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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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古典 강의

 

 

 

Ⅰ 고대 지중해 세계와 폴리스 시대

 

 

 

* 읽는 고전

① 헤로도토스의 『역사』

: 페르시아 전쟁 - 페르시아 제국 vs 희랍 연합

②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내전 - 아테나이 쉬마키아 vs 스파르테 쉬마키아

 

 

 

 

제 1강

 

 

  진화에 대한 협의의 생물학적 정의는 ‘환경에 적응하여 신체를 특수하게 발달시킨 것’이다.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 혹은 변이라는 말과 맥이 닿는다.

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4~5만 년 전에 진화를 멈추었다고 한다. 진화를 멈추었다는 것은 이후 인간의 모든 행위는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학습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4~5만 년 전부터 문명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는 바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시기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인간 문명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신석기 농업혁명’ 이다. 약 1만 년 전 발생한 신석기 농업혁명은 문명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단계였다. 유목민 사회를 제외한 모든 문명 세계는 신석기 농업혁명이 가진 기본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곡물중심 식사, 집단 거주, 조직된 사회, 잉여 농산물, 교역, 문자 체계, 천문학과 기상학 등이 그것이다.

 

 

제 2강

 

  희랍이 위치한 지중해 세계의 지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나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의 도움을  받았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위쪽으로는 유럽 남부가 오른쪽으로는 서아시아, 아래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가 위치해 있다. 地中海는 말 그대로 땅 가운데의 바다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1  p59>

 

  척박한 자연환경의 희랍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주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서기전 6~7세기부터 서기전 490년 무렵까지 소아시아 지역에 식민지가 많이 생겼고 그 결과 팽창하는 페르시아 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해 졌다.

 

 <후첨 : EBS 중학의 <필독 중학 세계사> 

 

 

 

제 3강

 

 

  3강과 4강은 헤로도투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기술이지만,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희랍세계의 100년 역사를 저자는 먼저 요약해 보여준다.

 

  「페르시아 전쟁은 희랍인들의 식민지 개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서기전 494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이오니아 지역(지중해 동쪽 연안의 소아시아지역, 지금의 터키)을 모두 정복하고, 서기전 492년에 아테나이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진 전쟁의 경과를 간단히 보면, 유명한 마라톤 전투가 서기전 490년에 마라톤 평원에서 벌어졌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서기전 480년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희랍군이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은 평화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희랍 세계가 분열되어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아테나이 연합군과 스파르테 연합군 사이의 전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고, 서기전 404년 스파르테 측이 승리하면서 이 전쟁이 끝납니다. 그러니까 서기전 492년부터 서기전 404년까지 100년 가까운 기간을 전쟁기로 볼 수 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테가 승리한 것은 페르시아가 뒷돈을 댔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고대 희랍의 폴리스 시대가 마무리됩니다. p45~6」

 

  페르시아 전쟁은 3차에 걸쳐 일어났다. 전쟁은 희랍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국 페르시아는 건재한 반면, 승리자인 희랍세계가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페르시아 군의 제3차 침입은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육군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스파르테 군을 만나 승리를 거둡니다. 이때 스파르테 왕이 전사합니다. 반면 해군은 살라미스에서 아테나이 군을 만나 대패합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해군력을 키운 아테나이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거둔 두 번의 승리는 아테나이로 하여금 패권적 야망을 갖게 합니다. 반면 전투에서 패한 스파르테는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로 인해 희랍 세계 내부에서 반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튀퀴디데스가 말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아테나이의 야망과 스파르테의 두려움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p49」

 

  페르시아 전쟁은 서양이 동양에 대해 거둔 최초의 승리이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는 동양과 서양의 대결에서 대부분 동양이 승리했다. 동양에 잘 조직된 군대와 앞선 무기 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3가지 주요 전투는

 

마라톤 전투 : 아테나이의 중장 보병의 승리 (부유한 시민), 즉 호플리테(중장보병)가 팔랑크스 대형(방패로 몸을 가린 밀집 대형) 으로 뭉쳐 튀모스(적을 끝내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 용기)의 결기로 동양의 군대를 무찌른 최초의 전투

 

테르모퓔라이 전투 : 스파르테의 패배, 영화<300>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인들이 자신을 지칭할 때)에게 전해 주시오. 우리가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이곳에 누워 있다고.”

  스파르테인은 승리하거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방패를 들고 혹은 (죽어서) 방패 위에서!"  돌아와야 했다.  패배한 채 살아 오는 것이 가장 큰 치욕이었다.

 

살라미스 해전 : 아테나이의 경장 보병과 해병의 승리 (가난한 시민), 중장 보병에 밀려 시민으로서의 발언권이 세지 않았던 경장 보병이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전투, 아테나이 안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

 

 

 

제 4강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가 희랍세계에 미친 영향과 그 의의를 살펴본다.

 

  1.「아테나이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주정이 독재정을 이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들의 정치체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나이 인들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얻은 체제 아이덴티티입니다. 스파르테 사람이건 아테나이 사람이건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는 것에 한없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p69」

 

  폴리스시민으로서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체제에 헌신해서 얻은 자유’ 이다. 당시 희랍인들에게 폴리스와 개인의 삶은 하나였다.

 

  2. 아테나이 내부의 대립 격화 : 부유한 보수주의자와 가난한 민주정 지지자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나이에서는, 마라톤 전투에서 공을 세운 중장 보병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공을 세운 경장 보병 및 해병 사이에 대립이 생겨났습니다. 구식 보병과 신식 해병, 자기 땅을 가진 농민과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의 대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p70」

 

  3. Kunstwerk 인공물, 예술품 : 사람이 만들어낸 것 일반

 

  아테나이인들은 신탁도 예측하지 못한 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신들의 손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은 과학뿐만 아니라 국가도 인공물이라고 생각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일어났던 르네상스가 부활시킨 것이 바로 이 ‘인공물’ 개념이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인간중심주의이고, 인간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것은 근대국가의 기본정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 초기의 대표적 고전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에는 건국신화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국가는 인공물 즉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아테나이를, 아테나이의 황금기를 살았던 주요 인물들이 있다. 모두들 죽기 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비극을 목격해야 했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아테나이의 영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소크라테스 (BC 470 경~BC 399) 

  소포클레스 (BC 496 ~ BC 406) 

  페리클레스 (BC 495 ~ BC 429)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를 확립하고 아테나이를 희랍세계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토지귀족에 속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정의 대표자는 페리클레스를 공격한 클레온 같은 인물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전통적인 토지 귀족이었지만 클레온은 토지와 관계없는 신흥 계급이었습니다. 선전 선동에 능한 클레온 같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민주파를 구성했습니다. 클레온을 보면 아테나이 계급 대립이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민주파는 기본적으로는 상인과 빈민을 대변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되어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사람들, 즉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p101」

 

  소위 민주주의에 의해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는 것을 본 플라톤이 민주정을 참주정으로 가는 타락한 국가 정체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지성주의적인 사람들, 우매한 대중이 이끄는 민주주의는 곧잘 권력을 독점하려는 전제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주는 역사가 그랬다.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혹은 독재자의 딸을 지도자로 선출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지성적 대중과 결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포클레스는 희랍 3대 비극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오이디푸스왕」등 오디푸스 3부작과 함께 7편의 비극이 전해지고 있다. 매년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의 비극 경연대회를 휩쓸며, 희랍 비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제 5강

 

  1. 아테나이의 제국주의 : 국내는 민주주의, 국외는 제국주의

 

  아테나이는 페르시아로부터 희랍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주변국들과 공수 동맹인 델로스 동맹, 즉 아테나이 쉬마키아를 결성하고, 일종의 방위분담금을 걷어 델로스의 금고에 보관한다. 이 금고의 돈은 무단으로 아테나이를 위해 사용된다. 동맹국 보호를 명목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친 것이다. ‘atticize' 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군사뿐만 아니라 시장, 문화 등에서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아테나이화를 실현한다. 아티카나이즈는 현대의 아메리카나이즈와 유사하다.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은 스파르테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며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 기원전 431년에서 기원전 404년까지 27년이 공식적인 전쟁 기간이나 앞뒤로 분쟁이 계속된다.

 

  3. 승자 : 스파르테가 승리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최종 승자는 ‘페르시아의 황금’ 이었다. 혹자는 이 전쟁을 ‘페르시아의 꿈이 이루어진 전쟁’ 이라고 한다. (혹은 EBS중학의 인강에 의하면 희랍세계의 자살이라고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 에게해 지역은 혼연일체의 폴리스 시대를 끝낸다.

 

 

제 6강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제국주의적 아테나이에 대한 희랍 도시국가들의 반감(혹은 두려움)과 아테나이의 야망이 충돌한 희랍의 내전이다. 반-아테나이 쉬마키아 전선(스파르테 쉬마키아)의 선봉장인 스파르테는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나이에 대한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 전쟁은 초반 페리클레스의 구상에 따라 장기 농성전으로 돌입한다. 전통적으로 들판에서 팔랑크스 대형으로 치루는 전투는 반나절이면 끝났다. 그러나 당시 아테나이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들판 전투에 임할 중장 보병이 모자란 반면, 전쟁자금이 막대하게 비축되어 있어서, 페리클레스는 장기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농성전은 아테나이 인들의 기질과 맞지 않았고, 역병이 창궐함에 따라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역병으로 사망했다.

 

페리클레스가 전쟁 이듬해에 전몰자들의 장례식에서 행한 연설은 매우 유명하며 그 시대의 아테나이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에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 p102」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전체가 ‘헬라스의 학교’라고 말한다. 그의 연설에서는 폴리스에 대한 시민들의 소속감이 굉장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인간은 ‘준 폴리티콘 zoon politikon’,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었다. 나면서부터 공동체의 유기적 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것은 전쟁을 통해 더욱 잘 입증되곤 했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면서 이 공동체 의식은 무너지고 만다. 희랍 세계의 폴리스 시대가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더 이상 시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이란 자각을 갖지 않았으며, 국가는 낯선 통치 체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제 7강

 

  폴리스 시대의 몰락을 가져온 최초의 재앙은 역병이었다. 역병으로 아테나이 성인 남성의 1/3이 죽었다. 공성전으로 인해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수용 한계를 넘어서자 역병이 발생하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로 인해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구속력이 없었다.” 노모스가 붕괴 것이다.

 

  「희랍인들을 동족 의식으로 엮어주던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붕괴하면서 대량학살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쟁과 정치, 대외 정책과 국내의 음모, 전장과 전장 밖에서의 살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p110」

 

  케르퀴라 내전은 동족의식이 붕괴된 이후 일어난 대량 살육의 최초의 사례이다. 아테나이 쉬마키아와 스파르테 쉬마키아의 대립이 폴리스 내부의 대립으로 전이된 것이다. 하나의 폴리스 안에 아테나이파와 스파르테파가 나뉘어져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잔인한 살육을 벌였다. 이런 내전은 케르퀴라 뿐만 아니라 여러 폴리스들로 퍼져 나갔다.

 

 

제 8강

 

  투퀴디데스는 전쟁사를 통해 자신의 전쟁관을 피력한다. ‘전쟁은 잔혹한 교사’ 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p118」

 

  전쟁을 통해 말의 의미도 완전히 바뀐다. ‘일베’가 보여주듯 말의 타락은 우리시대에도 고달픈 환경과 거친 심성의 표출인 것처럼 희랍시대도 그랬던 가 보다.

 

  「사람들은 행위를 평가하는 데 통상적으로 쓰던 말의 뜻을 임의로 바꾸었다. 그래서 만용은 충성심으로 간주되고, 신중함은 비겁한 자의 핑계가 되었다. 절제는 남자답지 못함의 다른 말이 되고, 문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실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가 되고,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p119」

 

  머나먼 과거의 전쟁사가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그 당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내전, 잔혹한 인종 청소, 무력에 의해 지배되는 국제 질서 등이 21세기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제 9강

 

  멜로스 회담은 국제사회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테나이 쉬마키아에 가입하지 않았던 멜로스에 대해 아테나이는 무력을 앞 세워, 항복을 요구하는 회담을 강제한다.

 

  「아테나이인 사절단 : 여러분이 눈앞의 현실근거하여 여러분의 도시를 구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기 위해 여기서 우리를 만난 것이라면, 우리는 회담을 중단할 것이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가 권하는 대로 한다면, 우리도 회담을 계속할 것이오. p129」

 

  「아테나이인 사절단 : 우리를 해롭게 한 적이 없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시오. (...)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 p130」

 

  정의는 “ the strong do what they have the power to do and the weak accept what they have to accept." 다. 국제 사회의 이런 정의 개념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아테나이의 제안을 거부한 멜로스는 아테나이에 의해 참혹하게 도륙당한 뒤 아테나이의 식민지가 되었다.

 

  희랍인들의 동족의식을 무너뜨리고 잔혹한 내전으로 치닫게 된 것은 아테나이의 정치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전쟁 초기 페리클레스가 죽고 나자 아테나이는 본격적인 대중적 민주정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희랍의 민주정은, 지금도 비슷한 면이 있지만, 우중이 이끄는 정치였다. 당시 민주정은 어리석음과 동일시되었다. 여기서 대두한 문제가 민주정을 어떻게 현명함과 결합시키는 것인가이다. 플라톤이 『국가·정체』에서 민주정을 철인정치-명예정치-과두정치 다음으로 놓은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 10강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희랍세계의 폴리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전쟁은 표면적으로 스파르테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실상의 승자는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도 곧 이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침략당하고, 뒤이어 세력을 확장한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되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 철학이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가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하지만, 저자는 사실상 알렉산드로스가 문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고 한다. 여하튼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은 ‘존재론적 허무주의’ 이다. 나라는 망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참혹한 시절을 보내면서 세상의 고난을 잊기 위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가느다란 목숨을 길게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는 철학에 마음을 기울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① 에피쿠로스 철학 : 친구들기리 모여 놀자는 탈정치적 철학

  ② 스토아 철학 : 이 세상은 덧없고 진정한 행복은 우주적 질서와 교감할 때 생긴다는 탈현실적 철학

  ③ 퀴니코스 학파(회의주의) : 통속의 디오게네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 zoon politikon 은 완전히 사라졌다. 민회에 나가 폴리스의 일을 격렬히 토론하던 시민의 모습은 사라졌다. 시민들은 정치를 버렸고, 그들은 더 이상 폴리스의 시민이 아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 허무주의의 시대에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존재론적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객관적 질서가 모두 붕괴한 상황에서도 플라톤은 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며 거기에 기준을 두고 인생을 살아야 하고,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의 철학은 이를 악물고 현실 세계를 올바로 살아내기 위한 허무 극복의 철학이었습니다. p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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