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2_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제목만 보면 2장은 무슨 소린지 감이 안 온다. 어디서 튀어나온 문장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의미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런데 의외로 2장의 내용은 매우 재미있고, 비교적 쉽다. 2장에는 지젝의 특기인 온갖 비유적 사례들이 출동한다. 영화, 농담, 소설, 시, 정치적 사건 등이 2장의 삼분의 일 가량은 족히 차지하는 것 같다. 골치 아픈 이론은 제쳐두고 이 흥미로운 사례들에 푹 빠져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2장은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한 이야기다. 지젝이 보는 기독교는 한마디로 ‘무신론적 종교’ 다.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가 무신론적 종교라니, 언뜻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은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 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쳤다. 이 외침은 원망이 아니라 탄식이다. 아버지 신이 자신의 아들마저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다. 지젝은 이것을, 반항의 몸짓, 아버지 신을 향한 ‘염병할!’ 이라고 매우 과격하게 표현한다. 어쨌거나 이 때 신은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신 자신도 죽었다. 전능함의 베일 아래 감춰진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신은 죽었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대타자다. 라캉의 유명한 정식 중 하나는 ‘대타자는 없다’ 이다. 대타자는 구멍 뚫려있고, 빗금쳐져 있다는 뜻이다. 대타자는 비전체not all이며, (W)hole이다. 주체만 빗금쳐진 것이 아니다. 대타자 역시 빗금쳐져 있다. 주체만 무능한 것이 아니라, 대타자 역시 무능하다.

 

  대타자의 구멍(W)hole에 직면할 때, 비로소 주체는 소외에서 분리로 이행한다. 주체는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대타자를 잃었지만, 그 대신 자유를 획득한다. 주체의 자율성이란 어떤 외적 참조점도 없이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행위하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네 의무를 다하라’ 는 무조건적 명령은 어떤 내용도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식이다. 무엇이 의무인지에 대해 칸트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윤리적 주체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그 행위의 결과 또한 완전히 주체 자신의 책임이다. 어떤 대타자나 어떤 신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러므로 전혀 칸트적이지 않다. 아이히만은 칸트를 통해 자신을 합리화했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은 행위의 책임을 대타자에게 지우는 바로 그 합리화의 길을 완전히 봉쇄한다.

 

  2장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이제까지 지젝이 기독교와 대타자에 관해 주장해 온 내용들이다. 단, 기독교가 왜 무신론적인 종교인지에 관해 훨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왜 무신론자만이 ‘본래적인 믿음’을 가지고 행위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아먹기가 쉽다. 사실 그 동안은 왜 지젝이 기독교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목 “아무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로 읽어라” 는 베유 (아마 시몬느 베이유인 것 같다;;) 의 표현인데, 204쪽에 그냥 달랑 나온다. 베유의 말이 어떤 맥락인지는 모르겠다. 별 설명 없어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인가? 여하튼 이 ‘아무것도 없음’의 대리인이 바로 라캉의 대상a이다.

 

 

1. 큰 타자

  (보통은 대타자로 번역되기 때문에, 이 책의 인용문이 아닌 경우에는 입에 익은 대타자를 썼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으려 몇 번 시도했다. 기독교가 서양 문화의 근간이 확실한 건지, 철학책이라도 좀 읽을라치면 꼭 거기서 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못 읽었다. 늘 구약 초반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나거나, 신약의 유명한 부분만 조금 보다 덮는다.

  우리 언니 중 한명은 약간 보태면 종교에 반 목숨은 걸었다. 전화를 하다보면 늘 하느님 이야기다. 그런 언니에게 내가 언젠가 물어본 적이 있다. “성령이 뭐야?" 언니는 의외로 당황했다. 성령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성령은 무엇일까? 대타자일까? 지젝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는 식의 조금 모호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보기엔 성령이란 대타자인 동시에 대상a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젝은 딱 부러지게 말하지는 않는다. S1과 대상a를 등치시키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에 어긋나는 걸까? .. 잡설은 그만두고 이제 책 내용을 따라가 보자.

 

  라캉은 “성령은 시니피앙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분명 죽음충동이라는 제목 아래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일 겁니다.” 고 했다. 성령은 삶의 영역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적 질서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에게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생물학적 삶을 넘어 종교적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성령은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타자는 잠재적 현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나 꽃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성령에 대해 대답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겠나.

 

  「큰 타자는 오직 그에 대한 주체들의 ‘믿음’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잠재적 질서이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큰 타자에 대한 믿음을 중단한다면 주체 그 자체, 주체의 ‘현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여기서 역설은 상징적 픽션이 현실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픽션을 제거하면 현실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고리가 바로 헤겔이 ‘전제의 정립’이라고 부른 것이다. p181」

 

  주체의 믿음은 대타자를, 대타자는 주체의 현실을, 구성한다. 달걀과 닭의 관계다. 이 꼬리를 무는 원환의 구조를 헤겔은 ‘전제의 정립’ 이라는 말로 해결했다.

 

 

 

2. 신의 죽음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죽어야 했는가? 여기서 역설적인 것은 잠재적 실체(큰 타자)가 죽기 위해서는 육체와 피라는 실재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픽션이지만 이 (현실을 구조화하고 있는) 픽션이 죽으려면 실재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야 한다. 잠재적 질서, 상징적 픽션으로서의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작용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작용한다 - 따라서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하는 것, 픽션을 현실로 환원시키는 것, 이 픽션이 어떻게 현실로부터 출현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으로는 (도킨스 같은 ‘속류’ 무신론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이 픽션은 내부로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즉 이 픽션의 내속적 허위성을 드러내야 한다. 이를 기술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무신론의 공식은 신 스스로 자기 자신의 비존재를 선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이 자신을 믿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역설이 있다. 픽션을 외부로부터 파괴해 현실을 환원시키면 현실 속에서는 계속 기능하며, 상징적 효력을 행사한다. p202~3」

 

  신 스스로 비존재를 증명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 “주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외부로부터 대타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자들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그의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이 시대에 이데올기의 허구성, 자본주의의 상품 물신성 따위는 숨겨진 비밀도 아니다. 영화나 소설 심지어는 드라마까지 나서서 이 거대한 대타자를 비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끄떡없이 굴러간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냉소를 먹고 커가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의 핵심적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다름 아니라 기독교는 가장 심원한 핵심에서 이미 무신론적인, 역설적이지만 무신론적 종교라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후 현혹당해 있는 추종자들에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을 때면 언제나 자신은 그곳에, 그들 사이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사랑이 사랑의 관계에서 제3항, 즉 사랑의 보증자와 토대라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읽혀야 한다. 즉 우리의 운명을 보장해주는 큰 타자는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자신에 근거한 우리 사랑의 심연이 전부이다. p216」

 

  바디우는 사랑을 ‘이자의 장면’ 이라고 한다. 사랑은 일자도 아니고 삼자도 아니다. 사랑에는 삼자, 즉 우리 사랑의 조화를 보장해주고 적절한 토대를 제공해주는 삼자는 없다. 또한 사랑은 일자도 아니다. 연인과의 하나로 융합된 일자는 망상일 뿐이다. 사랑은 원초적 실재이며, 결혼의 의식에 의해 비로소 제3자인 대타자에 등록된다. 사랑은 그 개념 자체로부터 무신론적이다.

  신자들에게는 자명한 사실인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사랑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성령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성령은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인간의 필멸성의 죽음/끝, ‘죽음의 죽음’, 부정의 부정이다. 신의 죽음은 안 죽은 충동 (안 죽은 부분 대상)의 출현이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대상a를 사유할 수 없는 까닭에 헤겔은 또한 몸으로 나타나는 불멸성 (‘안 죽어 있음’)을 무시한다. p197 」

 

  성령이 신의 죽음에 대한 선포이고, 신의 죽음은 안-죽은 부분 대상, 대상a의 출현이라면, 성령을 곧 대상a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밤 꿈속에서 조 힐을 만났지.

너와 나처럼 살아 있었네.

내가 말했지, “아니 조, 10년 전에 죽었잖아.”

“나는 결코 죽지 않았네.” 조의 말씀.

 

“구리 회사 사장놈들이 너를 죽였어, 조

너를 쏴죽였잖아, 조.” 내가 말했지.

“사람을 죽이려면 총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조의 말씀. “나는 죽지 않았어.”

 

거기 생명처럼 크게 서 있었지

두 눈으로 미소 지으며

조가 말했지. “저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계속해서 조직하지.“

 

“조 힐은 죽지 않았어.” 그가 내게 말했지.

“조 힐은 절대 죽지 않는다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곳이면 어디든

조힐이 그들 편에 서 있을 거라네.”

 

  <조 힐>이라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노래다. 1925년에 만들어져 진정한 민중가요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1952년 피스 아치 콘서트에서 “저 들이 잊어버리고 못 죽인 것”이 “저들이 결코 죽일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불렸다. 불멸의 차원, 자본가가 총으로 죽이지 못한 그 영(靈)이 계속해서 조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로서의 대상a이다.

 

 

 

3. 무신론적 내기

 

  성령은 라캉의 성구분 공식에서 여성적 입장이다. 여성적 입장은 주인 기표라는 예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화 될 수 없는 장, 즉 비전체 not-all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여성성이란, 지도자에 기반하지 않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주인 형상이 아니며 대상a로서 분석가의 자리에 있다.

 

  지젝은 자신의 ‘기독교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에 이러에 이렇게 답한다.

 

  「먼저 나는 내 입장을 무신론과 종교적 신앙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진정 철저한 무신론으로, 즉 큰 타자의 비존재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무신론으로 간주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바로 거기에 있다. 즉 앞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는 신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 본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 또한 비실체적인 상징적 질서로, 즉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대표해 계속 믿는 잠재적 큰 타자로 살아남을 수 없다. 두 번째로 오직 큰 타자의 그러한 사라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만이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의 신앙이며, 파스칼의 내기보다 훨씬 미친 듯한 내기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인식론적인 것, 즉 단지 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머문다. 즉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상정해야 하며, 내기는 신 자체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철저한 무신론에서 내기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 무신론적 주체는 프로젝트에 가담하며, 그것을 ‘믿는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따라서 나의 명제는 이중적이다. 즉 기독교는 유일하게 진정 일관된 무신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일하게 진정한 신자들이다. p223」

 

  지젝은 신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에도 ‘믿는 것’ 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라고 역설한다. 천국과 성공에 대한 아무런 보증 없이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새로운 정치적 프로젝트를 보증하는 대타자는 없지만, 그 프로젝트에 대한 충실한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주체의 진정한 정치적 행위이다.

 

  「진정한 윤리에서 우리는 큰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행위하며, 어떠한 보장 또는 토대도 박탈당한 행위의 심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p227」

    

 

4.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일반적 오해와는 달리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 는 쾌락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제는 ‘쾌락원리를 넘어’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칸트의 윤리적 의무와 동일하다.

 

  「첫 번째로 명확히 해 둘 것은 라캉적 윤리는 쾌락주의 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은 프로이트가 ‘쾌락원리 - 쾌락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심정 장치의 기능 - 라고 부른 것의 무절제한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라캉에게 쾌락주의는 실제로 ’현실주의적 양보‘를 위해 욕망을 연기하는 모델 자체이다. p235」

 

 

 

  정리를 하기 전과 후에 생각이 달라질 때가 많다. 2장은 비교적 쉽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리를 하다 보니 그리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훨씬 적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에 관해 분명히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성령’의 일반적 개념조차 없는 내 바탕 위에  정립하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렴풋이, 성령이란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대타자이자, 신의 죽음 이후에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상a라고 생각한다. <조 힐>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함께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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