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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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와 『아틀라스 세계사』를 참고 자료로 읽으며 개략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물론 중세에 관해서는 원래 아는 것이 너무 없다. ;; 워낙에 비잔티움은 은하철도 999같다고 강유원 박사가 농하기도 했다만. 중세는 별칭이 암흑기이기도 하고 ㅋ ;;  

 

 

Ⅱ 로마와 중세 카톨릭 제국 시대

 

 

 

* 읽는 고전

①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기

②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 서로마 제국에서 중세 봉건제로의 이행기

③ 비코의 『새로운 학문』

  :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르네상스 시대에 관한 문헌

 

 

 

 

제 11강

 

 

1. 로마 정치 체제의 개괄

 

   왕정 : 전설시대 , BC750~BC510

→ 공화정 : 원로원에 의한 귀족 공화정 BC510~ BC27

  · 내전의 세기 : 원로원 귀족과 가난한 하층민 사이의 대립

  · 일인자의 시대 : 하층민의 불만을 흡수해 자신의 세력을 키운 일인자들

→ 제정

  · 서로마 제국 : BC27~ AD476 , 게르만에 의해 멸망

  · 동로마 제국 : BC330~ AD1453,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

 

 

2. 내전의 세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제국은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민권을 신장하며 발전해 오던 로마 공화정은 포에니 전쟁 이후 크게 쇠퇴했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이 극심해 지고 이를 해결하려던 그락쿠스 형제는 살해되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혼란해지며 내전의 위기에 빠지자, 어느 시대나 그렇듯 군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일인자 자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엄청난 토지와 노예를 얻은 소수의 부유층(라티푼디움 운영)과 오랜 전쟁으로 자기 땅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 다수의 평민 간에는 갈수록 갈등이 심해졌다. 그 동안 로마를 다스려온 귀족 중심의 공화정은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고, 사태는 내전에 가까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1권 p65>」

 

 

3. 로마 제국의 인프라와 마리우스의 당나귀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또한 로마 군인이 사병화되는 단초를 제공하여 카이사르 같은 일인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로 국가에서 군사들에게 표준 무장을 제공하고, 군인들은 괭이, 톱 같은 건축 공사용 장비를 짊어지고 다녔다. 이것을 ‘마리우스의 당나귀’라고 한다. 로마 군인은 전투병인 동시에 공병이었다. 로마 군대는 가는 곳마다 먼저 도로와 성과 도시를 건설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네트워크와 중심지들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인프라이다.

 

 

 

 

제 12강

 

 

1. ‘Crossing the Rubicon'

 

  BC 49년 가장 강력한 일인자였던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무장 해제 지시를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고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파멸한다.”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실질적인 황제권을 행사하며 1인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세계가 파멸하기 이전에 파멸당한다.

 

 

 

2. ‘romanize’ : 제국주의의 통치 방식

 

  정복지의 지도자 자녀를 로마로 보내 공부시켜 로마화의 선봉으로 삼고, 로마와의 통상을 장려해 경제적으로  통합하고, 로마의 문화를 식민지에 이식한다. 제국주의 정치는 이렇게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힘이 함께 움직인다.

 

 

3. <갈리아 원정기> 중의 알레시아 전투

 

 <갈리아 원정기>는 카이사르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를 정복한 내용을 직접 쓴 일종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정복전쟁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전투는  7년간 계속된 갈리아 지도자 베르킹게토릭스의 반란을 다루고 있는 알레시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만화 <아스테릭스>에 의해 매우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제 13강

 

 

1. Pax Romana

 

 팍스 로마나는 제정이 시작되는 BC27년 옥타비아누스 때부터 AD180년까지를 가리킨다.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군사력에 의한 평화’로 식민지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유지되는 체제이다. 현대는 ‘팍스 아메리카나’ !

 

 

2. 시민권과 만민법

 

 로마 제정 시기에  “모든 자유민은 로마의 시민”이라는 선언과 함께 속주민의 개념은 사라지고 로마 영토 안의 사람은 노예를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의 시민이 된다. 실제로는 로마의 군인을 충원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속주민들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주어진다.

  만민법은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법률체계로서, 시민권과 만민법은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중앙 정부의 성립, 조세 기구의 확립, 직업 군대의 운용은 시민권 및 만민법과 더불어 로마제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3. 동로마제국의 분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성된 330년을 동로마제국의 공식적 원년으로 보는데, 서로마제국과 분리된 것은 395년으로 기록된다. 영토의 크기가 제국 통치의 한계를 넘어감에 따라 분할을 결정했다.

 

 

4. 서로마제국의 멸망 : 476년

 

  제국 기병대를 운용하기 위해 게르만 용병이 고용되었고, 용병들이 많아지자 게르만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결국 게르만 용병대장에 의해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이미 서로마제국 말기에 중세화가 진행되었는데, 로마인구의 5%가 제국의 부의 80%를 차지했다. 대다수의 농민은 자기 땅을 잃고 지주 아래 들어가 농노처럼 예속되었다.(콜로나투스제. 이 말에서 식민지를 뜻하는 콜로니가 파생되었다.) 지주들의 힘은 강대해지고 국가의 힘은 쇠락해갔다.

 

  로마제국 말기에는 중세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대토지 소유가 늘고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몰락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던 로마 가도의 붕괴로 이어졌다. 로마의 길은 풀이 자라면서 울창한 숲으로 변했고, 대토지 지역들은 서로 고립된 섬이 되었다. 이 무렵에 수도원이 탄생하는데, 최초의 수도원은 신앙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대토지 지주 밑에 들어가지 못한 떠돌이 농민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인 일종의 생활 공동체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대략 150년 동안 이렇게 로마는 서서히 중세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 14강

 

 

1. 봉건제와 기독교의 결합

 

  로마제국 말기와 중세 초기는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중세의 봉건제가 확립된 것이 10C 중반 바이킹의 100 여년에 걸친 침략이 끝난 후라고 하는데, 강유원은 로마제국 말기부터를 중세로의 이행기로 보고 있다. 강유원의 책은 중세를 크게 중세초기, 고중세, 중세말기로 나누는데, 바이킹 침략 이후부터를 중세적 특징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설명하면서 고중세라고 부른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말하는 중세는 아마도 고중세를 의미하는 듯하다.

 

  여하튼 중세는 로마제국 말기의 지주-전사 연합체를 이어받아 그것을 밑바탕으로 두고, 그 위에 기독교를 얹어서 로만 카톨릭 제국을 세웠다.

 

 

2. 동로마 제국의 기본 축

 

  동로마 제국을 유지한 세 가지 축은 희랍전통의 엘리트 문화, 로마 법전과 관료 행정 체계, 희랍 정교회이다.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교를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과 희랍 정교회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제2차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이 지역에 수많은 종교 분쟁이 벌어진다.

 

 

3. 로마는 오랫동안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차르와 카이저는 각각 카이사르의 슬라브어와 독일어 식의 발음으로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이나 제3제국, 제3의 로마 등을 자처하는 국가들이 이어졌다

 

 

 

 

제 15강

 

 

1. 기독교 공화국 respublica christiana

 

  중세는 기독교 공화국이다. 레스푸블리카는 정치적 측면, 크리스티아나는 종교적 측면을 가리킨다. 이 두 측면은 공존했지만 끊임없이 충돌했다. ‘두 개의 칼’은 정치적 권위를 가진 ‘황제의 칼’ 과 종교적 권위를 가진 ‘교황의 칼’을 의미한다. ‘카노사의 굴욕’(1077)과 ‘아비뇽 유수’(1309~1377)는 이 두 칼의 충돌을 극적으로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은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라는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종교적 측면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말기의 사람이지만 이런 이유로 중세 역사 공부에 반드시 언급되고 있다.

 

 

2.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빠르게 스며들었던 이유 : 교리 측면과 현실의 역할

 

  교리상의 평등주의와 영생사상이 로마인들을 끌어들였고, 자선을 통한 참회의 실천이 로마제국 말기의 빈곤 상황에 가장 강력한 구제책으로 기능했다.

 

 

3. 로만 카톨릭 Roman Catholic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지식 엘리트였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을 보존하고 그것을 게르만 족의 전통과 결합시켰다. 남부 갈리아 지방의 로마 귀족들은 교회를 장악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고, 북부 프랑크 게르만 귀족은 전사계급을 구성하여 '싸우는 자'가 되었다. 이 두 집단의 결합이 기독교 공화국을 이루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신학적 역사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목적론적 진보관을 갖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역사를 보는 서양인의 관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제 16강

 

 

1. 중세 1천년 (서로마제국 멸망 476 ~동로마제국 멸망 1453)

 

  ① 중세 초기  :   476 ~ 1000 , 암흑기

  ② 고(高)중세 : 1000 ~ 1300 , 중세의 핵심 (카노사의 굴욕 ~ 아비뇽 유수)

  ③ 중세 후기  :  1300 ~ 1500,  해체기 (동로마제국 멸망)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과거 서로마제국이었던 곳과 게르만 지역에 희랍문화가 전달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2. (高)중세의 핵심 요소

 

  ① 교회

  ‘카톨리코스katholikos’는 ‘보편적인’, 또는 ‘전체의’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두고, 성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을 지상 대리인으로 둔, 적법한 사제들의 관리를 받으며 동일체 안으로 모여든 신도들의 사회’ 를 말한다.

 

  ② 전사 조직

  영주와 전사의 전우애 체제이다. 쌍무계약을 바탕으로 한 이 조직이 봉건제의 직접적 기원이 된다.

 

 ③ 장원제 : 경제 시스템

  로마제국 말기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민들을 콜로누스colonus라 불렀는데, 게르만 족은 이러한 로마의 불평등한 토지 소유관계를 받아들여 사회경제적 평등 관계를 해체하고 토지 소유에 따른 계급 관계로 전환했다. 여기에 게르만족 특유의 전사조직을 결합해서 중세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들었다.

 

  ④ 교육제도 : 대학의 등장

 

 

 

 

제 17강

 

 

1.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14~16C)

    

    중세 → 르네상스, 종교개혁  →  절대왕정  → 근대 국민국가

 

 

2. 특징

 

  ① 교황 권력의 약화

     아비뇽 유수 (프랑스 왕이 독자적으로 아비뇽에 교황청을 세우고 교황을 임명)

 

  ② 흑사병 창궐

     14세기에 소빙하기가 찾아오면서 대기근이 발생하고 면역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몽골로부터  흑사병이 유입되자 유럽인구의 절반이 죽었다. 

 

   ③ 전사조직의 몰락  

      인구의 급감은 농노 감소를 의미했고 영주들은 서로 농노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이다.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 백년전쟁후 영국은 30년간의 장미전쟁에 돌입했다. 전쟁후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에스파냐는 차례로 절대왕정 국가를 수립했다.

 

  ④ 장원제 붕괴

      15세기 중반 이후 영주들은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쫓겨난 농노들은 도시로 몰려가 빈민이 되었다. 소위 인클로저 운동으로 '양떼가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 이 벌어졌다. 오늘날 영국의 전형적인 풍경인 목초지는 이때 형성된 것이다.

 

  화약과 대포의 등장

     전쟁의 규모와 비용이 급증하면서 영주로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중앙의 군주가 세금을 거두어 운영해야 했다. 이로 인해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⑥ 종교개혁

 

 

 

 

제 18강

 

 

1. 르네상스

 

  「화약과 대포 기술의 발명, 국가나 회사 같은 새로운 사회적 조직의 형성, 대규모 해외 정복, 자본주의 체제의 등장이 르네상스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면서 중세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근대의 통일성을 이루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맞물려 작용하면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통일성이 성립하며, 과학혁명은 이것을 완결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223」

 

 

2.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운동이 짧은 시간에 많은 세력을 얻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프로테스탄트가 세속적 통치자와 영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카톨릭에 대해 회의와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교리의 보편성과 함께 교황 영토의 보편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데, 프로테스탄트들은 카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려 하였다.  

 

  「종교개혁은 이제 순수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흐름을 타면서 자연스럽게 폭력이 발생했습니다. 그 충돌은 우선 토지를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토지를 몰수하려 하고 카톨릭 수도원의 재산 관리자는 그것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p227」

 

 

3. 근대정신을 이끈 자연과학 : 17C 과학혁명의 시대

 

  종교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을 내걸고 벌어지고 있는 종교 전쟁의 바탕에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종교는 이를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종교에 염증을 느끼게 된 사람들에게는 확실성을 심어줄 새로운 근거가 필요했다. 과학이 새로운 시대 정신으로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도로 높아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개혁과 함께 치열한 종교 대립이 벌어졌고 30년 전쟁 시기에는 세상이 극도로 험악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원하기 시작했고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자연과학이었습니다... 고전적 권위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수학적 확실성에 의존하는 과학,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물리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들에 대한 요구 등과 같은 변화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면서 17세기 중반에 르네상스는 완전히 끝납니다, p231」

 

 

 

 

제 19, 20강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수학적 확실성’ 이라는 시대정신에 맞서 신의 섭리와 인문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와 역사철학을 공부할 때 반드시 읽어야 할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비코는 데카르트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도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데카르트를 비판했다는데, 데카르트의 철학은 발표되자마자 동시대에 거센 비난에 직면했던 것 같다. 데카르트는 지금도 이놈저놈 열심히 비판하는 동네북이지만, 그럼에도 데카르트를 언급하지 않고는 근대철학도 현대철학도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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