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_

비전체 또는 성적 차이의 존재론

 

 

  11장을 두 달 가까이 끌었다. 모든 장이 다 그랬지만, 특히 11장은 머리가 아팠다. 비전체not-all 라면 전혀 모르는 개념도 아닌데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비-비-대상’, ‘비-비-미학’, ‘비-비-담론’ 따위의 ‘비-비-~’ 에서 손을 놓았다. 개념 자체의 난해함도 있지만, 역시나 번역의 문제가 그 난해함에 혼란을 더했다. ‘비’로 뭉뚱그린 우리말 번역으로는 술어의 부정과 비술어의 부정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다시 읽은 11장은 두 달 전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반년 이상 붙들었던 책에 질려있었던 것 같다. 11장을 끝내면 이제 4부 ‘식후 끽연’만 남았다. 어쩌다 일 년에 한두 번 붙여보는 담배지만, 담배란 느긋한 마음의 여유가 아니던가. 11장만 어서 끝내자!

 

 

 

1. 탈주술화된 세계 속에서의 성적 차이

 

  제목이 상당히 거시기하다. 성적 차이 혹은 그것의 합일 따위는 주술화된 세계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적어도 근대에는. 그런데 라캉은 근대 과학의 장 내에서 성적 차이의 존재론적 지위를 다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성적 차이란 무엇일까?

 

 

2. 성적 차이의 실재

 

  「그리하여 얼핏 섹슈얼리티는 어떤 형상을 비틀어버리는 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왜곡시키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 자체로 그것은 환원 불가능한, 도저히 능가할 수 없는 존재론적 추문, 칸트가 그렇게나 큰 충격을 받은 진짜 ‘이성의 안락사’를 가리킨다.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교착 상태, 비정합성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역설 -그리고 진정 헤겔적인 통찰-은 우리의 지각을 왜곡하는 이러한 ‘성적 편향들’이 우리를 현실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기는커녕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존재론적 교착 상태, 현실 그 자체의 불완전성이 주체성 속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객관적 현실에 대한 주관적 왜곡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실 자체의 비전체, 비정합성/어긋나 있음과 동일한 주관적 왜곡이다. p1313~4」

 

  「‘젠더의 사회적 구성’ 이라는 문제틀은 주체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며, 우연적인 상징화의 공간을 전제하는 반면 라캉에게서 ‘성구분’은 주체의 구성 자체를 위해, 상징화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다. 바로 거기에 성적 차이의 지위와 관련된 정신분석과 철학의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철학에서 주체는 내속적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며, 성 구분을 주체의 출현 자체를 위한 형식적으로 선험적인 일종의 조건으로 격상시킨다. 따라서 철학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철학적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성적 차이라는 주장을 옹호해야 한다. 성적 차이는 원초적 적대성을, 모든 총체성을 교란시키는 비전체를 나타낸다. p1317」

 

  두 개의 인용문에는 성 및 성적차이와 관련해 두 개의 단어가 나온다. 블완전성과 비전체가 그것이다. 불완전하고 비전체인 것은 현실이다. 성적 차이는 그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두 성은 이 비정합성을 드러내는 상이한 방식이다.

 

 

3. 성 구분 공식 : 예외가 있는 전체

 

  「따라서 성적 차이는 궁극적으로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며 각각의 성의 정체성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그것을 불가능성의 표시로 낙인을 찍는 차이이다. 만약 성적 차이가 양성 간의 차이가 아니라 각 성을 내부로부터 절단하는 차이라면 양 성은 도대체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을까? 라캉의 대답은 ‘무관심’ 이다. 성적 관계는 없다. - 양성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p1340」

 

  라캉의 성 구분 공식은 우리가 아는 수학적 공식과는 다른 논리 구조를 가진다. ‘예외가 있는 전체’는 남성의 공식이다. 모든 x는 F(x)에 속한다. 단,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하나는 있다. 예외가 있으면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에 관한 우리의 상식이지만 성 구분 공식에서는 예외가 있어야만 전체가 될 수 있다. 여성의 공식은 ‘비전체’ 이다. 모든 x가 F(x)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F(x)에 속하지 않는 어떤 x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공식에서는 예외가 없지만 비전체이다. 각각의 성은 자체로, 그 내부에서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상대의 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하튼 남성 공식이 ‘역학적 이율배반’ 이고, 여성 공식은 ‘수학적 이율배반’ 이다.

 

  보편성과 그것의 구성적 예외의 논리에는 세 개의 계기가 있다. (1) 보편성의 대한 예외가 있다. 모든 보편성은 그 틀에 맞지 않는 특수한 예외를 포함한다. (2) 보편성의 특수한 사례들은 모두 예외다. 보편성에 딱 맞는 특수성은 없다. (3) 여기서 변증법증 비틀기가 나온다. 예외에 대한 예외. 예외이지만 그 예외가 보편성 자체와 직접 연관된 요소가 있다. 단독적 보편성으로서의 예외가 그것이다.

 

  「모든 특수한 존재자는 보편성과 관련해 예외의 위치에 있다. ‘정상적인’ 예외의 계열과 관련해 주체를 대신하는 주인-시니피앙은 예외에 대한 예외, 직접적 보편성의 유일한 자리이다. 다시 말해 주인-시니피앙에서 예외의 논리는 재귀적인 극단으로까지 추구된다. 주인-시니피앙은 보편적 질서로부터 (그러한 질서 내에 적당한 자리가 없는 ‘비-부분의 부분’으로서) 전면적으로 배제되며,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으로 특수한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보편성을 나타낸다. p1345~6」

 

  그러면 보편성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쉽게 말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예외의 예외가 아닌 일반적 보편성을 얻게 되는 것일까? 

 

 「즉 주체는 보편성 속의 하나의 금, 실체적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X일 뿐만 아니라 오직 주체만을 위한 보편성도 있다. 오직 최소한으로 면제된 주체적 관점으로부터만 전체가, (특수한 예시화와는 다른) 보편성이 결코 이 보편성의 특수한 계기로 완전히 구현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외는 말 그대로 보편성을 정초한다. p1347」

 

  보편성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만 획득된다는 말인 것 같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이 말을 한 사람 역시 크레타인이지만 그는 자신을 예외에 놓는다.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는 언표행위자를 모든 크레타인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이 언표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언표행위자는 예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이 이런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조금 쉬워진다.

 

 

4. 성 구분 공식 : 비전체

 

  여성은 비전체이다. 그런데 비전체를 만드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전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無이다.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는 그냥 맨커피와 다르다.

 

  「다시 말해 ‘이것이 그것을 위해 비-Fx를 고수하고 있는 x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합을 비전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x는 단지 이 무 자체, 빗금처진 $일수밖에 없다. $와 a의 불가능한 접속(관계)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한다. 즉 주체는 공백이며, 텅 빈 위치, 술어 없는 주어인 반면 a는 그에 고유한 주어가 없는 술어이다. -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와 같은 것이다. p1358」

 

5. 성적 차이의 이율배반

 

  성적 차이는 적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각 성은 다른 성을 보충하지 않으며, 다른 성이 완전한 정체성을 갖는 것을 방해한다.

 

  「성적 차이는 ‘실재-불가능한 것’ 이라는 라캉의 주장은 ‘성적 관계는 없다’는 주장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성적 차이는 ‘정적인’ 상징적 대립들 그리고 포함/배제의 고정된 집합이 아니라 교착 상태, 트라우마, 열린 질문, 모든 상징화의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차이를 일군의 대립들로 번역하는 것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성적 차이가 의미하게 될 것을 위한 헤게모니투쟁의 영역을 여는 것이 바로 이 ‘불가능성’ 자체이다. p1373」

 

 

6. 왜 라캉은 유명론자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간결이 요약하려면 먼저 유명론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어렴풋이만 알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여기서는 알튀세르와 대비하여,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유명론’, 라캉은 ‘주이상스의 실재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라캉에게서 주이상스는 어떠한 실체적 실천성도 갖고 있지 않은 기묘한 실체이다. 그것은 오직 상징적 상블랑들의 텍스처에서 나타나는 금들, 왜곡들, 불균형들의 잠재적 원인으로만 식별될 수 있다 즉 현실과 관련해 라캉은 예외들(또는 클리나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유명론에 동의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예외들뿐이며, 그것들이 존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유명론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수의 현실을 낳는 잠재적인 원인인 어떤 불가능성 또는 적대성의 실재이다. p1375」

 

  라캉이 유명론자가 아닌 이유는 유명론이 현실의 잠재적 원인인 적대성의 실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이‘대안적 근대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점이다.

 

  「다수에 의지하는 것은 근대(성)의 독특한 고정된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수화는 근대(성)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오류이다. 즉 그것의 오류는 근대(성)라는 보편적 개념을 적대성으로부터, 이 근대(성)가 자본주의 체제에 끼워 넣어져 있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사실에 있다. 이 측면을 그저 이 체제의 역사적 아종 중의 하나로 치부함으로써 말이다. 이러한 내속적 적대성을 ‘거세적’ 차원으로 부를 수 있는 한 근대(성)들의 다수화를 물신주의적 부인의 형식으로 파악하기는 쉬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제임슨의 비판은 보편성과 특수성 간의 본래 변증법적인 관계를 위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이 양자의 차이는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보편성 쪽에 있다. 보편성은 특수한 내용의 모든 것을 담는 용기, 특수성들 사이의 갈등을 위한 평화로운 매개자나 배경이 아니다. 보편성 ‘그 자체’는 견딜 수 없는 적대성 또는 자기모순의 자리이며, 그것의 특수한 종(의 다수)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적대성을 모호하게 만들고‘화해시키고/제어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이란 문제-교착 상태의, 화급한 문제의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이며, 특수성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되었지만 실패한 대답들이다. p1377~8」

 

  우리가 어떤 형태의 근대를 발전시켜 왔던 적대는 실재한다는 말일까? 지금 우리 현실의 문제를 우리가 이룩했던 근대성의 문제로 보는 것은 실재하는 적대성에 대한 부인이라는 비판인 것 같다. 이 실재적 적대성이야말로 현실의 잠재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실재가 아니라 상블랑이다. 현실은 실재적 적대성을 흐리는 어떤 환상을 물질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상블랑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무엇인가?

 

  「1960년대부터 계속해서 실재는 더 이상 모든 상징적 세계들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통념과 관련해 실재는 어떤 대상에 대한 다수의 상이한 관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지속되는, 기저에 놓인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실재는 그러한 차이들을 낳는 것, 다수의 관점이 찾으려는 (그리고 실패하는) 파악하기 어려운 핵심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실재가 순수 가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대상의 어떠한 실재적, 특징들 속에도 정초될 수 없는 차이이다. ‘순수’ 차이인 것이다. p1380」

 

  라캉의 실재 개념은 변화해 왔다. 초기에는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는 어떤 핵심, 단단한 고갱이로 인식되었지만 후기에 와서 실재는 순수 가상 또는 순수 차이이다.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에서 나비인지 장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 이 간극이 바로 실재이다. 실재는 진짜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꿈을 다른 꿈과 분리시키는 간극이다.

 

 

7. 부정의 부정 : 라캉 대 헤겔

 

  라캉은 자신의 부정의 부정은 헤겔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헤겔처럼 부정의 부정의 결과 어떤 종류의 실정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라캉과 헤겔이 라캉 자신의 주장만큼 멀지는 않다는 것을 늘 암시해왔다. 똑 부러지게 단언하지는 않는데, 여기서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라캉의 부정의 부정은 성구분 공식의 여성적 측면 즉 비전체에 있다.

 

  「즉 담론의 사실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 비-비-담론은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비전체가 담론임을 의미한다. - 밖에 있는 것은 실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대상a, 무 이상이지만 어떤 것, 일자는 아닌 어떤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면, 거세되지 않은 주체는 없지만 이것이 모든 주체가 거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거세되지 않은 잔여가 대상a 이다). 여기서, 이러한 이중 부정에서 건드리게 되는 실재는 칸트적인 무한판단, 비-술어의 긍정과 연결될 수 있다. p1386~7」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지양이다. 그런데 이 지양에 대해 지젝은 오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기를 씻은 더러운 물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보통은 아기는 남겨두고 더러운 물만 버리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더러운 물이 아니라 아기를 내다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거기에 지양에 대한 유토피아에 고유한 오해가 있다. 즉 현상 속에서 건강한 핵심과 이 핵심의 완전한 실현을 막는 불행한 특수한 조건을 구분하고, 그런 다음 핵심이 완전히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그러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지양된다. 본질적인 핵심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지기 때문에 부정되지만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법은 핵심의 완전한 전개를 막는 장애물은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따라서 특수한 조건의 거짓 껍데기를 제거하면 이 핵심 자체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못보게 한다. 여기서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진정한 과제는 더러운 물은 내다 버리고 아기는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소위 건강한 아기를 내다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러운 물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p1396~7」

 

 

8. ‘비관계가 있다’

 

  ‘~관계가 없다’ 와 ‘비관계가 있다’는 다르다. 라캉은 ‘성적 관계는 없다’에서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이것은 부정판단으로부터 무한판단으로의 칸트적 이행을 환기시킨다.

 

  「‘성적 관계는 없다’의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러한 전도, 부정성 자체가 긍정적 실존을 얻도록 해주는 역설적 대상이라는 이 개념은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이것 없이는 우리는 ‘두 개의 대립적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추상적 수준에 머물게 된다.

  ‘성적 관계는 없다’로부터 ‘비관계가 있다’로의 이행은 또한 헤겔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행 즉 규정적 반성으로부터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과 상동적이다. - 또는 실로 유물 변증법으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행과 상동적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억압적인) 체계로부터의 해방의 난무로부터 (독일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핵심적인 변증법적 전환이다. - 부정성의 폭발들과, 상상 가능한 모든 형태의 ‘저항’과 ‘전복’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자체가 선행하는 실정적 질서에 기생하는 것은 극복할 수 없는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가장 파악하기 힘든 전환이다. p14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