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3_

피히테의 선택

 

 

 

 

  이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럴 것 같았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서문과 1,2장은 읽을 만 했다. 그동안 독해가 좀 늘었나 싶었는데, 웬걸 3장에서 탁 걸렸다.

  지젝은 피히테를 가끔 언급하긴 했지만, 한 장에 걸쳐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은 ‘Anstoss' 의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하자면 피히테의 ‘Anstoss'는 라캉의 ’대상a‘와 같다. 이 책 3장에서도 ‘Anstoss'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된다. ‘Anstoss'처럼 라캉에 빗댄 개념은 오히려 이해할만 하다. 그 외의 것들은 머리가 아프다.

 

  “절대자는 오직 동시에 그것의 대립물, 즉 출현이 출현에게도 출현할 때만 출현할 수 있다.” 같은 문장투성이다. 째려보고 노려보아도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쳐다볼 기력도 없다. 진이 빠지는 것 같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어떻게 읽기는 했는데,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연결은 안 되지만 그냥 멋지게 보이는 것들 토막토막 옮겨 놓는 것이 내 수법이다.

 

 

 

 

 

0.

 

 

  독일관념론은 ‘공식적으로’는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진다. 그러나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 장점은 이어받고 단점은 극복하며 매끄럽게 진보한 것은 아니다. 선임은 후임의 비판을 거부하고, 후임은 선임의 핵심 개념을 놓치는 등 굴곡이 많은 역사다. 그러나 이런 충돌을 지젝은 오히려 철학 발전의 촉매로 본다. 칸트라면 헤겔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 헤겔이라면 마르크스에게 어떻게 대답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 그것이 철학의 근본 모습에 다가가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1. 피히테적 내기

 

 

  「피히테는 주체성의 핵심 자체에 있는 기묘한 우연성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철학자였다. 피히테적 주체는 모든 현실의 절대적 기원으로 과장된 에고=에고가 아니라 영원히 지배를 벗어나는 우발적인 사회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유한한 주체다. 동인 Anstoß, 즉 처음에는 텅 빈 주체의 점진적인 자기한정과 자기규정을 가동시키는 원초적인 충동은 단지 기계적인 외적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자유의 심연 속에서 나의 자유를 한정하도록/규제하도록, 즉 추상적인 이기주의적 자유로부터 합리적인 윤리적 세계 속에서의 구체적인 자유로의 이행을 완수할 것을 강요하는 요청으로 기능하는 또 다른 주체를 암시하고 있다. p281」

 

 

  Anstoß. 두 가지 상반된 뜻을 가진 독일어다. 억제, 방해 저지 등 저항의 의미와  동인, 자극 등 행위를 촉진하는 의미가 있다. 지젝은 이 Anstoß (영어 번역어는 Anstoss) 를 대상a, 주체를 분열시키는 욕망의 대상-원인과 동일시한다. 피히테는 Anstoß를 “주체가 텅 빈 절대적 주체와 비(非)나에 의해 제한되는 유한한 한정된 주체로 분할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로 규정하고 있다.  피히테의 유명한 공식이라는 ‘나=나’ 를 불가능하게 하는, 목 안의 가시 같은 이물이다. “Anstoß는 절대적 나의 관념성의 한가운데로의 ‘난입’, 실재와의 위험한 부딪힘, 마주침의 순간을 가리킨다.”

 

 

  「우리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칸트적인 예지체적 물과는 분명히 반대로 동인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외-밀하다. 주체의 핵심 자체에 있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 자체인 것이다. 피히테 본인이 강조하듯이 동인의 역설은 그것이 나의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데 있다. 만약 이 동인이 ‘순전히 주관적인 것’ 이 아니라면, 만약 이미 이 비나, 객관성의 일부라면 우리는 다시 ‘독단주의’에 떨어질 것이다. 즉 동인은 실제로는 단지 칸트적 물 자체의 어슴푸레한 잔여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단지 피히테의 비정합성 (그에 대한 가장 흔한 비난)을 확인해줄 뿐일 것이다. 만약 동인이 단지 주관적일 뿐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자신과 얼빠진 놀이를 하는 것일 것이며, 우리는 결코 객관적 현실이라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피히테는 실제로 독아론자 (그의 철학에 가해지는 또 다른 상투적인 비난)가 될 것이다. 핵심적 요점은 동인이 ‘현실’의 구성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동화 불가능한 낯선 물체를 가진 순수한 나가 중심에 있다. 주체가 형식이 없는 동인의 실재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하며, 그것에 객관성의 구조를 부여한다. p282~3」

 

 

  지젝은 피히테가 통상적인 비판과는 달리 독아론자도 아니고 비정합적이지도 않다고 한다. 그 이유가 책의 내용이지만, 보다시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그냥 결론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피히테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결정적인 오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물론 또 책 안에 다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통과한다.

  뭐.. 그 오류라는 것에 대해 한마디만 해보자면 , “나 자신을 볼 때 어떻게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라는 피히테 자신의 질문에 대해 피히테는 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지젝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는 어떻게든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지젝은 그 전제의 ‘불가능성’이 답이라고 한다. “ 나는 알지 못한다. 인식은 오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원래 공백이며, 존재의 질서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의 실패이다. 나와 나의 실체 또는 대상으로서의 나인 것 사이에는 구성적 간극이 있다.”

 

 

 

 

2. 동인 Anstoß 과 행위-행동

 

 

「동인은 형식적으로 라캉의 대상a와 상동적이다. 이것은 자장처럼 나의 정립 행위의 초점, 그것을 중심으로 히 행위가 순환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적으로 비실체적이다. 그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다루는 과정 자체에 의해 창조되고- 정립되고,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p284」

 

 

  Anstoß에 관해서는 뒤에도 이어진다. 하나 더 가져오면,

 

 

  「동인은 정확히 출현appear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가상appearance, 즉 무엇인가로 나타나는 무가 아닐까? 바로 이것이 피히테의 동인을 기묘하게 라캉의 대상a, 욕망의 대상-원인  - 이것은 또한 어떤 결여의 실정화, 공백의 대리물이다-  에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 p313」

 

 

  「모든 동일성의 원조 격의 모델은 나=나, 즉 주체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라는 피히테의 주장이 옳은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동일성이라는 형식 논리적 개념은 두 번째로 오며, 이것은 나의 자기동일성이라는 초월론적 논리적 개념에 정초되어야 한다. 피히테가 절대적 나는 사태가 아니라 행위(행위-행동)임을, 즉 그것의 동일성은 순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과정적인 것임을 강조할 때 그가 말하려는 것은 정확히 주체는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 자기 자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주체로 완전히 실현하려 하지만 (주체가 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가 주체이다. (그것이 나이다) 오직 주체의 경우에만 우리는 실패와 성공,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결여에 정초되어 있는 동일성의 이러한 완전한 일치를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과정성에 앞서는 또는 그것의 기저에 놓여 있는 실체적 동일성의 가상이 있게 된다. 그리고 실재론의 ‘독단론’에 대한 피히테의 비판은 모든 실체적 존재자에 대한 나의 이러한 순수한 과정성의 초월론적·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하는 데 요점이 있다. p288」

 

 

  ‘동일성’은 identity 의 번역이다. 그래서 동일성으로 잘 이해가 안 갈 때는 정체성으로 바꾸어 읽으면 쉬울 때도 있다. 여기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생각난 김에 하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 그대로 두 가지 의미를 다 고려해야 될 때도 있다. 영어에는 그런 단어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지젝이 잘 쓰는 단어로는 ‘cause' . 대의 혹은 원인. 『in the defence of lost Cause』. 지젝의 책 제목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책이다.

  여하튼 이 책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라캉과 헤겔이 지젝 사유의 지평이다. 인용문에서도 피히테를 엄청 헤겔-라캉식으로 읽는 것 같다. 피히테는 자기 동일성이 ‘과정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지젝은 여기서 자기 동일화의 ‘실패가 주체다’ 고 한다.

 

 

  「주체의 한정은 외적인 동시에 내적이며, 주체의 외적 한계는 항상 주체의 내적 한정이라는 주장은 물론 피히테에 의해 ‘절대적인 초월론적 관념론’의 주요 명제로 발전된다. 모든 외적 한계는 내적인 자기한정의 결과이다. 칸트가 보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칸트에게 물 자체는 직접적으로 주체에 의해 구성된 현상체적인 장의 외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예지체적인 것을 현상체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한계는 초월론적 주체의 자기한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의 외적 한계일 뿐이다. p289」

 

 

  어떻게 보면 지젝은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는 잔소리장이 같다. ‘칸트의 한계’에 대해서는 수십 번을 들어 본 것 같다. 지젝에 의하면 칸트는 다 해놓고 저 골칫덩이 ‘물자체’ 때문에 망한 것 같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를, 인식의 저 너머에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헤겔이 한 일은 간단하다. 인식의 불가능성을 존재의 불완전성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우리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모든 외적 한계는 자기한정의 결과라는 것’

 

 

 

 

3. 분할과 한정

 

 

  「피히테에게서 나와 비나 사이의 관계는 상호 한정의 관계이다. 비록 이 상호 한정은 항상 절대적 나 내부에서 정립되지만 핵심적인 요점은 이 나를 실재론적 방식으로 ‘자체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나와 비나가 상호 제한하는 추상적이며, 순전히 초월론적 관념적 매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최고의) 현실인 것은 절대적 나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나 자체는 오직 나를 좌절시키고 제한하는 비나의 반대하는 힘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것 속에서만 현실성을 획득한다. p293」

 

 

  피히테에게 나의 (자기)정립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 비나는 무엇인가? 비나는 나의 ‘비정립되어 있음’ 이다. 비나는 절대적으로 무이며 순수한 없음이다. 피히테는 이것을 일종의 ‘비존재’ 로 표현했다. ‘죽지 않은 not dead’이 아니라 '안죽은 undead' 인 것처럼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비존재, 나가 아닌 것이 아니라 비나이다. 나와 비나의 대립 외부에는 나의 어떠한 현실도 없다. 나로부터 비나를 박탈하는 것은 현실을 박탈하는 것이다.

 

 

  피히테의 무한성은 ‘행위하는 무한성’, 주체의 실천적 참여의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다. 사람에 있어 ‘한정’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한정은 내부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에 끼어들어 그것을 좌절시키며, 그것을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한정이다.

 

 

  헤겔의 진무한과 자기한정은 자기 관계 맺기라는 개념 속에서 전개된다. 생물학의 ‘자기생산 autopoiesis'와 같다. 수프같은 유기체의 웅덩이에서 어떻게 세포막을 가진 독립체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 말이다. 생화학적 반응으로 어떤 분자가 만들어지고, 이 분자는 세포막을 생성한다. 생성된 세포막은 역으로 그 생화학적 반응을 제한한다. 원환이 만들어지고, 이것으로 자기구분이 발생한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전제정립‘과 동일한 구조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요약·비판하고 있는 이 장에서(친절한 요약은 물론 아니거니와 더우기 지젝의 논지에 필요한 것들만 선별한 것일터이다.)  무언가를 발췌한다는 것은 우스운 짓인 것 같다. 축약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뚝뚝 떼어온 인용문은 선문답처럼 생경맞다. 그래도 기왕 한 것, 조금만 더 인용하기로 한다. 나중에 피히테를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읽어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하며.

 

 

 

 

4. 유한한 절대자

 

 

  ‘비나’는 칸트의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 ‘비인간’은 인간도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비인간’에게는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인간이라는 것 속에 있는 어떤 무시무시한 초과라는 특성이 있다. 이것이 칸트와 함께 일어난 변화이다.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 동물적 욕망과 신적 광기의 초과와 싸우는 이성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오직 칸트 그리고 독일관념론과 함께 이제 맞서 싸워야 할 초과는 절대로 내재적인 것, 주체성 자체의 핵심 자체에 위치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어떤 영웅이 미칠 때 그것은 동물적 열정이나 신적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칸트와 함께 광기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핵심 자체의 폭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피히테적 비자아는 술어의 부정이 아니라 비-술어의 긍정이다. 그것은 ‘이것은 자아가 아니다’가 아니라 ‘이것은 비자아이다’ 이다. p311」

 

 

  「피히테는 단정적인 판단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나=나, 생명의 순수한 내재성, 순수한 생성, 순수한 자기정립, 행위-행동, 정립된 것과 정립하는 것의 완벽한 일치가 그것이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나는 이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지적 직관으로, 이러한 신비적 흐름은 의식에는 접근 불가능하다. 모든 의식은 자신과 대립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흐름으로부터 안나의 등장은 나로부터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존재로부터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안나로부터 비나로서의 대상으로 이행할까?  동인을 통해. 이 외-밀한 장애물을 통해. 동인은 (나를 포함한) 비나도 또 (외적으로 나와 대립해 있는) 대상도 아니다. 동인은 절대적으로 무인 것도 또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로 셈해지는 무이다. 여기서는 피히테가 그렇게나 크게 강조하는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핵심적이다. 내용과 관련해 동인은 무이다. 형식과 관련해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  따라서 그것은 ‘어떤 것의 형식 속에서 무’이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이미 첫 번째 명제로부터 두 번째 명제로의 이행에서 작용하고 있다. 즉 A=A는 순수한 형식, 자기동일성의 형식적 제스처, 형식의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안자아는 그것과 대칭을 이루는 대립물로, 형식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재귀성이 또한 A=A로부터 안자아의 정립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형식과 내용 사이의 이러한 최소한의 간극이 없다면 절대적 자아와 절대적 안자아는 간단히 직접적으로 겹치고 말 것이다. p311~2」

 

 

 

 

 

5. 목에 걸린 피히테적 가시

 

 

  내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감각들뿐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자는 나의 ‘정신적 구성물’ 이라는 것이 피히테 철학에 대한 통상적 인식이다. 그러나 피히테가 단지 이렇기만 하다면 그는 정말로 버클리적인 실재론자일 뿐이다. 따라서 피히테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현실적인 대립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외부 세계가 나에 실제로 대립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피히테에 따르면 그것은 오직 정신이 세계에 대해 실천적 태도를 취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이론적·관찰자적 입장에서 현실을 눈앞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꿈으로 파악하기는 쉽다.  -하지만 현실은 일단 우리가 개입해 그것을 바꾸려고 하기 시작하면 ‘상처를 주고’ 저항한다. 물론 바로 여기서 피히테의 악명 높은 가무한이 들어온다. 즉 실천적 자아는 결코 비나의 저항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아 본래의 실천적 성향은 분투”이다.-  궁극적으로, 도덕적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는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무한한 윤리적 분투가 그것이다. p331」

 

 

  피히테는 이론이성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철학자라고 한다.

 

 

 

 

6. 최초의 근대신학

 

 

  관념론을 대할 때, 특히 모든 것이 주체의 정신의 작용이라거나, 나의 정신적 구성물이라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이것이다. 모든 ‘나’가 제 각각 자신의 구성물을 만들어내면, 어떻게 이 ‘나’들은 소통을 할까?  이런 질문과 동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피히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바로 “나의 다수성 문제” 라고 한다.

 

 

  「나의 전주체적 근거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피히테는 다수의 자아가 어떻게 이처럼 공유된 근거 속에서 공존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p341」

 

 

  「피히테는 근거의 지위를 해결 할 수 없었다. 비정신적이며, 즉 비주체적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물’은 아니며 순전히 관념적인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용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의 큰 타자가 정확히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비정신적인 것이며, 그것은 주체의 경험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 이전의 물질적 실재도, 주체성과 독립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이나 과정도 아니다. - 큰 타자의 지위는 순전히 잠재적이며, 관념적인 참조의 구조로 존재한다. 즉 그것은 오직 주체의 전제로서만 존재한다. 라캉적인 ‘큰 타자’는 또한 주체의 복수성 문제도 해결한다. 그것은 제3항, 즉 주체들 간의 만남의 매개 자체인 제3항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p344」

 

 

  이 라캉의 대타자는 헤겔의 ‘객관적 정신’ 에 얼추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타자로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대타자가 언어 체계 혹은 이데올로기 체제 또는 국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 대타자 속에서 동일한 체계를 습득하는 셈이니 주체 간 상호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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