테가 절대적 나는 사태가 아니라 행위(행위-행동)임을, 즉 그것의 동일성은 순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과정적인 것임을 강조할 때 그가 말하려는 것은 정확히 주체는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 자기 자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주체로 완전히 실현하려 하지만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가 주체이다. (그것이 나이다) 오직 주체의 경우에만 우리는 실패와 성공,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결여에 정초되어 있는 동일성의 이러한 완전한 일치를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과정성에 앞서는 또는 그것의 기저에 놓여 있는 실체적 동일성의 가상이 있게 된다. 그리고 실재론의 ‘독단론’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은 모든 실체적 존재자에 대한 나의 이러한 순수한 과정성의 초월론적·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하는 데 요점이 있다. p288」

 

 

  ‘동일성’은 identity 의 번역이다. 그래서 동일성으로 잘 이해가 안 갈 때는 정체성으로 바꾸어 읽으면 쉬울 때도 있다. 여기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생각난 김에 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 그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고려해야 될 때도 있다. 영어에는 그런 단어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지젝이 잘 쓰는 단어로는 ‘cause' . 대의 혹은 원인. 『in the defence of lost Cause』. 지젝의 책 제목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책이다.

  여하튼 이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라캉과 헤겔이 지젝 사유의 지평이다. 인용문에서도 피히테를 엄청 헤겔-라캉식으로 읽는 것 같다. 피히테는 자기 동일성이 ‘과정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지젝은 여기서 자기 동일화의 ‘실패가 주체다’ 고 한다.

 

 

  「주체의 한정은 외적인 동시에 내적이며, 주체의 외적 한계는 항상 주체의 내적 한정이라는 주장은 물론 피히테에 의해 ‘절대적인 초월론적 관념론’의 주요 명제로 발전된다. 모든 외적 한계는 내적인 자기한정의 결과이다. 칸트가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칸트에게 물 자체는 직접적으로 주체에 의해 구성된 현상체적인 장의 외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예지체적인 것을 현상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한계는 초월론적 주체의 자기한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의 외적 한계일 뿐이다. p289」

 

 

  어떻게 보면 지젝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잔소리장이 같다. ‘칸트의 한계’에 대해서는 수십 번을 들어 본 것 같다. 지젝에 의하면 칸트는 다 해놓고 저 골칫덩이 ‘물자체’ 때문에 망한 것 같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를, 인식의 저 너머에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한 일은 간단하다. 인식의 불가능성을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모든 외적 한계는 자기한정의 결과라는 것’

 

 

 

 

3. 분할과 한정

 

 

  「피히테에게서 나와 비나 사이의 관계는 상호 한정의 관계이다. 비록 이 상호 한정은 항상 절대적 나 내부에서 정립되지만 핵심적인 요점은 이 나를 실재론적 방식으로 ‘자체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나와 비나가 상호 제한하는 추상적이며, 순전히 초월론적 관념적 매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최고의) 현실인 것은 절대적 나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나 자체는 오직 나를 좌절시키고 제한하는 비나의 반대하는 힘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것 속에서만 현실성을 획득한다. p293」

 

 

  피히테에게 나의 (자기)정립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 비나는 무엇인가? 비나는 나의 ‘비정립되어 있음’ 이다. 비나는 절대적으로 무이며 순수한 없음이다. 피히테는 이것을 일종의 ‘비존재’ 로 표현했다. ‘죽지 않은 not dead’이 아니라 '안죽은 undead' 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비존재, 나가 아닌 것이 아니라 비나이다. 나와 비나의 대립 외부에는 나의 어떠한 현실도 없다. 나로부터 비나를 박탈하는 것은 현실을 박탈하는 것이다.

 

 

  피히테의 무한성은 ‘행위하는 무한성’, 주체의 실천적 참여의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다. 사람에 있어 ‘한정’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한정은 내부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에 끼어들어 그것을 좌절시키며, 그것을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한정이다.

 

 

  헤겔의 진무한과 자기한정은 자기 관계 맺기라는 개념 속에서 전개된다. 생물학의 ‘자기생산 autopoiesis'와 같다. 수프같은 유기체의 웅덩이에서 어떻게 세포막을 가진 독립체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 말이다. 생화학적 반응으로 어떤 분자가 만들어지고, 이 분자는 세포막을 생성한다. 생성된 세포막은 역으로 그 생화학적 반응을 제한한다. 원환이 만들어지고, 이것으로 자기구분이 발생한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전제정립‘과 동일한 구조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요약·비판하고 있는 이 장에서(친절한 요약은 물론 아니거니와 더우기 지젝의 논지에 필요한 것들만 선별한 것일터이다.)  무언가를 발췌한다는 것은 우스운 짓인 것 같다. 축약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뚝뚝 떼어온 인용문은 선문답처럼 생경맞다. 그래도 기왕 한 것, 조금만 더 인용하기로 한다. 나중에 피히테를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읽어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하며.

 

 

 

 

4. 유한한 절대자

 

 

  ‘비나’는 칸트의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 ‘비인간’은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비인간’에게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인간이라는 것 속에 있는 어떤 무시무시한 초과라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칸트와 함께 일어난 변화이다.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 동물적 욕망과 신적 광기의 초과와 싸우는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오직 칸트 그리고 독일관념론과 함께 이제 맞서 싸워야 할 초과는 절대로 내재적인 것, 주체성 자체의 핵심 자체에 위치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어떤 영웅이 미칠 때 그것은 동물적 열정이나 신적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 자체의 폭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피히테적 비자아는 술어의 부정이 아니라 비-술어의 긍정이다. 그것은 ‘이것은 자아가 아니다’가 아니라 ‘이것은 비자아이다’ 이다. p311」

 

 

  「피히테는 단정적인 판단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나=나, 생명의 순수한 내재성, 순수한 생성, 순수한 자기정립, 행위-행동, 정립된 것과 정립하는 것의 완벽한 일치가 그것이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나는 이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지적 직관으로, 이러한 신비적 흐름은 의식에는 접근 불가능하다. 모든 의식은 자신과 대립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흐름으로부터 안나의 등장은 나로부터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존재로부터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나로부터 비나로서의 대상으로 이행할까?  동인을 통해. 이 외-밀한 장애물을 통해. 동인은 (나를 포함한) 비나도 또 (외적으로 나와 대립해 있는) 대상도 아니다. 동인은 절대적으로 무인 것도 또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로 셈해지는 무이다. 여기서는 피히테가 그렇게나 크게 강조하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핵심적이다. 내용과 관련해 동인은 무이다. 형식과 관련해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  따라서 그것은 ‘어떤 것의 형식 속에서 무’이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이미 첫 번째 명제로부터 두 번째 명제로의 이행에서 작용하고 있다. 즉 A=A는 순수한 형식, 자기동일성의 형식적 제스처, 형식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안자아는 그것과 대칭을 이루는 대립물로, 형식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재귀성이 또한 A=A로부터 안자아의 정립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최소한의 간극이 없다면 절대적 자아와 절대적 안자아는 간단히 직접적으로 겹치고 말 것이다. p311~2」

 

 

 

 

 

5. 목에 걸린 피히테적 가시

 

 

  내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감각들뿐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자는 나의 ‘정신적 구성물’ 이라는 것이 피히테 철학에 대한 통상적 인식이다. 그러나 피히테가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그는 정말로 버클리적인 실재론자일 뿐이다. 따라서 피히테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현실적인 대립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외부 세계가 나에 실제로 대립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피히테에 따르면 그것은 오직 정신이 세계에 대해 실천적 태도를 취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이론적·관찰자적 입장에서 현실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꿈으로 파악하기는 쉽다.  -하지만 현실은 일단 우리가 개입해 그것을 바꾸려고 하기 시작하면 ‘상처를 주고’ 저항한다. 물론 바로 여기서 피히테의 악명 높은 가무한이 들어온다. 즉 실천적 자아는 결코 비나의 저항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아 본래의 실천적 성향은 분투”이다.-  궁극적으로, 도덕적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무한한 윤리적 분투가 그것이다. p331」

 

 

  피히테는 이론이성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철학자라고 한다.

 

 

 

 

6. 최초의 근대신학

 

 

  관념론을 대할 때, 특히 모든 것이 주체의 정신의 작용이라거나, 나의 정신적 구성물이라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이것이다. 모든 ‘나’가 제 각각 자신의 구성물을 만들어내면, 어떻게 이 ‘나’들은 소통을 할까?  이런 질문과 동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피히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바로 “나의 다수성 문제” 라고 한다.

 

 

  「나의 전주체적 근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피히테는 다수의 자아가 어떻게 이처럼 공유된 근거 속에서 공존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p341」

 

 

  「피히테는 근거의 지위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비정신적이며, 즉 비주체적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물’은 아니며 순전히 관념적인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용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의 큰 타자가 정확히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비정신적인 것이며, 그것은 주체의 경험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 이전의 물질적 실재도, 주체성과 독립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이나 과정도 아니다. - 큰 타자의 지위는 순전히 잠재적이며, 관념적인 참조의 구조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오직 주체의 전제로서만 존재한다. 라캉적인 ‘큰 타자’는 또한 주체의 복수성 문제도 해결한다. 그것은 제3항, 즉 주체들 간의 만남의 매개 자체인 제3항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p344」

 

 

  이 라캉의 대타자는 헤겔의 ‘객관적 정신’ 에 얼추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타자로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대타자가 언어 체계 혹은 이데올로기 체제 또는 국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 대타자 속에서 동일한 체계를 습득하는 셈이니 주체 간 상호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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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gativität 2024-05-29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독자인데 진무한에 대해 세포의 자기형성 과정으로 비유하신건 진짜 탁월한 설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자의 구성이란 무엇이던 질료에 그와 같은 형상이 부여되는 모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군요. (물론 지젝이 지적했듯 이 질료는 추상적 타자입니다만) 덕분에 변증법에 대한 실마리를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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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책을 ㅠ.ㅠ....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은 독서회에 가입했을 때, 이미 회원들이 읽고 있던 책이다. 매주 선정된 책과 별개로, 반년 정도를 잡고 조금씩 함께 읽는 책이라고 했다. '다산'만 해도 아득한데, '지식 경영법' 이라니... 반년이나 손때를 묻혀야 하는 책이니 빌려 볼 수도 없고, 책을 주문하면서도 울며겨자먹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의외로 흥미롭다. 한꺼번에 읽으면 지치겠지만, 1주에 2~30쪽 정도라 분량도 적당한데, 뜻하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오늘 읽은 대목은 '19강.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라' 와 '20강.근거에 바탕하여 논거를 확립하라' 이다.

 

이 책을 두고 어떤 회원은 석사 논문을 쓸 때 지침으로 삼았으면 참 좋았겠다는 말을 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책은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가에 관한 방법론이다. 전체 10강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강은 5개의 목으로, 각 목은 4개의 결로 세분되어 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10강 50목 200결 체제다. 

 

...

 

다시, 오늘 읽은 19강으로 돌아가서, '절시마탁법'. 

 

  「글로써 벗과 만나는 것은 옛사람이 즐거워한 일이다. 다만 근세에 학자들은 서로 모여 강할 때, 매번 알갱이 없이 칭찬하고 거짓으로 겸손해하며 하루해를 마친다. 갑이 온통 치켜세워 찬양하면, 을은 몸을 받들어 물러선다. 다시 을이 두 배나 더 칭송하면 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겸양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실지에는 절시마탁하는 보탬이 없다. 」

 

그림이 그려진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겸양하고 매우 흔쾌한 듯 한데, 지나치게 가식적이다. 정약용은 여기에 돌을 던진다.  벗의 유익함은, 서로 칭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데 있다고 한다. 얼마나 무자비하냐하면 상상만해도 끔찍할 정도다.

 

"마땅히 돌침으로 뼈에 침놓듯이 어리석고 게으름을 경계하고, 쇠칼로 눈동자의 백태를 깍아내듯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여기엔 관계의 불평등이 있다. 엄마가 공부 못하는 자식에게 '잘한다, 잘한다', 엉덩이 살살 두드려 가며 어떻게든 공부 좀 시켜볼까 하는,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난다.  턱도 없는 일에 칭찬을 해도, 고래니까 춤을 추지 사람이면 반발이 먼저 생길 수 있다, 나를 진짜 바보로 아나..뭐 이런.

 

여하튼 다산의 교훈은 인정사정 두지 말고 논쟁하라는 것. 논쟁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두고 하는 것이다. 나의 논지가 공격받는 것이지 내 인격이 공격받는 것이 아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쌍방히 온전히 승복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도 독서 토론이라도 할라치면, 누군가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말하기가 괜히 미안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다산이 옳다!

 

 

이건 우리 회원이 직접 만든 컵케잌 ^^ 보너스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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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이 책 읽어 봤어요, 아마 대학교 졸업반 무렵 어느 즈음인 것 같은데, '지식경영법'이라는 책 제목에 약장수의 향기를 읽었으나 내용은 꽤 그럴 듯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상식적인 얘기인데, 정약용 선생께서 옛 한문의 구문을 이용하여 설명하니 무릎을 탁 치고 말았더랬죠,,, ㅎㅎ

말리 2013-09-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약용 지독한 OO . 사람들이 뭐 그러고 읽는답니다. 넘 깐깐해서 자식들 미치겠다고 ㅋ
 
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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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_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제목만 보면 2장은 무슨 소린지 감이 안 온다. 어디서 튀어나온 문장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의미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런데 의외로 2장의 내용은 매우 재미있고, 비교적 쉽다. 2장에는 지젝의 특기인 온갖 비유적 사례들이 출동한다. 영화, 농담, 소설, 시, 정치적 사건 등이 2장의 삼분의 일 가량은 족히 차지하는 것 같다. 골치 아픈 이론은 제쳐두고 이 흥미로운 사례들에 푹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2장은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한 이야기다. 지젝이 보는 기독교는 한마디로 ‘무신론적 종교’ 다.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가 무신론적 종교라니, 언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은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 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쳤다. 이 외침은 원망이 아니라 탄식이다. 아버지 신이 자신의 아들마저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다. 지젝은 이것을, 반항의 몸짓, 아버지 신을 향한 ‘염병할!’ 이라고 매우 과격하게 표현한다. 어쨌거나 이 때 신은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신 자신도 죽었다. 전능함의 베일 아래 감춰진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신은 죽었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대타자다. 라캉의 유명한 정식 중 하나는 ‘대타자는 없다’ 이다. 대타자는 구멍 뚫려있고, 빗금쳐져 있다는 뜻이다. 대타자는 비전체not all이며, (W)hole이다. 주체만 빗금쳐진 것이 아니다. 대타자 역시 빗금쳐져 있다. 주체만 무능한 것이 아니라, 대타자 역시 무능하다.

 

  대타자의 구멍(W)hole에 직면할 때, 비로소 주체는 소외에서 분리로 이행한다. 주체는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대타자를 잃었지만, 그 대신 자유를 획득한다. 주체의 자율성이란 어떤 외적 참조점도 없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행위하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네 의무를 다하라’ 는 무조건적 명령은 어떤 내용도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식이다. 무엇이 의무인지에 대해 칸트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윤리적 주체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그 행위의 결과 또한 완전히 주체 자신의 책임이다. 어떤 대타자나 어떤 신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러므로 전혀 칸트적이지 않다. 아이히만은 칸트를 통해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은 행위의 책임을 대타자에게 지우는 바로 그 합리화의 길을 완전히 봉쇄한다.

 

  2장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이제까지 지젝이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해 주장해 온 내용들이다. 단, 기독교가 왜 무신론적인 종교인지에 관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왜 무신론자만이 ‘본래적인 믿음’을 가지고 행위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아먹기가 쉽다. 사실 그 동안은 왜 지젝이 기독교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목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는 베유 (아마 시몬느 베이유인 것 같다;;) 의 표현인데, 204쪽에 그냥 달랑 나온다. 베유의 말이 어떤 맥락인지는 모르겠다. 별 설명 없어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인가? 여하튼 이 ‘아무것도 없음’의 대리인이 바로 라캉의 대상a이다.

 

 

1. 큰 타자

  (보통은 대타자로 번역되기 때문에, 이 책의 인용문이 아닌 경우에는 입에 익은 대타자를 썼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으려 몇 번 시도했다.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근간이 확실한 건지, 철학책이라도 좀 읽을라치면 꼭 거기서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못 읽었다. 늘 구약 초반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나거나, 신약의 유명한 부분만 조금 보다 덮는다.

  우리 언니 중 한명은 약간 보태면 종교에 반 목숨은 걸었다. 전화를 하다보면 늘 하느님 이야기다. 그런 언니에게 내가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다. “성령이 뭐야?" 언니는 의외로 당황했다. 성령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성령은 무엇일까? 대타자일까? 지젝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는 식의 조금 모호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보기엔 성령이란 대타자인 동시에 대상a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젝은 딱 부러지게 말하지는 않는다. S1과 대상a를 등치시키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에 어긋나는 걸까? .. 잡설은 그만두고 이제 책 내용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성령은 시니피앙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제목 아래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일 겁니다.” 고 했다. 성령은 삶의 영역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적 질서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에게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생물학적 삶을 넘어 종교적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성령은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타자는 잠재적 현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나 꽃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성령에 대해 대답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겠나.

 

  「큰 타자는 오직 그에 대한 주체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잠재적 질서이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큰 타자에 대한 믿음을 중단한다면 주체 그 자체, 주체의 ‘현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상징적 픽션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픽션을 제거하면 현실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고리가 바로 헤겔이 ‘전제의 정립’이라고 부른 것이다. p181」

 

  주체의 믿음은 대타자를, 대타자는 주체의 현실을, 구성한다. 달걀과 닭의 관계다. 이 꼬리를 무는 원환의 구조를 헤겔은 ‘전제의 정립’ 이라는 말로 해결했다.

 

 

 

2. 신의 죽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잠재적 실체(큰 타자)가 죽기 위해서는 육체와 피라는 실재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픽션이지만 이 (현실을 구조화하고 있는) 픽션이 죽으려면 실재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야 한다. 잠재적 질서, 상징적 픽션으로서의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작용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작용한다 - 따라서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하는 것, 픽션을 현실로 환원시키는 것, 이 픽션이 어떻게 현실로부터 출현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으로는 (도킨스 같은 ‘속류’ 무신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이 픽션은 내부로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즉 이 픽션의 내속적 허위성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기술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무신론의 공식은 신 스스로 자기 자신의 비존재를 선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자신을 믿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역설이 있다.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해 현실을 환원시키면 현실 속에서는 계속 기능하며, 상징적 효력을 행사한다. p202~3」

 

  신 스스로 비존재를 증명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부로부터 대타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자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의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이 시대에 이데올기의 허구성,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성 따위는 숨겨진 비밀도 아니다. 영화나 소설 심지어는 드라마까지 나서서 이 거대한 대타자를 비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끄떡없이 굴러간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냉소를 먹고 커가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의 핵심적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다름 아니라 기독교는 가장 심원한 핵심에서 이미 무신론적인, 역설적이지만 무신론적 종교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후 현혹당해 있는 추종자들에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은 그곳에, 그들 사이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사랑이 사랑의 관계에서 제3항, 즉 사랑의 보증자와 토대라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읽혀야 한다. 즉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주는 큰 타자는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자신에 근거한 우리 사랑의 심연이 전부이다. p216」

 

  바디우는 사랑을 ‘이자의 장면’ 이라고 한다. 사랑은 일자도 아니고 삼자도 아니다. 사랑에는 삼자, 즉 우리 사랑의 조화를 보장해주고 적절한 토대를 제공해주는 삼자는 없다. 또한 사랑은 일자도 아니다. 연인과의 하나로 융합된 일자는 망상일 뿐이다. 사랑은 원초적 실재이며, 결혼의 의식에 의해 비로소 제3자인 대타자에 등록된다. 사랑은 그 개념 자체로부터 무신론적이다.

  신자들에게는 자명한 사실인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사랑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성령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성령은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인간의 필멸성의 죽음/끝, ‘죽음의 죽음’, 부정의 부정이다. 신의 죽음은 안 죽은 충동 (안 죽은 부분 대상)의 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대상a를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헤겔은 또한 몸으로 나타나는 불멸성 (‘안 죽어 있음’)을 무시한다. p197 」

 

  성령이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고, 신의 죽음은 안-죽은 부분 대상, 대상a의 출현이라면, 성령을 곧 대상a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밤 꿈속에서 조 힐을 만났지.

너와 나처럼 살아 있었네.

내가 말했지, “아니 조, 10년 전에 죽었잖아.”

“나는 결코 죽지 않았네.” 조의 말씀.

 

“구리 회사 사장놈들이 너를 죽였어, 조

너를 쏴죽였잖아, 조.” 내가 말했지.

“사람을 죽이려면 총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조의 말씀. “나는 죽지 않았어.”

 

거기 생명처럼 크게 서 있었지

두 눈으로 미소 지으며

조가 말했지. “저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계속해서 조직하지.“

 

“조 힐은 죽지 않았어.” 그가 내게 말했지.

“조 힐은 절대 죽지 않는다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곳이면 어디든

조힐이 그들 편에 서 있을 거라네.”

 

  <조 힐>이라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노래다. 1925년에 만들어져 진정한 민중가요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1952년 피스 아치 콘서트에서 “저 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저들이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불렸다. 불멸의 차원, 자본가가 총으로 죽이지 못한 그 영(靈)이 계속해서 조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로서의 대상a이다.

 

 

 

3. 무신론적 내기

 

  성령은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서 여성적 입장이다. 여성적 입장은 주인 기표라는 예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화 될 수 없는 장, 즉 비전체 not-all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여성성이란, 지도자에 기반하지 않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주인 형상이 아니며 대상a로서 분석가의 자리에 있다.

 

  지젝은 자신의 ‘기독교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에 이러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나는 내 입장을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진정 철저한 무신론으로, 즉 큰 타자의 비존재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무신론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즉 앞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는 신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 본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 또한 비실체적인 상징적 질서로, 즉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대표해 계속 믿는 잠재적 큰 타자로 살아남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오직 큰 타자의 그러한 사라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만이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의 신앙이며, 파스칼의 내기보다 훨씬 미친 듯한 내기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인식론적인 것, 즉 단지 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머문다. 즉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하며, 내기는 신 자체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철저한 무신론에서 내기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 무신론적 주체는 프로젝트에 가담하며, 그것을 ‘믿는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따라서 나의 명제는 이중적이다. 즉 기독교는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이다. p223」

 

  지젝은 신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에도 ‘믿는 것’ 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라고 역설한다. 천국과 성공에 대한 아무런 보증 없이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를 보증하는 대타자는 없지만, 그 프로젝트에 대한 충실한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주체의 진정한 정치적 행위이다.

 

  「진정한 윤리에서 우리는 큰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행위하며, 어떠한 보장 또는 토대도 박탈당한 행위의 심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p227」

    

 

4.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는 쾌락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제는 ‘쾌락원리를 넘어’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칸트의 윤리적 의무와 동일하다.

 

  「첫 번째로 명확히 해 둘 것은 라캉적 윤리는 쾌락주의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프로이트가 ‘쾌락원리 - 쾌락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심정 장치의 기능 - 라고 부른 것의 무절제한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라캉에게 쾌락주의는 실제로 ’현실주의적 양보‘를 위해 욕망을 연기하는 모델 자체이다. p235」

 

 

 

  정리를 하기 전과 후에 생각이 달라질 때가 많다. 2장은 비교적 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를 하다 보니 그리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훨씬 적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에 관해 분명히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성령’의 일반적 개념조차 없는 내 바탕 위에  정립하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렴풋이, 성령이란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대타자이자, 신의 죽음 이후에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상a라고 생각한다. <조 힐>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함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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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으러 들어와 습관적으로 TV를 켜니, YTN 속보라는데, '통진당 내란음모죄' 로 법석이다. 시끄럽다... 놀랍기 보다 시끄럽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총기를 준비하라는 녹취록을 확보했단다. 전쟁이 일어나면 경기남부의 통신, 유류 시설을 파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저껜가  "김정은, 동북아서 위험한 일은 없을 것' 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정작 위험은 위험을 조장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트윗도 대충 놀림거리 하나 만났다는 분위기다. <정원이와 정은이> 라는 '본격냉전콩트' 제목도 나왔다. 정원이가 누군가? 국정원장 이름은 아닌데 갸우뚱거리며 검색을 하는 순간 알았다. 아, 국 정원이! 성을 빼고 부르니 생판 처음 듣는것 같구나 호호.. 국정원 정치개입이 내란음모에 가까운지, 통진당 똘아이들의 쑥덕공론(이런게 있기는 할까;;)이 내란음모에 더 가까운지, 그거라도 이 참에 한번 밝혀보면 좋겠다.

 

 

오후 2시 현재, 다음 실시간 이슈에 '내란음모죄' 같은 것은 없다. 이석기, 김재연이 3위와 5위를 찍고 있고, 1위는 단연 '태풍북상' 이다.  태풍 '콩레이'는 일본 쪽으로 갈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왔는데도, 인기가 내란음모 뺨을 친다. 아마 작년 태풍 '볼라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은 유난히 태풍이 잦았다. 그리고 우리집은 유난히 태풍에 취약했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아파트에, 한 번도 손본적이 없고, 세입자들만 들락거린 험한 집, 거기다 앞은 훤하게 트였고, 결정적으로19층 고층이었다. 평소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19층엔 회오리바람이 '피용~ 피쉬쉬식' 비명을 지르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태풍 소식에 박스테잎을 사다 붙였지만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테잎자국 지운다고 힘만 썼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테잎 붙이고, 신문지 붙이라고 광고를 하더니만, 태풍이 지나고 나니, 그거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벌써 수십년 전에 해본 짓인데, 효과는 없고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유리창이 문제가 아니라 창틀이 문제라는 보도도 나왔다. 오래된 창틀은 그 자체가 휘거나 덜컹거려서 창도 깨지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볼라벤이 지나자 창틀이 휘어진 집들이 TV 화면에 위험스레 보도됐다. 그런 기사들을 보면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낡고 건들거리는 우리집 창틀이 그 거센 비바람을 이겨냈다는 것에 감사했다. 감사를 잘 못하는 성격인데, 정말 감사했다. 나는 그나마 볼라벤이 서해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네로 도망갔다. 평소에도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덜컹거리는 소리를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남편이 데려다 줬다. 볼라벤이 수도권에 근접하던 그 날 밤, 남편은 한 숨도 못잤다고 한다. 덜컹거리거나 퍽하는 소리가 아니라 뜯겨나가는 괴상한 소리에, 이제 깨졌나 싶어 나가서 확인하고, 또 나가서 확인하며 밤을 샜다고 한다. 겁 없는 남편인데, 도저히 잠잘 수 없었다고, 무서웠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이사를 왔다. 3년된 새집이고, 7층이라 그리 높지도 않다. 그런데 오고나니, 여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닷가라 바람이 세고, 높은 산이 없어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닥친다. 4월에 이사를 왔는데, 정말이지 봄바람이 작은 태풍처럼 불었다. 바람때문인지 남쪽인데도 수도권보다 더 추웠다. 지역 주민들 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바람 때문에 좀 고생한다고 한다. 

 

여름이 되고, 혹여 태풍이 올라올까 조금 신경을 썼다. 그전까지는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건, 농작물을 쓸어버리건, TV 속의 일로만 알았는데, 19층 낡은 아파트에서 태풍을 겪고나니 남의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올해는 아직까지 태풍이 없다. 북상하는 콩레이는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 한다.

 

 

한반도 태풍의 진로는 '북태평양 고기압' 이 결정한다. 태풍은 '북태평양 고기압' 의 가장자리를 따라 북상하는데, 올해는 이 고기압이 워낙 동서로 길게 뻗쳐서 중국-한반도-일본을 뒤덮는 바람에 태풍의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서서히 위축하고 있어 한반도 쪽으로 태풍의 길이 만들어 지고는 있다. 9월까지 강력한 태풍이 올라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기압이 빨리 수축해서 일본쪽으로 오그라들면 우리나라는 태풍을 피해갈 수도 있다.

 

사실 콩레이 기사를 보다가, 북태평양고기압의 분포에 따라 월별로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관한 그림이 있길래 복사해 두려고 한 것인데, 또 말이 길었다. 왜 자판 앞에 앉으면 자꾸 말이 길어지는 지 모르겠다.

 

 

 

이 기사를 통해 오늘 새롭게 안 사실은, 태풍은 지구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자구 노력이라는 것이다. 열나면 우리는 해열제를 먹는데, 지구는 높은 곳의 열을 낮은 곳으로 옮겨 '열적 균형'을 맞춘다. 적도 부근은 당연히 열을 많이 받는다. 이 뜨거운(?) 공기가 바다에서 수분을 공급받아서 덜 뜨거운 고위도 지방으로 이사하는 것이 소위 태풍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바람과 비가 동반된다.  왜 태풍은 항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지 이제 알겠다. 저위도에서 고위도로 열을 보내, 지구의 열적균형을 회복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올해는 태풍없이 잘 지나가면 좋겠다. 이 태풍 대신 내란음모죄라는 태풍이 불까? 싶기도 하지만, 열대저기압이라고 전부 다 태풍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이 어찌 태풍인가?   

우리가 이미 볼라벤을 겪어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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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알라딘 '블로거 베스트셀러'에 『살인자의 기억법』이 올라온 지 꽤 된 것 같다. 김영하라는 소설가를 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몇 년 전  "김영하 vs  조영일" 논쟁이라는 것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그가 꽤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밥과 김치'를 남기고 고인이 된 최고은이라는 작가 때문에 그 논쟁은 더욱 뜨거워졌고, 김영하는 착잡한 마음을 피력하며 논쟁의 글들을 모두 지우고 한동안 침묵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몇 달 전 아이패드를 통해 그를 다시 만났다.

  스마트폰도 없이 지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서, 뭔가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쌉쌀한 마음에 아이패드를 샀다. 말로만 듣던, 강처럼 흐르는 트윗이라도 하게 되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기분이라도 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도 여전히 나의 트윗은 강물은 커녕 달팽이처럼도 움직이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SNS보다 뜻밖의 수확은  팟캐스트다. 집안일을 하며, 잠들기 전에 등등, 짜투리 시간에  팟캐스트를 듣는다.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은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들을 듣는 재미가 적지않다. 플라톤의 향연,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 거리의 철학자라는 강유원의 입담도 만만치 않다. 나꼼수류의 시시껄렁한 입담이 아니라, 곰국같이 구수한 입담이다. 설겆이 물소리 때문에 군데군데 들리지 않아도, 이방저방 돌아다니느라 드문드문 빼먹어도 그 뿐, 다음에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

  이동진의 "빨간책방"도 기분이 쳐질 때 들으면 상큼하다. 작가라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말솜씨만은 전문 MC에 빠지지 않는다. 약간 높은 톤의 밝고 활기찬 목소리, 상큼한 사과를 한입 베어무는 기분이다. 남자들도 저렿게 생기발랄할 수 있구나 싶다, 더구나 작가가.   

  그리고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이 있다. 설마 했는데, 진짜 그냥 책을 읽을 때가 많다. 장편소설의 한 구절을 뽑아 그대로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는데, 중저음의 침착한 목소리 하나만은 듣기에 좋다. 혼자 녹음하고 직접 팟캐스트에 올린다고 하는데, 재주도 많은가 보다. 호기심이 많거나, 부지런하거나.

 

 

  『살인자의 기억법』을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왠 횡재인가 싶어 냉큼 빌려왔다. 읽어야 할 다른 책이 있는데, 한 며칠 묵히더라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정유정의 『28』이나 조정래의 『정글만리』등 조금 유명한 신간은 빌려 읽기가 엄청 힘들다. 도서관에 돌아오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이 빌려버리는지, 검색할 때마다 '대출중'이다. 여기 도서관에는 대출중인 책은 예약할 수 없다. 시스템이 안되어 있단다.

 

 

  예상외로 얇고,행간도 넓고, 글씨도 널널해서, 막상 읽는데는 반나절도 필요하지 않다. 술술 읽히는 것을 보니 재미가 있긴 한가보다. 그런데 이게 왜 베스트셀러인지는 모르겠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흥미롭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다. 다만 한두가지 의문이 들뿐이다.

 

  화자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연쇄살인범 노인이다. 그런데 그의 사고력은 너무 뛰어나다. 알츠하이머 화자가 과거의 기억은 또렷할 수 있지만, 그것들에 대한 표현력이 이처럼 훌륭할 수 있는 걸까? 화자와 작가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의 서술 방식은 화자의 생각이나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다.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언어를 잃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망각 속에서 언어를 잃는다. 건망증의 가장 흔한 증상은 단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모른다. 말기의 알츠하이며 환자가 이런 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선입견으로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나의 선입견이 선입견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부자연스러운 서술 방식을 택한 것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인터뷰에서 인물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고 하지만, 인물들의 말도 생각도 모두 작가의 말과 생각이지 않은가. 그래서 소설이든 드라마든 등장인물들의 말투가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때가 많다. 재벌 회장도 주먹 깡패도 똑 같이 비유법 좋아하고, 회고하기 좋아한다. 양아치 짓을 하다가도 멀쩡하게 교사처럼 설교한다.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야기다. 재미있고 좋은 드라마인데, 너나 할 것없이 똑같은 말투가 기분을 팍 잡친다. 여하튼 단순한 의문이다. 치매 환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  표현이 아니라 그냥 생각만이라 하더라도 가능할까? 생각 역시 언어로 구성된 것 아닌가? 언어를 잃고 사고를 또렷이 할 수 있을까?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  문화센터 강사의 말이다.  킬러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것은 언어를 살해했기 때문일까? 킬러가 연쇄적으로 죽여 나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언어인 것일까? 이 책은 언어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일까?  "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킬러는 살인을 계속한다. 시인도 그렇게 시를 계속 쓰는 것일까? 언어를 더 완전하게 죽여  시 속에 묻어 두기 위하여?  언어를 완벽하게 포착해 자신 속에 가두어 두기 위해?

  그러나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이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한다는 명제도 있다.  개체가 죽어도 유전자는 또 다른 개체 속에 살아 남듯이, 사람은 죽어도 언어는 남는다.  아닌가? 

 

  언어를 완벽하게 살해하는 것, 그것이 작가들의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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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경과 반야심경에 둘러 쌓인 두 농담의 공포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from 뚜벅뚜벅 주니우 2013-08-26 12:51 
    문학평론가 권희철씨의 해설에서 인상 깊은 문구 몇 개를 가져왔다. - 잘못된 인식과 고집과 고통이 집합소로서의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여기 남은 건 무아의 상태가 아니라 대혼란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바다 위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려야 하는 고통과 공포가 너의 몫이다. - - 연쇄살인범의 세계에서 주어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며 나머지 것들은 주어에 의해 부정당하기 위해 준비된..
 
 
주니우 2013-08-2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번 김영하씨는 일반인들이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화시키기 어려운 '알츠하이머 환자'인 '연쇄살인범'으로 주인공을 잡았습니다. 따라서 '화자의 일기장 같은 것인데, 너무 논리적이고 너무 사색적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꼭 그렇지 말라는 보장이 또 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얘 폴더를 만들어 김영하씩 소설을 관리하실 모양이군요~ 적극 추천합니다.
저는 이 폴더에 '책 읽어주는 시간'에서 소개한 책을 넣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말리 2013-08-2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고 남은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전히 서재지수 올리려고 ㅋㅋ(이거 은근 중독성 있음. 근데 아직 점수 규칙은 모르겠음) 걍 쓰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건 언어를 죽이는 시인에 관한 메타포구나. 근데 금강경은 모르니까, 금강경 구절로 앞, 뒤를 맞추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오겠지요. 권희철의 해설은 안 보고 반환해서 내용은 모릅니다만. 근데 언어에 촛점을 맞추게 되면, 조금 어색해지더군요. 우리가 내뱉는 것, 표현하는 것만 언어가 아니라, 생각이나 의식 혹은 무의식까지 모두 언어로 되어있다는 전제를 인정해 보면, 언어가 죽어나가는데, 사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거지요. 언어를 죽이면서 언어를 포착하는 작업으로 보면, 표현이 달라져야 된다는 거지요. 뭐 깊이 생각한 게 아니라, 마음대로 쓰다보니 그런 생각이 설핏들었고 걍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ㅋ. 여하튼 좀 알아 보고는 싶군요.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 사고나 표현은 어떻게 되는지. 근데 어쨌거나 난 언어를 살해하는 킬러라는 착상(내 맘대로 규정한 ? )은 마음에 들어요. 결국 죽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킬러죠. 알츠하이머에 의해 킬러가 죽는다는 것은 자기가 죽인 언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