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일 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은 말도 어렵게 할까? 일정한 법칙 따윈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칠일밤』을 펴들기가 편안치는 않았다. 『칠일밤』은 일흔여덟의 눈먼 노인 보르헤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극장에서 일곱 차례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글이 아니라 말이다.

 

눈먼 노인은 종종 예언자, 현인들을 상징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테이레시아스가 그렇고, 바로 오이디푸스 자신이 그렇다. 스스로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눈을 떴다. 그렇다고 보르헤스의 실명이 그의 강의에 아우라를 더해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눈먼 노인의 생각 깊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어느 밤에 대한 상상은, 슬프고 아름답다.

 

보르헤스의 강의는 편안하고 풍부하다. 난해하고 현란하던 단편집들을 생각한다면, 놀라우리만큼 쉽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그를 수식하던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모든 것? 내가 조악하게 이해한 대부분의 것들이라 하자. 보르헤스는 일곱 번의 강의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거의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어제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카톨릭 청년대회’에서 그럴법한, 온화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신이 사랑한 책과 작가들, 관심 깊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들은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들의 책과, 불교와 카발라 같은 종교, 그리고 꿈과 시와 실명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보르헤스 자신이 평생 사랑하고 깊이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청중들은 그리고 말-글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보르헤스의 난해한 책을 읽어내는 법과 보르헤스 글쓰기의 방법과 사상의 단편들을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1일 밤 : 신곡

 

보르헤스는 단테(신곡 속의 단테) 나 베르길리우스, 베아트리체, 베르나르두스 같은 중심인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수없이 많은 일화적인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일화, 한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현대소설은 우리에게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서 오백이나 육백 페이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단테에게는 한순간으로 족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작중 인물은 영원히 규정지어지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중심 순간을 찾습니다. 나는 여러 단편소설에서 그와 똑같은 것을 하고자 했고, 중세 때 단테가 발견한 방법 때문에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암호로서 한순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작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지 짧은 3행연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원합니다. 그들은 한 단어나 하나의 행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노래의 일부이지만, 그 일부는 영원합니다.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고, 기억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다시 새로워집니다. p29」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보고 울던 갑돌이, 눈빛으로만 사랑하다 이별한 연인의 절절한 아픔은 이 한 순간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우리 삶의 단 한순간, 그것만이 우리의 삶이다. 그 한순간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우리는 그 한순간이 없이 산다, 잘 산 것이리라. 보르헤스가 단편만을 고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신곡』에서 율리시스의 일화가, 단테가 만든 가장 멋진 전설이라고 한다. 율리시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늙고 지친 몸이지만, 새로운 모험을 향해 떠난다.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서 남반구를 탐험하기 위해서다. 율리시스는 동료들에게 그들은 남자이지 짐승이 아니며, 용기와 지식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다섯 달의 항해 후 드디어 육지에 도달하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배가 침몰한다. 그곳은 연옥이다. 율리시스는 불길의 고통을 받는 형벌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왜 율리시스가 벌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 절정의 순간에 연옥에 떨어진 이유는, “절정의 순간은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면서도 대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율리시스에게 절정의 순간은 트로이의 목마가 성공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남반구의 탐험에 성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신에 의해 금지된 순간이다. 보르헤스는 단테가 이 일화를 비극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단테가 율리시스를 자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단테는 『신곡』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단테 스스로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단테는 『신곡』을 통해 그것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리시스란 인물은 그토록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리시스는 단테의 거울이고, 단테는 아마도 자기 역시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좋든 나쁘든 시를 쓰면서 그는 밤의 법칙, 즉 하느님과 신성의 신비로운 법칙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p48」

 

이것은 아마도 보르헤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절정의 순간, 그 한순간을 포착하여, 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다. 작가는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을 알고자 하는, 고결하고 대담한” 신성모독자이다. 율리시스가 단테이며, 단테는 보르헤스이다. 보르헤스가 그의 첫 강의에서 단테의 『신곡』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신곡』의 수많은 일화들 중 율리시스를 최고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일 밤 : 악몽

 

보르헤스가 늘 꾸는 악몽은 미로와 거울, 혹은 거울이 만든 미로다. 꿈이란 무엇일까? 악몽이란? 보르헤스는 영어 nightmare와 독어 märchen의 연관성을 추측하며, 악몽을 ‘밤의 허구적 작품’ 즉 ‘밤의 소설’ 이라 말한다. 악몽은 fiction 이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미로와 거울의 이미지를 변주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보르헤스는 꿈을 ‘가장 오래된 미학 행위’로 결론짓는다.

 

그런데 꿈은 신적인 어떤 것이다. 보르헤스는 던이란 작가의 『시간 경험』을 인용한다.

 

「그 책에서 던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것보다는 작지만 개인적인 영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매일 밤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꿈속에서 이미 개인적인 영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영원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미래를 보게 합니다. 하느님이 광활한 영원에서 우주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듯이, 꿈꾸는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바라봅니다. p57」

 

꿈은 어떤 사람에게는 소망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과거다. 꿈에 대한 도전은 정신분석학, 심리학, 문학 등 다양하지만, 여전히 꿈은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꿈을 일종의 신적 응시로 생각한다.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에는 정신없이 바쁜 신이 나온다. 지구 곳곳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기도를 듣느라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신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한번 응시로, 단 한 순간으로, 신은 모든 것을 본다. 꿈 역시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보르헤스의 대표적 단편 <알레프>의 응시이기도 하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단편 <알레프>는 두 번이나 읽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컴컴한 지하실에 드러누워 2~3cm의 좁은 구멍을 통해 화자는 한순간 모든 것을 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어느 모퉁이 가로수의 잎맥, 해변의 모래알 하나하나, 심지어는 자신의 뱃속 창자까지. 한순간에 우주의 모든 것을 본다. 그 <알레프>가 바로 신의 응시이고, 꿈이며, 그리고 픽션들이다.

 

역자 송병선은 “그는 우리가 문학을 통해 여행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시간여행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가 모든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알레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p280” 라고 ‘옮긴이의 말’ 에서 전하고 있다.

 

문학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한 자리에서 수 천 년 전의 이야기와 바로 오늘 만들어진 이야기, 그리고 아르헨티나 어느 극장의 눈먼 노인의 모습에서 소년 동호의 굳은 얼굴까지, 이 모두를 생생히 볼 수 있다. 보르헤스 자신은 꿈이 알레프라 말하지 않지만, 내가 읽은 보르헤스는 꿈이 바로 그 <알레프>라 말하고 있다.

 

 

3일 밤 : 천 하룻밤의 이야기

 

지금까지 ‘천일야화’가 千日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설마 千一이라고는... ‘천’은 무수히 많다, 무한하다는 의미다. 거기에 더한 하루, 一은 무한이라는 추상에 순간적 현실성을 더해준다. 千日이 은유라면, 天一은 현실이다. 이건 내 생각이고, 보르헤스는 '영원히'의 영어식 표기인 ‘forever and a day' 떠올리며, “무한의 사상은 『천 하룻밤의 이야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생각” 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카이로에서 편찬되었지만, 핵심은 인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인도에서,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 소아시아를 거쳐 마침내 아랍어로 씌어져 이집트에서 발행되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번역판들이 있다. 이 판본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내용이 살짝 변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기도 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거나 재창조되고 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의 무한한 시간은 계속해서 길을 갑니다. 18세기 초에 이 책은 번역되었고, 19세기 초 혹은 18세기 말에 드 퀸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번역자들에 의해 또 다시 번역될 것이고, 각 번역자는 이 책의 서로 다른 판본을 출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제목을 지닌 수많은 책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p116 」

 

『천 하룻밤의 이야기』는 모든 책들 혹은 보르헤스의 책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은 상호텍스트성 혹은 메타픽션에 관한 비유로 읽혀진다. 번역에 의해, 판본에 의해, 독자에 의해 텍스트는 끊임없이 변한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통해 보르헤스가 극명히 보여주려 했던 것이 이것이다. 어떤 텍스트도 ‘죽지 않는다.’ 텍스트는 무한성을 갖고 있다.

 

 

4일 밤 : 불교

 

서양의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조금 웃는다. 그들의 이해가 일천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해박한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나는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불교 그 자체다. 우리는 딱히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불교의 정신과 관습에 어쩔 수 없이 물든 부분을 가지고 있다. 염화시중처럼. 어쨌든 보르헤스의 픽션들에는 불교사상 특히 선불교의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보르헤스가 보는 선불교의 핵심은 자아가 없고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란 환영이며 꿈이고, 인생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깊이 느껴야만 하고, 명상을 통해 그것에 이르러야 합니다.p150」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이 그 대표작일 것이다. 나는 꿈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5일 밤 : 시

 

보르헤스는 시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직접 읽는 것이다. “참고 문헌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 비평에 대한 참고문헌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p171” 아마도 보르헤스 자신의 픽션들에 대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주석에 신경 쓰지 마세요, 쇼펜하우어나 라이프니츠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냥 읽고 낄낄 웃으세요...

 

시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읽고도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그 작가는 여러분을 위해 그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그럼 그 책은 그냥 버려두라. 문학작품은 너무도 많고, 당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작가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급하다. 패션처럼 작가들의 이름을 좇는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보르헤스라는 명품 혹은 사치품.

 

「에머슨은 도서관을 보고, 마법에 걸린 수많은 책들이 있는 마법의 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부를 때에만 잠에서 깨어납니다. 우리가 책을 열지 않으면, 그 책은 글자 그대로 기하학적인 종이더미, 즉 수많은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열면, 그 책은 독자를 만나게 되고, 미학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심지어 동일한 독자가 읽었다 하더라도 그 책은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그는 어제의 인간이 오늘의 인간이 아니며, 내일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바뀌고 있으며, 하나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그리고 다시 읽은 책을 기억할 때마다, 작품을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도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입니다. p162 」

 

리뷰를 쓰는 것도 작품을 고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가능하면 리뷰를 쓰려고 한다. 처음에는 단지 내용을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리뷰를 쓰다보면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들 그리고 처음 떠올렸던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새로운 생각이 덧붙여진다. 책이 변하고, 나도 변한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읽으며 과거에 썼던 리뷰를 떠올리고, 이전의 생각들을 수정하거나 더 깊게 하기도 한다. 과거의 리뷰가 지금의 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작가들의 글쓰기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리뷰 놀이에도 작용한다.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다.

 

 

6일 밤 : 카발라

 

유대교 신비주의. 더 이상 아는 것도 없고, 강연 내용에서 특기하게 이해되는 것도 없다.

 

7일 밤 : 실명

 

실명한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멀어진다.”

 

「한 작가, 아니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든지,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p255 」

 

과연 그럴까?

 

보르헤스의 실명은 유전병이었고, 쉰 무렵에는 혼자서 읽기도 쓰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87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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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송병선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보르헤스의 『알레프』와『픽션들』을 읽었다. 당연히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해설서를 찾아보았다. 나는, 해설서는 잘 읽지 않는다, 특히 소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소설책 뒤편에 붙은 작품해설도 읽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해설서를 읽다니, 바보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맛을 느끼는 법을 공부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요리사가 될 것도 아니고, 맛 감별사가 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읽었다. 송병선의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송병선을 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보르헤스를 포함시키면서, 번역을 맡은 라틴문학 전공자가 송병선 교수라, 이름이 낯익었다. 시립도서관에 있는 것 중 제일 만만한 것이기도 했다. 혀가 굳었는데, 맛보는 법을 배운다고 오묘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다. 그래도 방법이라도 조금 익혔으니, 『알레프』를 다시 읽어보려 한다.

 

 

 

1장은 <보르헤스의 미로를 향한 첫걸음> 이다. 제목대로 보르헤스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보르헤스는 한마디로 말하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문학계에 새로운 출구를 열어준 작가다. 보르헤스 이후 문학은 특히 미국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해 질주한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는 철학, 신학, 문학, 논리학, 신화 등에 걸친 광범위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세계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의해 고갈된 서구 문학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 선구자이며, 하나의 진리만을 찾고자 하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60년대 말의 문학적 상황을 다원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p38」

 

보르헤스의 문학세계는 다원적이다. 하나의 진리나 유일신을 부정하며, 진리/허구의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한다. 리얼리티와 픽션이 구별되지 않는다. 현실이 곧 허구이고, 허구가 곧 현실이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를 불러 오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장자의 ‘호접몽’이 있으니까. 사실 보르헤스는 동양의 사상과 불교를 좋아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추방된 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플라톤과 헤겔 역시 추방되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도 슬슬 해거름을 맞고 있는지, 진리와 헤겔의 부정성 같은 것들이 다시 불려나오고 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나 『투명사회』뿐만 아니라, 알랭 바디우, 지젝 등의 라캉주의 좌파들이 부정성과 ‘진리-사건’ 등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계몽주의시대의 순진한 진리와는 다른 업그레이드 판 진리이다.

 

여하튼 진리가 없다는 것은 판단의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리얼인지 픽션인지도 헷갈리고, 판단의 기준도 없고, 끊임없이 차이를 반복하며 미로를 헤매는 그런 소설이 쉽게 읽힐 리가 없다. 업계는 보르헤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로 숭배하고 따랐지만, 대중에게 보르헤스는 어쩌면 순수한 비현실이다.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가 현실이기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것이 꿈이나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왜 끝나지 않는 고통만이 그렇게도 생생한 걸까? 『픽션들』의 <원형의 폐허> 속 화자처럼 우리도 불길 속에서 아무런 뜨거움도 느끼지 못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렇게 빨리 도전받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고통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문학계에서 왜 모더니즘문학이 고갈되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존 바스라는 사람이 「고갈의 문학」에서 모더니즘 미학의 고갈을 선언하면서, 해결책으로 보르헤스를 들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이다. 이 단편의 내용은 나도 알고 있었던 걸로 보아, 보르헤스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은 들었을법하게 유명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중 두세장 정도를 글자 그대로 베껴서 자신의 이름으로 돈키호테를 출간했는데, 피에르 메나르의 이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원작 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글자 그대로 베꼈는데 도대체 이 두 작품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메나르의 상상적인 예를 통해 창조라는 종래의 글쓰기 행위를 부정한다. 즉 최소한의 패러디를 통해 메나르는 돈키호테를 글자 그대로 베끼지만, 동일한 두 작품 사이의 역사적 거리로 인해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인식소의 변화로 인해 독자 및 작가의 콘텍스트가 대치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패러디가 텍스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지평선 속에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에서 메나르는 독서를 글쓰기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둘 사이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한다. p47~8」

 

말하자면 메나르의 베껴 쓰기는 독자의 읽기와 같다. 17세기의 『돈키호테』가 20세기에 읽힐 때는 당연히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런 경험은 우리들도 자주 한다. 고전이라 불리는 지긋지긋한 작품들을 읽을 때,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다. 보르헤스는 메나르의 쓰기-읽기가 더 풍부하다고 하지만, 평범한 나의 독해력은 당대인들에 비해 훨씬 빈약함에 틀림없다. 그 작품들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깊이 감동한 고전들도 없지는 않다. 여하튼 시대에 따라 혹은 독자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읽는 방법에 따라 텍스트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작가들은 옛 텍스트를 가지고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모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포스트모던한 용어로는 ‘상호텍스트성’ 이다. 상호텍스트성을 추구하는 작가들-메타픽션가들은 “글쓰기가 결국은 다른 다양한 텍스트를 흡수하고 변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되풀이하는 것임을 감추지 않는다.p49”  페더만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표절유희”라고 불렀다. 표절이 고발의 대상이 아니라, 유희의 대상인 셈이다. 표절과 유희라고 하니, 과거 이인화의 ‘패스티쉬’ 논쟁이 생각난다. 혼성모방이란 뜻인데,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두고, 너 이것 누구누구 베꼈지 하니까, 나는 누구누구만 베낀 것이 아니고 이놈 저놈 엄청 베꼈다고 응수한 사건이다. 덕분에 나는 페티시와 패스티쉬가 엄청 헷갈려서, 글을 쓸 때마다 찾아보곤 했다. 그러니까 이인화도 일종의 표절유희를 즐긴 셈인데, 마침 이 책의 <한국문학과 보르헤스>편에서 송병선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다루고 있다.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베낀 것이라고 했는데, 송병선은 에코가 보르헤스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영원한 제국』도 보르헤스 문학의 자장 안에서 쓰였다고 해석한다.

 

 

2장은 <보르헤스는 어떻게 글을 썼는가> 이다. 이 장은 보르헤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마르케스, 카프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보르헤스가 가장 좋아한 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보르헤스는 소설의 구조를 이 백과사전의 구조와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카프카이다. 카프카처럼 글을 쓰려고 했다가 실패했다는 고백이 나온다.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상호텍스트성의 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송병선은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어떻게 흡수하고 변형했는가”, 즉 보르헤스가 카프카를 어떻게 흡수,변형 했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다음으로 조금 짚어 보아야 할 것은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와 보르헤스의 환상문학 간의 관계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을 흔히 환상문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남미의 환상문학은 리얼리즘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남미의 환상문학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다가가기 위해 남미문학은 환상을 채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존재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에게 환상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이다.” 샤르트르가 카프카나 블랑쇼의 환상 문학에 대해 한 이 말은 남미문학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환상적인 이미지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보르헤스는 이성적 환상주의자다. SF소설가나 초현실주의자와는 다르다. 톨킨이 그리고 있는 『반지의 제왕』의 순수 환상의 세계와도 다르다. 보르헤스의 비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기초하고 있다. 보르헤스 스스로 자기의 환상소설은 근본적으로 실제 인간에 대한 감추어진 논평이라고 말했다. 보르헤스의 비현실에는 현실이 있다. 보르헤스는 사상과 현실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이성과 논리적 상상력, 수사학적 상징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인간 논리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르헤스의 환상소설은 비이성에 반대한 이성의 도구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진리를 부정하는 보르헤스가 ‘이성적’ 환상주의자라니 언뜻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더니즘은 계몽의 시대,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으로 표현되는 시대가 아닌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의 권위에 대한 반란이 아닌가?

 

그런데 보르헤스의 ‘이성적’ 환상주의는 1930년대의 서구사회를 비이성적 사회로 파악한데 따른 것이다. 보르헤스는 파시즘, 공산주의, 대중 민주주의, 독재주의를 모두 비이성으로 치부했다. 그는 환상을 통해 완벽하게 조직된 세계를 제시한다. 그러니까 근대를 대표하는 ‘이성’과 송병선이 설명하는 보르헤스의 ‘이성’은 좀 층위가 다른 것 같다. 사실 30년대의 ‘비이성적 사회’라는 것은 데카르트 이래 서구 사회를 이끌어 온 이성 중심주의의 파국적 귀결인데 말이다.

 

어쨌든 보르헤스는 픽션으로 철학을 논파한다고 할 수 있다. 환상으로 논리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환상이라고 할 때 선험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공상 과학적이고, 빗자루가 하늘을 나는 순수 환상과는 분명히 다르다. 보르헤스의 환상세계는 논리적, 이성적으로 구성된 세계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는 멋진 논리적 구성과 이런 논리적 구성이 현실 세계의 알려지지 않는 구조를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실망감이 교차되는 것이다. p101”

 

마르케스의 환상문학은 ‘마술적 사실주의’라 불린다. 마르케스 자신은 환상적 혹은 마술적이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리얼리즘 작가’로 규정한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전 세계인에게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부로 인식되어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보르헤스의 환상문학과는 많이 다르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보르헤스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비평사를 살펴보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195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마술적 사실주의’에 관한 많은 의견이 등장했지만, 이 용어는 사실주의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재현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용어가 비평가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기록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면을 통합하려는 관점과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문화 및 사회 문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리얼리즘-자연주의 문학 서술의 한계를 느끼고 과감하고 혁신적이자 실험적인 문학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p101~2」

 

마르케스가 자신을 리얼리즘 작가로 주장하는 것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마르케스에게 마술적 형식이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보다 잘 서술하기 위해 필요한 강력한 도구라 할 수 있다. 마르케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집』의 이사벨 아옌데,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라우라 에스키벨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원시적 주술과 마술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강렬하게 고발한다.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두 거장이지만, 매우 상이한 경향을 나타낸다. 보르헤스는 “차갑고 지성적이며 박학함을 통해 이성적으로 환상을 사용한다.” 반면 마르케스는 “불가해한 현실의 신비를 포착하면서, 작가의 사회적·예술적 의무로써 마술적 사실주의를 구사한다.”

 

남미의 환상문학이 현실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볼 때,  보르헤스의 '이성적' 환상주의는 철학의 현실을, 마르케스의 '사실적' 마술주의는  사회적 혹은 역사적 현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케스와는 달리 보르헤스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닐까. 마르케스가 당대의 현실 사회에 천착한 반면 보르헤스는 진리나 존재 혹은 영원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현실에 몰두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 안에서 '현실' 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찾아야 한다면 말이다.

 

3장은 보르헤스가 세계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한 고찰이다. 보르헤스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세계적 작가로 격상시킨 것은 프랑스의 신비평계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론을 통해 보르헤스의 글이 자기 책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보르헤스는 현대미국소설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90년대에 뒤늦게 수용되기 시작한 우리문학계에서도 보르헤스의 영향이 발견된다. 송병선은 구광본, 이인화, 이승우를 통해 보르헤스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 분석하는데, 구광본과 이승우의 책은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이인화는 충분히 그럴듯해 보인다.

 

 

4장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방법>인데, 작품론이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가장 짧은 단편인 <이스테리온의 집>과 후기 걸작인 <의회>를 분석한 두 편의 글과 보르헤스에게 성이 무엇인지를 다룬 글로 이루어져 있다.

 

 

한 가지 기억해 둘 만한 것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네 단계이다. 첫 단계는 까다로운 이론적 배경 따위는 다 집어치우고 그냥 스토리에 집중해야 한다. 스토리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르헤스는 스토리텔링의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 단계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서술 기법을 분석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작품들 속에서 의미를 지시하는 조그마한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게임처럼 레벨이 있다는 것인데, 일단 나 같은 일반 독자는 소설 자체로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러자면 그 어지러운 각주들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황병하 역 보다 송병선 역에는 각주가 훨씬 적어 보이기는 한다. 다시 송병선 역으로 『알레프』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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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일종의 강박이다, 카프카와 함께. 하도 여기저기서 말들을 하니까, 읽지 않았다고 하면 뭔가 비웃음을 살 것 같은  불안함. 나도 보르헤스를 읽으려 한적이 있다. 육칠년 전쯤, 재미있다는 지인의 말에, 속았다. 보르헤스 전집을 독파한 지인은 보르헤스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어떤 재미를 느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보르헤스에게서 재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보르헤스는 재미없어라고 평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마치 풀지 못한 방정식이 적힌 칠판 앞에서 벌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그런 것이다.  보르헤스는 재미있어야하고 위대해야하고  경이로워야 한다. 하다 못해 뭔지는 몰라도 무척 놀랍다, 정도는 되어야 한다. 수학을 포기하면 방정식 그깟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문학을 포기하지 않고도 보르헤스 그깟것 할 수 있을까?

 

 

도서관 소속의 독서회는 아이들의 방학기간에 맞춰 방학을 한다. 아이들의 방학과 별 상관없이 사는 몇몇 회원들은 놀아 뭐하냐, 책이라고 읽고 수다라도 떨자, 했다. 그런데 보르헤스다. 마침 한 명의 회원이 박사과정을 수료한 서어서문학과 출신이다. 서어서문학은 스페인문학 보다 남미문학이 중심이라고 한다. 넘어야 할 산이라면, 등산화끈이라도 조여보자는 마음으로, 꼬셨다. 네가 특강하는 셈치고, 보르헤스 좀 가르쳐 주라, 이야기는 그렇게 되었다. 휴가 마치고 다음주부터 시작이다. 첫 책은 『픽션들』 

 

보르헤스는 여전히 어렵다. 차라리 난삽하다. 짧은 단편들인데도 너무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익숙치 않은 스페인어 명사들이 일단 머릿속을 헝컬어댄다.

 

그리고 주석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보르헤스는 책에 대한 책,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쓴다. 그런데 그것이 평론이 아니라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압축된 단편소설이다. 당연히 아무 설명이 없다. 보르헤스가 표적으로 삼은 그 소설, 그 책을 읽지 않고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이해할 길이 없다. 유명한 책들도 아니다. 셰익스피어나 안데르센 같은, 읽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그런 책들이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책들에 관한 글을 쓴다. 보르헤스는 살아있는 도서관인지 걸어다니는 도서관인지, 아뭏든 그렇게 불린다.  적어도 기어다니는 도서관 정도는 되어야 보르헤스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노심초사, 고육지책, 역자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교과서에 온통 빨간줄을 그어대듯 주석을 달아댄다. 주석은 읽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고, 읽으면 어지럽고 질린다.

 

역자 황병하는 "작금에 들어 아무도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지성 사조인 독자반응이론,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보르헤스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집들을 가지고 20세기 후반을 창조해낸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런데 지금은 21세기다. 포스트모더니즘도 후기구조주의도 진부해졌다. 독자반응이론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텍스트는 독자의 해석에 의해 재탄생한다는 것도 상식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처음 말했을 때, 그때 코페르니쿠스는 살아있는 혁명아였다. 지금 코페르니쿠스는 박제된 혁명아이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상식이다. 보르헤스 보다 보르헤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푸코,에코,데리다를 먼저 접한 21세기의 나는 당연히 보르헤스가 놀랍지 않다. 보르헤스를 역사의 창조자로 인정은 해야겠지만, 그 창조가 주는 경이와 위대함은 이미 후계자들에 의해 먼저 전파되었다.

 

그럼에도 『픽션들』 의 몇몇은 재미있었다. 가장 유명한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  비교적 쉬운 편에 속하는 단편들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명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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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제 얘기 같아서 찔립니다. 저 보르헤스 좋아합니다. 엄지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는 했죠. ㅎㅎㅎㅎㅎ. 전 보르헤스가 장편을 압축해서 단편으로 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천재라고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파스칼이었나요. 그가 편지에다 이렇게 썼죠. 짧게 쓸 수 없어서 길게 써서 미안합니다...라고 말이죠. 보르헤스는 참기름 장수 같아요. 압축한 것을 풀어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말리 2014-08-10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시를 잘 못읽습니다. 감성도 독해력도 떨어져서 그렇겠지. 그래서 단편 보다는 장편이 더 잘 읽힙니다. 보르헤스에 대한 이론적 지식 이런걸 다 떠나서 시적 감수성이 있었다면 보르헤스를 직관적으로 좋아했을 수도 있을것 같아요. 음악, 미술 이런 것들에도 감수성이 엄청 결핍된 편이라 응축이나 상징에도 매우 약합니다 ㅠ.
 
정신의학의 권력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3~74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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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왠지 무서웠다. 『감시와 처벌』『광기의 역사』『성의 역사』『지식의 고고학』『말과 사물』. 어느것 하나 만만해 뵈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안전, 영토, 인구』라는 책이 번역되었는데, 덜컥 세미나 책으로 결정되어 버렸다. 제목만 봐도 한숨이 탁 나오는데, 그것도 푸코의 책이라니. 나의 첫 푸코가 하필 ... 
 
 
푸코는 1971년부터 1984년까지 한해만 빼고, 13년 동안 해마다 12주씩, 1주에 한 번, 콜레주드프랑스에서 강의를 했다. '사유체계의 역사' 라는 명칭 아래 진행된 이 강의에는 5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려 들었는데, 학생, 교사, 연구자 뿐만 아니라 호기심에 찬 일반인들, 외국인들이 원형강의실 두 개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대중강의 혹은 공개강좌였다. 이 강의들은 많은 청강생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푸코 사후에 유가족의 동의 아래 강의록의 형태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강의록은 총 13권이다. 출판사 '난장'에서는 2011년 『안전, 영토, 인구』를 처음으로, 2012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그리고 올해 『정신의학의 권력』을 번역 출간하였다.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먼저 번역한 것들도 있다. 
 
『안전, 영토, 인구』는 재미있었다. 강의여서 그런지 어렵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강의의 치밀함이 놀라웠다. 사실 콜레주드프랑스의 강의들은 강의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강의들은 한 해동안의 연구업적을 공개강좌를 통해 설명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이름값으로 설렁설렁하는 그런 강의와는 다르다. 강좌의 문이 열리자, 천정까지 쌓여 있던 기록들, 자료들, 문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저것들을 다 모으고 읽고 분석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궁금했다. 푸코의 탐구 방법을 흔히 고고학과 계보학이라고 한다. 무슨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푸코의 강의들을 읽다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푸코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구성' 되는가 이다. 진리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이 푸코의 고고학이다. 그렇게도 시시콜콜 세부적인 기록들과 그렇게도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들이 푸코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안전, 영토, 인구』는 '통치' 개념의 변화에 대한 고고학적 작업이며, 『정신의학의 권력』은 '정신의학'적 권력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19세기 정신의학의 규율권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재미로는 『안전, 영토, 인구』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좀 있는 편이라, 기대값이 높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푸코는 정신분석학에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않은듯한 느낌이다. 
 
난장 출판사의 또 다른 강의록인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연결되는 강의이다. 푸코를 '감시와 처벌' 즉 규율사회를 강조한 학자로만 알고 있다면, 통상 푸코가 인용되는 방식이 그러니,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무척 새로울 것이다. 나도 깜짝 놀랐다. 푸코는, 벤덤의 판옵티콘으로 상징되는 규율체제가  '생명관리정치' 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때 처음으로 푸코는 생명관리권력, 혹은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인구라는 개념을 도입하며, '전면화된 규율사회'라는 자신의 가설에 수정을 가했다." " '폐쇄된 규율들로부터 무한히 일반화가 가능한 판옵티콘 체제의 메커니즘에 이르게 되는 규율사회'라는 『감시와 처벌』의 가설을 수정함으로써 푸코는 『앎의 의지』의 두 번째 축인 생명의 축,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이라는 축, 다시 말해서 인구에 대한 생명관리정치의 축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20세기와 21세기를 각각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로 구분한 후,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 규율사회는 말하지 않아도 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벤덤의 '판옵티콘'에 닿아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 때가 막 『안전, 영토, 인구』를 읽고 난 후였다. 푸코에 대한 (당연히 얻어들은 것 뿐인) 선입관과는 판이하게, 생명관리정치라는 개념에 신기해하고 있던 차에, 20세기를 규율사회로 규정한 한병철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푸코는 이미 규율사회의 개념을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는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세한 논의가 있었다. 그때도 참 놀라웠다. 70년대 말에 벌써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거론하다니, 우리나라에는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도 아마 없었을 텐데. 개발독재 아래 웅크리고 있던 그 때, 신자유주의를 알고 있던 학자는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여하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은 『안전, 영토, 인구』에 이어서 읽으면 꽤 재미있다.  『정신의학의 권력』은 기대만큼의 재미는 없었는데, 나는 『주체성과 진실』이나 『주체의 해석학』등 80년대 초반의 강의들이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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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전 지식의 고고학 읽다가 정말 난해해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쉽게 접할 양반이 아니구나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푸코가 좋습니다.감시와처벌, 광기의 역사, 성의 역사는정말 탁월했으니 말이죠. 안전, 영토, 인구.. 이거 세일하길래 사둘려고 장바구니 담았다가 포기하고는 했는데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워야겠군요..

말리 2014-08-06 09:38   좋아요 0 | URL
유명한건 다 읽으셨네요 ㅎㅎ. 전 지젝을 통해 철학에 가까워진 터라 좀 편향되어 있어요. 지젝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철학은 잘 안 읽는 ㅋ;; 그런데 푸코 강의는 정말 좋았어요. 이런 공개강좌가 우리에게도 열리면 어디든 쫓아가고 싶어요. 12시간에서 13시간 정도 강의분량이라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아요. 추천드리고 싶어요.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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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사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소위 ‘아줌마’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다. 신도시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서 학교 이야기, 과외 이야기, 시험 이야기, 유학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느긋한 오전, 향 좋은 커피를 앞에 두고 친구들과 마주 앉아도, 아줌마들에게는 결코 자신만의 삶이 없다. 나의 사랑, 나의 욕망, 나의 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 많은 이야기 속에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한다. 아이의 삶을 뺀 나의 삶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방과 후 교사를 하는 어떤 지인은 매일 엄마들이 교실을 얼쩡거리기에 교장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일을 만들어서 매일 오셔요” 하더란다. 일이 없으면 옥수수라도 한 자루 쪄서 온단다. 그렇게 엄마들은 두 번의 유년을 산다. 두 번의 유년. 좋은 점이 있냐고 했더니, 어떤 엄마가 말했다. 어린 시절 읽지 못했던 동화책들을 읽을 수 있어 좋아요. 옆에 있던 다른 엄마는, 어릴 때 입어 보지 못했던 예쁜 옷을 딸에게 입혀서 좋은데 나는, 호호 책이라니, 아이 부끄러워, 했다. 나도 동화책은 부럽다.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자랐고, 공공 도서관이 없던 때라(내가 몰랐던 것일까?), 언니 오빠의 교과서를 읽는 것 외에는 변변한 읽을거리가 없었다.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좋은 동화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처음 읽는 어떤 창작동화들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프린들 주세요』도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누구나 한번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왜 하필 저 높고 푸른 허공을 ‘하늘’ 이라고 부를까?, 달고 시원한 이 과일은 왜 ‘수박’ 이라 이름 붙였을까? 요즘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 할지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는 욕이나 한바가지 얻어먹고 끝날 질문이었다. 하늘이 하늘이고 수박이 수박이지 그럼 뭐야! 『프린들 주세요』의 닉은 이렇게 순진한 물음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선생님 골탕 먹이기의 천재 닉은 5학년이 되자, 드라마 <여왕의 교실>의 고현정 같은 막강한 적수를 국어 선생님으로 만난다. 닉은 겁 없는 아이답게 선제공격한다. “선생님, 이 교실에는 사전이 참 많아요. 특히 저 큰 사전이요. 그 많은 낱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거예요?” 수업 시간 종료를 몇 분 앞두고 닉은 사전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설명에 정신이 팔려 숙제 내는 것을 잊어버리도록 미끼를 던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현정 급이다. “여러분도 궁금한가요? 좋아요. 니콜라스가 이 문제를 조사해서 간단히 발표해 보겠니?” 1라운드는 닉의 패배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나면 닉이 아니다. 다음 국어시간, 열심히 준비해 간 닉은 1시간 내내 지루한 발표를 함으로써,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빼앗는다. 눈치를 챈 선생님이 발표를 마무리시키자, 닉은 급한 마음에 이렇게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낱말은 이런 뜻이고 저런 낱말은 저런 뜻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개’라는 말이 꼬리를 흔들며 왈왈 짓는 동물을 뜻한다고 누가 정했나요? 누가 그런 거죠?” “누가 개를 개라고 했냐고? 네가 그런 거야. 니콜라스. 너와 나와 이 반에 있는 아이들과 이 학교와 이 마을과 이 주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거야.... 사전에 나오는 말은 다 우리가 만든 거란다.” 집으로 가던 도중 닉은 말을 못하던 아기 때 ‘과갈라’ 하면 엄마가 노래 테이프를 틀어주던 일을 기억해 내고, “네가 그런 거야” 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닉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친구들과도 문구점에서도 선생님께도 닉은 굽히지 않고 ‘프린들’을 고집한다. 선생님은 펜을 ‘프린들’이라고 부르면 남아서 반성문을 쓰게 하지만, 선생님의 탄압이 계속되면 될수록 프린들은 닉의 반을 넘어 전 학교 그리고 전 지역에 퍼져 나가며, 프린들 열풍을 일으킨다. 10년 뒤 결국 ‘프린들’은 선생님이 사랑하던 사전에까지 실리게 되고, 선생님과의 전쟁은 끝이 난다. 『프린들 주세요』는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형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언어의 형성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언어라니, 마침 며칠 전에 산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이 생각났다. 천천히 읽으려고 꽂아두었는데, 그 첫 번째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닌가. 『프린들 주세요』를 철학적으로 풀이해 볼 단서가 있을 것 같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 』와 『철학적 탐구』라는 두 권의 책으로 대표된다. 30대 중반에 『논리-철학 논고 』를 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손을 탁탁 털고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6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그러다 『논리-철학 논고 』의 결정적 결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는데, 책은 사후에 출간된다.

 

비트겐슈타인하면 떠오르는 문장은 아마도 7번 명제인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 것이다. 말 자체가 멋지게 들리니 여기저기 마구 이용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단순히 말 할 용기가 없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쓰일 때가 제일 어처구니없다. 탄압이 두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것과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 것’ 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논리-철학 논고》의 최종 결론인 7번 명제를 통하여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논리-철학 논고》의 핵심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논리-철학 논고》의 목적은 비트겐슈타인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고의 한계를 긋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말할 수 없는 것은 사고의 한계 밖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는 어떻게 그을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계는 오직 언어에서만 그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 건너편에 놓여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가 될 것이다” 라고요. p25」

 

비트겐슈타인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은 “자연과학의 명제들” 뿐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끼리 하는 말로 참, 거짓이 똑 부러지는 것, 그런 것들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나 진리, 선악 심지어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참 거짓을 구분할 수도 없고, 그 말이 그림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여기 한 사람과 개 한마리가 있다.” 이 문장은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착하다.” 이건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그래서 《논리-철학 논고》의 주장을 “그림 이론” 이라고 한다. 한 명제는 사실이나 현실에 대한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트게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을 열등한 것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인데, 그는 “말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 이라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이며, 자신이 쓴 부분 그러니까 ‘말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라 쓰지 않은 부분인 ‘말 할 수 없는 것’ 이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사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했을까?

 

「《논리-철학 논고》에 따르면 철학은 “언어 비판”을 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입니다. 그렇다면 왜 명료화와 언어 비판이라는 활동이 필요한가요?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며, 그리하여 명제의 외견상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실제 형식과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물음들과 명제들이 생겨날 수 있지요. 따라서 그러한 물음들이나 명제들이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는 “언어 비판”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p41 」

 

“언어 비판”의 비판은 칸트의 “수수이성 비판”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칸트는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명확하게 했다. 순수이성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칸트에게 물자체는 현상 너머에 실재하는 것이었다. 비트켄슈타인도 언어를 비판함으로써 언어를 통한 사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윤리나 미학, 세계, 신 등 ‘말할 수 없는 것’ 들은 스스로 드러나는 신비스러운 것들로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논리-철학 논고 』는 출판되자마자 떠들썩하게 유명세를 타며,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요 주장들은 『논리-철학 논고 』의 영향 아래 놓인다. 20세기 영미 철학의 대표자로 단연 비트겐슈타인이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의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으며,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 』는 그 작업들의 최종 결과물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의 ‘그림 이론’ 을 포기하고 ‘사용의미 이론’과 ‘가족 유사성’ 개념을 도입한다. 사용의미 이론의 핵심은 ‘언어 놀이’ 이다. 그림 이론에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문장과 그림은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언어 놀이에서 하나의 말은 그 말이 가리키는 하나의 지시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벽돌’ 이라고 할 때, 공사 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가져 오라’는 의미가 되지만, 태권도장에서 벽돌은 ‘벽돌을 격파하라’ 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용의미 이론은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주장을 토대로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사용의미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것의 사용이다.” “문장을 도구로 간주하라. 그리고 문장의 뜻은 그 사용이라고 간주하라!” 라고요. P35」

 

전라도의 ‘거시기’, 경상도의 ‘쫌’ 따위가 바로 언어놀이의 대표적 사례다. 다른 지방 사람들이 ‘거시기’나 ‘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이 낱말들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전라도에서, 쫌이 경상도에서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훌륭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다 함께 ‘언어놀이’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 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놀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런데 당신이 ‘거시기’ 라는 말을 정말 그 말의 규칙을 제대로 따라 사용했다고, 즉 이런 뜻이 아니라 저런 뜻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개떡 같은 말을 진짜 찰떡 같이 알아들은 것이 맞는가?

 

「우리는 언어놀이에 참여하면서 예컨대 “하얗다”와 관련된 규칙을 실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배움과 규칙을 따르는 데 있어 생각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실천, 관습, 제도이며, 넓게는 삶의 형식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사적으로 규칙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언어놀이, 제도, 삶의 형식과 얽힌 행함과 실천에서 우리는 각각의 경우에 필요한 기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의 지배는 “체험의 논리적 조건” 이지요. P39~40」

 

 

『프린들 주세요』의 닉과 선생님의 전쟁은 10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닉과 선생님의 직접적 대립은 몇 달을 넘기지 않고 금방 끝났다. 그러나 프린들이라는 이름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놀이는 닉의 손을 떠나 학교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장난꾸러기 닉의 ‘프린들’ 이라는 언어놀이는 사용과 실천을 통해 관습이 되고 드디어 10년 후 사전이라는 제도에 정착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이렇게 『프린들 주세요』에 직접 연결시켜도 되는지 사실 자신은 없지만, 거칠게 이해하자면 이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렇게 초기의 비트겐슈타인과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를 위한 “언어비판”이라는 《논리-철학 논고》의 철학관과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지성에 마법을 걸려는 것에 대한 투쟁” 이라는 《철학적 탐구》의 철학관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연속성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이 표현되는 언어에 대한 일관된 관심이 바로 이것입니다.P42」

 

여하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라고 하면 한마디로 ‘언어’ 라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언어에 대한 감시, 언어가 우리의 사유와 지성을 속이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일관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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