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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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와 『아틀라스 세계사』를 참고 자료로 읽으며 개략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중세에 관해서는 원래 아는 것이 너무 없다. ;; 워낙에 비잔티움은 은하철도 999같다고 강유원 박사가 농하기도 했다만. 중세는 별칭이 암흑기이기도 하고 ㅋ ;;  

 

 

Ⅱ 로마와 중세 카톨릭 제국 시대

 

 

 

* 읽는 고전

①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기

②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 서로마 제국에서 중세 봉건제로의 이행기

③ 비코의 『새로운 학문』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르네상스 시대에 관한 문헌

 

 

 

 

제 11강

 

 

1. 로마 정치 체제의 개괄

 

   왕정 : 전설시대 , BC750~BC510

→ 공화정 : 원로원에 의한 귀족 공화정 BC510~ BC27

  · 내전의 세기 : 원로원 귀족과 가난한 하층민 사이의 대립

  · 일인자의 시대 : 하층민의 불만을 흡수해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일인자들

→ 제정

  · 서로마 제국 : BC27~ AD476 , 게르만에 의해 멸망

  · 동로마 제국 : BC330~ AD1453,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

 

 

2. 내전의 세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제국은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민권을 신장하며 발전해 오던 로마 공화정은 포에니 전쟁 이후 크게 쇠퇴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극심해 지고 이를 해결하려던 그락쿠스 형제는 살해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혼란해지며 내전의 위기에 빠지자, 어느 시대나 그렇듯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일인자 자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엄청난 토지와 노예를 얻은 소수의 부유층(라티푼디움 운영)과 오랜 전쟁으로 자기 땅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다수의 평민 간에는 갈수록 갈등이 심해졌다. 그 동안 로마를 다스려온 귀족 중심의 공화정은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고, 사태는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1권 p65>」

 

 

3. 로마 제국의 인프라와 마리우스의 당나귀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또한 로마 군인이 사병화되는 단초를 제공하여 카이사르 같은 일인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로 국가에서 군사들에게 표준 무장을 제공하고, 군인들은 괭이, 톱 같은 건축 공사용 장비를 짊어지고 다녔다. 이것을 ‘마리우스의 당나귀’라고 한다. 로마 군인은 전투병인 동시에 공병이었다. 로마 군대는 가는 곳마다 먼저 도로와 성과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네트워크와 중심지들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인프라이다.

 

 

 

 

제 12강

 

 

1. ‘Crossing the Rubicon'

 

  BC 49년 가장 강력한 일인자였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무장 해제 지시를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고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파멸한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실질적인 황제권을 행사하며 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세계가 파멸하기 이전에 파멸당한다.

 

 

 

2. ‘romanize’ : 제국주의의 통치 방식

 

  정복지의 지도자 자녀를 로마로 보내 공부시켜 로마화의 선봉으로 삼고, 로마와의 통상을 장려해 경제적으로  통합하고, 로마의 문화를 식민지에 이식한다. 제국주의 정치는 이렇게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힘이 함께 움직인다.

 

 

3. <갈리아 원정기> 중의 알레시아 전투

 

 <갈리아 원정기>는 카이사르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를 정복한 내용을 직접 쓴 일종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정복전쟁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전투는  7년간 계속된 갈리아 지도자 베르킹게토릭스의 반란을 다루고 있는 알레시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만화 <아스테릭스>에 의해 매우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제 13강

 

 

1. Pax Romana

 

 팍스 로마나는 제정이 시작되는 BC27년 옥타비아누스 때부터 AD180년까지를 가리킨다.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로 식민지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유지되는 체제이다. 현대는 ‘팍스 아메리카나’ !

 

 

2. 시민권과 만민법

 

 로마 제정 시기에  “모든 자유민은 로마의 시민”이라는 선언과 함께 속주민의 개념은 사라지고 로마 영토 안의 사람은 노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시민이 된다. 실제로는 로마의 군인을 충원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속주민들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주어진다.

  만민법은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체계로서, 시민권과 만민법은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중앙 정부의 성립, 조세 기구의 확립, 직업 군대의 운용은 시민권 및 만민법과 더불어 로마제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3. 동로마제국의 분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성된 330년을 동로마제국의 공식적 원년으로 보는데, 서로마제국과 분리된 것은 395년으로 기록된다. 영토의 크기가 제국 통치의 한계를 넘어감에 따라 분할을 결정했다.

 

 

4. 서로마제국의 멸망 : 476년

 

  제국 기병대를 운용하기 위해 게르만 용병이 고용되었고, 용병들이 많아지자 게르만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결국 게르만 용병대장에 의해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이미 서로마제국 말기에 중세화가 진행되었는데, 로마인구의 5%가 제국의 부의 80%를 차지했다. 대다수의 농민은 자기 땅을 잃고 지주 아래 들어가 농노처럼 예속되었다.(콜로나투스제. 이 말에서 식민지를 뜻하는 콜로니가 파생되었다.) 지주들의 힘은 강대해지고 국가의 힘은 쇠락해갔다.

 

  로마제국 말기에는 중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대토지 소유가 늘고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몰락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던 로마 가도의 붕괴로 이어졌다. 로마의 길은 풀이 자라면서 울창한 숲으로 변했고, 대토지 지역들은 서로 고립된 섬이 되었다. 이 무렵에 수도원이 탄생하는데, 최초의 수도원은 신앙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대토지 지주 밑에 들어가지 못한 떠돌이 농민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생활 공동체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대략 150년 동안 이렇게 로마는 서서히 중세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 14강

 

 

1. 봉건제와 기독교의 결합

 

  로마제국 말기와 중세 초기는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중세의 봉건제가 확립된 것이 10C 중반 바이킹의 100 여년에 걸친 침략이 끝난 후라고 하는데, 강유원은 로마제국 말기부터를 중세로의 이행기로 보고 있다. 강유원의 책은 중세를 크게 중세초기, 고중세, 중세말기로 나누는데, 바이킹 침략 이후부터를 중세적 특징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설명하면서 고중세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말하는 중세는 아마도 고중세를 의미하는 듯하다.

 

  여하튼 중세는 로마제국 말기의 지주-전사 연합체를 이어받아 그것을 밑바탕으로 두고, 그 위에 기독교를 얹어서 로만 카톨릭 제국을 세웠다.

 

 

2. 동로마 제국의 기본 축

 

  동로마 제국을 유지한 세 가지 축은 희랍전통의 엘리트 문화, 로마 법전과 관료 행정 체계, 희랍 정교회이다.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교를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과 희랍 정교회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제2차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이 지역에 수많은 종교 분쟁이 벌어진다.

 

 

3. 로마는 오랫동안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차르와 카이저는 각각 카이사르의 슬라브어와 독일어 식의 발음으로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이나 제3제국, 제3의 로마 등을 자처하는 국가들이 이어졌다

 

 

 

 

제 15강

 

 

1. 기독교 공화국 respublica christiana

 

  중세는 기독교 공화국이다. 레스푸블리카는 정치적 측면, 크리스티아나는 종교적 측면을 가리킨다. 이 두 측면은 공존했지만 끊임없이 충돌했다. ‘두 개의 칼’은 정치적 권위를 가진 ‘황제의 칼’ 과 종교적 권위를 가진 ‘교황의 칼’을 의미한다. ‘카노사의 굴욕’(1077)과 ‘아비뇽 유수’(1309~1377)는 이 두 칼의 충돌을 극적으로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은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라는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종교적 측면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말기의 사람이지만 이런 이유로 중세 역사 공부에 반드시 언급되고 있다.

 

 

2.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빠르게 스며들었던 이유 : 교리 측면과 현실의 역할

 

  교리상의 평등주의와 영생사상이 로마인들을 끌어들였고, 자선을 통한 참회의 실천이 로마제국 말기의 빈곤 상황에 가장 강력한 구제책으로 기능했다.

 

 

3. 로만 카톨릭 Roman Catholic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지식 엘리트였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것을 게르만 족의 전통과 결합시켰다. 남부 갈리아 지방의 로마 귀족들은 교회를 장악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고, 북부 프랑크 게르만 귀족은 전사계급을 구성하여 '싸우는 자'가 되었다. 이 두 집단의 결합이 기독교 공화국을 이루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신학적 역사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목적론적 진보관을 갖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역사를 보는 서양인의 관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 16강

 

 

1. 중세 1천년 (서로마제국 멸망 476 ~동로마제국 멸망 1453)

 

  ① 중세 초기  :   476 ~ 1000 , 암흑기

  ② 고(高)중세 : 1000 ~ 1300 , 중세의 핵심 (카노사의 굴욕 ~ 아비뇽 유수)

  ③ 중세 후기  :  1300 ~ 1500,  해체기 (동로마제국 멸망)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과거 서로마제국이었던 곳과 게르만 지역에 희랍문화가 전달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2. (高)중세의 핵심 요소

 

  ① 교회

  ‘카톨리코스katholikos’는 ‘보편적인’, 또는 ‘전체의’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두고, 성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을 지상 대리인으로 둔, 적법한 사제들의 관리를 받으며 동일체 안으로 모여든 신도들의 사회’ 를 말한다.

 

  ② 전사 조직

  영주와 전사의 전우애 체제이다. 쌍무계약을 바탕으로 한 이 조직이 봉건제의 직접적 기원이 된다.

 

 ③ 장원제 : 경제 시스템

  로마제국 말기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민들을 콜로누스colonus라 불렀는데, 게르만 족은 이러한 로마의 불평등한 토지 소유관계를 받아들여 사회경제적 평등 관계를 해체하고 토지 소유에 따른 계급 관계로 전환했다. 여기에 게르만족 특유의 전사조직을 결합해서 중세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들었다.

 

  ④ 교육제도 : 대학의 등장

 

 

 

 

제 17강

 

 

1.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14~16C)

    

    중세 → 르네상스, 종교개혁  →  절대왕정  → 근대 국민국가

 

 

2. 특징

 

  ① 교황 권력의 약화

     아비뇽 유수 (프랑스 왕이 독자적으로 아비뇽에 교황청을 세우고 교황을 임명)

 

  ② 흑사병 창궐

     14세기에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대기근이 발생하고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몽골로부터  흑사병이 유입되자 유럽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③ 전사조직의 몰락  

      인구의 급감은 농노 감소를 의미했고 영주들은 서로 농노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이다.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백년전쟁후 영국은 30년간의 장미전쟁에 돌입했다. 전쟁후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는 차례로 절대왕정 국가를 수립했다.

 

  ④ 장원제 붕괴

      15세기 중반 이후 영주들은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쫓겨난 농노들은 도시로 몰려가 빈민이 되었다. 소위 인클로저 운동으로 '양떼가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 이 벌어졌다. 오늘날 영국의 전형적인 풍경인 목초지는 이때 형성된 것이다.

 

  화약과 대포의 등장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급증하면서 영주로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중앙의 군주가 세금을 거두어 운영해야 했다. 이로 인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⑥ 종교개혁

 

 

 

 

제 18강

 

 

1. 르네상스

 

  「화약과 대포 기술의 발명, 국가나 회사 같은 새로운 사회적 조직의 형성, 대규모 해외 정복,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이 르네상스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면서 중세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근대의 통일성을 이루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작용하면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통일성이 성립하며, 과학혁명은 이것을 완결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223」

 

 

2.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세력을 얻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 통치자와 영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카톨릭에 대해 회의와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교리의 보편성과 함께 교황 영토의 보편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프로테스탄트들은 카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려 하였다.  

 

  「종교개혁은 이제 순수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흐름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폭력이 발생했습니다. 그 충돌은 우선 토지를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토지를 몰수하려 하고 카톨릭 수도원의 재산 관리자는 그것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p227」

 

 

3. 근대정신을 이끈 자연과학 : 17C 과학혁명의 시대

 

  종교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을 내걸고 벌어지고 있는 종교 전쟁의 바탕에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는 이를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종교에 염증을 느끼게 된 사람들에게는 확실성을 심어줄 새로운 근거가 필요했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개혁과 함께 치열한 종교 대립이 벌어졌고 30년 전쟁 시기에는 세상이 극도로 험악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자연과학이었습니다... 고전적 권위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수학적 확실성에 의존하는 과학,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물리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들에 대한 요구 등과 같은 변화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면서 17세기 중반에 르네상스는 완전히 끝납니다, p231」

 

 

 

 

제 19, 20강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수학적 확실성’ 이라는 시대정신에 맞서 신의 섭리와 인문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와 역사철학을 공부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할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도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데카르트를 비판했다는데, 데카르트의 철학은 발표되자마자 동시대에 거센 비난에 직면했던 것 같다. 데카르트는 지금도 이놈저놈 열심히 비판하는 동네북이지만, 그럼에도 데카르트를 언급하지 않고는 근대철학도 현대철학도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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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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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_

비전체 또는 성적 차이의 존재론

 

 

  11장을 두 달 가까이 끌었다. 모든 장이 다 그랬지만, 특히 11장은 머리가 아팠다. 비전체not-all 라면 전혀 모르는 개념도 아닌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비-비-대상’, ‘비-비-미학’, ‘비-비-담론’ 따위의 ‘비-비-~’ 에서 손을 놓았다. 개념 자체의 난해함도 있지만, 역시나 번역의 문제가 그 난해함에 혼란을 더했다. ‘비’로 뭉뚱그린 우리말 번역으로는 술어의 부정과 비술어의 부정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다시 읽은 11장은 두 달 전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반년 이상 붙들었던 책에 질려있었던 것 같다. 11장을 끝내면 이제 4부 ‘식후 끽연’만 남았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붙여보는 담배지만, 담배란 느긋한 마음의 여유가 아니던가. 11장만 어서 끝내자!

 

 

 

1. 탈주술화된 세계 속에서의 성적 차이

 

  제목이 상당히 거시기하다. 성적 차이 혹은 그것의 합일 따위는 주술화된 세계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적어도 근대에는. 그런데 라캉은 근대 과학의 장 내에서 성적 차이의 존재론적 지위를 다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성적 차이란 무엇일까?

 

 

2. 성적 차이의 실재

 

  「그리하여 얼핏 섹슈얼리티는 어떤 형상을 비틀어버리는 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왜곡시키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 자체로 그것은 환원 불가능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존재론적 추문, 칸트가 그렇게나 큰 충격을 받은 진짜 ‘이성의 안락사’를 가리킨다.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교착 상태, 비정합성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설 -그리고 진정 헤겔적인 통찰-은 우리의 지각을 왜곡하는 이러한 ‘성적 편향들’이 우리를 현실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기는커녕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존재론적 교착 상태, 현실 그 자체의 불완전성이 주체성 속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주관적 왜곡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 자체의 비전체, 비정합성/어긋나 있음과 동일한 주관적 왜곡이다. p1313~4」

 

  「‘젠더의 사회적 구성’ 이라는 문제틀은 주체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며, 우연적인 상징화의 공간을 전제하는 반면 라캉에게서 ‘성구분’은 주체의 구성 자체를 위해, 상징화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바로 거기에 성적 차이의 지위와 관련된 정신분석과 철학의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철학에서 주체는 내속적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며, 성 구분을 주체의 출현 자체를 위한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일종의 조건으로 격상시킨다. 따라서 철학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철학적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성적 차이라는 주장을 옹호해야 한다. 성적 차이는 원초적 적대성을, 모든 총체성을 교란시키는 비전체를 나타낸다. p1317」

 

  두 개의 인용문에는 성 및 성적차이와 관련해 두 개의 단어가 나온다. 블완전성과 비전체가 그것이다. 불완전하고 비전체인 것은 현실이다. 성적 차이는 그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두 성은 이 비정합성을 드러내는 상이한 방식이다.

 

 

3. 성 구분 공식 : 예외가 있는 전체

 

  「따라서 성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며 각각의 성의 정체성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것을 불가능성의 표시로 낙인을 찍는 차이이다. 만약 성적 차이가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 각 성을 내부로부터 절단하는 차이라면 양 성은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을까? 라캉의 대답은 ‘무관심’ 이다. 성적 관계는 없다. - 양성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p1340」

 

  라캉의 성 구분 공식은 우리가 아는 수학적 공식과는 다른 논리 구조를 가진다. ‘예외가 있는 전체’는 남성의 공식이다. 모든 x는 F(x)에 속한다. 단,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하나는 있다. 예외가 있으면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에 관한 우리의 상식이지만 성 구분 공식에서는 예외가 있어야만 전체가 될 수 있다. 여성의 공식은 ‘비전체’ 이다. 모든 x가 F(x)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공식에서는 예외가 없지만 비전체이다. 각각의 성은 자체로,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상대의 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하튼 남성 공식이 ‘역학적 이율배반’ 이고, 여성 공식은 ‘수학적 이율배반’ 이다.

 

  보편성과 그것의 구성적 예외의 논리에는 세 개의 계기가 있다. (1) 보편성의 대한 예외가 있다. 모든 보편성은 그 틀에 맞지 않는 특수한 예외를 포함한다. (2) 보편성의 특수한 사례들은 모두 예외다. 보편성에 딱 맞는 특수성은 없다. (3) 여기서 변증법증 비틀기가 나온다. 예외에 대한 예외. 예외이지만 그 예외가 보편성 자체와 직접 연관된 요소가 있다. 단독적 보편성으로서의 예외가 그것이다.

 

  「모든 특수한 존재자는 보편성과 관련해 예외의 위치에 있다. ‘정상적인’ 예외의 계열과 관련해 주체를 대신하는 주인-시니피앙은 예외에 대한 예외, 직접적 보편성의 유일한 자리이다. 다시 말해 주인-시니피앙에서 예외의 논리는 재귀적인 극단으로까지 추구된다. 주인-시니피앙은 보편적 질서로부터 (그러한 질서 내에 적당한 자리가 없는 ‘비-부분의 부분’으로서) 전면적으로 배제되며,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특수한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보편성을 나타낸다. p1345~6」

 

  그러면 보편성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예외의 예외가 아닌 일반적 보편성을 얻게 되는 것일까? 

 

 「즉 주체는 보편성 속의 하나의 금, 실체적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X일 뿐만 아니라 오직 주체만을 위한 보편성도 있다. 오직 최소한으로 면제된 주체적 관점으로부터만 전체가, (특수한 예시화와는 다른) 보편성이 결코 이 보편성의 특수한 계기로 완전히 구현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외는 말 그대로 보편성을 정초한다. p1347」

 

  보편성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만 획득된다는 말인 것 같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이 말을 한 사람 역시 크레타인이지만 그는 자신을 예외에 놓는다.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는 언표행위자를 모든 크레타인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이 언표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표행위자는 예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이 이런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조금 쉬워진다.

 

 

4. 성 구분 공식 : 비전체

 

  여성은 비전체이다. 그런데 비전체를 만드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전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無이다.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는 그냥 맨커피와 다르다.

 

  「다시 말해 ‘이것이 그것을 위해 비-Fx를 고수하고 있는 x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합을 비전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x는 단지 이 무 자체, 빗금처진 $일수밖에 없다. $와 a의 불가능한 접속(관계)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한다. 즉 주체는 공백이며, 텅 빈 위치, 술어 없는 주어인 반면 a는 그에 고유한 주어가 없는 술어이다. -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와 같은 것이다. p1358」

 

5. 성적 차이의 이율배반

 

  성적 차이는 적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각 성은 다른 성을 보충하지 않으며, 다른 성이 완전한 정체성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

 

  「성적 차이는 ‘실재-불가능한 것’ 이라는 라캉의 주장은 ‘성적 관계는 없다’는 주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성적 차이는 ‘정적인’ 상징적 대립들 그리고 포함/배제의 고정된 집합이 아니라 교착 상태, 트라우마, 열린 질문, 모든 상징화의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를 일군의 대립들로 번역하는 것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성적 차이가 의미하게 될 것을 위한 헤게모니투쟁의 영역을 여는 것이 바로 이 ‘불가능성’ 자체이다. p1373」

 

 

6. 왜 라캉은 유명론자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간결이 요약하려면 먼저 유명론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어렴풋이만 알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는 알튀세르와 대비하여,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유명론’, 라캉은 ‘주이상스의 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라캉에게서 주이상스는 어떠한 실체적 실천성도 갖고 있지 않은 기묘한 실체이다. 그것은 오직 상징적 상블랑들의 텍스처에서 나타나는 금들, 왜곡들, 불균형들의 잠재적 원인으로만 식별될 수 있다 즉 현실과 관련해 라캉은 예외들(또는 클리나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유명론에 동의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예외들뿐이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유명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현실을 낳는 잠재적인 원인인 어떤 불가능성 또는 적대성의 실재이다. p1375」

 

  라캉이 유명론자가 아닌 이유는 유명론이 현실의 잠재적 원인인 적대성의 실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이‘대안적 근대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점이다.

 

  「다수에 의지하는 것은 근대(성)의 독특한 고정된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수화는 근대(성)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즉 그것의 오류는 근대(성)라는 보편적 개념을 적대성으로부터, 이 근대(성)가 자본주의 체제에 끼워 넣어져 있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사실에 있다. 이 측면을 그저 이 체제의 역사적 아종 중의 하나로 치부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내속적 적대성을 ‘거세적’ 차원으로 부를 수 있는 한 근대(성)들의 다수화를 물신주의적 부인의 형식으로 파악하기는 쉬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제임슨의 비판은 보편성과 특수성 간의 본래 변증법적인 관계를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이 양자의 차이는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보편성 쪽에 있다. 보편성은 특수한 내용의 모든 것을 담는 용기, 특수성들 사이의 갈등을 위한 평화로운 매개자나 배경이 아니다. 보편성 ‘그 자체’는 견딜 수 없는 적대성 또는 자기모순의 자리이며, 그것의 특수한 종(의 다수)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적대성을 모호하게 만들고‘화해시키고/제어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이란 문제-교착 상태의, 화급한 문제의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이며, 특수성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되었지만 실패한 대답들이다. p1377~8」

 

  우리가 어떤 형태의 근대를 발전시켜 왔던 적대는 실재한다는 말일까? 지금 우리 현실의 문제를 우리가 이룩했던 근대성의 문제로 보는 것은 실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이라는 비판인 것 같다. 이 실재적 적대성이야말로 현실의 잠재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상블랑이다. 현실은 실재적 적대성을 흐리는 어떤 환상을 물질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상블랑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무엇인가?

 

  「1960년대부터 계속해서 실재는 더 이상 모든 상징적 세계들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통념과 관련해 실재는 어떤 대상에 대한 다수의 상이한 관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속되는, 기저에 놓인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실재는 그러한 차이들을 낳는 것, 다수의 관점이 찾으려는 (그리고 실패하는) 파악하기 어려운 핵심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실재가 순수 가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대상의 어떠한 실재적, 특징들 속에도 정초될 수 없는 차이이다. ‘순수’ 차이인 것이다. p1380」

 

  라캉의 실재 개념은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는 어떤 핵심, 단단한 고갱이로 인식되었지만 후기에 와서 실재는 순수 가상 또는 순수 차이이다.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에서 나비인지 장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이 간극이 바로 실재이다. 실재는 진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꿈을 다른 꿈과 분리시키는 간극이다.

 

 

7. 부정의 부정 : 라캉 대 헤겔

 

  라캉은 자신의 부정의 부정은 헤겔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헤겔처럼 부정의 부정의 결과 어떤 종류의 실정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라캉과 헤겔이 라캉 자신의 주장만큼 멀지는 않다는 것을 늘 암시해왔다. 똑 부러지게 단언하지는 않는데, 여기서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라캉의 부정의 부정은 성구분 공식의 여성적 측면 즉 비전체에 있다.

 

  「즉 담론의 사실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비-비-담론은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비전체가 담론임을 의미한다. - 밖에 있는 것은 실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a, 무 이상이지만 어떤 것, 일자는 아닌 어떤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면, 거세되지 않은 주체는 없지만 이것이 모든 주체가 거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거세되지 않은 잔여가 대상a 이다). 여기서, 이러한 이중 부정에서 건드리게 되는 실재는 칸트적인 무한판단, 비-술어의 긍정과 연결될 수 있다. p1386~7」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지양이다. 그런데 이 지양에 대해 지젝은 오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기를 씻은 더러운 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보통은 아기는 남겨두고 더러운 물만 버리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더러운 물이 아니라 아기를 내다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거기에 지양에 대한 유토피아에 고유한 오해가 있다. 즉 현상 속에서 건강한 핵심과 이 핵심의 완전한 실현을 막는 불행한 특수한 조건을 구분하고, 그런 다음 핵심이 완전히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러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지양된다. 본질적인 핵심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지기 때문에 부정되지만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법은 핵심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은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따라서 특수한 조건의 거짓 껍데기를 제거하면 이 핵심 자체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못보게 한다. 여기서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진정한 과제는 더러운 물은 내다 버리고 아기는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소위 건강한 아기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물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p1396~7」

 

 

8. ‘비관계가 있다’

 

  ‘~관계가 없다’ 와 ‘비관계가 있다’는 다르다. 라캉은 ‘성적 관계는 없다’에서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것은 부정판단으로부터 무한판단으로의 칸트적 이행을 환기시킨다.

 

  「‘성적 관계는 없다’의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러한 전도, 부정성 자체가 긍정적 실존을 얻도록 해주는 역설적 대상이라는 이 개념은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이것 없이는 우리는 ‘두 개의 대립적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추상적 수준에 머물게 된다.

  ‘성적 관계는 없다’로부터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은 또한 헤겔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행 즉 규정적 반성으로부터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과 상동적이다. - 또는 실로 유물 변증법으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행과 상동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억압적인) 체계로부터의 해방의 난무로부터 (독일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핵심적인 변증법적 전환이다. - 부정성의 폭발들과, 상상 가능한 모든 형태의 ‘저항’과 ‘전복’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자체가 선행하는 실정적 질서에 기생하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가장 파악하기 힘든 전환이다. p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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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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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古典 강의

 

 

 

Ⅰ 고대 지중해 세계와 폴리스 시대

 

 

 

* 읽는 고전

① 헤로도토스의 『역사』

: 페르시아 전쟁 - 페르시아 제국 vs 희랍 연합

②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내전 - 아테나이 쉬마키아 vs 스파르테 쉬마키아

 

 

 

 

제 1강

 

 

  진화에 대한 협의의 생물학적 정의는 ‘환경에 적응하여 신체를 특수하게 발달시킨 것’이다.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 혹은 변이라는 말과 맥이 닿는다.

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4~5만 년 전에 진화를 멈추었다고 한다. 진화를 멈추었다는 것은 이후 인간의 모든 행위는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학습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4~5만 년 전부터 문명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바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시기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인간 문명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신석기 농업혁명’ 이다. 약 1만 년 전 발생한 신석기 농업혁명은 문명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단계였다. 유목민 사회를 제외한 모든 문명 세계는 신석기 농업혁명이 가진 기본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곡물중심 식사, 집단 거주, 조직된 사회, 잉여 농산물, 교역, 문자 체계, 천문학과 기상학 등이 그것이다.

 

 

제 2강

 

  희랍이 위치한 지중해 세계의 지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나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의 도움을  받았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위쪽으로는 유럽 남부가 오른쪽으로는 서아시아, 아래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가 위치해 있다. 地中海는 말 그대로 땅 가운데의 바다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59>

 

  척박한 자연환경의 희랍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주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서기전 6~7세기부터 서기전 490년 무렵까지 소아시아 지역에 식민지가 많이 생겼고 그 결과 팽창하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해 졌다.

 

 <후첨 : EBS 중학의 <필독 중학 세계사> 

 

 

 

제 3강

 

 

  3강과 4강은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기술이지만,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희랍세계의 100년 역사를 저자는 먼저 요약해 보여준다.

 

  「페르시아 전쟁은 희랍인들의 식민지 개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서기전 494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이오니아 지역(지중해 동쪽 연안의 소아시아지역, 지금의 터키)을 모두 정복하고, 서기전 492년에 아테나이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진 전쟁의 경과를 간단히 보면, 유명한 마라톤 전투가 서기전 490년에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졌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서기전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희랍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은 평화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희랍 세계가 분열되어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아테나이 연합군과 스파르테 연합군 사이의 전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고, 서기전 404년 스파르테 측이 승리하면서 이 전쟁이 끝납니다. 그러니까 서기전 492년부터 서기전 404년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전쟁기로 볼 수 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가 승리한 것은 페르시아가 뒷돈을 댔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고대 희랍의 폴리스 시대가 마무리됩니다. p45~6」

 

  페르시아 전쟁은 3차에 걸쳐 일어났다. 전쟁은 희랍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 페르시아는 건재한 반면, 승리자인 희랍세계가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페르시아 군의 제3차 침입은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육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스파르테 군을 만나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파르테 왕이 전사합니다. 반면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아테나이 군을 만나 대패합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해군력을 키운 아테나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거둔 두 번의 승리는 아테나이로 하여금 패권적 야망을 갖게 합니다. 반면 전투에서 패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인해 희랍 세계 내부에서 반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튀퀴디데스가 말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아테나이의 야망과 스파르테의 두려움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p49」

 

  페르시아 전쟁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는 동양과 서양의 대결에서 대부분 동양이 승리했다. 동양에 잘 조직된 군대와 앞선 무기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3가지 주요 전투는

 

마라톤 전투 : 아테나이의 중장 보병의 승리 (부유한 시민), 즉 호플리테(중장보병)가 팔랑크스 대형(방패로 몸을 가린 밀집 대형) 으로 뭉쳐 튀모스(적을 끝내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 용기)의 결기로 동양의 군대를 무찌른 최초의 전투

 

테르모퓔라이 전투 : 스파르테의 패배, 영화<300>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인들이 자신을 지칭할 때)에게 전해 주시오. 우리가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이곳에 누워 있다고.”

  스파르테인은 승리하거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방패를 들고 혹은 (죽어서) 방패 위에서!"  돌아와야 했다.  패배한 채 살아 오는 것이 가장 큰 치욕이었다.

 

살라미스 해전 : 아테나이의 경장 보병과 해병의 승리 (가난한 시민), 중장 보병에 밀려 시민으로서의 발언권이 세지 않았던 경장 보병이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전투, 아테나이 안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

 

 

 

제 4강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가 희랍세계에 미친 영향과 그 의의를 살펴본다.

 

  1.「아테나이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주정이 독재정을 이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나이 인들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얻은 체제 아이덴티티입니다. 스파르테 사람이건 아테나이 사람이건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는 것에 한없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p69」

 

  폴리스시민으로서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체제에 헌신해서 얻은 자유’ 이다. 당시 희랍인들에게 폴리스와 개인의 삶은 하나였다.

 

  2. 아테나이 내부의 대립 격화 : 부유한 보수주의자와 가난한 민주정 지지자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나이에서는, 마라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중장 보병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공을 세운 경장 보병 및 해병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습니다. 구식 보병과 신식 해병, 자기 땅을 가진 농민과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의 대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p70」

 

  3. Kunstwerk 인공물, 예술품 : 사람이 만들어낸 것 일반

 

  아테나이인들은 신탁도 예측하지 못한 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들의 손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은 과학뿐만 아니라 국가도 인공물이라고 생각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일어났던 르네상스가 부활시킨 것이 바로 이 ‘인공물’ 개념이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인간중심주의이고, 인간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것은 근대국가의 기본정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 초기의 대표적 고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에는 건국신화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국가는 인공물 즉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아테나이를, 아테나이의 황금기를 살았던 주요 인물들이 있다. 모두들 죽기 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비극을 목격해야 했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아테나이의 영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소크라테스 (BC 470 경~BC 399) 

  소포클레스 (BC 496 ~ BC 406) 

  페리클레스 (BC 495 ~ BC 429)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를 확립하고 아테나이를 희랍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토지귀족에 속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정의 대표자는 페리클레스를 공격한 클레온 같은 인물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토지 귀족이었지만 클레온은 토지와 관계없는 신흥 계급이었습니다. 선전 선동에 능한 클레온 같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민주파를 구성했습니다. 클레온을 보면 아테나이 계급 대립이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민주파는 기본적으로는 상인과 빈민을 대변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되어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사람들, 즉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p101」

 

  소위 민주주의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는 것을 본 플라톤이 민주정을 참주정으로 가는 타락한 국가 정체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 우매한 대중이 이끄는 민주주의는 곧잘 권력을 독점하려는 전제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주는 역사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혹은 독재자의 딸을 지도자로 선출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지성적 대중과 결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포클레스는 희랍 3대 비극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오이디푸스왕」등 오디푸스 3부작과 함께 7편의 비극이 전해지고 있다. 매년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비극 경연대회를 휩쓸며, 희랍 비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제 5강

 

  1. 아테나이의 제국주의 : 국내는 민주주의, 국외는 제국주의

 

  아테나이는 페르시아로부터 희랍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주변국들과 공수 동맹인 델로스 동맹, 즉 아테나이 쉬마키아를 결성하고, 일종의 방위분담금을 걷어 델로스의 금고에 보관한다. 이 금고의 돈은 무단으로 아테나이를 위해 사용된다. 동맹국 보호를 명목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친 것이다. ‘atticize' 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군사뿐만 아니라 시장, 문화 등에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아테나이화를 실현한다. 아티카나이즈는 현대의 아메리카나이즈와 유사하다.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은 스파르테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 기원전 431년에서 기원전 404년까지 27년이 공식적인 전쟁 기간이나 앞뒤로 분쟁이 계속된다.

 

  3. 승자 : 스파르테가 승리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최종 승자는 ‘페르시아의 황금’ 이었다. 혹자는 이 전쟁을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 이라고 한다. (혹은 EBS중학의 인강에 의하면 희랍세계의 자살이라고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 에게해 지역은 혼연일체의 폴리스 시대를 끝낸다.

 

 

제 6강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제국주의적 아테나이에 대한 희랍 도시국가들의 반감(혹은 두려움)과 아테나이의 야망이 충돌한 희랍의 내전이다. 반-아테나이 쉬마키아 전선(스파르테 쉬마키아)의 선봉장인 스파르테는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 전쟁은 초반 페리클레스의 구상에 따라 장기 농성전으로 돌입한다. 전통적으로 들판에서 팔랑크스 대형으로 치루는 전투는 반나절이면 끝났다. 그러나 당시 아테나이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들판 전투에 임할 중장 보병이 모자란 반면, 전쟁자금이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어서, 페리클레스는 장기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농성전은 아테나이 인들의 기질과 맞지 않았고, 역병이 창궐함에 따라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역병으로 사망했다.

 

페리클레스가 전쟁 이듬해에 전몰자들의 장례식에서 행한 연설은 매우 유명하며 그 시대의 아테나이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에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 p102」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전체가 ‘헬라스의 학교’라고 말한다. 그의 연설에서는 폴리스에 대한 시민들의 소속감이 굉장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은 ‘준 폴리티콘 zoon politikon’,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었다. 나면서부터 공동체의 유기적 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것은 전쟁을 통해 더욱 잘 입증되곤 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 이 공동체 의식은 무너지고 만다. 희랍 세계의 폴리스 시대가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더 이상 시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이란 자각을 갖지 않았으며, 국가는 낯선 통치 체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제 7강

 

  폴리스 시대의 몰락을 가져온 최초의 재앙은 역병이었다. 역병으로 아테나이 성인 남성의 1/3이 죽었다. 공성전으로 인해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자 역병이 발생하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로 인해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구속력이 없었다.” 노모스가 붕괴 것이다.

 

  「희랍인들을 동족 의식으로 엮어주던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붕괴하면서 대량학살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쟁과 정치, 대외 정책과 국내의 음모, 전장과 전장 밖에서의 살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p110」

 

  케르퀴라 내전은 동족의식이 붕괴된 이후 일어난 대량 살육의 최초의 사례이다. 아테나이 쉬마키아와 스파르테 쉬마키아의 대립이 폴리스 내부의 대립으로 전이된 것이다. 하나의 폴리스 안에 아테나이파와 스파르테파가 나뉘어져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잔인한 살육을 벌였다. 이런 내전은 케르퀴라 뿐만 아니라 여러 폴리스들로 퍼져 나갔다.

 

 

제 8강

 

  투퀴디데스는 전쟁사를 통해 자신의 전쟁관을 피력한다. ‘전쟁은 잔혹한 교사’ 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p118」

 

  전쟁을 통해 말의 의미도 완전히 바뀐다. ‘일베’가 보여주듯 말의 타락은 우리시대에도 고달픈 환경과 거친 심성의 표출인 것처럼 희랍시대도 그랬던 가 보다.

 

  「사람들은 행위를 평가하는 데 통상적으로 쓰던 말의 뜻을 임의로 바꾸었다. 그래서 만용은 충성심으로 간주되고, 신중함은 비겁한 자의 핑계가 되었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의 다른 말이 되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가 되고,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p119」

 

  머나먼 과거의 전쟁사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그 당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내전, 잔혹한 인종 청소, 무력에 의해 지배되는 국제 질서 등이 21세기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제 9강

 

  멜로스 회담은 국제사회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테나이 쉬마키아에 가입하지 않았던 멜로스에 대해 아테나이는 무력을 앞 세워, 항복을 요구하는 회담을 강제한다.

 

  「아테나이인 사절단 : 여러분이 눈앞의 현실근거하여 여러분의 도시를 구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기 위해 여기서 우리를 만난 것이라면, 우리는 회담을 중단할 것이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가 권하는 대로 한다면, 우리도 회담을 계속할 것이오. p129」

 

  「아테나이인 사절단 : 우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시오. (...)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p130」

 

  정의는 “ the strong do what they have the power to do and the weak accept what they have to accept." 다. 국제 사회의 이런 정의 개념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아테나이의 제안을 거부한 멜로스는 아테나이에 의해 참혹하게 도륙당한 뒤 아테나이의 식민지가 되었다.

 

  희랍인들의 동족의식을 무너뜨리고 잔혹한 내전으로 치닫게 된 것은 아테나이의 정치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전쟁 초기 페리클레스가 죽고 나자 아테나이는 본격적인 대중적 민주정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희랍의 민주정은, 지금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우중이 이끄는 정치였다. 당시 민주정은 어리석음과 동일시되었다. 여기서 대두한 문제가 민주정을 어떻게 현명함과 결합시키는 것인가이다. 플라톤이 『국가·정체』에서 민주정을 철인정치-명예정치-과두정치 다음으로 놓은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 10강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희랍세계의 폴리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전쟁은 표면적으로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실상의 승자는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도 곧 이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침략당하고, 뒤이어 세력을 확장한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되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 철학이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가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하지만, 저자는 사실상 알렉산드로스가 문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한다. 여하튼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은 ‘존재론적 허무주의’ 이다. 나라는 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참혹한 시절을 보내면서 세상의 고난을 잊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가느다란 목숨을 길게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에 마음을 기울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① 에피쿠로스 철학 : 친구들기리 모여 놀자는 탈정치적 철학

  ② 스토아 철학 : 이 세상은 덧없고 진정한 행복은 우주적 질서와 교감할 때 생긴다는 탈현실적 철학

  ③ 퀴니코스 학파(회의주의) : 통속의 디오게네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 zoon politikon 은 완전히 사라졌다. 민회에 나가 폴리스의 일을 격렬히 토론하던 시민의 모습은 사라졌다. 시민들은 정치를 버렸고, 그들은 더 이상 폴리스의 시민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 허무주의의 시대에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존재론적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객관적 질서가 모두 붕괴한 상황에서도 플라톤은 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며 거기에 기준을 두고 인생을 살아야 하고,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의 철학은 이를 악물고 현실 세계를 올바로 살아내기 위한 허무 극복의 철학이었습니다. p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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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 시리즈의 3탄이 나올까? 하필 1997과 1994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겠지만 나는 조금 아쉽다. 이왕이면 나의 20대가 소환되었다면 더 행복했겠지 싶은 개인적 아쉬움이다. 경상도에서 10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20대 이후를 주~욱 보낸 40대라 1997과 1994 모두 친숙했다. 그러나 내게 더 특별했던 것은 1994다. 주변 아줌마들 이야기로는 1997이 더 재미있었다지만, 1994의 하숙생 이야기는 내내 나의 하숙시절과 겹쳐졌기 때문에 나는 1994가 더 좋았다. 아마 1997이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빠순이 문화’에 내가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빠순이 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밝게 자라지 못했다. 궁핍했고 어두웠다.

  대학 3학년 때 옮긴 하숙집이 나정이네와 비슷했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 땅을 팔고 올라와 하숙을 처음 시작한 집이었다. 퉁퉁한 아줌마와 빼빼마른 아저씨, 그리고 초등, 중등의 아들과 딸이 있는 주인집이었다. 1층에는 주인식구와 나와 내 룸메이트가 살았고 2층에는 열 명 가량의 남학생들이 시끄럽게 뒹굴며 살았다. 수시로 친구들을 데려와 밥상머리에 앉혀도, 밥시간이 훨씬 지나 부엌을 덜커덕거리며 수선을 피워도 눈치 주는 일이 없었다.

  밤이 없던 하숙촌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누구라도 과외비를 받으면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양념치킨을 사들고 이층 거실에 모여 앉아 때로는 밤을 새며 기타를 치고 술을 마셨다. 한번은 참다못한 건너편 집 이층의 젊은 남자가 내복 차림으로 플래시를 비추며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대거리를 해가며 우리는 술판을 접지 않았다. 거기는 치외법권 하숙촌이었고 우리에게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고성방가나 소음죄로 신고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늘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셔틀버스 앞에서 가방을 뒤지거나 이단옆차기로 데모하는 학생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이었다.

  하숙촌에 살 때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였다.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며 보는 세상이 전부였고, 서울에서 4년을 살아도 그 작은 세상 밖을 나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외를 하러 오가던 강남의 아파트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쫒아 다녔던 신세계 백화점 앞과 여의도 정도가 잠깐씩 엿보았던 세상 밖의 다른 세상 이었다.

  그때도 복학생들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참 많이 변했다... 군대 3년 만에 단골 막걸리집도 없어지고 서점도 없어지고, 학생들은 되바라졌다고. 치마 입고 화장을 한 여학생들이 교정을 부끄럼 없이 돌아다닌다고.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 얼마 있다 다시 찾은 하숙촌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이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 사이 하숙촌은 고시촌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변의 산동네들은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촌이 들어섰다고 했다.

  학교와 하숙집 사이 등산로 입구의 감자탕 노점상들은 그래도 여전할까. 시뻘건 기름 위로 통감자들이 둥둥 떠 있던 그 커다란 국솥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 길에서 왈칵 쏟아냈던 서러운 눈물, 수업을 빼먹고 만화광장에서 보았던 허영만의 숱한 만화들... <오! 한강>

  <응답하라~>에 온 세대가 열광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열렬히 응답했다. 우리는 무엇에 응답했던 것일까? 90년대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불러내었고, 그 때의 우리 젊음에 열렬히 응답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단지 추억만이 아닌 그 무엇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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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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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세계사를 배운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딱 일 년이었다. 시작종이 울리기 전부터 벌벌 떨던 세계사 시간, 그 무서운 선생님은 우리 담임이셨다. 무엇이든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던 선생님 덕분에 빡세고도 살뜰한 일 년을 보냈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선생님은 딱 그 분뿐이다. 오래전에 할머니가 되셨을 선생님이 생존해 계실지 모르겠다.

  선생님 덕분에 이것저것 참 많이 외웠는데, 그 숱한 사건의 연도들이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렇게 배웠다. 사건들과 연도들을 짝 지워놓고 무조건 달달 외웠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세르비아 청년 그리고 1914년만 외우면 충분했다. 역사 속의 숱한 암살들 중에 왜 유독 그 암살만이 세계대전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불러왔는지 궁금하게 여길 줄도 몰랐다. 역사는 단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두드러진 사건,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역사를 만들어 온줄 알았다. 그 사건들은 거꾸로 역사적 변혁의 결과에 지나지 않음을 그때는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19C는 부르주아의 전성기였고, 그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은 산업혁명과 해외식민지였고, 산업혁명은 17C 과학혁명의 결과라는 사실은 물론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신분질서에 얽매여 있던 제3 계급에게 부르주아라는 이름과 역사의 주인이라는 명예를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향해 쏘았던 총알이 실제로 꿰뚫었던 것은 19C를 군림했던 부르주아지의 심장이라는 사실도 상상할 수 없었다.

 

 

  역사는 흐름과 축적이다. 하나의 사건은 다른 사건에 닿아 있고, 다른 사건은 또 다른 사건에 이어져 있다. 사건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도 아니다. 이념의 흐름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역사를 변혁시켜 온 사건들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사건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 속에 그 사건들이 놓여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똑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다른 맥락 속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만약 파리의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한 것이 1789년이 아니라 1289년이었다면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발단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수 천 년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떤 눈으로 어떤 사건들을 선택해서 어떤 흐름 속에서 역사를 구성해낼 것인가가 아마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 교과서 전쟁(?)의 '깊은 원인'일 것이다. 학생들은 배우는 교과서에 따라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과서 문제는 단지 교재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문제이고 가치관의 문제 이다.

 

 

  『역사 古典 강의』는 저자 강유원이 독특하게 구성해 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제목 가운데 있는 ‘古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고전이다. 한 시대를 가장 집약적으로 혹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고전들을 선택하여, 그 고전을 통해 역사의 맥을 짚어주고 있다. 보통 우리가 배워왔던 방식은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사건들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당구장 표시’나 ‘용꼬리 용용’ 따위로 강조하며 꼭 외워야 했던 사건들은 많이 누락되어 있다. 대신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온 중대한 사건들이 발생했던 '깊은 원인'과 그것들이 이후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수 백 년 이상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넓은 안목으로 설명해 준다.

  고대 희랍세계부터 제 2차 세계 대전까지의 긴 ‘강의’를 듣고 나면,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이 세상이 결코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도 단지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도 새삼스레 환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역시 언젠가는 지나간 체계가 될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다른 세계로의 변화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수백 년 어쩌면 수십 년 후에 예기치 못한 우연적 사건이 터지면,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결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역사란 이런 상상을 도와주는 이 세계 모든 선조들의 귀중한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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